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천비가虎天飛歌
: 하늘을 가르고 날으신 호랑이를 노래하다





 왕은 이전 날 사내아이의 처분을 끝낸 후, 눈에 띄지 않도록 따로 불러왔다는 누이와 대면했다. 오래 기다렸을 터인데 아이의 기색은 무던하고, 궁에서 옷가지를 새로 내어주기라도 했는지 거친 손에 비해 단정한 차림새였다. 영문도 모른 채 왕과 독대하는 것에 겁을 집어먹었을 법도 하건만. 꾹 참고 있는 입매가 제법 옹골찼다.

 

“아우가 나가는 것은 보았느냐.”

“예, 보았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리되었는지는 알고 있느냐.”

“모르옵니다.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도 어느 한 사람도 알려주지 않았사옵니다.”

“하여 화가 났어?”

“….”

“솔직하니 좋구나. 허면 나도 솔직해져야겠지. 네 아우는 역모에 가담한 죄인이니라.”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핏기가 더욱이 가셨다. 언젠가부터 기이하게 여겼다는 말은 울음이 아니라 화에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집을 지키려 하셨습니다. 유달리 추웠던 겨울에, 지금은 양모이신 선생께서 함께 떠나자 했을 때. 이듬해 아우가 아파서 옆 마을 의원에게 갔어야 했을 때도 집은 꼭 지켜야 한다고 하셨어요.”

 

 아이는 울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작은 집이었으나, 제 어미에게는 하나뿐인 보금자리였음에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렸다고 했다. 그랬기에 아우를 빼앗은 양반 나리가 떠나라 명하던 때, 당장 죽으라는 뜻인 줄 알았단다. 허나 어미는 죽지 않았다. 집도, 아들도 내어주겠으니 첫째는 건들지 않도록 약조하곤 떠났다. 선생께서 와주실 터이니 그의 양녀로 입적하고 나면 이 모든 일을 잊으라는 말을 남기고서.

 

“헌데 너는 잊지 못하였고.”

“전하께오서 백성들을 굽어살핀 이후로는 여인의 목숨이 파리처럼 사라지는 일이 어려워졌으니 혹 손을 쓴 것은 아닐까….”

 

 입술을 짓씹는 낯이 예사롭지 않다. 명석하고 눈치도 빠르며, 제 감정을 숨기려 하는 단단한 성정까지. 그래, 피는 못 속인다고 하였던가. 왕은 공연히 드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네 어미는 내 반드시 찾아주겠다. 이 땅에 머무르고 있지 않다면, 이국異國을 뒤져서라도 만나게 해주마.”

“참이십니까?”

“참이고 말고. 대신 너에게 내릴 명이 있어.”

 

 일어나 다가선 왕께서 손을 내밀자 눈에 띄게 당황하던 아이가 어렵사리 작은 손을 포갰다.

 

“궐에 들어오거라. 네 아우가 가질 뻔하였던 모든 것을 너에게 주마.”

“…예?”

“너는 이제 나의 유일한 혈육으로서, 마땅한 자리에 앉을 것이며 이에 합당한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여인이 다스려야 하는 이 나라의 군주로서 과인의 뒤를 이으라. 이것이 너에게 내리는 명이다.”

 

 파리하게 떨리던 몸이 이내 명을 받들었다.

 

“내 마음이 급하여, 네 성명도 묻지 않았구나.”

“연이라 합니다.”

“네 어머니의 성정을 가늠하건대, 고울 연을 쓰진 않았을 테지.”

“예. 연꽃 연을 씁니다.”

“음,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지고. 하늘을 다스릴 몸이니 청명할 연을 쓰도록 하면 어떠하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공석이던 왕녀의 자리에 연이 오르시게 되었으니. 선왕의 바람대로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시대를 열어, 훗날 대왕청연大王靑曣이라 불리게 된다.




제5장
호랑이, 안식을 찾다



 혼삿길이며 벼슬길까지 막히자, 살길이 막막하게 된 수많은 사내가 책봉식 이후 궐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관료들도 죄 여인으로 채워져 왕은커녕 왕녀의 백년가약 맺어 부군이 되어줄 인물 하나 내놓지 않고 있음인데 어찌 홀로 두냐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으나, 그 말인즉슨 불평불만이었다. 이 밖에도 규변민란이 변고 없이 지나가자 이를 표방한 크고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때마다 법도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뿐 조정은 별달리 반응하지 아니했다. 사내도 자식인데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냐는 말이 잠시 떠돌았다 사라졌다.

