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더스게이트3 아스타리온xOC 글연성입니다. 아스타브라고 쓰고 자캐 드림이라고 읽습니다. 

* OC(타브) 이름은 '엘(Elle)'입니다. 이 글에서는 엘이라고 지칭합니다.

* 2막 아스타리온 고백 장면 이전의 시점입니다.

* 약하지만 공황장애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 아스타리온이 타브(엘)에게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의 이야기.


엘의 설정 정리는 이쪽 링크 참조: https://posty.pe/bzxbyu




너를 저주해.


아스타리온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벌써 동틀녘이 다가오는지 동쪽 하늘이 흐릿하게 푸른 물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루를 마치고 들어가는 명상 상태(인간들이 말하는 수면)에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 기억을 떠올린 건 조금 뜻밖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아스타리온은 과거를 곱씹지 않는다. 그게 득될 일도 필요도 없는 일일 경우엔 더더욱. 옛 주인인 카자도르의 역겨운 면상이나 그가 저지른 추악한 행위들을 기억하는 것은 진저리칠 만큼 기분이 더러워지지만 자기 의지대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되갚아줄 빚을 하나 하나 계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참을 만했다. 

그러나 이건? ‘사냥감’, 혹은 ‘희생양’들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그 목소리와 말을 되새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도움도 이득도 없는 일이었다. 머리만 아플 뿐. 그런데 어째서? 이런 쓸데없는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을까? 저주와 증오가 가득찬 목소리와 시선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어찌 됐건 그것은 과거의 것이며,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메아리의 잔여물도 못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주는 아무런 힘도 없고,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희생자의 외침이란 그런 것이다. 포식자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조차 되지 못하는 나약하고 미미한 것.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무언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뜻인가?

말도 안 돼.

아스타리온은 헛웃음을 쳤다. 무슨 이유로? 어떤 계기로? 설령 이유가 있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으로.

신경을 쓴다면, 아니 써야 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새로이 집중해야 할 ‘목표물’뿐일 것이다. 


- 널 좋아하지 않아.


깔끔하게 웃던 타깃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으며, 심지어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증오와 경멸에 차서, 배신감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른 희생양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사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배신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배신당할 틈을 보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을 엘이라고 소개한, 이 괴상망측한 기생충을 머릿속에 박은 채 돌아다니는 무리의 리더는, 처음엔 비교적 까다로운 표적으로 보였다. 남을 속이는 것은 숨쉬듯 자연스럽게 해도 자신이 속는 것은 참을 수 없어 했으며, 대가 없는 수고를 싫어했다. 본인에 대한 적의는 몇 배로 되돌려줘야 했고, 무조건적인 호의는 일단 의심하고 봤다. 일행 중 소위 ‘정의로운’ 치들은 안색을 찌푸리는 일이 잦았으나, 아스타리온에게는 굳이 따지자면 합리적이고 공감할 만한 태도였다. 다만 문제라 한다면 파고들어갈 틈을 찾기 어렵다는 정도. 

그러나 어느 정도 여정을 함께 하면서, 아스타리온은 이 까탈스러운 리더에게 드물지만 약간의 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대가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약자일 때, 예를 들면 어린아이나 작은 동물 같이 무력한 이일 때, 동정인지 방심인지 모르겠으나 평소에는 결코 보이지 않을 관대함을 드러낸다. 얼마 전에는 제 주머니를 털려고 했던 꼬마 소매치기를 붙잡고는 그대로 보내준 것뿐만 아니라 안 들키게 똑바로 지갑을 훔치는 방법을 알려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을 해칠 수 없는, 혹은 해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주 가끔이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위선인가? 이중성인가? 아스타리온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한 뜻밖의 빈틈, 그래, 평소 우리가 물렁하고 유약하다고 평하는 면모를 정작 그에게서 발견했을 때, 아스타리온은 단지 남몰래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용하지 못할 것은 없겠다. 그래, 날카로운 송곳니가 뚫고 들어갈 틈은 반드시 있다고.

엘은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었지만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스타리온이 웃어보이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지언정 실소나마 웃음을 흘렸고, 단 한 번도 그를 무시하거나 낮잡아 보는 태도를 취한 적도 없으며, 다른 이에 비하면 자신과의 대화에서 엘이 보이는 태도는 다분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엘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고 여겼다. 성격이나 가치관이 비슷해서? 사고 방식이 닮아서? 어쩌면 제 얼굴을 좋아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감히 자신하건대 이몸은 아름다우니까! 그가 자신의 얼굴을 뜯어볼 때의 눈빛은 분명히 만족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라면 걸어볼 만했다. 승률은 낮지 않았다. 가끔씩 드러나는 물렁한 면모에 자신이 포함되지 못한다는 장담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거의 보이지 않는 작고 작은 틈일수록 막상 드러났을 때엔 허무할 만큼 쉬이 뚫리는 법. 아스타리온의 간단하고도 근사한 계획은 그렇게 실행되었다.


