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랑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미 결정한 일에 더 이상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제는 그런 여랑을 향해 웃으며 감옥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오는 여랑을 향해 천제가 말했다. 

 

 

“그 아이를 부탁해.” 

 

 

대답하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여랑의 얼굴에서 천제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여랑은 얼음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감싸고 있던 한기가 사라지자 여랑은 자신을 기분 좋게 감싸는 영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랑이 고개를 돌리자 그 앞에는 흑영이 서 있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인간계로 가는 건가?” 

“그래.” 

 

 

흑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여랑은 이상하게 쳐다봤다. 자신이 인간계로 간다고 해서 이렇게 배웅할 사이도 아니었고 별로 할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놈.” 

 

 

결국 여랑은 그를 두고서 돌아서서 걸어갔다. 잠시 후 흑영은 얼음궁에서 나온 천제의 뒤를 따랐고 천제는 천천히 걸으며 흑영에게 말했다. 

 

 

“하연...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느냐.” 

“... 예.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천제는 멈춰섰고 그 뒤에서 흑영도 멈춰섰다. 천제가 고개를 돌려 흑영을 봤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흑영. 너의 일이 무었이냐.” 

“천제님을 보필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내 일을 돕는 게 너의 일이다.” 

 

 

천제는 흑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흑영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천제를 봤다. 천제는 웃고 있었다. 

 

 

“네 일을 했는데 내가 왜 너를 벌하겠느냐.” 

“허나..” 

“하연은 나의 분신과도 같다. 내가 처음에 계획할 때만 해도 그 아이는 그저 인간이었어. 운명부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에 가장 순수함을 가진 인간.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성장하는 그 아이를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 아이를 진짜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더군.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도울 수가 없었다. 내가 만든 운명에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워 하는 그 아이를 도울 수가 없었어.” 

 

 

슬픈 눈빛을 하는 천제를 보며 흑영은 하연의 존재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흑영은 고개를 숙여 천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천제의 그런 표정을 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여우구슬로 살려달라는 여랑을 보고서야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알았지. 그 아이는 나의 아이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 영혼에 나의 힘도 담겨 있으니... 그러니 네가 그 아이를 위해 했던 일들은 나를 위한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네 일을 하면 된다.” 

“허나, 저는 인간을 해하였습니다.” 

“그래. 그 벌로 앞으로 계속 그 아이를 도와야 한다.” 

“예?” 

“그게 네 벌이다. 이미 관여하였으니 앞으로 그 아이를 지켜보며 그 아이를 도와야 한다.” 

“천제님...” 

 

 

흑영은 조금 머쓱해졌다. 그저 그림자처럼 몰래 가끔씩 하연을 보며 하연을 도왔던 흑영은 아무도 그것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천제가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천제는 흑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흑영이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천제는 웃으며 말했다. 

 

 

“그저 넌 앞으로도 네 일을 하면 된다.” 

“예.” 

 

 

천제는 어깨를 몇 번 토닥거리더니 손을 내리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몇 걸음 뒤로 흑영이 천제를 따라 걸어갔다. 무거웠던 그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인간계로 내려온 여랑은 자신이 처음 머물렀던 절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별루였다. 하연이 오기 전까지 그 곳에 발이 묶여 있었던 여랑은 초조하고 화가 났었다. 그랬던 시간을 떠올리니 이제는 웃음이 났다.  

 

여랑은 문득 하연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연은 지금 여랑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그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서 있던 여랑은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하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랑을 보고 서 있었다.  

 

여랑도 갑자기 나타난 하연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 침묵만 흐르고 한참이 지나 말을 먼저 꺼낸 건 여랑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하연이 놀랐을 거라고 생각해서 여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나가다가 잠시 쉬려고....” 

 

 

여랑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하연이 '풋' 하고 웃더니 갑자기 폭소했다. 그 모습에 여랑은 다시금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어대던 하연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여랑에게 말했다. 

 

 

“오.. 오랜만입니다. 여랑.” 

“어?” 

 

 

전보다 더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웃고 있는 하연을 보자 얼떨떨한 여랑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상황 파악이 끝난 여랑은 그제서야 웃음이 났다. 자신은 또 천제에게 속은 것이었다. 

 

 

“넌 전보다 더 잘 지내는 거 같다?” 

“제가요? 여전히 힘 하나 없는 나약한 도망자 신세인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연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전처럼 나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느껴졌다. 여랑이 그런 하연의 모습에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을 때 하연이 말했다. 

 

 

“천상계에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간계에는 무슨 일로... 여우구슬도 더 이상 없지 않습니까?” 

“없긴 왜 없어.” 

“네?” 

“너. 네가 여우구슬을 가졌으니 네가 나쁜 이들의 손에 이용되지 않도록 해야지.” 

 

 

여랑의 말에 하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때문에 오신 겁니까?” 

“누가!! 여우구슬 때문이야. 너 때문이 아니라.” 

 

 

당황하는 여랑을 보며 하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예예. 구슬 때문이라고 치지요.” 

“치는 게 아니라 진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하연의 말에 허를 찔린 여랑은 헛기침만 할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전보다 더 하연이 능청스러워졌다고 느낀 여랑이 게슴츠레 한 눈으로 하연을 보자 그 모습이 웃긴지 하연이 또 웃었다. 

 

 

“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요. 흑영님이 때가 될 때까지 여기서 머무르라고....” 

“뭐?” 

“보아하니 그 때가 여랑이 돌아오는 지금인 거 같네요.” 

 

 

웃는 하연의 얼굴을 보던 여랑은 문득 헤어지기 마지막의 하연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위험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야 이곳에 있었으니 안전했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글쎄요. 영성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있을까요?” 

“왕위를 노리는 자이니 세상 어디에든 그 자의 눈과 귀가 있겠지.” 

“그럼 그냥 어디가 됐든 발길 닿는 대로 가죠.” 

“뭐?” 

“그렇지 않습니까? 상대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자라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죠.” 

 

 

하연의 말에 여랑은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의 하연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두려워만 하던 그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넌 정말 걱정이 없구나.” 

“글쎄요. 든든한 아군이 생겨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하연이 여랑을 보며 웃었다. 그 모습에 여랑은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천인과 인간이라고 선을 그으며 하연과 거리를 두고 있던 자신과는 다르게 하연은 언제나 그 거리감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모두가 생명이 있는 동일한 존재였다. 그것을 생각하니 새삼 하연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천제의 계획에 들어 있는 인간이 하연이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디든지 가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여랑은 호탕하게 웃으며 먼저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하연은 웃으며 따라 걸었다. 그들은 절을 떠나 산을 내려갔고, 따스한 햇살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달을 보며 위안삼듯이 누군가가 나의 글에 재미와 위안을 받길 바라며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공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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