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한테 부탁했어. 오늘도 힘내.

 

눈을 뜨자마자 옆을 돌아보았다. 손을 조금 뻗으면 닿는 작은 테이블 위에 네모반듯하게 접힌 작은 메모지가 보인다.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깔끔하고 유려한 필체로 적어내린 글귀는 분명 릴리의 것이었다. 메모와 함께 테이블 위에 쌓인 초콜릿을 보며 리무스는 가볍게 웃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만 해도 믿을 수 없다며 길길이 난리를 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에 쌓인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분명 호그스미드에 가지 않은지 며칠 되었을 터였건만 ― 제임스와 시리우스 콤비가 마음이 동할 때 마다 투명망토를 쓰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지만, 어쩐지 이제 와서 말릴 수는 없었다. ― 왠지 사온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허니듀크 특제 초콜릿들을 보건데, 어쩌면 시리우스와 제임스가 또 한 밤중 몰래 나가 초콜릿을 쓸어 담고 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초콜릿을 릴리가 가져다 두었단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교칙과 바르지 않은 것에 관해선 똑 부러지는 그녀가 그런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슬쩍한’ 초콜릿을 옮겨다 놓았다니. 어쩌면 제임스와 함께 하면서 릴리도 조금은 유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변했다는 것이 비단 릴리 한사람에게만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에 리무스는 표정을 굳혔다.

다른 때보다 유난히 피곤한 몸과 무거운 머리. 그 이유야 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보았다. 날짜를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은 보름이었다.

리무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만은 꼭 챙겨 먹어야 릴리에게서 오는 잔소리를 줄일 수 있을 터였다. 아마도 아픈 자신 보다 먼저 움직여서는 메모 한 장만을 남긴 채 혼자 반장 업무를 보러 다닐 것이 분명했다. 그다지 개운치 못한 기분으로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무시하며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



 

가볍게 샤워를 끝내고 기숙사의 계단을 조심조심 걸어 내려오며 휴게실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시선 끝에 소파에 나른하게 늘어져 앉아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 누군가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힐끗 고개를 돌려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손 하나 만을 슬렁슬렁 들어 올려 인사를 함에 리무스도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 했다. 한 걸음을 더 옮길 무렵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옆에 다가와서 아무렇지 않게 손에 들린 책과 어깨에 걸쳐진 무거운 가방을 빼앗아 든 시리우스는, 기다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그저 난처한 웃음만 지으며 쫓아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다. 그는 어느새 초상화 구멍 앞에서 비뚜름하게 서서는, 리무스가 다 내려오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서투르게 서둘러 걸어 내려갔다간 분명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체력이 허락하는 만큼 조심조심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시리우스는 평소 성미 급한 성격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책을 옆구리에 낀 채,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무거운 책가방을 그저 어깨에 걸쳐둔 모양새는 가만히 놔두어도 제법 그림이 될 법한 모습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기숙사 내에서 어쩐지 의미를 잘 알 것 같은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시선이 모조리 자신에게 향해 있을 것이란 걸 분명히 느끼며, 리무스는 더더욱 조용히 시리우스에게로 다가갔다.

 

“책가방 정도는 내가 들 수 있다니까.”

“아, 이제 그 소리도 지겨워 죽겠네, 진짜. 그냥 잔 말 말고 따라오지?”

 

그저 툭툭 내뱉는 험한 말투에도 이미 면역이 된지 오래다. 리무스는 시비조로 귀찮다는 듯 튀어나온 그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으며 초상화 구멍을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연회장을 가로지르는 학생들 무리로 신입생들이 보였다. 올해로 7학년이 되는 입장에서 올망졸망 뛰어다니는 그 작은 학생들을 바라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울 법도 했다. 리무스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복도 옆 창문을 바라보았다. 갈색, 붉은 색, 노랑, 수수한 빛으로 물든 낙엽들이 천천히 흩날리는 호수와 그 뒤의 숲들이 눈에 들어왔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문득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 리무스는 가볍게 몸을 움츠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엔 어느 샌가 시리우스의 손이 자신의 망토를 여며주고 있었다.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능숙하게 손짓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여며주는 그 가볍고도 재빠른 손길에 리무스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마음속에 간질거리며 지나가는 감정 탓에 얼굴이 뜨거워 지는 것만 같았다. 오로지 그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일 뿐이라며, 리무스는 차가운 바람이 드나드는 교정 밖으로 자꾸만 시선을 내던졌다.

 

“가을은 가을이네. 바람이 좀 찬 걸 보니.”

