_ R15 (행위 묘사는 없지만 다소 노골적인 표현들)






0.

꿈을 꾼다. 몸이 한없이 가벼워 숨이 턱턱 막혔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까지 가는 걸음 하나하나가 목을 조였다. 허세를 부리자면 따끔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죽을 것 같았다. 사람이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죽지 않고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왼쪽으로 꺾어진 물에서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손을 겹쳐 물을 모아 얼굴을 때렸는데도 얼굴에 닿아오는 감각이 없다.

꿈이었다. 숨이 막혀오는데도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고,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고, 얼굴에 닿아오는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꿈이라고 인식한 게 아니었다. 눈앞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와 웃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떠나간 네가 나에게 웃어줄 리 없는데.

 



 

보통의 것

Written by. 비에



 


1.

오른쪽에서는 얼음이, 왼쪽에서는 화염이 나왔다. 얼핏 보면 개성이 두 개인 것 같은 녀석은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리고는 제 개성보다 차가운 표정을 했다.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 녀석이 추천입학이니 뭐니 하는 것은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강한 녀석. 그 얼음이 나의 손바닥 위에서 부서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꿈에서는 희미한 한기가 내 주변을 돌았다. 꿈이라 느껴질 리 없을 텐데도 나는 몸을 떨고 있었다. 곧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그 속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나 비릿하게 웃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모양이 소름 끼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림자는 뭐라고 몇 마디를 지껄인 뒤 모습을 감췄다.

눈을 뜨자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그것의 이름을 안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 끝을 세웠더니 단편적인 기억이 흘러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 녀석의 과거. 어머니. 하나하나 결코 가볍지 않은 말들이 내 안으로 고스란히 쌓여갔다.

그래서. 그게 뭐. 어쩌라고. 나한테도 써봐. 너의 왼쪽.

 

 

 

2.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애초에 누가 어떤 자격을 갖고 감정의 이름 따위를 고안해낸 것인지. 의미 없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어 길게 이어진다.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더니 아래에서 손이 뻗어져 올라왔다. 내 볼에 닿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소리로 나오지 못해 입모양으로 겨우 알아들은 말이 열을 뻗치게 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목소리도 모자라 이제는 숨조차 끊어지기 시작한 녀석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위로 밀려 올라갔다. 침대 시트를 쥔 손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정작 핏방울이 맺힌 곳은 내 어깨와 등이었다. 아프면 할퀴라고 내어줬더니 정말로 인정사정없이 할퀴고 물어 뜯어준 덕분에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살이 파인 곳이 따끔거렸다.

토도로키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였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나는 상체를 숙였다. 그러자 토도로키가 시트를 쥐었던 손을 올려 내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 마. 그러지 마. 명백한 거절이 과거의 잔상을 불러일으킨다. 입을 맞추기 위해 숙였던 상체가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래. 나는 이제, 네가 숨이 끊어져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3.

연애를 했다. 상대는 토도로키였다. 그 녀석은 좋아한다는 말을 생각보다 더 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걸로 끝이냐. 그렇게 물었을 때 토도로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의미였다. 먼저 고백한 것은 나였지만 그 때의 나는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자존심 다 접어두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러지 못했다.

정답은 늘 멀리 있었다. 문제를 눈앞에 두고 빨간 동그라미가 쳐질 만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정답이 내게 왔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정답에 가까워지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답이라며 으스대던 감정의 이름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정답이 아니다. 는 이 감정의 이름이 아니야.

 

 

 

4.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너를 좋아한다 말하는 거지?

 

 

 

5.

이별을 했다. 연애에 수반되어야 하는 감정 없이 이어지는 관계에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의문은 있었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것과 별개로 쉽지 않았다. 그것에 장애가 된 것이 진짜 사랑인지 스스로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다. 의미 하나 없는 방황의 시간에 더는 나 자신을 가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된 것처럼 굴었다. 철창을 으그러뜨리고 나온 짐승 새끼처럼 돌아다녔다.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하나 없이 거리를 헤맸는데 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 대신 추잡한 뒷골목을 방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뒤늦게 누군가 나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가장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곳에서 너를 만났다.

 

 

 

6.

야. 넌 왜 나랑 섹스하냐.

… 기분 좋아서? 그런 건 왜 물어봐?

 

 

 

7.

