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아가씨’를 모티브로 작성된 글입니다.




봄은 금방 오지 않고 있었다. 북쪽 산은 칼바람으로 온통 덮였고 눈 또한 소복한것이 아니라 살결을 베어갈 것 처럼 세차게 내렸다. 겨울은 너무 길었고 찬열의 어머니의 안색은 점차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미칠 것 같은 겨울이었다.


“돈은 언제 갚을겐가.”


일직선으로 꽂는 질문에 찬열은 깜짝놀라 우물쭈물거렸다. 윤씨는 으이구 한숨을 쉬며 찬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사람아. 어머니 살리는게 촉박하긴 허더만, 나도 보증할 것이 있어야지.”


맞는 말이었다. 그는 찬열의 옷가지를 위아래로 훑었다. 참으로 기구한 옷차림이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양복 하나도 못맞추는 찬열이 불쌍해보이기까지 했다.


“으구.. 일단 돈 먼저 싸개 받게나. 뭐, 방법이 있겠지. 자네 인품 보고 눈 감는걸세.”

“감사해요.”

“혹여라도 돈 벌 생각이 떠오르면, 여기로. 응? 전화 하게나.”


윤씨는 다 튼 찬열의 손에 순백의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명함엔 창씨개명을 한 윤씨의 이름과 환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윤씨가 있었다. 찬열은 옷 주머니 속에 명함을 꾸겨 넣었다.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서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 점심 드실 시간이네...”


찬열은 바삐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리가 낀 나무들과 건물들을 스쳐 지나가 얼어버린 논들을 지나 땔감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니, 엄마 또한 아픈 입을 움직여 환하게 웃었다.


“아들 왔어?”

“왜 깨어 있었어. 자라구 아랫목에 불도 지펴놨구만.”

“아들 안오니까...”

“입이나 벌려보셔.”


얼어붙은 손엔 시장에서 막 사온 국밥이 어른거리고 있었고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왜 또 이런대.”

“아들이 먹어야 엄마 맘이 편하지.”

“어이구 나는 시장에서 한 사발 진하게 말아서 먹었어요.”


찬열은 고집스레 엄마의 입주변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결국 못 이긴 채 뜨뜻한 국물을 삼키는 엄마는 미소를 지었다. 먹는 모습에 기쁜 찬열 또한 아이같은 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숨죽인 것 처럼 고요한 달빛이 비추는 밤이었다. 찬열은 밖으로 나와 달빛을 받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하수를 쏟아내는 남색빛 하늘을 보며 한숨을 크게 쉬니 입김이 크게 나왔다. 저 멀리서, 친구 길택이 손을 흔들며 오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시장으로 나와술집에 들어갔다. 맛있는 내음 폴폴, 술냄새에 난동부리는 냄새까지 참으로 사람 사는 냄새같아서 둘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알콜은 쓰디 썼다.


“... 영화는 잘 사냐?”


영화는 길택의 딸내미였다.  지난 해 이쯤 이었던가, 영화의 대학등록금이 없어 길택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었던 때가 있었다. 길택은 빨개진 얼굴로 끄덕거렸다.


“으응... 잘 산다. 대학가서 열심히 공부 하는갑더라. 기숙사가서 얼굴도 못본다.”

“다행이네 그래도.”


둘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길택은 찬열을 응시했다. 


“너는.”

“뭐가?”

“너는 연전 합격했다며.”


당황한 기색의 찬열이 콜록거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찬열의 표정이 놀라고 의아하자 길택은 찬열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으이구!!! 이 화상아. 너 예전 집으로 우편 왔더라. 전화 해보니까 하나는 너 일하는 곳으로 갔다던데.”

“받았어...”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찬열은 문학재능이 뛰어났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시인이라 했다. 옛 부터 허름한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 쓰기를 좋아했다. 그 버릇이 어른 될 때까지 뒤꽁무니를 쫒아와 수준에 맞지도 않은 연전에 시험을 보게 했던 것이다.


“합격하면 뭐하니. 형편이 안되는데.”


엄마는 생사를 허덕이고 계시는 뿐 아니라아들은 불효자식마냥 연전에 합격해서 집안을 꼬이게 만드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돈은 필요한데 숨 쉴구멍은 보이지가 않는다. 

길택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찬열은 취한 몸을 비틀거리며 가로등 아래를 걸었다. 공기는 이렇게 맑은데 인생은 꼬일대로 꼬인 기분이었다. 담배를 하나 꺼내려 점퍼 주머니를 뒤지는데 꾸겨진 명함이 굴러떨어졌다. 윤씨의 명함이었다.


‘돈 벌 생각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게.’


급하게 몸을 돌려 다시 시장으로 뛰어나갔다. 시야엔 번쩍이는 호텔이 보였다. 호텔의 공중 전화에서 번호를 누르는데 왠지모를 긴장감에 수화기에서 들리는 신호음에 집중하게 되었다. 자존심 다 굽히고.


“여보세요?”


침이 꿀꺽 넘어갔다.

성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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