 

문득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시리우스 또한 그녀를 따라 교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회색 눈동자는 아무런 감흥 없이 흩날리는 낙엽들을 보다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는 리무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다시 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이마에 닿은 손가락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리무스는 무심코 방금 시리우스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신의 앞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 즈음 이었나?”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그 한마디에 리무스는 화들짝 고개를 들고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 만큼으로 충분했다. 결국 리무스는 살포시 웃었다.

그래. 작년 이 즈음.

리무스는 입 안으로 그 한마디를 조용히 굴렸다. 시간은 정말 거짓말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

 



“늦었구나, 릴리.”

 

리무스는 의외로 연회장에 늦게 도착한 릴리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릴리는 약간 신경질 적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소 상기된 낯빛을 지우지 못한 채 서둘러 리무스의 옆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 뛰어온 기색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신 손부채질을 해가며 무언가를 식히려는 듯 열심인 그녀에게 리무스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안함을 표했다.

 

“반장 업무가 많이 바빴어? 미안해 나 때문에, 도와주지도 못하고.”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넌 그냥 몸조리나 잘해. 너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제임스 그 바보 멍청이가―”

 

릴리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제임스의 이름을 올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침나절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크게 흥분한 것 같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리무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릴리는 약간 붉어진 양 볼을 조금 감싸 쥐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손부채질과 함께 연신 붉어진 볼을 감싸는 그 행동을 꽤 오랜 시간동안 관찰하고 나서야, 이유를 알 것 같은 그 모습에 리무스는 드물게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낮고 작게 킥킥거리는 리무스를 가볍게 흘겨본 릴리가 한숨을 쉬었다. 친구의 축 처진 어깨를 슬며시 문지르던 리무스는 귓가에 가까이 고개를 마주하고 속삭였다.

 

“릴리, 입술이 빨개.”

“어머!!”

 

아하하하. 황급하게 입술을 가리며 아까보다 더 빨개지는 릴리를 보고 리무스가 웃었다. 그녀답지 않게 평소보다 아주 조금 크고 아주 조금 쾌활한 웃음소리 탓인지 일순간 그리핀도르의 테이블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덩달아 시선을 받은 릴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리무스의 팔을 붙들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 리무스는 한참을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킥킥거렸다. 언제나 칼 같던 릴리의 이미지 탓이었는지 당황하며 붉게 얼굴을 물들이는 모습이 제법 신선했음을 누구든 느낄수 있었을 것이다. 릴리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바로 앞에 아직 제임스가 연회장에 도착하지 않은 빈자리를 지키며 말없이 주스를 마시고 있는 시리우스가 보였다. 그는 턱을 비스듬히 테이블에 기대어 앉은 채로 방금 있었던 작은 소란을 꽤나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리우스의 시선을 잠시 마주하던 릴리는 먼저 고개를 돌려 리무스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그만 웃어, 리무스. 너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냐.”

“응? 내가 왜?”

“그렇게 시치미 떼니까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긴 하지만…… 너, 블랙하고 지내면서 별 일 없는 것처럼 날 놀릴 거냐고.”

 

이번에는 리무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바로 앞에 앉아있는 시리우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 샌가 그는 이쪽에서 시선을 돌려 곁에 앉은 피터 페티그루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듯 했다. 리무스는 행여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몸을 숙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맙소사, 릴리! 시리우스랑 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뭐? 어느 샌가 서로 이름으로 부르더니 잘만 같이 다니면서, 전교에서 다 인정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니?”

“그런 거 아니야, 그건 그냥 시리우스가 자길 블랙으로 부르지 말라고 해서 덩달아 그냥 그렇게 이름 부르게 된 것일 뿐이야. 진짜야, 릴리.”

“뭘 당황하니? 오늘 아침에 이야기 들었어. 아침에 시리우스가 네 물건이며 가방이며 다 들고 같이 연회장 왔다며.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던데? 조심해야겠더라, 리무스. 너 은근히 질투의 대상인거 모르는 건 아니지?”

“으,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래도…….”

 

리무스는 결국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뭘 그래? 나쁠 것도 없는데. 가볍게 흘려버리는 릴리의 목소리에 리무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째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제임스와 비슷해진다는 소리에 릴리 또한 똑같이 마주보며 서로를 흘겨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왠지 릴리와의 대화 후 식지도 않고 화끈거리는 얼굴 탓에 그녀의 입술을 운운하며 놀렸던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는 얼굴을 감싸 쥐며 어딘가로 숨어버리듯 깊이 고개를 숙이는 리무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삭였다.

