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나의 확정된 타임라인

*이벤트 '가면무도회의 막간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도회장 한쪽 발코니에서 이라는 그의 절친한 친구- 다이나라는 사람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물론 둘은 닮은 점도 많았다. 그것은 주로 이성적인 부분에서 합이 맞는 것이어서, 이성과 감성이 만나 표출되는 양상, 즉 지금 상황에서는 방향을 달리한 것이다. 이라와 다이나는 오페라 감상 포인트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 의견에 어울려주다가도 결국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교적 주인공 두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이라와 달리 다이나는 그녀 스스로 메인 주인공보다 그 주변에 눈길이 간다고 인정했다. 그렇기에 소꿉친구의 처우를 아쉬워하고, 유독 그를 중심으로 다소 억지스럽게나마 바꾼 이야기를 예시로 드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다이나와 제법 허물없이 교류하는 지인으로서 이라도 그녀가 진정 내밀한 속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무언(無言)은 때때로 배려로써 행해지지만, 이번만큼은 그 배려를 거뒀으면 싶었다. 장막에 숨겨진 문장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오로지 그의 몫으로 남았다.

얼핏 추측건데, 다이나는 차라리 장미가 별것이 아니었다면 소꿉친구의 파괴적인 행위는 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미는 그저 상징에 불과하다. 장미가 별것 아니게 된다는 것은 그것이 뜻하는 바, 즉 사랑이 의미를 잃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극이 시작되지도 않았겠지.

다이나가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건 안다. 그런데 진정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것치고, 작품의 줄거리에 이렇게까지 개변을 시도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왜냐하면, 이라가 아는 다이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조금 에둘러 가더라도 마지막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놨을 것이다.

네가 어떤 방식으로 오페라가 전하는 사랑을 감상하고 해석했는지 알고 싶다. 너의 사고와 그 원천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그렇지만 여전히 너란 사람은 어려웠다.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재야 하는 문제 같아. 다이나 씨, 내가 너에 대해 추측한 게 맞을까? 이제 이라는 조용히 묻는다. 그의 언어는 소리를 갖지 않았기에 답 또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답이랄 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다이나가 아니라 그녀의 이상한-그렇다고 알려진- 동업자였다.


“아가씨께서 장미를 여전히 갖고 계시더군요.”


재즈의 유쾌한 선율이 끝을 맺고 나서 다이나는 여성용 휴게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남은 사람들이 춤을 추느라 마른 입술을 음료로 축이고 있을 때, 매드해터가 넌지시 말했다.

이라는 매드해터의 말을 듣고 상당히 고민해야 했다. 아직 매드해터라는 남자가 어렵게 느껴진 것도 있지만, 그의 말이 이상하게 의문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수수께끼와 말장난을 즐기고, 그런 방식으로 곧잘 사람을 떠보는 데 출중하다고 들었다. 평탄한 어조의 평서문은 역으로 내포된 의도가 무엇인지 수상하게 여길 여지를 주었다. 문장 기저에 깔린 기묘한 공기에 이라는 살짝 긴장했다.


“아직 건넬 사람이 없었던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혹은 잊어버리셨을지도요. 오페라 전에도 제가 몇 번 물어보긴 했는데, 그때마다 처음 듣는 것처럼 구셨거든요.”


휴, 생화라서 슬슬 시들어버릴 텐데 말이에요. 참 아깝죠. 매드해터가 안타깝다는 듯 가느다란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연극배우처럼 말하는 그에게 이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장미를 아예 잊은 건 아닐 겁니다. 오페라 감상을 말할 때 장미를 무척 신경 쓰는 것 같았으니까요.”

“어라, 그렇던가요? 아가씨가 뭐라 하시던가요?”


단순히 그 자신이 자리에 없었을 때 다이나가 뭐라 했는지 듣고 싶어서 대화를 유도한 걸까? 이라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최대한 요점만 간단히 말했다.


“장미가 여러 송이라면 어땠을까, 라고요.”

“아, 과연….”

“하지만 장미가 여러 송이라면 극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이나 씨도 자신이 청개구리라고 하던데요.”

“청개구리요? 퍽 재밌는 표현이네요. 지금껏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역시 자기 자신은 자기가 가장 잘 아는 법일까요…….”


