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이카와 토오루 7/20 생일 축하해!

- 하이큐 42권 내용이 날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을지 모른다, 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생각했다. 하늘로 발돋움하는 다리, 유연하게 꺾인 허리, 총알보다 빠른 팔, 그리고 굉음을 내며 체육관 바닥에 꽂힌 공. 딱딱한 배구공을 바닥에 꽂아버린 장본인은 목표로 삼았던 지점에서 빗나갔다며 머리를 감싸고 앓는 소리를 냈지만 카게야마는 이미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 이름을 가진 남자만이 대단하다고 깨닫고 나서는 그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샌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시선 끝에는 늘 그가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에 어폐는 없을 터였다.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이잖아.’

 

두 살 위의 선배는 그렇게 말하곤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매한가지지만 그 때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이루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도 난이도가 높았다. 게다가 수학은 답이라도 정해져 있지, 오이카와를 쏙 빼닮은 문제는 답도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루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데, 그에게서 나온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이, 그리고 또 이어진 그 말이, 어떤 감정을 수반했는지. 카게야마는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한 가지만이 확실했다. 그 날 이후 카게야마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7월의 어느 밤에는 잠들지 못했다.

 

 


 극야

w. 비에

 

 

 

가판대에 비스듬히 걸린 청회색의 머플러를 산 것은 상당한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한다. 그 날은 마치 잔잔하던 수면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둥글게 울린 날과 같았다. 겨우 물방울 하나 떨어졌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 특유의 번들거리는 바닥을 밟았다. 신발 바닥과 체육관 바닥이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는 사람에 따라 미간을 찌푸릴 수도 있었지만 오이카와가 거기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간은 그랬다. 예민하긴 했어도 무언가를 크게 거슬려한 적은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인생 최초로 거슬리는 존재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눈앞에는 커다란 벽이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 등 뒤에서는 천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자신을 바짝 쫓아온다. 그것은 이미 쫓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압박이었다. 그 자체로.

머리 위에 커다란 벽이 없었어도 자신은 필연적으로 카게야마를 거슬려했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천재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재라는 말에 고집을 버린 뒤에도 그는 카게야마를 마음에 들일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물방울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물방울. 너무 커다래서 ‘겨우’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미안해지는 물방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다란 것이 수면 위로 떨어지는데 울림이 없을 리 없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힘없이 휩쓸렸다. 충동이라는 변명을 더하면서.

 

“야, 나 간다.”

“응. 내일 봐, 이와쨩.”

 

이와이즈미가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오이카와의 팔을 툭 쳤다. 시내의 가판대에서 머플러를 산 뒤로 오이카와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것을 캐묻지 않았다. 누군가 ‘왜?’라고 물어본다면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얽히면 귀찮으니까.’ 하고 답하겠지만 그런 건 반 쯤 농담이었다. 사실은 오이카와가 어련히 알아서 말해줄 것을 믿고 있어서였다. 낯간지러우니 본인은 물론이고 타인에게도 평생 말은 하지 않겠지만.

오이카와는 저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목에 두른 머플러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청회색의 머플러. 가판대에 놓인 것을 본 순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손 안에 들어온 머플러를 그대로 목에 둘렀다. 이와이즈미가 옆에 서서 웬일로 어두운 색깔을 샀느냐며 말을 얹었다. 오이카와는 ‘그냥’이라는 말로 정리해버렸다.

그냥이라는 말은 편리했다. 복잡스러워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뭉뚱그려 정리하기에 그보다 편한 말은 없었다. 애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때도 있는 법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고 이후 줄곧 그럴 예정이었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은 언제든 찾아온다.

감정도 같은 맥락이었다. 오이카와는 지금 제 안에서 타 죽어가는 그리움을 ‘그냥’이라는 말로 갈무리했다. 문득, 네가 보고 싶어 졌다.