 

“굳이 뭔가 말이 오갔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 제임스도 별로 말은 하진 않지만 아마 추궁해도 알아낼게 없을 것 같으니까 입 다물고 있는 것 같아. 그 제임스가.”

“그거야, 사실이 아니니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거잖아. 그건 굳이 추궁하지 않아도…….”

“너는, 아니, 너희는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누가 봐도 공공연한 커플 같아 보인다는 거 조금은 인정하도록 해. 솔직히 서로 모르는 척 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이제 우리도 곧 7학년이고, 학교를 떠나서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텐데 이런 감정 정리 정도는 확실하게 해둬도 괜찮다고 봐. 안 그래?”

 

얼마 남지도 않았다고.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어쩐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들어간 그 목소리에 리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고개를 숙인 상태로 시선만 조금 들어 시리우스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모르겠네. 리무스는 결국 애꿎은 책을 펼쳐 들고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문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애초에 감정이 있었던 걸까.

작년 이 즈음. 아까 무심코 중얼거렸던 그 한마디를 도로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였다. 조금 인정 하자면, 안 생길리가 없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고 존재감을 알리는 감정에 대해 억지로 눌러 앉히며 표하지 않았을 뿐.

그렇다고 해서 있어도 그게 가능 할 리가 없잖아. 결국 씁쓰레한 생각에 절로 쓴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들었다. 시리우스 블랙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 놀라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심한 눈초리로 리무스를 한번 쳐다보고는 도로 자신이 쳐다보던 머글 잡지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시선이 마주했을 뿐임에도 도로 열오르듯 달아 오른 얼굴을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릴리는 그런 리무스를 보고 역전승이라도 한 모양새로 웃는 바람에 결국 리무스는 두 손 모아 싹싹 빌며 릴리를 놀린 것을 사과해야만 했다.

 

“제임스도 애니마구스인데, 굳이 보름날엔 자기 혼자서 너랑 그 오두막에 가고 말이야.”

 

릴리는 궁금한 것에 있어서는 바로바로 꼬집어 내며 의문을 표하는 성격이었다. 그게 정작 자신보다 타인이 더 궁금해 하는 의문거리일 땐 더욱 더 분명히. 리무스는 그동안 늘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던 질문들이 그대로 노출 된 것에 부정을 못하며 우물쭈물 거렸다. 어쩐지 불편한 아침인 것은, 그저 오늘이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보름이기 때문이고, 가슴과 머리가 뜨거운 것도 단순히 그 여파 때문이기를 바라며. 그 뒤로도 한참을, 리무스는 릴리에게서 시달림 아닌 시달림을 받으며 절절 매고 있는 참이었다.

 

“야! 좋은 아침! 오, 릴리! 아까 그렇게 도망가 버려서 섭섭했잖아. 내가 이 아름다운 가을을 맞아 네 아침을 괴롭히는 졸음을 몰아낼 사랑과 애정을 퍼붓는 중이었는데 그렇게 도망치면……”

“제임스 이 빌어먹을 멍청한 자식아!! 조용히 해!!”

 

리무스는 처음으로 제임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감사했다. 지금의 이 난처함을 벗어나게 해 준 그의 푼수 끼를 처음으로 고맙게 여기며 가벼운 한숨을 쉰 그녀는 테이블 위로 손짓 발짓을 다 해가며 사랑다툼을 하는 릴리와 제임스 아래로 시리우스를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재미있는 모양새를 구경한다는 듯 둘의 싸움을 바라보던 시리우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이던 그는 리무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피식 웃어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웃음에 리무스는 곧바로 고개를 내려 바로 앞에 내어져 온 토스트를 우물거렸다.

 

감정 정리라. 만약에 있다면. 화끈거리는 얼굴과 비례하게 괜히 가슴 속에서 조금씩 튀어 오르는 느낌을 애써 가라앉히려고 한 들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과 동시에, 오늘이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보름인 것을 떠올리면서 그 위로 차가운 것이 끼얹어 지는 듯 했다. 만약에 있다 한 들, 달라질 것은 없을 텐데.

언제나 그렇듯 보름달이 뜨는 그날 하루는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즐겁고 쾌활한 아침이 시작 되어도, 밤마다 찾아오는 그 한때의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진실이자 숨길 수 없는 그림자였다.