말끝을 흐리는 매드해터를 보며, 이라는 그에게서 오묘한 위화감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이라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것이다. 그가 무심코 내뱉었다.


“글쎄요. 나는 사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이라는 아차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였고, 이 사람 앞에서 겨우 한탄이나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본인도 없는 자리. 의도한 바는 아니었대도… 그는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라가 그게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매드해터는 그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아닌 남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하지만 아가씨께 직접 물을 수는 없었던 거겠지요?”


정곡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저 남자에게서 실마리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라는 반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나가 장미에서 꽃잎을 한 장 떼어냈을 때, 이라는 은밀하게 새어 나오는 냉소를 읽었다. 아름답게 살아있는 장미에는 쉽게 상처가 났고…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하잘것없는 무생물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아마 같은 자리에 있던 그라드는 물론이고, 나름 그녀와 가까이 지내는 예민한 스페르비아도 쉽게 눈치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지나친 비약이라 해도, 이라는 그 모습을 모른 척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이라와 다이나는 서로 닮은 점으로 인해 빠르게 친분을 쌓았다. 닮은 두 형태가 이라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라는 그녀와 자신에게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머리로 알면서도, 그런 점이 많지는 않길 바랐다. 꼭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설명해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사람 사이가 아무리 허물없더라도, 어디 제 속을 훤히 까발리고, 혹은 까발려져도 좋을 것이던가? 경계와 거리는 강철 같기도 하고 나약하기도 한 것을. 망할 딜레마였다.

매드해터는 고민 많은 황금색 눈동자를 오래 응시했다. 이라는 그가 들고 있는 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처음에 아가씨가 예상한 결말은, 가면 쓴 남자와 소꿉친구가 동일인이란 것이었죠. 정말 그랬다면 두 인물이 모두 해피엔딩이었겠죠? 아, 이 경우는 한 명이군요.”

“……그건, 어쩌면… 다이나 씨에겐 그편이 이상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마도요. 하지만 저희는 금세 알아차렸어요… 이 오페라에서는 어쨌든 가면 쓴 남자나 소꿉친구, 무도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만 선택받게 되리란 걸 말입니다.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죠.”


매드해터는 마지막 문장의 두 글자를 강조하고는, 들고 있던 음료를 입술에 가져갔다. 그의 우아한 몸짓은 이걸로도 충분한 힌트가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기대는 빗나간 듯싶었다. 매드해터가 새 조각 케이크를 하나 집어 다 먹어갈 즈음에도 이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잔을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매드해터의 말은 그에게 혼선만 일으킨 것 같았다. 이 냉정하고도 온화한 청년은 여전히 자신이 낸 결론에 확신이 없었다.


“제 짧은 견해가 도움되었으면 좋겠군요. 아마도 다이나 아가씨가 가진 불만은 오페라 자체가 아닙니다. 오페라가 남긴 ‘부산물’이죠…….”


매드해터가 다시 입을 열자 이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부산물 말입니까…….”

“네. 이 무도회장에 재현한 세계에서 새로 의미가 있게 된 것이 있잖습니까.”


무심코 이라는 제 망토 자락을 고정하는 장미 장식을 만졌다. 붉은 칠과 금박이 된 딱딱한 오브제의 오돌토돌한 요철이 느껴졌다.


“제가 먹는 조각 케이크는 원래 둥근 케이크 한 판이었던 것을 나눈 것입니다. 하지만 조각 케이크 자체가 케이크가 아닌 게 될까요? 비록 조각으로 나뉘었지만, 우리는 이것을 잘라 나눠준 사람에게 ‘이것은 케이크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걸요. 양적으로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 가치를 셈할 때 누군가에겐 홀케이크 하나가 케이크 한 개이더라도, 누군가는 조각 하나를 케이크 한 개로 셀 수 있겠지요.”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말한 매드해터가 들고 있던 포크로 저쪽을 가리켰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저기 디저트 테이블을 보세요. 딸기 케이크도, 초콜릿 케이크도… 서로 다른 재료로,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졌어도, 이것 모두가 하나의 케이크 섹션에 포함되어 있죠. 만일 그들이 케이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요?”