그러나 계획이란 얼마나 쉽게 어그러지는가. 



***



“널 좋아하지 않아.”


아스타리온이 저에 대한 호감이라고 생각했던 예의 그 산뜻하고도 시원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엘은 단언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선고처럼 들렸고, 어쩐지 현실과는 조금 괴리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던 터라, 아스타리온은 이제는 잊어버린 지 오래인 2세기 전의 옛 직장에서 죄인에게 판결을 내리던 자신의 목소리가 저러했을까 순간이나마 딴 생각을 했다. 2초 정도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아스타리온은 원래의 간드러진 웃음기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런, 마음이 아프네.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그런 기억은 없는데. 아, 지난밤이 별로였다든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의 유혹을 엘이 받아들인 밤, 틀림없이 상대는 만족했다. 이런 일에 한해 아스타리온의 눈치는 비상했다. 원치 않는다 해도.

“엥, 하하! 아니.” 

엘은 시원스럽게 웃음을 내뱉었다. 저 말끔한 웃음에 아스타리온은 왠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거 아냐. 굳이 말하자면 좋았지. 그런데 그거랑은 상관없어. 그야 그럴 게—” 

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아스타리온을 똑바로 쳐다봤다. 


“너도 그렇잖아?”

“…뭐?”

“너도 날 안 좋아하잖아?”


엘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인지 아스타리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태연한 얼굴이 몹시도 거슬렸다. 표정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실망, 원망, 노여움, 배신감, 슬픔, 그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차라리 그런 종류의 감정이 티끌만큼이라도 묻어났다면 읽어낼 수라도 있었을 텐데.


“이봐, 괜찮아?”

아스타리온은 그제서야 자신이 입을 다문 채 한참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의 표정이 약간 걱정스럽게 일그러졌다.

“난 네가 안심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스타리온은 더 이상 평소의 멋들어진 웃음조차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미간의 주름을 깊게 만든 채 짜증스럽게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불쾌했다. 

“나는 차라리 안심했으니까.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서. 너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

아스타리온은 다시 침묵했다. 이 불쾌함은 무력하게 발가벗겨져 저항할 수 없는 몸이 되어 홀로 빈 방에 내버려졌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무기도 방어구도 없이 홀로, 맨몸으로 서 있는 기분.


“나는 무언가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가 없이 베푸는 것은 무엇이 됐든 믿지도 않고,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네가 다가왔을 때, 솔직히 말하면 속이 빤히 보여서 차라리 안심했거든.”

“지금 빈정대는 거야, 자기?”

“아, 그렇게 들리나. 미안, 달리 듣기 좋게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네. 근데 빈정대거나 비꼬는 거 아니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뺨을 긁적이며 엘은 말을 이었다.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잖아.”


한 번, 두 번, 세 번. 아스타리온은 눈꺼풀이 깜빡이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세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너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그러니 서로 뭔가를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거나 바랄 필요도 없지. 나는 그게 훨씬 깔끔하다고 생각해.”

서로 필요를 교환할 뿐, 더없이 깨끗하고 후련한 관계. 기대하지 않으니 배신당할 일도 없다. 그러므로 속고 속이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애초에 호의와 애정을 약속한 적이 없었으므로.

“네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으니, 나 역시 아무것도 바랄 게 없어. 말뿐인 약속으로 기대를 품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아.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엘은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의 예민한 귀는 이어진 말을 놓치지 않았다.


- 너랑 난 이런 부분이 좀 닮았으니까.


그 말은 아주 오랫동안 아스타리온의 가슴 한켠에 남아,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징그러운 기생충처럼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



생각해보면 그랬다. 엘은 아스타리온에게 아무것도 먼저 요구한 적이 없다. 물론 이 괴상망측한 기생충을 머리에 달고 다니는 일행의 리더인 만큼 전술 지시 같은 것이야 당연히 하고 불침번 순서나 야영지에서의 잡일 담당 같은 것도 자주 미루기도 하는데(유달리 귀찮은 일을 몰아주는 것 같아서 소소하게 몇 번 다퉜었다), 그 외에 사적인 영역은 결코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