 


 

***

 

 


리무스는 방금 전 까지 어두컴컴한 복도를 함께한 거대한 검은 개를 마주하며 살짝 웃었다. 평소의 모습을 생각 할 수 없을 ― 굳이 연관성을 따진다면야 윤기가 나는 부드러운 검정색 털과 잿빛의 눈동자를 빼고는 설마 본래의 모습이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가 있을까 싶은 ― 거대한 개는 얌전히 리무스의 발치에 엎드려 앉아 느긋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패드풋. 언젠가 들었던 그 별명을 조용히 말하자 검은 개는 머리를 돌려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잿빛의 눈동자는 올곧게 그녀를 바라보며 그 알맹이가 시리우스 블랙임을 아낌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그 느긋한 고갯짓에서 특유의 나른한 기색이 절로 풍겨 나오는 듯 해 리무스는 황당하면서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지속적으로 이렇게 오래 지켜본 들 변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은 꽤나 다가가기 쉽지 않을 터였다. 자신조차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를, 말도 없이 그 날 이후로 꾸준히 쫓아오는 검은 개의 온기에 리무스는 마음 한편이 묵직해 지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귓가에 돌아오는 답변은 매번 같았다. 신경 쓰지 마.

 

“알 수가 없다, 정말.”

 

중얼거린 그 한마디에 검은 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잘생긴 개가 부리는 애교처럼 보일 것 같아 그만 웃음이 나왔다. 컹! 아마도 불만 어린 코웃음을 쳤을 법한 그 소리에 다시 한 번 웃고야 말았다. 입가를 가리고 고개 숙여 낮게 웃는 그녀의 앞에 결국 개의 것이 아닌 기다란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란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자신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온 시리우스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신나게 웃어?”

“시리우스. 이제 곧 달이 뜰 텐데…….”

“아직 한참 남았어. 한두 번도 아니고.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왔어.”

 

걱정이 서린 리무스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한 시리우스는 곧 낡은 오두막 한편에 아무렇게나 마련 된 침대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걱거리는 메마른 소리가 잠시간의 정적을 깼다. 빛이라고는 지팡이로 겨우 밝혀둔 게 전부인 희끄무레한 시야 너머로, 리무스는 시리우스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봤다. 흠 잡을 것 없이 잘 생긴 얼굴이, 지금 무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해지는 마음 한 구석 탓에 절로 한숨이 밀려 나올 때, 그 한숨과 함께 박자라도 맞춘 듯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아까 아침에 에반스랑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렇게 수다스러운 에반스는 처음 봤다. 너도 그렇고.”

“아…… 그건.”

 

리무스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친구의 프라이버시를 모두 내뱉기엔 조금 껄끄럽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시리우스라면 이미 제임스와 릴리의 열렬한 모닝키스를 직접 본인을 통해 이미 듣고도 남지 않았을까? 고작 그 이유라면 늘 남의 연애에 대해선 심드렁한 시리우스가 웃음의 이유로 납득하기도 어려워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굳이 거짓말을 할 것은 없었지만, 마치 기회라도 되는 듯 리무스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만 굴려 시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벽만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던 시리우스의 눈동자가 의외로 자신을 향한 것을 알고 지레 놀라 숨을 삼킨 리무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음― 별 말은 아니었어. 그냥 릴리가, 너도 제임스도 애니마구스면서, 왜 보름날엔 시리우스 혼자서만 오두막에 방문 하냐고 물어봤던 거였어. 동물 모습인건 한결 같은데 그런 거면 사슴도 늑대 인간에게 피해 입지 않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면서.”


결국 평소에 자신이 궁금해 했던 것을 릴리를 팔아 물어보게 된 것에 잠시간 미안함을 표하며, 그러면서도 리무스는 시리우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게 뭐 웃길만한 일인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시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곤란한 듯 인상을 쓰며 한참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스레 오기와 궁금증이 더해진 리무스는 고개를 조금 빼고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으로 불쑥 내밀어진 시선을 느꼈을까, 조금 당황한 표정의 시리우스가 입을 가리고 무어라 웅얼웅얼 거리는 듯 했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찡그린 미간 아래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마저도 어딘가에 조각한 듯 잘 빠진 얼굴이었다. 새삼 그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시리우스는 빠르게 주문이라도 외듯 내뱉었다.

 

“보여 줄 수 있냐, 그 꼴을.”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하는 리무스의 시선을 차마 마주하진 못하는 듯,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돌려버린 시리우스는 또 다시 한참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고민하는 듯 했다. 평소 툭툭 내뱉는 것과는 다르게 신중한 모습에 리무스는 의아함을 느끼며 슬며시 시리우스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도대체 뭔데 그래? 설마 내가 변신하는 모습 때문이야? 그게 좀 끔찍하긴 하겠지……? 더럽기도 하고― 그리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시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성난 목소리가 공중을 울렸다.

