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과 같이 들어보세요!




가위바위

- 사랑을 되찾기 위한 한 판



"지민이형, 설마 저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시겠죠? 그럼 섭섭한데."

" 어, 저하고 구면이신가 보네요? 제가 지금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얼굴이 정확하게 안 보여서 누구신지 정확하게 몰라뵙네요, 죄송합니다. "



사실, 정국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남자가 바로 옛 애인,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박지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갑게 엘리베이터로 뛰어간 거일지도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을 하다가 만난 지민은 그때 그 모습과 화려하지 않고 단아했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이제 스물 아홉이 되어서 조금 더 성숙해진 느낌도 엿볼 수 있었다.  정국은 오랜만에 지민을 보았을 때, 마치 첫 만남처럼 가슴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2년 가까이 사귀고 말도 없이 지민에게 작별을 고했던 자신이란 사실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혹시라도 나를 기억해줄까, 이 희미한 소망 하나에 기대어 정국은 지민에게 이야기를 건네보았다. 하지만 지민에게서 돌아온 건 차갑디 차가운 무관심, 외면이었다. 지민이 짓는 특유의 반가운 웃음이 아니라 당황해하면서 '구면'이였냐는 반문을 들었던 정국은 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이런 반응을 원한게 아니였지만, 지민은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야했다. 연락도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나서 갑자기 만난 옛 남자친구를 과연 누가 환영할 수 있겠는가. 지민의 반응에 정국은 난감하면서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민은 정국에게 멋쩍게 인사를 하면서도 한 번도 정국의 눈을, 아니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딴청을 피워댔다. 마치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이. 정국은 지민의 표정이 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민이 만약 자신의 곁을 떠났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조금이라도 원망한다면 사과할 생각이 있었을텐데, 지금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이 보는 지민을 보면서 오히려 정국은 마음 속 한 편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지민의 얼굴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왜?'라고 생각하면서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그리고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었는데 왜 나라고 그런 사정이 없었겠냐고.


"오랜만에 봤는데, 형의 그 때 그 버릇 아직도 여전하네요. 우리 싸울 때 꼭 형은 내 얼굴 안 보고 화내면서 말했는 거도." 






#JM



사실 나는 돌이켜봐도 크게 할 말은 없었다. 정국에게 딱히 착하고 좋은 연인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많은 일을 겪어서 이제는 멘탈이 튼튼하다고 자랑하던 정국이가 유독 내가 장난스럽게 '헤어지자'고 말하면 약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툭하면 나를 외롭게 만들고 서운하게 만드는 정국에게 헤어지겠다, 도망쳐도 되냐며 투정처럼 이야기했던 게 몇 번이었을까. 

그 때마다 정국은 내게 어디 한 번 도망쳐보라면서, 햇병아리 잡으러 가야겠다고 웃으면서 나의 장난스러운 화를 제압했었다. 그 말을 던질 때면, 난 자취방이나 기숙사에서 그에게 잡혀 하루 밤낮을 그의 침대에서 보내야했다. 내 말때문에 삐진 정국이를 달래주려고 할 때마다, 몇 번의 관계를 맺고 침대에서 토끼처럼 큰 녀석을 달래주었던 게 몇 날 몇 일인지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들었다. 그 때마다 정국이는 내게 울먹거리면서 자기 마음을 토로하고 서운하다는 감정을 표출했었다.


'형, 왜 그런 말 자꾸 해요? 나 서운하게....'


나보다 몸집도 크고 우락부락한 녀석이었지만, 마음 만큼은 여리다 못해 물러 터진 구석도 있었다. 나는 내가 힘들 때면 이런 감정을 이용해서 그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이용하기도 했었다. 헤어지자고 말하면 마지 못해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캐묻고, 관계를 맺었던 그 때. 외로웠던 나 박지민의 삶에 천사같은 전정국이 찾아와서 외로움을 메꿔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한 때는 내가 정국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게 아니라, 외로워서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제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정국이가 내 삶의 깊숙한 부분으로 들어오고 함께 미래를 꿈꾸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정국이가 마법처럼 내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못된 말을 한 내게 벌을 내리겠다는 것처럼 한 순간에 그는 사라졌고, 폰 번호와 카톡 아이디도 삭제되면서 그와 나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끊겨버렸었다. 그가 내 곁에서 사라진 후에야 진심으로 정국이를 사랑했는데 제대로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던 내 자신을 탓해야했다. 자책은 3년을 이어도 끊임이 없었지만, 이제는 지쳐만 갔다.




정국이는 비상계단 쪽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아파트 단지 정원으로 가자고 나에게 손짓했다. 어차피 여기서는 무엇을 이야기해도 조용한 복도에 소음만 낼 거 같다는 생각에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서 그러겠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정국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오후에 호석이와 점심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산책만 하고 잠들려했는데 오는 날이 장 날이라고 큰 판이 벌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다시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잠시의 순간, 우리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고 나는 나대로 정국이는 정국이대로 그저 앞을 쳐다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반질반질해서 멀뚱히 서있는 우리 둘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그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우리 동을 나와서 몇 분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싶다가 옆을 보니 아파트 정원 사이에 있는 한적한 테라스가 보였다. 정국이는 그 중 원탁같은 곳에 앉아서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해요, 여기 안 앉고."

