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봤다. 제대 후 복학하면서 처음 봤다. 그 사람은 올해 복학한 선배라고 했다. 만개한 벚꽃 나무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눈 아래 접힌 주름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나는 그런 다음에 바닥에 떨어져 짓뭉개진 목련 꽃잎을 보았다. 진짜 봄이었다.


내성적이고 사람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게 나였다. 고개를 숙인 탓에 내려온 안경이 거슬려 나는 코를 찡긋거렸다. 안경을 코에 걸친 채로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으면 덜 떨어져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는데 가족 중 누군가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오예, 나 조별 과제 김태형이랑 같이 한다.”

“아 좋겠다. 다 해주겠네.”


외부 시선에 무신경했지만 작은 소리까지 잘 주워듣는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나의 이야기다. 좋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별 볼 일 없고 못난 그런 흔한 아웃사이더. 교우 관계는 미련 없다. 어차피 대학은 공부하려고 오는 곳 아닌가. 나는 책을 덮었다.


외모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어 늘 머리가 덥수룩 자란 채였다. 거기에 안경까지. 말이 없다 보니 외모로 들었던 최악의 험담은 ‘음침하다’였다. 뭐라든 관심이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 마음에 없는 말하며 사교성 짙은 행동을 하는 것이 험담을 듣는 것보다 더 싫었다. 정말로.




“내가 뽑아줄까?”

“아…. 에, 아니에요.”


자판기에서 마주쳤다. 청재킷을 입고 있다. 아직 계절이 바뀌기 전인가. 분명 꽃은 다 지고 이제 나무들이 초록 잎으로 무성했다. 그 선배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꽃향기는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그 사람의 냄새였다. 옆에서 은은하게 넘어오는 향기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인다. 자판기 아래에서 캔 음료를 꺼내는 손을 본다.


“그냥 마셔. 강의실에서 너만 나랑 같은 거 마시더라.”

“괜찮은데.”

“얼마 안 해. 다음에 밥 한번 먹자.”


건네주는 캔 음료를 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타인에게 가버리는 그 사람을 보다 나는 나중에야 내가 또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에 쥔 캔 음료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판기에서 갓 나와 시원했지만 나는 알았다. 미지근해져도 캔을 딸 일이 없을 것이란 걸.


그 선배의 이름은 김석진이다. 올해 봄, 복학하는 학기에 처음 봤다. 나와는 거리가 먼 범주의 사람이었다. 항상 웃고 있고 곁에선 웃음소리와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후드 주머니에 선배가 준 캔 음료가 묵직하게 들이찼다. 무게만큼 주머니가 보기 싫게 쳐진다. 나는 괜히 자판기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 앞머리를 털어 정리해본다.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면 순수히 거짓이다. 학기 초 혹여나 같은 수업을 들을까 곁눈질로 강의실을 훑었었다. 발견하면 나는 바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후에 종종 이쪽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나는 꼭 그 선배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다시 눈동자를 굴려 보면 그 사람은 어김없이 전공서를 보고 있었다. 불시에 고개를 드는 바람에 나는 남 모르게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곤 했다. 몇 번이나 그랬다. 잔상으로 남은 모습을 칠판에 투영한다. 그 사람과 어울리는 창가에 앉아서 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진부했다. 진부했지만 꼭 어울렸다.


그 선배 옆에 서 있는 나를 떠올려봤다. 그러니 고개가 더욱 쳐졌다. 반짝인다기보단 빛났다. 같은 학교, 같은 과에 같은 강의를 듣고 있었지만 내가 한 차원은 더 별 볼 일 없었다.


혼자 밥을 먹으러 카페테리아에 가도 혹여나 마주치지 않을까 식당을 눈으로 훑는다. 돌이켜보면 하루가 한심했다. 등굣길부터 그 선배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종종 그런 나를 자각하고 나면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런 사람이 나를 의식하고 있을 리가 없지. 나는 나를 잘 안다. 내가 어떤 식으로 타인에게 각인되는지조차도. 그래서 나는 빠르게 인정하기로 한다. 아마도 나는….


“안녕. 윤아랑 전공 과제 같이 하지?”

“예? 아, 네….”

“잘 부탁한다. 윤아가 게으름 부리면 바로 나한테 말해야 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선배는 웃었다. 나는 그 미소에 의미를 오랫동안 두었다. 굳이 내게 찾아와서 말 걸 주제인가를 깊이 고민했다. 나에게 말 걸고 싶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의미를 둔다. 의미를 찾는 신분의 학생인데 다른 것에 의미를 두며 가슴 뛰어한다. 나와 함께 과제를 하게 된 여자애를 떠올렸다. 어떤 모습의 사람이었는지. 선배와는 어떤 사이인지.