 

“그런 거 말고, 이 멍청아!”

 

멍청이라는 말에 얼핏 인상을 구긴 그녀였지만, 그가 딱히 시비 거는 표정이 아니었기에 굳이 꼬투리를 잡으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붙잡힌 소맷자락을 슬며시 잡아 빼며 시리우스는 무심코 리무스의 손등에 난 상처를 문질렀다. 한 달 전 너무 심하게 자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개의 모습으로 지켜봤던 자신이 낸 상처였다. 다리를 긁어내며 빼낼 생각을 하지 않던 그 손을 시리우스는 자신의 입으로 물고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이빨로 인해 난 상처에 대해 리무스는 그의 탓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마주친 순간 시야에 확연히 다가왔던, 손등에 감긴 붕대를 뒤로 감추며 리무스가 그에게 건넨 아침 인사는 고맙다는 말 뿐이었다. 그 기억을 곱씹으며 시리우스는 말했다.

 

“너, 보름 지나고 나서 그 꼴을 다른 남자한테 보여주고 싶어?”

 

그 꼴? 리무스는 잠시 인상을 쓰며 늘 상 있었던 보름 날 이후의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온몸이 바스라질 것 만 같은 고통이 끝난 뒤에 늘 자신은 쓰러져 있었다. 늑대 인간이 되면 평소보다 커지는 덩치 탓에 별 수 없이 변신 전과 변신 후의 상태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난폭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난 상처들을 내려다 볼 때의 그 암담함과, 맨몸으로 노출된 공기의 흐름에 파르르 소름 돋았던 새벽녘. 시리우스 블랙이 동행한 뒤로는 종종 정신을 차리면 병동에 누워 있는 경우도 많았던 듯 했다. 이따금 그럴 때 마다 혼미한 기억을 더듬다 보면, 흐릿한 시야 속에서 다급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제 망토를 벗어 덮어주던 따뜻한 온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 혼자가 아니게 된 새벽은 아픈 몸을 애써 감싸주듯 온기로 뒤덮어졌다. 가릴 것 없이 무방비 하게 노출된 알몸 위로 덮어주던 온기.

그리고 여기 까지 생각 했을 때 리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알몸! 알몸이라니!

차마 내지르지 못한 비명을 끅끅거리며 경악에 찬 시선으로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는 리무스는 울다가, 화내다가, 멍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원망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리어 그 표정을 마주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건 시리우스였다.

 

“너 설마 이제 와서 자각했다는 건 아니지?”

“내가, 내, 알, 알몸을, 너, 네가,”

“그럼 너 여태까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이상한 부분에서 허술하다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위로 리무스는 한참 동안을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다시 앉아. 언제까지 헐떡거리면서 체력 소모할래? 보름 지나면 엎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시리우스는 도로 그녀의 손목을 끌어 당겨 침대 위로 앉혔다. 새파랗게 질려있던 안색은 그제야 빨갛게 달아올라 한참 동안을 고개 숙이고 들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마,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았어. 그래서 프롱스도 안 데리고 오는 거고. 그런 거 다른 남자들이 보면 좀 곤란하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맙소사, 이럴 수가.”

 

한참을 신이며 누군가를 부르며 자신의 멍청함과 허술함에 자책하던 리무스는 문득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듯 붉어진 눈으로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피곤함과 좌절이 겹쳐 더더욱 어둡게 내리 앉은 그 눈빛에 시리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 짧게 묻는 말에 리무스는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 다른 남자라고 말하면 너도 그 범주에 속하는 거잖아.”

 

문득, 시리우스는 무언가에 한방 얻어맞은 표정을 지어 보인 듯도 했지만, 그것은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일방적으로 얼굴을 힘껏 구기며 다시 혼자서 무어라 웅얼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

 

되묻는 리무스의 말에 시리우스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다시금 그녀의 손등 위에 내려앉은 굵직한 상처를 주시하며 시리우스는 묵묵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남자가 아닌 범주에 속하는 건 어떤 경우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난 그런 경우가 없어봐서 모르겠지만, 릴리 경우엔 제임스라던가……?”

“그렇군. 없어 봐서 모르는 거로군.”

“그건 또 뭐야. 꼭 내가 바보인 것처럼 들리잖아.”

“지금은 바보가 맞는 것 같으니 네 입으로 직접 확인 하지 않아도 돼.”