이라는 반복해서 나열되는 단어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과연 그간 전해 들은 대로 이상한 나라의 모자 장수는 쉬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럴듯하게 들려도 결국 자기 좋을 대로 벌리는 말장난에 가까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데도 분명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긴 해서, 그것을 따라가느라 기분 상해할 겨를도 없었다.


“장미가 뜻하는 바와 케이크는 다르지 않습니까? 추상적인 관념을 물질로 온전히 비유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음, 그건 장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한껏 그를 휘저어놓은 매드해터는 잠시 진정하더니 이라에게 사과를 건넸다.


“하하, 이거 실례했습니다. 궤변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 부디 심각하게 파고들지 마시길…! 하지만 분명 아가씨께선 누구보다 장미의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걸요. 요컨대 관점의 차이이지만 말이에요. 누구나 양보할 수 없는 관점을 가졌고, 그를 고수하려 들잖습니까. 거기서 다이나 아가씨의 논리가 비약한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은 어떻습니까?”


돌려서 말했지만 매드해터는 꽤나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다이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일 모자 장수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겨우 추측이라 할지라도 신뢰도가 높다고, 이라가 생각했다.


“비약이라… 이곳에서 가진 불만이 오페라에 옮겨갔을 뿐이란 겁니까? 그녀에게 오페라 줄거리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이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자 곁에 없는 다이나가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만약 누구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이라는 뭔가를 퍼뜩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구나.

사람들은 장미에 담긴 상징에 열광하고 그 장미 한 송이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이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장미 한 송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세계에 피어나는 장미는 오페라 무대의, 오페라를 재현한 세계의 장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더 나아가 다이나는 뭇 사람들이 겨우 장미 한 송이에만 집중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어느 시야 하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여기며 가엾게 바라보는 오만인지, 영원히 홀로를 고집하게 될 애정관을 스스로 연민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붉은 장미와 가면의 파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만 뼛속 깊이 인식했을 것이다. 이라는 이것이 가장 신경 쓰였다.

다이나 씨는 지금껏 이런 일을 몇번이나 겪었을까?

이라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썼다.

한데. 그렇다면. 당신은 왜 처음에 그렇게… 그는 마지막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새 부리 가면 남자에게 몸을 돌렸다.


“당신은 그녀의 장미를 원한 게 아닙니까?”

“후후후, 어떤 것 같습니까? 예, 뭐. 아예 흥미나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매드해터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당신이라면 아시겠지요?”


새 부리 가면을 쓴 남자는 길쭉한 창에 기대어 섰다. 그 외의 다른 말들은 없어도 족하다는 듯이.


오페라가 막을 내렸을 때, 매드해터는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오페라에서 주인공은 그녀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가면무도회의 많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수많은 만남 가운데서도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처음부터 찾아다니던 사람, 가면 쓴 남자에게 장미를 건넨다. 가면 쓴 남자도 그에 답해 가면을 벗고… 단순한 플롯임에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운명적인 만남, 서로에게 끌리는 듯 끌리지 않는 듯 은밀한 마음의 행방, 여기에 목소리의 나라, 복스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노래들까지. 어째서 세계가 이 오페라에 열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매드해터는 자신의 옆자리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앙코르 요청이 쇄도하는 중인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계약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힘차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빛에는 유유함이 내비쳐진다. 평소 많은 감정을 갈무리하는 그녀는 이것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아, 노래가 정말 훌륭하던데요.


그런데도 그녀가 극장 바깥에서 매드해터에게 꺼낸 첫마디란. 매드해터는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매드해터가 자유로운 성토의 장을 위한 물꼬를 터주자 금방 여러 가지를 지적하긴 했지만, 다이나는 우선 창작자의 의도대로 감상하는 게 기본 예의라고 여겼다. 그럼요, 그 외는 사실상 곁들임인걸요. 매드해터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필이면 그녀가 가장 관심 있게 기대했던…  오페라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획이 그녀에게 제일 미스였지만 말이다. 사실 매드해터 그 자신도, 이곳이 가상의 세계와 설정임을 잘 알고 있는 다이나가 이렇게까지 타협하지 않으려 할 줄은 몰랐다.