 죄를 묻기 위하야 오곡백과를 수확하기 위한 타작 소리만큼이나 목이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잔풍우혈殘風雨血 수살收殺이다. 기록에는 이 시기에만 죽어난 사내들이 일백여 명이 넘었다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족히 세 배에 달한다 전해진다.



 왕께오서 입으시는 곤룡포의 붉은 빛은 모두 사내의 피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마저 퍼져나가고, 달거리보다 더욱더 짙은 피내음이 찬 이슬에 방울방울 맺혔다 사라지던 찰나. 그는 서찰 한 통을 받았다. 대비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언제나 곁에 있음을 잊지 마소서.


 왕은 그것을 오래도록 붙들었다. 연이 궁에 들어온 날부터 다시 육고기가 올라오는 수라도 물리시고, 그 길로 산책을 하시었다. 내금위장에게서 상감이나 지밀의 만류에도 도통 들어가실 생각이 없으시단 소식을 전해 들은 영숙이 하던 업무도 제치고 달려갔다.


“무어. 내가 이상하다고 서둘러 오라든?”


 영숙은 별다른 답 없이 그저 언제나처럼 반보 뒤에서 그를 따랐다.


“영숙아.”

“예.”

“너는 억울하지도 않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네가 훌륭한 왕이 될 재목이라 생각한다. 야망도 있고, 성품도 좋으니.”


 왕이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농이 아니야. 너의 뚝심과 영민함, 그리고 큰 그릇을 보며 내 늘상 배우고 있음을 너도 알지. 하물며 검술은 나보다 낫고. 헌데도 어찌해서 불평 한마디 없어.”

“참으로 물으시니, 참으로 답을 올리겠습니다.”

“내가 항상 거짓부렁만 한 것처럼 말하지 말래도.”

“저는 전하만큼 낡아빠진 이치를 뒤엎겠다, 할 수 있는 기백이 없습니다. 전하를 뵙기까지 세상에 대한 분노만 있었지요. 저 같은 놈을 주워다 사람답게 설 수 있도록 하신 분이 전하십니다. 무엇이 억울하겠사옵니까.”


 영숙의 답엔 거짓일랑 추호도 없었다. 꿈에서라도 욕심낸 적 없거니와, 저의 자리는 그의 뒤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하를 뒤엎는 이의 곁에 있음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과분한 영광이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려 더없이 정진하였으며 그만큼 자신 있었다. 검술과 충의 그리고 진심까지도.


“네가 나의 혈육이라 해도 그랬을까.”

“그런 말 마옵소서.”

“왜?”

“…피곤하게 살기 싫습니다.”

“이제야 솔직하구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어찌 그리 살겠다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너도 있고, 휘도 있고. 본영과 어마마마도 계시지. 많은 이들이 곁에 있어 가능한 것이다. 이 몸은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난 왕이지 않으냐.”

“…하오니 전하, 바라건대 부디 옥체 보전하소서.”


 평생토록 감히 욕심내는 것은 그뿐이었다. 부디 길고 긴 삶을 살아 이 땅의 섧은 죽음이 없어지는 날까지 계셔주시기를. 그날까지 함께 있을 터이니. 오랜 친우의 진정 앞에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 고하에 막론하고 날뛰던 사내들의 움직임이 잠잠해지자 왕은 연의 양모인 주하澍碬를 궐로 불러들였다. 주하는 선생으로 지낸 세월이 길어 명석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왕은 주하와 담소를 나눌 때면 날이 새는 것도 모를 만큼 즐겁게 지냈다. 양모 역시 왕녀의 어미이니 그에 걸맞은 벼슬과 호號를 주는 것이 법도였으나, 친모의 생사도 불명한 와중에 그리할 수는 없다 하여 왕은 특별히 왕가의 스승으로서 머물도록 했다.

 허나 왕녀의 친모를 찾는 일은 진척이 없었다. 국경과 맞닿은 마을에 사람을 심어 두었음에도 소용없는 듯했다. 이같은 사실을 부러 알리진 아니하였으나, 왕녀 역시 교육을 받던 와중 간혹 집중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며 영의정이 염려를 비추었다.

 대체 어디로 어떻게 보냈기에. 반역 죄인들을 죽여 없애기 전에 먼저 발고토록 해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분노에 눈이 멀어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나. 그토록 살생치 아니하길 바라던 어마마마의 염원까지 깨트리고 지금껏 휘두른 칼은 앙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릇된 판단으로 기어이 무고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건 아닐지. 언제나처럼 따라붙던 의문과 풀리지 않는 자책. 그리고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고, 답 역시 바라지 못하는 기나긴 고민이 또다시 되풀이되었다.