 

뭐? 바보 취급만큼 불쾌한 것도 없기에 발끈하며 또 다시 일어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시리우스는 가볍게 눌러 앉히는 것으로 굴복시켰다. 애꿎은 화만 내면 도리어 어지러워지는, 제 체력만 소모시킬 성가신 보름날 밤이었다. 괜스레 발끈 한 것 때문에 비틀거리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댄 시리우스는 뜨거운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정도의 범주가 문제 되지 않는 정도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난 나름 암묵적으로 대충 넘어간 줄 알았는데.”

“……그래, 내가 바보에 멍청했던 것 인정할 게. 그냥 넘어갈 것이 따로 있지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한 거. 세상에, 알몸이라니, 어떻게 그런, 너는 그걸 매번 보면서도 모른 척 했다는 거니?!”

“그럼 뭐, 나 너 알몸에 가슴까지 다 봤다, 라고 말하리? 그게 더 웃긴데. 그리고 뒤 늦게 자각한 건 둘째 치고 왜 그랬는지는 생각도 안 해봤어? 진짜?”

“그…… 이, 이, 이,”

 

말문을 찾지 못하고 또 더듬거리는 리무스의 어깨를 또 한 번 눌러 앉힌 시리우스는 문득 무엇이 웃긴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왜 웃어, 난 화내고 있다고! 표정으로 묻는 리무스에게 시리우스는 회색 눈동자를 들어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너도 발끈하는구나 싶어서.”

“이건…….”

 

이건 민망하고 부끄러운 거야,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그것 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리무스는 그저 열이 올라 뜨거운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쉬었다. 남의 알몸을 봐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변화도 없이 말하는 모양새라니, 괘씸함을 넘어서 여자로써 느껴왔던 무언가가 무너질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문득, 언젠가 슬리데린 학생들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 했던 날을 떠올리며 ― 그리고 그날 도와줬던 검은 개가 결국은 시리우스였다는 것도 ― 일반적인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여자를 대상으로 어떤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도 직접 체험하게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 날 이후로 보름 때 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그녀의 뒤를 쫓아, 거부하면 거부 할수록 함께 했던 나날이 길어지면서, 이 시리우스 블랙이라는 동급생에게 느꼈던 각종 불미스럽고 의심스럽고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성격의 모습들 뒤편으로 발견한 의외성이 지금에 와서야 더욱 새롭게 느껴질 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할 일 아닌가. 루모스 하나만으로 오두막 안을 밝히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앞으로는 보름 때 같이 와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에는 우습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뒤늦게 알아차린 창피함을 핑계로!

이미 그동안 봐 왔던 이러 저러한 것들을 마치 없는 일 인양 할 수도 없었다. 거리가 멀어진 들 기억이 희미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리무스는 복잡한 생각들 와중에도 보름 직전에 몸의 고생보다 머릿속 고생이 심하기는 이번이 또 처음이라 생각하며 끊임없는 자기 한탄을 하고 있었다. 시리우스의 말을 완벽하게 부정하기엔 스스로도 억지스러워 보였다.

 

“난 제임스랑 달라서 말이야.”

 

복잡한 머릿속을 파고들고 낮고 평이한 어조의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리우스는 루모스 마법이 걸려있는 자신의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녀석은 무조건 들이대고 보는 성격이지만, 뭐랄까. 난 그랬던 적이 없어. 늘 누가 말을 걸곤 하거든. 사실 누구에게 말을 건다거나 뭐 그러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아. 누가 그럴 일도 없고. 제임스가 특이한 경우지. 아무튼, 그건 다른 이야기지만. 그래서 생각했어. 이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었던 건 부정 안 하지만. 만약 정의 내릴 수 있다면, 사람에겐 친구와 친구 말고도…… 다르게 생각해 볼만한 것들이 생겨난 다는 걸 말이야. 난 처음에 이걸 제임스와 나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게 보려고 했어. 하지만 조금 틀리더군.”

 

서투르면서도 제법 조리 있는 그 말투에 리무스는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지작거리고 있는 지팡이만을 내려다보는 그의 옆얼굴은 옅은 미소조차 떠오르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거만해 보인다거나 싸늘해 보이지도 않았다. 무심한 회색 눈동자에 루모스의 희미한 불빛이 비추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리무스는 어느 샌가 멍하니 시리우스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뭔가 틀리다는 것도, 왜 틀린지도, 전부 깨닫고 나서 그제야 모든 상황들이 이해가 갔어. 솔직히 말하면 이걸 깨달은 건 별로 오래 된 것도 아니지만. 그 이전에 몰랐을 때부터 내가 왜 이딴 짓을 하고 있는가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더라고. 이를테면, 그래, 뭐 그렇게 재밌는 일도 아닌데 매번 여기 이 오두막에 오게 되는 것도 깨닫고 난 후에야 이해가 가게 된 내 행동들 중 하나야. 그런데 사실, 안다고 해서 다는 아녔거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넌 다른 사람이랑 너무 틀리니까.”