카게야마를 만나기 위해 달리는 일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밀어내고 떨쳐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그 눈이 자신을 향하지 않으면 그리워 미치겠다니. 오이카와는 집으로 가던 길에서 벗어나 내렸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낮이 짧은 계절이라 시간은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카게야마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오이카와는 정류장에서 내려 또 달렸다. 카게야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하나 밖에 없고 그의 하교 시간까지 어림잡아 20분은 남았으므로 지금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이카와가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 멀리서 카게야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발견하곤 어깨에 크로스로 멘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코트 안에서는 건방진 소리도 척척 해내더니, 뭘 그렇게 긴장하는지 오이카와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카게야마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고 앞으로 향했다. 대륙의 패왕霸王이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게야마는 가방끈을 다시 고쳐 쥐면서도 오이카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여간 지고는 못 살지.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씨.”

“이제 집 가는 거야?”

“네? 아, 네.”

 

그의 목소리에서 그럴 리 없는 상냥함이 묻어나왔다. 카게야마는 낯선 상냥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전혀 상냥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얼마나 잘 안다고 그의 평소를 논하는지 웃기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동안 카게야마가 봐오던 것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오이카와가 이곳에 있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 목적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마치 그가 전쟁을 하러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선전포고던가. 어느 쪽이 되었든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거짓말이었다. 문득 얼굴이 보고 싶어 찾아왔는데 할 말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는 거짓말과 요령에 능숙한 사람이었고 상대는 카게야마였다. 1 그램의 개연성만 집어넣어도 ‘아, 그러십니까.’ 하고 넘어갈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 다음 달에 아르헨티나로 가.”

“… 네? 그럼 배구는….”

“너는 여기가 아니면 배구 못 하는 줄 알아? 아르헨티나에서 계속 할 거야.”

 

카게야마는 커다란 물방울이었고, 결국엔 홍수였다. 오이카와가 견고하게 쌓고 정비해온 제방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제방 안쪽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홍수였다. 본래 있었던 것의 흔적조차 가져가버리곤 다시 예측도 못한 상황에 찾아온다. 자연 재해 같았다. 예측할 수 없는 점이나, 무지막지한 점이.

 

“오이카와 씨.”

“왜.”

“… 계속, 쫓아갈 겁니다.”

“네가 내 스토커야? 뭐, 아르헨티나까지 쫓아오게?”

 

그런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이죽거렸다. 카게야마가 몸을 경직시키고 입술을 삐죽였다. 불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카게야마가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어쩜 저렇게 정직한지. 오이카와는 예측이고 뭐고, 카게야마를 홍수에 빗댄 것을 취소했다. 저런 정직한 멍청이, 몇 번이라도 예측해서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와의 거리를 좁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청회색의 눈동자와 마주한다. 시린 겨울을 닮은 눈동자였다. 카게야마의 생일이 겨울임을 알았을 때 오이카와는 ‘참 너답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를 캔버스에 옮겨 담는다면 거기엔 분명 겨울의 풍경이 담길 것이다. 바다 위로 쌓인 눈과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 한 그루. 자신이 화가였다면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을 한 캔버스 위로 그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무지막지한 점은 홍수에 빗댈 만했지만 예측 할 수 없는 재해는 아니다. 카게야마와 헤어진 뒤 망연하게 거리를 걷던 오이카와는 목에 두르고 있던 청회색의 머플러를 풀었다. 머플러가 오이카와의 손 안에서 스르르 흘렀다.

고개를 들어 완전히 깜깜해진 하늘을 보았다. 카게야마는 밤이었다. 언제든지 찾아오는 밤. 예측할 필요도 없이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밤이었다. 무수하고도 영원한 밤이었다. 찬바람이 오이카와의 휑한 목을 쓸고 지나갔다. 역시 오이카와는 겨울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 밤도, 싫지 않았다.

 

 



 



망했다. 이게 뭐지. 진짜 뭐지.

오이카와는 사형을 선고 받은 죄수 마냥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꿈자리가 사나워도 이렇게 사나울 수가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한 지 올해로 6년 째였다. 5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꿈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당첨될 일 없는 복권을 손에 쥐고 백만 엔의 당첨금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쓸 데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꿈에 재수 없는 후배가 좀 나왔다고 해서 동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 얼마 만에 받은 휴가인데 겨우 꿈자리 좀 사납다고 하루의 시작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이카와는 목 부근이 늘어난 티셔츠의 구겨진 부분을 대충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휴가의 첫 날이라도 스트레칭을 빠뜨릴 수는 없어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두 팔도 천장을 향해 길게 올린 뒤 발끝과 손끝이 만나도록 상체를 숙였다. 동시에 숨을 내뱉고, 상체를 올리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숙이려던 찰나, 오이카와의 눈에 엉망진창이 된 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이 자는 사이에 폭격이라도 맞았는지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500ml짜리 생수통은 군데군데 굴러다니고 있었고, 분명 옷장에 잘 개어두었던 이불이란 이불은 전부 꺼내져 있었다.

