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난 계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난 네가 떠오른다.










가을도 거의 저물어가서 이제는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쌀쌀한걸. 되받아쳐줄 상대도 없는데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오미네는 상의의 옷깃을 여몄다. 그다지 추위를 크게 타는 편은 아니지만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에는 몸이 반응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연습 후에 밖에 나서면 체온이 급작스럽게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닭살이 올라왔다 가라앉는, 결코 유쾌하지는 못한 경험을 몇 번 반복하고 나자 조금 적응이 된 몸이 노곤해졌다. 잊고 있던 피로감이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오늘 연습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뛰고, 패스를 받고, 슛을 넣고. 농구는 참으로 단순한 게임이다. 혹자는 순발력과 민첩성, 지능이 겸비되어야 비로소 최고가 될 수 있는 섬세한 스포츠라고는 하지만 아오미네는 그런 잡지 칼럼에나 실릴 법한 표현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순한 게 어때서.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한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이기고자 하는 본능으로 힘껏 코트를 박차면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리고 오직 농구공과 상대, 그리고 골대만이 존재하는 듯 쨍한 그 감각을 좋아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몇 년째 질리지 않고 계속 하고 있을 정도니까.


…그래. 중학 시절부터, 계속.


“아오미네 선배!”


잠시 멍하니 감상에 빠지려는 찰나, 귀 안쪽이 징 울려 올 정도로 하이톤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오자 아오미네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까보다도 조금 더 빨리.


“선―배!”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아까가 솔이라면, 지금은 라 정도?

정말 시끄러운 여자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오미네는 혀를 찼다. 탁탁탁, 잘게 뛰어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잡았다!”


왼쪽 팔에 하중이 실렸다. 언제나 이 여자는 왼쪽을 노린다. 선배는 농구를 하니까, 혹시라도 오른팔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으스대며 하는 것에는 아무리 아오미네라도 어이가 없었다. 그럼 왼손이나 왼팔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이야기인지.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라.”

“에, 선배 차가워― 오늘 저 강의 일찍 끝나니까 밥 같이 먹자고 이야기한 거 잊었어요? 왜 그냥 가요?”

“잊지 않았으니까 도망가는 거지. 놓으라고.”


아, 너무해― 칭얼대는 목소리가 지긋지긋하다. 농구부 매니저면 매니저답게 부 활동 때 최소한의 신경만 써 주면 참 좋을 텐데—사실 신경 꺼 주는 것이 제일 좋지만—왜 개인 시간에까지 끼어들어 이 난리인지 아오미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미 프로팀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는 자신이 부 활동은커녕 정규 강의에 제대로 출석하는 일도 이젠 거의 없는데 말이다. 오늘처럼 가끔 시간이 빌 때 체육관을 빌려 연습을 할 때 말고는.


게다가 듣자 하니 다른 부원들한테는 이러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의를 같이 듣자고 하질 않나, 밥을 같이 먹자고 하지 않나. 저돌적이고 시끄럽고, 아무튼 귀찮은 녀석이었다.


같은 매니저라도 사츠키는 이런 타입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좀 잔소리가 심하긴 했지만, 이렇게 따라붙어서 귀찮게 굴지는―


“…으앗, 선배!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그녀가 귀찮게 구는 상대는 따로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한 주제에, 코트 위에서는 누구보다도 심지 곧은 녀석. 농구를 못 해도 그저 농구가 좋다며 조금 쓰게, 하지만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웃던 녀석. 빛이 아닌 그림자가 되어 팀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말하던, 그런 이상한 녀석.


“선배…?”

“미안한데, 오늘은 진짜 너랑 어울려줄 기분이 아냐. 나중에 보자.”


표정을 한껏 굳히며 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여자는 겁먹은 듯 눈만 굴리다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심하게 굴었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 따위 싹 지워졌다. 그런 건 아오미네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온 길을 되돌아가면서도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자신을 힐끗 힐끗 돌아보는 후배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아오미네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최근, 부쩍 많이 생각난다. 그 녀석이.


그는 이렇게 추운 날에는 몸을 넉넉하게 덮는 커다란 외투를 즐겨 입었다. 회색이나 검은색 등 무채색 계통의 옷이 많았던 것 같다. 잔병치례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치고는 허약한 체질이라, 감기에 걸리기라도 한 날에는 잔뜩 열에 들뜬 눈으로 연습에 가곤 했다. 코끝과 눈가가 잔뜩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면서.


“…제길.”


기억이란 못 써먹겠다. 끄집어낼수록 더 물밀듯 차올라서, 사람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 버리기나 하니까.


아니. 몹쓸 것은 단지, 너에 대한 기억뿐일지도 모른다.


“테츠…”


익숙한 이름이 혀끝에 맴돌았다. 부르되 부르지 못하게 만드는 그리움을, 아오미네는 끝내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그것은 소태마냥 쓴 맛이 났다.