만일 이런 그녀가 오페라의 주인공이었다면 어떨까. 매드해터는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익히 잘 아는 그녀라면. 매드해터는 그녀가 섣부르게 예측한 오페라의 결말을, 그녀가 오페라를 직접 보고 난 뒤에 늘어놓은 감상을, 그리고 은연중에 비친 그녀의 미소가 갖는 의미를 곰곰이 고찰했다.

그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매드해터는 장갑을 낀 손으로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제 입가를 가렸다. 자신의 추측을 들키지 않게 꽁꽁 감쌌다.

높은 확률로, 다이나 루트위지는 자신을 스쳐 간 그 모든 만남에 꽃을 바치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주인공이 아무에게도 장미를 주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있었거든요.


매드해터는 완전히 빗나간 자신의 가설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차가운 별빛이 그의 가면에 닿아 파랗게 부서지고 있었다.





다이나는 시큰한 발목과 딱딱하게 굳은 발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며 휴게실을 나왔다. 휴게실에서 춤으로 전신을 혹사한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근육을 진정시키긴 했다. 그렇지만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졸도할까 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잠깐 몸을 틀어 휴게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벽 한쪽에 들여 설치되어 잘 보이지 않는 휴지통에 붉은 점들이 삐죽대며 나와 있는 게 보였다.


“하…….”


어쨌거나 매력적인 생화였는데. 아깝긴 해도, 망가지는 것에 무신경했더니 자신이 그대로 갖기에도 미묘한 상태가 됐던 것이다. 애초에 이 건물 내에서 깔끔하게 처분하고 갈 거였지만 말이다.

다이나는 약간 노기가 치밀어 빠르게 자리를 떴다. 이런 발 상태로 빠르면 얼마나 빠르겠느냐마는. 두어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저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다이나는 애매하게 쉬었기 때문에 오히려 통증 자체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상태가 된 게 아닌지 의심했다.


“여기 있었구나?”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라!”

“휴, 계속 돌아오지 않길래 혹시 길을 잃었나 했어.”

“아뇨, 그건 아니고… 발이 약간 아파서 천천히 걷고 있어요.”


이라의 표정이 곧바로 심각해졌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다이나의 상태를 진지하게 살폈다. 그의 두 눈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잠깐 어깨에 머물렀다가, 그녀의 걸음걸이로 옮겨진다. 이라는 짤막하게 숨을 내쉬고 다이나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이쪽을 잡고 걸어. 벽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아, 실례할게요… 고마워요.”


다이나가 이라의 팔을 잡았다. 이라는 다이나가 걸음을 옮기는 속도에 맞춰 보폭을 조정했다.


“…아프겠다. 춤에 너무 열심이었던 거 아니야?”


걱정 반 농담 반 섞인 질문에 다이나는 다소 민망하게 웃었다.


“절대로 아녜요.”

“그래? 그쯤 하면 거의 완곡을 해낸 것 같은걸.”

“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거든요. 남의 발을 좀… 많이 밟긴 했지만. 밟은 값으로 장미를 줘야 하나 고민까지 했다고요.”

“응……? 그래서, 줬어?”

“아뇨. 당연히 농담이죠.”


이라가 피식 웃었다. 그는 밟은 값을 주지 않아서 네 발이 아픈 거면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당연히 그도 농담 삼아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다이나는 춤 때문에 망가뜨린 장미를 줄 순 없다고 맞받았다. 그 장미가 지금은 어두컴컴한 휴지통 안에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다가 발밑을 조심히 살피며 걷기엔 가면이 거추장스러웠는지 이라가 비교적 자유로운 한 손을 뻗어 머리 뒤의 매듭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어디 한 손으로 될 일이던가? 이라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멈춰서 두 손을 썼지만,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은 듯했다.


“……이런.”

“잠시만. 내가 도와줄게요.”


곤란해 하는 이라를 보고 다이나가 그의 뒤로 돌아가서 팔을 뻗었다.


“그럼 부탁할게.”


다이나를 돕기 위함인지 그는 자신의 날개 한 쌍을 가만히 웅크렸다. 다이나가 부드러운 물색 머리칼 사이를 더듬어 매듭을 찾자 끈은 약간 엉켰긴 했어도 예상보다 간단히 풀렸다. 이라가 풀기엔 각도가 안 좋았어, 그녀가 생각했다.