때때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혐오감은 차치하고서라도, 아스타리온은 저의 ‘테크닉’에 꽤 자신이 있었다. 이번 ‘타깃’은 주인에게 갖다 바쳐야 하는 강제성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 보호를 위함이라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는 타깃을 함락시키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지난 2세기 동안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총동원해 유혹한 표적은 그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목적성이 뚜렷한 친절, 친의, 타오르는 불길처럼 명약관화한 욕망과 갈망. 아스타리온이 예상하고 기대한 것은 그런 종류의 의지였다. 그리고 자기 안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답해줄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이 오랜 공을 들여 유혹한 이 사람은, 무엇 하나 그의 예상대로 행동해주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이 먼저 팔을 뻗으면 거부하지 않고 안겨주지만, 먼저 손을 뻗거나 달리 뭔가를 요구해온 적은 없었다. 결코 상냥하거나 친절한 성격이 아닌데도 최소한 아스타리온에게 모질게 굴지 않던 그는, 본인이 생각해도 어린애 생떼 같다고 느끼는 투정이나 매몰찬 말투에도 안색 하나 바뀐 적이 없다. 


거래. 필요를 교환하는 게 전부인, 깨끗하고 후련한. 
그래서 그는 그렇게나 산뜻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깔끔한 정의인가. 아스타리온은 지금껏 이런 것을 바라왔는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것은 모조리 잘라낸, 서로 재고 따지며 지저분한 부가물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지극히도 단순하고 명쾌한 상호합의적 관계. 동등한 입장에서 필요한 것만을 교환하는,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도 아스타리온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제안하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지난 이백 년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동등한 입장에서 대우해주지 않았고,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는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설령 있었다 한들 카자도르가 먹어버렸거나, 제 손으로 치워버렸을 테다. 뭐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엘은 특별했다. 그는 아스타리온의 특출난 전투 기술과 이따금씩 잠자리를 덥히는 열기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잠자리는 아스타리온이 먼저 청하지 않으면 요구하지도 않았다. 폭력적인 강요도, 부탁을 위시한 강박도 아닌, 어디까지나 본인의 의사에 초점이 맞춰진 필요의 교환. 이런 식의 관계 맺음도 있을 수 있음을, 그로 인해 처음으로 알았다. 아스타리온이 더 이상 이 관계가 필요하지 않다면,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끊어버릴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제약도 지저분한 감정도 없을 것이다. 


필요하지 않다면.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숨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다만 머리만은 재빠르게 회전했다.

자신이 필요에 의해 관계의 맺고 끊음을 결정할 수 있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그가 나를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 이 깔끔하고도 단순한 관계는 끊어질 수 있다. 아스타리온이 스스로의 의지로 필요를 결정하는 것이 저만의 권리(아,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이듯이, 상대도 필요를 결정하고 맺고 끊음을 이행하는 것은 그만의 권리일 터였다. 이상적이다. 아름다울 만큼. 아스타리온은 감탄하면서도 우울감에 침잠했다. 



***


어느 날 야영지의 모든 이들이 밤의 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눈을 감은 깊은 시간이 되었을 때쯤, 가까이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지자 아스타리온은 눈을 떴다. 엘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는 게 보였다. 순간 아스타리온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척으로 가까워진 발걸음은 다가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지나가 멀어져갔다. 엘의 볼일은 여기에 없었다.

어딘가로 멀어지는 엘의 뒷모습을 보며 아스타리온은 고민했다. 
지난 하루는 유난히 길었고 피로했다. 길은 평소보다 배는 험난해서 다리가 부을 지경이었고 썰어야 할 적들은 자꾸만 쏟아져나왔다. 어서 다시 머리를 뉘이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다음날 아름다운 자신의 눈동자가 총기를 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이 밤중에 혼자 어디로 가는 걸까? 자기처럼 뱀파이어도 아니고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야영지 바깥을 배회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결국 호기심에 굴복했다. 


대상의 기척을 놓치지 않을 만큼 가까이, 그러나 이쪽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은 멀리 거리를 유지한 채 발소리를 죽여 따라간 곳은 야영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낮에 일행이 지나온 산기슭 어딘가였다. 엘은 정처없이 떠도는 듯 휘적휘적 걸어다니다가 어느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수풀 사이에 들어가 쭈그려 앉아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몰래 꿍쳐둔 비자금이라도 땅에 묻어놨나? 가끔 보면 엘은 넌더리가 날 정도로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서 (“돈이 길가 잡초마냥 썩어나는 줄 알아! 야영 물자 쓰는 것도 무구 챙기는 것도 다 돈이니까 벌어올 거 아니면 닥치고들 있어.”)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진짜라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아스타리온의 밝은 눈이 포착한, 엘이 손으로 들어올린 그것은 뜻밖의 물건이었다.