***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 매일같이는 아니지만,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닌 것치고는 꽤 자주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이린과 토오는 같은 도쿄 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연습 시합도 비교적 잦았고 합숙에서도 이래저래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두 팀은 말하자면 도쿄의 톱3—슈토쿠를 포함하여—이자 숙명적인 라이벌이었고, 여름의 전국대회나 겨울의 윈터컵에서도 지긋지긋할 만큼 계속 맞부딪히곤 했다. 어차피 주전들이라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팀끼리 자주 부딪히는데 멤버들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다.


1학년 때 있었던 윈터컵 1차전 이후 자신과 쿠로코의 관계는 그럭저럭 우호적이 되었다, 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의 아오미네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중학교 시절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면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우호적 관계에서 친밀함으로 다시 나아가는 것은 그 때의 아오미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끝까지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결코 일정 수준 이상 거리를 좁히는 일 없이 3년이 흘렀다. 만날 때마다 아오미네는 쿠로코를 관찰했다. 굳이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상대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후로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제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시선이 가버리곤 하는 것을 통제할 길은 없었다.


아오미네의 눈에, 쿠로코는 중학 시절보다 훨씬 즐거워보였다.


「지금은 그저, 모두와 함게 농구를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 말에 안도했지만, 동시에 섭섭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함께 했던 시간이 그의 안에서는 이미 화석이 되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걷잡을 데 없이 아쉬워지는 기분을 도무지 지울 길이 없었다. 자신의 기억에서 그 때는 언제 어느 때와 비교해도 가장 빛나던, 비할 데 없이 행복했던 시간인데.


아오미네는 생각했다. 사고하고, 또 고민했다. 내가 만일 변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옆자리엔 여전히 내가 있었을까? 계속 나에게 웃어주었을까? 시합에서 이긴 후에 주먹을 마주대어 주었을까?


가정에 가정을 반복하는 것은 무척 지치는 일이었다. 과거에 머물 뿐 앞으로 나아갈 각오가 없는 주제에, 감히 그 일에 싫증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이유 탓이었으리라.


포기를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아오미네는 자신의 죄책감을 핑계 삼기로 결정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좋게 보면 전통적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식상한 방식 및 내용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킨 것이다.


자신이 쿠로코에게 한 짓은 천하에 다시없을 몹쓸 짓이며, 따라서 그에게 다시 다가가 스스럼없이 지낼 자격이 없다는 것이 그 진부한 자기세뇌의 골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때의 자신은 어렸고, 유치했고, 철이 없었으며, 제 아픔만 중요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병신이지…”

“…다이쨩,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귀를 찌르자, 아오미네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 봐, 이렇다니까. 요새 정말이지 다른 생각에 잔뜩 빠져 일상에서 살짝 비껴 나가 있는 기분이다. 눈앞에는 분홍색 머리칼을 하나로 가지런히 묶어낸 화사한 미인이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병신은 병신이네. 대체 몇 년째 네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지 원.”


한숨을 쉬며 공책을 빼앗아가려는 손을, 아오미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볍게 쳐 냈다. 그리고 베끼던 부분을 다시 광속으로 필기하기 시작했다. 그 뻔뻔한 모습을 기가 차다는 듯 노려보며, 모모이는 얼얼한 손등을 문지르면서 혀를 내둘렀다.


“진짜 최저라니까. 다이쨩, 여전히 여자한테 인기 없지?”

“그래, 그래. 마음대로 떠들어라.”


대학은 다르지만 모모이와는 이번 학기에 같은 학문을 다루는 교양 강의를 듣고 있다. 그러다보니 시험 내용 역시 유사해서 아오미네는 종종 그녀의 필기 노트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대학에 와서까지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정 많은—그래서 가끔 귀찮기도 한—소꿉친구는 연락할 때마다 착실히 자신을 만나주었다.


“그나저나, 다이쨩~?”


모모이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하지만 한껏 애교를―물론 아오미네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담아 상대의 애칭을 불렀다. 아오미네는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기분에 슬쩍 눈을 들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으로 다섯 번째야. 노트 빌려주는 거.”

“…벌써 그렇게 됐냐…”

“잊지 않았지? 약속.”


내 부탁 꼭 들어주기야? 응? 그녀를 흠모하는 수많은 남성들이 보면 한 번 더 사랑에 빠질 것이 틀림없는 귀여운 웃음을 만면에 띤 모모이를 보며 아오미네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그녀에게 설렘도 뭣도 없는 그로서는 그것이 단순한 악마의 미소로 보일 뿐이었다.


저게 뭐가 좋다고. 아무리 봐도 테츠의 웃는 얼굴 쪽이 훨씬―


“뭐야, 나.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머리 괜찮아, 다이쨩?”