그날 밤부터 나는 입고 나갈 옷을 고민했다. 평상적인 등교다. 고만고만하고 몇 벌 없는 무채색 옷장을 보고 한숨이 나왔지만 그나마 밝은 색의 옷을 입고 가기로 한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억지로 자려고 누워서도 그 밤엔 심장이 엄청 뛰었다. 속절없는 설렘에 밤을 허우적 선잠으로 지샐 것이 빤했다. 원인을 명확히 말 할 수가 없다. 그냥 그 자체가 설레 속을 여러 번 털었다. 이어폰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하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요함과 같은 수준이었다.


후드 하나를 입기보다 면티에 가디건을 선택했다. 버스에서 내내 유리창을 보고 앞머리를 털었다. 앞머리가 눈을 찔러 이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시답잖은 이유로 잠을 설쳤으면서도 기민했다. 심장이 계속 뛰었고 입술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무엇을 기대했었던 걸까?


하루종일 한 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허탈했다. 그 사람의 의도가 아니지만 내게 허탈감을 준 사람을 또다시 떠올린다.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배 안쪽에서부터 그 사람의 미소가 퍼진다. 차라리 잘됐어. 오늘은 아니었어. 그러다 이상한 용기가 생긴다. 말을 걸어볼까 하는. 하지만 무슨 말을? 접점이 없었다. 다들 그 선배 곁에 어떤 이유로 있는 건지, 어떻게 다가간 건지 생각하게 된다. 어떤 기준이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납득하고 만다. 아마 나는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 할 것이란 것을.


혼자 있는 방 안에서 한숨이 나왔지만 크게 내뱉지는 못 했다. 그저,

빛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런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가 지났다. 바라만 보는 시간이 밤낮을 바꿔가며 지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떤 모습이어야 선배에게 다가가도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외모를 가꾸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어 그게 가장 괴로웠다. 신경 써서 티셔츠 한 장을 사본 일이 없어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복장에 관심이 생겼다. 눈을 덮는 머리카락도 잘라낸다. 동네 이발소 아저씨가 이제야 훤하다며 웃었는데 나는 그저 어색해 말없이 뒤통수만 쓰다듬었다.


“저, 선배.”


초여름이었다. 나는 바보같이 날씨를 생각하지 못 하고 옷을 샀다. 결국 더워서 가디건을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아, 어? 태형이?”


조금 변한 모습을 알아채는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똑같이 자판기 앞에서였다. 사실 말 걸 이유가 없어서 선배가 자판기 앞에 오기를 전부터 기다렸다. 대답도 전에 나는 서둘러 동전부터 자판기에 밀어 넣는다. 단순한 말 한마디 건네는데도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몇 밤 전부터 떠올렸다.


“이번엔 제가 사드릴게요.”

“아,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같은 거 드실 거죠?”


거절 당할까 봐 서둘러 음료를 뽑는다. 가슴이 꽉 졸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죠, 그렇죠. 선배와 눈 한 번을 못 마주치면서 손에 음료를 건넨다. 그 단정한 손 끝을 보고 나는 최대한 손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 끝을 오므렸다. 당신에 비하면 손톱까지 못나 보여서. 거의 반 강제로 음료를 받아든 선배가 말이 없다. 나는 심장이 엄청나게 뛰는 걸 느낀다.


“진짜 괜찮은데….”


달가워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제야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커피를 본다. 음절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콕콕 박혔다. 얼마나 기다렸던 상황이었는지는 까맣게 잊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그새 선배 곁으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뭐야, 김태형이 왜?” 따위의 말이 들린다. 이제야 불편하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의 목소리 한 올 내 귀에 닿지 않는다. 삽시간 나는 오늘 말 걸었던 것을 후회한다.


고작 오늘 말 한마디 먼저 걸어봤을 뿐인데 존재가 더 하찮아진다. 나는 왜 이따위 모습일까. 나의 며칠은 당신에게 스쳐 가는 찰나다. 아마도 기억조차 되지 않을. 과장된 행동으로 사교적으로 구는 것을 싫어했다. 모순적이다. 이제야 알았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그득해도 사교적으로 구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을 안 뒤로 처음 알았다.


나는 아직도 선배가 줬던 캔 음료를 따지 못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었어도 봄이었다. 영영 가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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