‘풀?’

약초 줄기처럼 생긴 풀뿌리 같은 것을 땅에서 뽑아 들고는 본인도 확신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뭐야, 그게?”
“으악, 뭐야?!”


갑자기 들린 소리에 엘은 펄쩍 뛰며 재빨리 한 발짝 거리를 벌렸다. 그제서야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입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만, 너무 뜻밖이라 그만. 소소한 잠행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건 아깝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는 수 없지. 아스타리온은 어둠 속에서 달빛이 비치는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지 마, 자기. 나야.”
“아, 뭐야, 너구나. 웬일이야?”
“음~ 밤 산책.”

뭐하나 궁금해서 몰래 뒤따라왔어,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엘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는 몰라도 한쪽 눈썹을 씰룩 치켜올릴 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에 든 건 뭐야?”

아스타리온은 진짜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응? 아, 이거? 밤난초. ……아마도.” 

자신 없는 듯 덧붙인 뒷말이 맥아리 없이 작아졌다.


밤난초.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했지만 잘 모르는 이름이었다. 인상에 안 남은 걸 보면 별로 중요한 건 아닐 터였다.

“그건 왜? 이 밤중에 따러 나올 정도로 귀한 건가?”

“잘 모르겠지만, 흔한 건 아닌가봐. 지금 지나치면 또 발견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으니.”

그리고 엘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다른 생각에 잠긴 듯했다.

“섀도하트가 좋아한다고 하던데.”

어, 뭐라고? 아스타리온의 입꼬리가 뒤틀리듯 비뚤어졌다.

“오, 우리 일행의 어여쁜 숙녀분을 위해 꽃을 따러 나오셨다고? 정말 낭만적이네.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하려던 거야?”

이럴 시간에 그냥 누워서 더 쉬기나 할걸. 아스타리온은 급격히 피로해졌다.

“아니, 굳이 그랬다기보단……. 어쩐지 잠이 안 와서 잠깐 바람 좀 쐬려고 걷다가 아까 언뜻 이걸 본 게 생각나서 찾아본 것뿐인데……. 근데 내가 왜 이런 변명 같은 말을 하고 있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사적으로 답하던 엘은 퍼뜩 정신이 돌아온 듯 투덜거렸다.


아스타리온은 꽃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아주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오늘밤은 정말이지 나답지 않은 짓을 연속으로 하는, 괴이한 밤이다. 이런 이상한 밤에, 이상한 짓 한 번 더 한들 뭐 크게 대수일까?


“그러면 그거, 나 줘.”


아스타리온은 평소처럼 완벽하고도 침착한 미소를 띄운 채 손을 내밀었다. 엘의 얼빠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처구니가 없겠지. 나도 그런데. 그러나 이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낼 생각이 전혀 없던 아스타리온은 뻔뻔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리기까지 했다.

“딱히 섀도하트에게 선물 주려던 건 아니라며? 그럼 누구한테 주든 상관없잖아?”
“그건 그런데……. 그보다 너 꽃 같은 거 좋아했어?”
“난 아름다운 건 뭐든지 좋아해. 특히 꽃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전에 살던 집에는 온실이 따로 있었다니까?”

있겠냐. 당연히 거짓말이지.

아스타리온의 완벽한 미소는 그러한 속내를 결코 내비치지 않았다.


엘은 혼란스러운 듯이 눈을 껌뻑거리더니 손에 든 꽃과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장난이 좀 짓궂었나.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엘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자.”

아스타리온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풀뿌리 한 줄기가 올라왔다. 아주 작고 짙은 색의 꽃송이가 달려 있는, 특이하게 생긴 풀이었다.


‘허. 진짜 주네.’

입술 사이로 실소가 새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것 봐. 이렇게 무르다니까. 이 기생충 군단을 이끄는 강인한 우리의 리더는, 아무리 아닌 척해도, 비정하고 무자비한 무뢰한을 표방하고 싶어 애쓴대도, 결국 이런 물렁한 면을 보이고 만다. 맹수가 되고 싶은 새끼 여우. 한심스럽게도.


“아스타리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근심인지 의심인지 모를 감정이 상대의 눈에서 읽힌다. 어쩌면, 걱정 같은 것도.