"네, 앉을게요."



정국이는 내게 꽤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2년을 사귀면서 싸운 적도 꽤 많았는데, 싸울 때면 나는 늘 정국이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정국이의 눈을 쳐다보고 말하면 웬지 내 진심이 드러날 거 같아서, 자존심에 쳐다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숨기려했지만 드러났다보다. 정국이가 눈 이야기를 하면서 살짝 비꼴 때, 들켰구나 생각도 했다. 결국 들켜버렸지만 굳이 3년이 지난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는 궁금하지 않다. 드라마를 보면 옛 연인들이 만나서 구구절절 왜 자신이 떠났는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딱 그 상황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 추운 날에 정국이를 기다리고, 정국이에게 전화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던 그 때가 떠오를 때가 있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미치도록 외로울 때면, 침대에 누워서 배게에 얼굴을 묻고 혼자 끙끙 울면서 힘들어했던 게 몇 번이었을까. 사랑한다고 속삭여놓고 말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에게 내가 이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해야할까. 지금은 never, 전혀 없었다.



"형,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어요? 얼굴보니까 잘 지냈던 거 같네요."

"그렇게 보이는 군요."

"왜 저한테 반말 안 써요? 이제 완전히 저 잊기로 작정한 거에요?"

"죄송하지만, 말이 지나치시네요."



그저 반말을 안 쓰고 친근하게 대하지 않는다며 표정을 찡그리던 정국은 아직도 애 같았다. 이제 스물 일곱일텐데 그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서운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떡하지, 나는 이제 그렇게 해줄 마음이 많이 없는데 말이야. 내가 너를 잊든 말든 이제는 상관없는 게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같은 아파트의 같은 동, 라인에서 만나는지는 궁금했지만, 딱히 물어볼 마음도 없었다. 2018년 그 겨울에 전정국은 나 박지민의 마음 속에서 눈처럼 녹아버린 존재였으니까.



"전정국씨, 말 나왔으니까 말해볼게요. 지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이런 걸 보고 '피차일반'이라고 말하는 거겠죠? 왜 그 쪽이 저한테 그런 표정을 짓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요."

"형, 그게....."

"아니, 그 쪽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이제와서 우리가 이야기를 해봐야 어떤 이야기를 하겠어요? 3년이나 지났는데, 우리 이제는 이웃주민으로 편하게 지내고 싶기도 한데 정국씨도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미안하지만, 싫어요."



 아니 이제 와서 싫다고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 도대체 무슨 의도로 싫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 예전에 형이 저한테 말했었죠? 사람에게 말 못할 비밀을 한 가지씩 간직하고 있다고. 그 비밀은 소중한 사람한테만 말해주기도 힘든데, 저한테만은 이야기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이제는 제 차례에요."

"왜, 그걸 내가....?"

"형, 제가 그랬죠? 형 계속 제 앞에서 도망치려한다고 말하면, 제가 어떻게 형을 대할지 모르겠다구요. 제가 잘못한 거도 알고 있고, 그 때 이후로 계속 후회만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형 이제 만났는데 저한테 한 번은 기회를 줘야하는 거 아니에요? 왜 혼자만 생각하고 저를 판단해요? 내가 나쁜 놈인 건 나도 아는데,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형이 알면......"

 "내가 그걸 알아서 지금 달라질 수 있는게 뭘까, 정국아?"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와버렸다. 우리가 이 상황을 알아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옛날이었다면 YES라고 답하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NO와 So-so 그 중간 지점 어딘가라고 생각한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제 내 생활이 가능하고, 아이들과 바삐 지내다보면 정국이와의 추억은 그저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정국이를 그나마 평온하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이정도면 된 거야.



"말 못 하겠으면, 이제 일어날게. 나 오후에 약속 있어서 너하고는 이제 이렇게 말 못하겠다. 그리고 앞으로 신경쓰이니까 아는 척도 안 했으면 좋겠네. 난 간다!"

"박지민!"



정국이의 진심, 그 놈의 사정 따위 이제 내가 알 바가 전혀 아니었다. 이제 더는 들어주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투벅투벅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국이 말대로 사람에게 누구나 사정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하필 연인에게 그 사정조차 말할 수 없었을까. 그건 이제와서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그의 고약한 핑계인게 아닐까. 그리고 정국이 말대로 만약 정국이가 나한테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3년 동안 나에게 '사랑'을 준 사람에게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마음을 느끼고, 상처를 받고 아파하면서 내가 그에게 저질렀던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덕에 누군가를 사랑하기 보다 내 일과 꿈에 집중하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뒤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겨진 정국이의 표정과 생각까지는 읽어줄 여유가 아직은 내 마음 속에 없었다. 

오랜만에 정국을 만나고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퍼붓고 돌아오니 정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집에 들어오니 엄마도 잠이 들었는지 불이 꺼져있었다. 괜히 엄마가 깰까봐 조심히 불 꺼진 방에 들어와 침대 한 켠에 바로 누웠고 얼마 안되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신기하게도 정국이가 나를 떠난 이후부터 매일 밤 계속 꾸던 그 '꿈'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기분좋게 빠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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