 

틀리다는 말이 비단 성격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임을, 리무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늘 등 뒤에서 달빛에 가려져 맴돌고 있는 짙은 어둠에 대해 떠 올리고는, 그녀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다 한 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결국 아침부터 머릿속을 떠돌았던 그 한마디가 그녀를 향한 모든 질문들에 대한 부질없는 답변임을 실감하며 리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시리우스. 난 어차피 이런 것들은 바라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으니까. 보름날 누군가와 같이 보낸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늑대 인간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

“제발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지 좀 마. 내가 그래서 섣불리 나대지 않은 거야, 리무스 루핀.”

 

시리우스는 한숨을 쉬고는 만지작거렸던 지팡이를 침대 아래 구석에 두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마주하며 리무스를 똑바로 쳐다본 채로 아까와는 달리 단호한 표정으로 리무스에게 말했다.

 

“아직도 이게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종류인지 몰라. 제임스에게 이야기 해봤자 시답지 않은 자기 연애 이야기나 할 테고, 넌 일단 에반스가 아니니까. 그래서 난 나름대로 그냥 네 스스로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할지, 답을 찾을 때 까지는 그 날 그대로의 일을 일상처럼 만들어 온 것뿐이야. 네가 불편하지 않게, 네가 익숙해지게. 그리고 결과적으론 명실상 ‘다른 남자’라고 할 수 있을 내 앞에서 매번 알몸을 보였단 사실 조차 까마득하게 망각할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것 같긴 하다만.”

“시리우스, 그건―!”

 

마지막 한마디에 무어라 반박하려던 리무스의 입술을 한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문을 막아버린 그가 비로소 은근 슬쩍 씨익 웃어 보였다. 그 희미한 웃음 한 조각만으로도 분위기가 틀려져 버리는 흠 없는 얼굴에 ― 어딘지 위험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안도하게 되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살거리듯 중얼거리는 시리우스의 목소리는 마치 한 밤중 달콤한 최면을 걸 듯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 걸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아까 다른 남자의 범위에 내가 들어간 걸 깨달았을 땐 좀 한방 먹은 느낌이었지. 나름대로 주변에 눈치도 주고 해서 굳이 말하진 않아도 다들 아는 눈치긴 했던 것 같았다만. 정작 본인이 이렇게 까지 무관심이라니. 아니면 무관심 한 척 한 거겠지? 난 아마 후자일 거라 생각한다. 그 정도로 네가 멍청하다고 생각되진 않으니까. 기왕 이런 식으로 길이 튼 거라면 별 수 없으니까, 그럼 물을게. 너, 네가 다음부터는 여기 같이 안 왔으면 좋겠어?”

 

갑작스런 질문에 리무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언제나 불안하고 조마조마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눈을 뜬 아침 누군가 어깨를 쓸어주며 함께 해주었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이란 것이 얼마나 크던가. 아마도 자신이 늑대 인간이 된 이후로는 거의 없었던 그 기억 속에서, 낯선 경험에서 처음 찾아온 두려움이 머지않아 고통뿐일 하룻밤에 한 가닥의 희열이 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대상이 누구도 아닌 시리우스 단 한사람뿐이었다는 것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시리우스는 별안간 이마를 맞대었다.

 

“단순히 내가 알몸을 봐 왔기 때문에?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닌 그저 타인이라서? 이를 테면 다른 남자?”

“그건…… 시리우스, 단순히 그런 문제로 치부하기에 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건 잘 알잖아…….”

“나한텐 단순한데. 개로 변신할 수 있는 나는 그저 보름 날 늑대 인간과 함께 뒹구는 한 마리 짐승일 뿐이고, 네가 늑대 인간이라서 나한테 피해 온 게 있어? 지난 1년간은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기준에선.”

“시리우스, 뭘 말하려는 거야. 조금 있으면 보름달도 뜰 건데.”

“정말 모르겠다는 거야, 아니면 그냥 모른 척 하려는 거야? 내 참.”

 

시리우스는 혀를 차면서도 그녀와 맞댄 자신의 이마를 떼지 않았다. 시선조차 돌릴 수 없는 포즈에 리무스는 어쩔 줄 모르고 두 눈 만을 굴리며 바싹바싹 타오르는 입술을 핥았다. 어차피 이러고 있으면, 난 내일도 네 알몸을 보게 될 걸? 그 말엔 이마를 마주한 채로 또다시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열기를 느꼈는지 나지막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마주한 이마를 타고 들려왔다.