진심어린 걱정이 담긴 소꿉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아오미네는 자신이 방금 떠올리려 시도했던 생각을 급히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어째서냐고 누군가 물으면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한층 더 쌀쌀해진 날씨에 두터운 겉옷을 입고 어깨를 움츠린 채 걷는 행인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오미네는 추위를 크게 타지 않는 편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계절이 바뀌면 한 겹 정도 옷을 더 껴입기는 했다. 목도리는 웬만하면 잘 하지 않는 주의다. 목을 덮는 천의 감촉이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번화가였지만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사람이 붐빌 정도로 많지는 않은 한 스팟에서 아오미네는 소꿉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약속시간에 일찍 나타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준비할 것이 많은 한창 나이의 여성. 기다리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늦잖아, 사츠키 이 자식…”


그녀가 부탁해온 것은 실로 유니크했다. 상상도 못한 내용에 아오미네가 한참을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었을 정도로.


「게이 친구가 있는데 말이야.」


아오미네는 오랜 침묵 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멍청한 질문이기는 했다.


「그놈이 날 좋아한대?」


그 때 모모이가 지었던 표정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이없음과, 경악과, 경멸의 삼중 콤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 눈동자는 순순히 다시 입을 닥치고 그저 상대의 말을 기다리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꽤 친해져서, 상담을 해 주기로 했어.」


그것이랑 자기한테 할 부탁이랑 무슨 상관이지? 설마 나한테 상담을 부탁하려고…라는 의구심은 다행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아마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해버렸다면, 꿈에 볼까 두려운 모모이의 그 표정을 다시 마주해야 했을 테니까.


「근데 상담 장소가 조금 걸려서.」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약속 장소는 완전히 게이바는 아니지만, 그쪽 계통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술집이라고 한다. 암묵적인 아지트랄까. 연약하고 가녀린―여기서 무심코 풋 하고 비웃었다가 샤프로 눈을 찔릴 뻔했다―여성인 자신이 그 곳에 보호해줄 사람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가 무슨 일이 날 지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가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급 연기라 감히 칭할 만한 울음 섞인, 다분히 가식적인 목소리에 아오미네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같이 가 줄 거지?」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내키지 않아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아오미네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성실한 남자였다.


그런 고로, 꽤 먼 길을 와서 낯선 거리에 오도카니 서서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이야기이다. 모모이는 자기 같은 친구를 둬서 다행인 줄 알라는 말을 가끔 하곤 하는데, 아오미네로서는 다행인 만큼 귀찮은 일도 은근 자주 시키니까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라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본인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딱히 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 건으로 쫑알거리며 파고들면 피곤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몇 번이나 밀물과 썰물처럼 들이닥쳤다 사라졌다. 인간, 이라는 개체보다는 하나의 군집체로까지 느껴지는 그 흐릿한 잔상의 파도 속에서 아오미네는 슬슬 무료해져갔다. 졸릴 정도로 지루해서 눈만 끔벅이던 그의 시야에 불현듯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말 그대로 사로잡혔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감각에 아오미네는 금방이라도 스쳐 사라질 듯 아련한 그 모습을 계속 시야 안에 두려고 눈을 부릅떴다. 반사적이고도 본능적인 행위였다.


테츠.


목에 탁 걸린 듯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그 이름을 계속해서 주워 담으며 아오미네는 무심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잘못 봤다고 하기엔 너무도 닮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보다 아주 약간 더 긴 하늘빛 머리칼을 하고, 단추를 남김없이 잠근 흰색 셔츠 위에 깊게 파인 모양새의 커다랗고 따스해 보이는 브이넥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신기루인가.’


환상이다. 그런 것 같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해도, 테츠다.


테츠가 바로 내 앞에 있어. 그 생각만으로 아오미네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부들부들 떨려왔다.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보지 못한, 하지만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니.


“…테—”


꿈일까. 그런 생각에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에 그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정말로 한낮의 백일몽이었던 것처럼.


그런 것까지도, 똑같았다. 어떻게, 어쩌면—


“다이쨩!”


익숙한 고주파의 목소리에 아오미네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멍청해 보일 것이 틀림없는 얼굴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모모이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 번이나 불렀다구. 도대체 어디에 그렇게 정신이 팔려있는 거야?”

“어, 어?”

“늦은 건 미안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좀 별로지 않아?”


톡 쏘는 말투치고는 그다지 진심으로 화내는 기색은 없었다. 단순히 조금 삐졌을 뿐인 것 같았다. 아오미네는 여전히 멍한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평정을 가장했다. 아까 잠시 망막에 맺혔던 그 꿈결 같은 사람의 존재를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며.


“미안.”

“알면 됐어. 자, 들어가자.”


자신의 팔꿈치를 잡아끌며 씩씩하게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모모이를 뒤따르며, 아오미네는 다시금 그가 있었던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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