 날이 차가워질수록 왕의 용태容態 역시 나날이 나빠졌다. 뚜렷한 병세病勢도 없었으나 태의가 직접 나서 탕약을 올렸다. 이어 영의정이 상감과 지밀, 제조상궁과 수라간 최고상궁까지 불러 거듭 신경 쓸 것을 당부할 지경이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칠정울결七情鬱結로 인한 옅은 고뿔이라는 내의원에 따라 탕약을 자시고도, 정사를 돌보겠다며 편전에 앉으신 왕의 앞에 주하가 나섰다.


“무슨 말씀이오.”

“무엇을 하시는 겐지 여쭙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옥체도 돌보지 않으시면서, 나라를 돌본다고 하시렵니까.”

“정무政務라도 처리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렇지요.”

“전하.”


 그제야 그가 얼굴을 들었다. 깊은 수심愁心이 여실히 보였다. 비록 곁에 있었던 날은 짧으나 이토록 살이 내린 용안은 마주하기 어려웠다.


“왕은 혼자의 몸이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압니다.”

“헌데 어찌 곁은 살펴주시질 않으시는지요.”


 내금위장은 수라간 최고상궁에게 쓴소리를 들었고, 태의내국太醫內局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지밀 역시 낯빛이 말이 아니었으며 제조상궁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궁인의 입술이 메말랐다. 궐은 주군에 대한 염려로 내쉬는 한숨에, 폭삭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승께서는,”

“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주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묻지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이를 알았다. 그리운 이란 하나뿐이었기에.


“정인情人이시지요.”

“예. 그립고 말고요. 눈만 감으면 선연해지는 탓에 밤마다 쉬이 잠들지 못합니다.”


 어찌 아셨을까. 그토록 숨기고 숨겨왔던 마음이었건만. 왕녀 저하께서도 여태 모르시는데. 진중히 아뢰는 말에 왕의 낯빛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도 했다.


“오랜 지기이기도 합니다. 그이가 혼인을 올리기도 전부터 막역한 지간이었지요. 천애 고아였던 소인에게는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연이 오기까지는.”

“어찌 견디십니까.”

“소인이 여태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연유가 됩니까.”

“예. 살아있으니 견딥니다. 오래전, 약조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날한시에 함께 죽지 못하더라도 혹여 소식 없이 한쪽이 먼저 세상을 뜬다면, 꼭 다른 이에게 알려주자고.”


 죽었다면 필히 알게 될 것이다. 꿈길에서든, 어디서든. 주하는 여태껏 그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었다. 바람마저도 곱디고왔다. 단풍은 혈흔이 아니었고, 하늘은 높았다. 그러니 버텨야 했다. 기다리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살아가고 있다면, 그러하다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스러지지 않는 한은.”


 그러니 부디 자책하시지 말아달라 간청 올리는 말에도, 왕은 답이 없었다.



 이튿날, 정무에도 마음 쓰지 말고 잠시라도 쉬시라 거듭 당부하는 태의의 당부를 왕이 따르시었다. 궐에서 조금 떨어진 별서別墅에 기거하게 된 것이다. 부연초扶連哨와도 멀지 않은 그곳은 유달리 물이 깨끗하여 온천욕을 즐기기 위해 선왕께서도 자주 머물렀으나, 그는 용상龍床에 오르신 후 처음 찾은 참이었다. 운치가 있고 주변이 고요한 터라 휴양으로는 손색없었다.

 별서에 머무는 동안에도 조현朝見은 거르지 아니하시어 도승지와 대독하며 계본啓本을 받잡기는 하였으나, 그 외의 주요한 정무는 영의정이 대신토록 했다. 왕의 일상이 전에 없이 고요하였다. 이 시기가 그의 통치기간 중 가장 평온한 나날이었다. 느지막한 수침과 맑은 공기. 궐에서 벗어난 이후 왕께서는 기력을 서서히 되찾았다. 좋아하던 사냥도 다시 즐길 정도였다. 뺨에는 혈색이 돌아왔고 용맹한 천안은 더욱이 깊어져, 모두가 크게 안도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산과 들의 색이 짙어져 갔다. 붉게 타오르는 모습은 마치 노을과도 닮아있었다. 왕은 널찍한 창을 열어두시고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는가 하면, 두툼한 털신을 신고서 소리가 날 때까지 산책을 즐기시곤 하였다. 여전히 생각이 많이 보이는 눈매였으나 누구도 심중을 물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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