몇 분 전의 정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등과 엉덩이가 순식간에 천으로 가려졌다. 토도로키는 스스로 벗어재낀 옷들을 주워 그것들로 제 몸을 덮었다. 조금쯤은 쉬고 가도 되지 않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들을 주고받을 관계도 아닐뿐더러 토도로키는 한 번도 섹스 후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몸이 목적인 사람처럼 그는 침대와 나 사이에 갇혔을 때만 과거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커진 욕망은 그대로 토도로키를 집어삼켰다. 아니, 그 때 집어삼켜진 것은 나였다. 덩어리진 욕망에 눈이 멀어 손을 뻗었는데 도망치지 않은 것은 너였다. 네가 잘못한 거다. 네가 자초한 거야. 도망갈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네가, 이 좆같은 관계를 만든 거라고.

누가 봐도 이상한 관계였다. 연애를 해서, 지금은 헤어진 우리가 섹스를 하고 있다. 더 이상의 다정한 말과 상냥한 손길은 없고 남은 거라곤 껍질을 벗어 나체가 된 욕망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이 관계가 언제 끊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너를 붙잡는다.

시발. 그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이딴 게 사랑일 리 없잖아. 그래도 나는 너를 놓지 못한다. 이게 뭔지는 몰라도 이제 나는, 그냥 너랑 섹스가 하고 싶고 네가 내 옆에서 잠들었으면 좋겠다.

 

 

 

8.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러는 바쿠고는?

뭐.

너는 왜 나랑 섹스하는데?

 

 

 

9.

토도로키의 얼굴이 내가 모르는 것들로 일그러진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잖아. 그렇게,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원래라니. 원래 토도로키가 어땠다는 건데. 그것은 만족감이 아니었다. 만족감을 뒤집어쓴 오만이다. 내가 뭐라고 너를, 내가 대체 뭐기에 너를 말할 수 있나.

오만의 찌꺼기가 내 안을 파고들었다. 파고들어서 가시를 뻗쳐 내 몸 안의 모든 장기를 찌른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비릿한 피맛이 났다. 입 안이 전부 터져서 피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토도로키의 얼굴이 나에게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는 너는 왜 나랑 섹스하는데? 입술이 벌어진 틈을 타 한 번에 빠져나온 말이 내 입 안의 피를 모조리 뽑아낸다. 그리고 곧 무언가의 덩어리 같은 형태를 갖추어 나와 토도로키 사이에서 꾸물거렸다. 징그럽게도, 말한다. 내가 널 대답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줬잖아. 그러니까 어디 대답해봐. 너는 왜 토도로키 쇼토랑 섹스해?

 

 

 

10.

너랑 똑같아. 기분 좋으니까.

그래? 다행이네. 너도 기분 좋아서.

 

 

 

11.

빚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웃은 토도로키는 그 때와 닮아 있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고백했던 그 때를. 심장이 울렁였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네가 내 심장을 흔들고 있는 탓이다. 울렁울렁.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무거워진다. 온 몸의 피가 입 속에 고였다가 덩어리 새끼가 그것들을 전부 앗아갔는데 정상인 게 이상하긴 하지. 시발. 진짜 좆같다.

몸 상태가 지랄 같은 와중에도 열렸다가 닫힌 문틈으로 네가 보여준 입모양이, 그거 하나가 기쁘다는 게. 또 연락할게. 그 하나가 뭐가 그렇게 기뻐서 피가 모조리 빨려나간 주제에도 살겠다고 심장은 뛰는지.

 

 

 

12.

죽기 위해 가슴을 두드린다. 심장을 멈춰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너를 쫓을 것이다. 손을 뻗고 목덜미를 잡아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입을 맞추겠지. 네 안으로 나를 쑤셔놓고 그 끝에는 욕망을 뿌리리라. 너의 애원이 쾌락의 흉내를 낼 때까지 나는, 이 일그러진 사랑으로 너를 범하고 말 것이다.

죽어. 제발 죽어, 이 더러운 감정과 함께.

 

 

 

13.

사랑. 그게 진짜 정답이었다. 그것은, 한 번도 내게 쉬운 길을 내어주지 않았던 신이 준 단 한 번의 기회였다. 하하.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렇군. 나는 그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거고.

시발. 진짜 좆같았다. 전부 좆같았지만 제일 좆같은 건 나 자신이었다.

 

“아아.”

 

이게 사랑이었다. 이렇게 더럽고 추잡스러운 내 밑바닥이, 결국 사랑이었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보통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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