“고마워, 다이나 씨.”


가면을 벗은 이라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다이나 옆으로 와서 그녀가 걷는 것을 도와주었다.


“좀 어렵게 묶었었어.”

“래그타임이라서?”

“정답이야.”

“이라도 이 장르 좋아하나요?”

“음…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즐거워하는 널 보면 나도 즐거우니까.”


따뜻한 조명 아래서 그는 개운한 얼굴로 다이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가면이 없어져서 그럴까, 그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물론 내 착각이겠지. 다이나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이라는 언제나… 날카로운 금색 눈동자, 옅은 서글픔을 머금은 눈매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은 유하기 그지없는 온화한 청년이고. 그가 다정을 말할 때 입매가 어떤 방식으로 둥글어지는지, 가벼운 애정을 표할 때 귓가가 얼마만큼 붉어지는지. 가면에도 가려지지 않는 어떤 것들을 바라보다가 다이나가 무심코 내뱉었다.


“갑자기 가면이 없으니까 뭐랄까, 색다르네요.”

“응?”

“…와, 잘생겼다?”

“…….”


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의 눈빛을 보냈고, 다이나가 소리 내 웃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심이라고요? 뭐야, 당신은 날 놀릴 때만 진심이지? 눈가를 붉히며 성 아닌 성을 내는 그에게 어떻게 웃어주지 않을 수 있는지. 다이나는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이라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그거 알아?”

“뭐를요?”

“내가 너를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 표정이 조금 변한다는 거.”

“…….”

“지금도 그렇거든.”


이번에는 다이나가 이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가늠할 차례였다. 이라는 장난스레 손바닥을 보이며 자신은 죄가 없으며 사실만을 이야기했다는 제스쳐를 취한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제대로 간파당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네.”

“어째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특기였다고요.”

“……?”


이라가 의문 어린 얼굴이 되었지만, 그녀는 그를 일부러 보지 않은 채다. 드레스 밑단이 펄럭였다. 다이나가 이라를 잡지 않은 팔로 반원을 그리며 걸었다. 넓은 복도를 오가는 사람이 그들뿐인 것을 즐기는 건지, 정체된 공기를 가르고 검은 볼레로 소맷자락이 휘날린다.


“아, 정말 재밌었어요. 밤에 정신없이 자겠는걸요.”

“나도. 눕자마자 잠들 것 같아.”


이라가 맞장구쳤다. 어쩐지 그의 팔뚝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자꾸 지그재그로 움직이면 꿈나라가 아니라 병원에 갈지도 몰라.”

“…이라가 생각해도 너무 막 걷고 있나요?”

“후후, 조금? 내 팔을 좀 더 제대로 잡아.”

“하긴 잘못해서 당신까지 넘어지면 안 되겠네요.”

“아니, 이런 때는 같이 쓰러져도 다이나 씨만 다칠걸.”

“제 체력 문제로요?”

“왜 아니겠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슬슬 파장을 맞이하는 연회장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 아마 일행들과 합류해 있다 보면 헤어지는 시간은 조금 더 나중이겠지만, 왠지 잘 자란 인사를 해둬야 할 것 같았다. 미리 잘 자요, 이라.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듯 다이나가 먼저 속삭이자 이라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 미리 좋은 꿈 꿔, 다이나 씨.





그날 밤은 달이 무척 가늘었다. 다이나와 매드해터는 연회가 파한 뒤, 극장 바깥에 서서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산해지길 기다렸다. 숙소까지 그들을 데려다줄 마차는 앞사람들에 밀려 조금 늦는 것 같았다.


“해터, 오늘 어땠나요?”


이곳에 오자고 제안했던 다이나가 질문했다. 매드해터는 한 손을 입가를 가리고 완염하게 웃었다.


“그야 물론 즐거웠지요. 가면무도회를 재현한 색다른 구성에, 오페라의 감정도 풍부했고, 당신과 요즘 들어 이렇게 토론한 적이 없어서 더욱 그렇군요.”

“맞아요. 저도 오랜만에 당신이랑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음, 물론 처음 목표였던 변혁에 관해선… 내일 일어나서 정리해보려고요.”