 

“네 논리를 듣고 나니 답이 생기겠다 싶어서. 그럼 그냥 내가 다른 남자가 아닌 거면 되는 거잖아.”

“시리우스, 도대체 넌 심각하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거야? 매번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농담을…….”

“아니, 미안하지만 빌어먹게 진지해. 이해 못하겠다면, 뭐 에반스가 말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그 녀석들 둘이 단순히 키스에서 끝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아마도 제임스가 릴리의 가…….”

“시리우스, 말하지 마 이 바보야!!”

“바보라고? 사실을 이야기 한 건데. 아무튼 릴리에게 제임스는 더 이상 다른 남자의 범위에 들어가진 않으니까 어느 정도는 감안하고 있는 부분 아니겠어? 네 논리에도 좀 맞는 것 같은데?”

 

너도 사실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태도는 그렇지 못한 모습에 리무스는 기가 막혀 입도 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점점 시리우스가 말하고자 하는 본 뜻을 알아차려가는 것에 기쁜 것과 두려운 것 두 가지가 동시에 부딪혀 왔다. 시리우스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로 모른 척 해도 되는 걸까. 리무스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저 빨리 보름달이 뜨기를.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은 지금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과 이마를 뿌리치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건만,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지우고 싶어도 지우지 못했던 답 없는 부분들을, 시리우스는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절박하게 묻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어느 한편으로 늘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해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부정 당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하며, 리무스는 맨 처음 릴리가 자신이 늑대 인간이었던 것을 느꼈던 암담함과, 시리우스 블랙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을 때의 까마득했던 참담함을 동시에 떠올렸다.

 

“리무스. 모른 척 하지 마. 표정에 다 떠오른다.”

“시리우스.”

“아무튼, 난 내 할 말이 이게 다는 아니라서, 근데 사실 이 이상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어. 시간은 없고, 내 표현할 건 다 해야겠고. 나는 문제를 피해가는 것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아. 그건 내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어서. 네가 걱정하고 고민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이든 간에. 난 그런 건 별로 상관 안 할 거야. 고민해 봤자 놔두면 넌 혼자서 별 시답지 않은 생각만 할 거고, 내 생각에 그건 점성술 수업만큼 지루하고 바보 같은 일이거든.”

 

시리우스가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도 다를 바 없이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를 말 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주 보는 얼굴이 어둠속에서도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만 같았다. 리무스는 그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알았다. 뿌리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뭐, 그냥 이렇게 받아 들여.”

 

낮은 숨소리가 조금 삼켜진 듯도 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을 리무스는 믿을 수 없었다. 상쾌한 샤워 코롱의 냄새와 그가 자주 쓰는 민트샴푸향이 한데 뒤섞여 가깝게 느껴졌다 싶을 때,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자신의 입술에 맞닿았다. 방금 전까지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이 그녀의 목과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순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의 팔은 그렇게 감아오는 온기와 숨소리에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이러면 안 되잖아? 울고 싶을 정도로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의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깊게 삼키듯 제 숨을 넘기는 시리우스의 숨결이었다. 경직되어 커진 두 눈동자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거짓말처럼 스르르 감겼다. 그와 동시에 마주한 입술 사이로 시리우스의 웃음이 들린 듯도 했다. 가두어 둘 것처럼 감싸 안은 품 안에서 리무스는 오늘 하루 처음으로 마음 속 깊숙하게 내려앉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곧 보름달이 뜨고 자신이 변한다 하더라도 눈을 뜨면 어제와 같이 함께하고 있을 온기란 것에 감사했다. 시리우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런 그녀의 입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겹쳐오는 시리우스의 입술에 숨이 벅차올랐다.

 

결국 리무스는 팔을 들어 시리우스의 목을 감싸 안았다. 곧 만월이 떠오른다 한 들, 그 다음날 시리우스가 자신의 알몸을 본다 한 들,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늘 옥죄어 왔던 괴로운 시간을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은 단순한 하룻밤으로 바꿔버린, 존재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법에 감사했다. 시리우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 마법에 감사하며, 리무스는 떨어진 그 입술을 놓칠 새라 그의 뺨을 감싸고 다가갔다. 힘껏 끌어당긴 온기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작고도 부질없는 소망이 마치 거짓이 아닌 양, 감싸 쥔 것 보다 더 큰 온기가 도리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숨소리와 웃음이 섞였다.

 

괜찮아.

 

그 한마디에 리무스는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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