아스타리온은 곧바로 웃음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달란다고 진짜 줄 줄은 몰랐어. 감동이야.’ 혹은 ‘주려고 생각한 사람이 따로 있는데 딴 사람이 달란다고 냅다 넘기다니 얼마나 줏대 없는 거야.’ 같은 말을. 그러면 엘은 언제나 그렇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칠 것이다. 그렇게 이 괴상한 밤 산책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아무 눈짓도, 아무런 몸짓도 지어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것을 보고 엘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뭔가 실수했나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고 있었지만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그 걱정을 달래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웃고 싶지 않았다. 우습지 않으니까.
기쁜 눈짓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도 기쁜 일 따위 없으니까.
매력적인 몸짓으로 교태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데.


너는 이렇게 쉽다. 손 한 번 까닥이는 것만으로 귀한 꽃을 순순하게 넘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마찬가지겠지. 

아스타리온은 생각했다. 섀도하트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놀랐지만, 별 생각 없었다는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구한 물건을 다른 사람이 내놓으란다고 정말로 내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깨닫는다. 아, 이 녀석은 진심이다.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은 거다. 정말로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거라고.


아스타리온은 목이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공기에 독안개가 끼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없지. 더 이상 호흡하지 않는 폐는 차갑게 굳어있을 뿐으로 생명 유지 기관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숨이란 살아있는 것을 조금 더 잘 흉내내기 위한 몸짓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런데 뭐지, 이 숨이 턱 막힌 느낌은.

기대받지 않는다는 것은 편하고 깔끔한 일이 아니었나?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바랄 필요 없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고, 기대받지 않으면 실망시킬 일도 없다. 이런 것을 원했던 게 아니었나? 혹여 속이고 있음을 들킬까, 속고 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일도 없이 단순하고 가벼운. 후련하고 시원스럽다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복잡하고 골 아픈 짓거리가 필요 없는 이 깨끗한 관계는 한동안 자유로운 해방감까지 선사했다. 즐거웠다. 마음 편했다. 


다만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이 관계가 끊기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모순. 아스타리온은 그 모순을 눈치챘으므로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 관계가 깔끔하고 마음 편한 이유는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제약도 강요도 없는 자유로움. 아스타리온이 평생에 걸쳐 갈구해왔던 것. 하나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임이 당연한지라, 언제든 이유 불문하고 없었던 것이 될 수 있는 무척이나 가볍고 얄팍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한쪽이 원치 않으면, 어느 한쪽이라도 상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관계는 끝난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필요를 교환하는 관계이므로 필요가 없어지면 소멸하는 것이다.


싫다.

아스타리온은 강렬하게 감각했다. 놓기 싫다. 끊어버리기 싫다. 없어지는 것은 싫다.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기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받지 않는 것이, 싫다.


기대한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 원하고, 요구하고, 때로는 강제하기도 하는 것. 미쳐버린 것 같았다. 평생토록 강박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자신이, 형태가 다를지언정 타인의 속박에 기꺼이 들어가고 싶다니. 심지어 상대가 그걸 원하지도 않는데.

그럼에도, 이 모든 모순과 불합리와 자기혐오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아스타리온은 그 이상을 원했다. 기대받고 싶고, 기대하고 싶었다. 무겁고 진득하고 지저분한 것이더라도 좋았다. 조금 더 오래, 가능한 길게, 지속할 수 있다면…….


‘어떡하지. 뭔가,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아스타리온은 눈앞의 얼굴이 저를 향해 온전히 집중하고 있음을 보았다. 저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틀림없이 형편없을 정도로 꼴불견일 것이다. 연기도 과장도 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무장해제된 자신은 볼품없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소름끼치는,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머릿속이 완전히 어둠에 잠식당하기 직전, 아스타리온은 등과 목이 단단하게 감싸이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목 뒤에는 손이, 등허리에는 팔이 한 짝씩 걸쳐 있었다. 

“숨 쉬어, 아스타리온.”

그제야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온몸을 심하게 떨고 있으며, 얼굴은 식은땀투성이에 호흡법도 잊어버렸을 만큼 정신을 놓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의 말이 뱀파이어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진정시키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아스타리온은 반박하지 않고 따르기로 했다. 흉내뿐이라 해도 호흡은 기분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엘은 아스타리온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진정 좀 됐어?”

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스타리온은 아무 부차적인 말도 덧붙이지 않고 긍정했다.

“돌아갈까?”

아스타리온은 머뭇거렸다. 그러다 팔을 뻗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무척이나 어색하고 뻣뻣한 동작으로.


“조금만…… 더 여기 있자. 괜찮아?”

대답하듯, 엘의 손이 아스타리온의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고마워.”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제 것이 아닌 듯 낯설게 들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너는 상관하지 않으니까. 상관하지 않고 옆에 남아주니까. 그러면 됐어.



- Con.

<기대> 편으로 이어집니다.



그때 그때 좋아하는 것을 막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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