“오, 내일 아가씨께서 어떤 견해를 들려주실지 기대되는군요.”

“해터는요?”

“그건 아직 비밀입니다.”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 그를 보며 다이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 떴다. 매드해터는 그를 못 본 척 넘겨버렸다.


“아가씨의 보탈리아 친구분들도 관심 가는 사람들이더군요. 그간 전해 듣고 너머로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는 느낌은 역시나 또 다르네요.”


돌발적인 만남이었지만, 자신의 지인들을 직접 매드해터에게 소개하게 됐던 다이나는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잘 모르게 되었다. 무엇을 말하든 스스로 난감하거나 멋쩍게 굴게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다들 다양한 방면에서 멋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좋아하기도 하고…….”


정말 이상하기도 하죠,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매드해터는 자그맣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았다.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요전에 하츠가 말한 영화 촬영에 다른 나라에서 몇 분이 참고인으로 참여하는 것 같더군요. 잠시 구경이라도 가게 되면 안면을 터놓는 것도 좋을 듯하고요?”

“네? 아니, 갑자기 발이 넓어지고 있어요?”

“그야 흥미로우니까요? 그리고 정정하자면 전 원래 인맥이 넓은 축일 텐데요.”

“그건 그런데요….”


정말 흥미라면 뭐든 할 사람이군, 다이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주변이 서서히 한산해진 게 느껴졌다. 늦은 밤의 서늘한 바람이 천 사이로 파고들었다.


“참, 장미는 어떻게 됐나요?”


매드해터가 댄스 플로어에서도 물어보았던 질문을 다시 했다. 가볍지만 묘하게 신경 쓰였다. 다이나는 자신이 갖고 있던 장미를 마지막으로 본 곳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왜죠?”

“왜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는 되물은 것치고 순순히 말해주었다.


“뜻이 있는 장미인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혹시 모르지요. 제게 주실지?”


그렇다면 저도 기꺼이 가면을 벗어드릴 텐데요. 문득 알아차린 거지만, 그때껏 그는 가면을 벗지 않고 있었다. 다이나의 왼편에 장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매드해터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했기 때문에, 다이나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없었다.

매드해터.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다이나가 그를 불렀다. 이리로 좀 숙여주세요. 매드해터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허리를 숙였다가, 다이나가 더 숙이라는 사인을 보내자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어라, 무슨 이유라도…? 그는 고개를 들고 다이나를 올려다보며 물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이 귓가에 스치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다이나는 매드해터의 반가면을 고정하던 리본을 풀어냈다. 그의 반듯한 앞머리가 가라앉고 가면 뒤에 감춰졌던 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매드해터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줄곧 고민했지만, 역시 저는 ‘가면과 장미’의 주인공이 아니라서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만….”


다이나가 매드해터와 눈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느슨한 겨울이 들어차 있었다. 면면에 배어버린 그것은 그 자신조차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만큼 억지스럽다. 비밀을 한 겹 벗겨내는 것, 그 위로 새로이 비밀을 덧씌우는 것. 과연 누구의 몫인지… 매드해터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것이 당신의 장미로군요.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아가씨야.


“잠시 안아봐도 될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매드해터가 다정하게 물었다. 다이나가 가만히 끄덕이자, 그는 두르고 있던 겉옷에 다이나가 완전히 감싸지도록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벼운 샴페인과 낯선 장미 향… 가면이나 다를 바 없는 것들 밑에서 졸인 설탕이나 말린 들꽃, 볕 좋은 숲에 이는 마른 바람처럼 익숙한 체취를 찾아냈을 때, 묘한 안정감이 들어 그는 안락하게 숨을 내쉬었다. 다이나도 그를 마주 안고 진하게 우린 홍차와 제비꽃, 은근한 바닐라빈과 머스크 향을 맡았다. 그녀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내일은 같이 장미를 사러 가요, 매드해터.”


그의 품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른함이 묻어나왔다. 귓가에 맴도는 단어들을 몇 번이나 음미한 뒤 비로소 그가 답을 한다.


“기꺼이요. 분명 제게 훌륭한 한 송이를 선물해주시겠죠?”

“당연하죠. 기대하셔도 좋아요.”







원더메어와 보탈리아에 상시거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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