얌전하게 꺼내져 있으면 그가 헛웃음 짓지는 않았으리라. 구겨진 것은 둘째 치고 하나는 돌돌 말려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햄버거라도 만들 작정이었는지 요와 요 사이에 끼어져 있었다. 물론 그것도 구석에 방치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자신이 자는 사이에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이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어떻게 모를 수 있었나. 오이카와는 평생을 살면서 자신이 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민하다고 하면 너무 예민해서 문제인 적은 있었지만 절대 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쯤 되면 스스로를 돌아 볼 때가 된 것 같다. 마침 곧 반 오십 번째 생일을 맞을 예정이었다. 요즘은 백세시대라던데 평균 수명의 ¼을 맞이한 시점에서 인생을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오이카와는 스트레칭이고 나발이고 방 꼬라지부터 정리해야겠다 싶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뺐다. 그리고 몇 걸음을 내딛는데 침대 아래에서 딱딱한 원통형의 무언가가 데구르르, 굴러왔다.

 

“이건 또 왜 여기 있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셔버린 빈 맥주 캔이 오이카와의 발끝에서 교통사고를 냈다. 오이카와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다 어젯밤 신나서 목구멍 안으로 술을 콸콸 쏟아낸 탓이었다. 아무리 신이 났어도 그렇지 술에 있어서는 자제력이 있는 편이었는데. 역시 생일을 맞아 인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맥주 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캔이 찌그러졌다.

불현 듯 방을 정리하기에 앞서 마음부터 진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가 두꺼운 요에 걸려 더는 어쩌지도 못하게 된 생수통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 어젯밤 맥주를 쏟아 부었던 것처럼 물을 흡입했다.

 

“토오루! 일어났냐아아아!”

“커흑…, 컥……!”

 

너는 또 왜 여기 있는데. 오이카와의 동공이 갈 곳을 잃은 나그네처럼 방황한다. 너무 놀라 물이 기도로 들어갔는지 숨이 턱 막혀왔다. 오이카와는 콜록거리며 호흡부터 원래 페이스대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콜록거리느라 엉거주춤하게 숙였던 자세에서 그대로 얼굴만 들어 눈앞의 남자를 인식했다.

남자, 다니엘 디아스는 두 손으로 오이카와의 멍한 얼굴을 잡아들었다. 오이카와보다 얼굴 한 개 반 정도의 큰 키를 가진 그는 그대로 오이카와를 들어 올릴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행이다. 일어났네. 오늘 밤 비행기라더니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쩌나 했어.”

“너는 왜 우리 집에 있는 건데.”

“네 생일 축하해준다고 부어라 마셔라 했는데 아침 대접도 안 하려고? 매정해, 토오루.”

 

다니엘이 오이카와의 부은 볼을 놓아주고 웃었다.

 

“내 생일까지 5일은 남았는데.”

“그 땐 토오루가 일본에 있잖아.”

 

오이카와가 거울을 내려놓고 다니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를 따라 거실로 나오니 식탁 위에 먹음직스러운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오이카와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오이카와의 시선을 눈치 챈 다니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과장해서, 오이카와는 왈칵 나오는 눈물을 그 널찍한 가슴에 닦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포크를 들고 계란 프라이부터 찍었다. 완숙에 가깝게 조리된 노른자가 흰 자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이카와는 계란 프라이를 우물우물 씹어 먹으면서 다른 접시에 담긴 샐러드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방울토마토를 콕 찍어 입에 넣는다. 입 안에서 터지는 과즙이 혀 위와 아래로 스며들었다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다니엘은 오이카와를 식탁 앞에 앉혀두고 다 먹은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제 몫의 접시에만 정신이 팔려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접시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이 집에서 다니엘 이외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간 모양이었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젯밤 오이카와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모였던 동료들일 게 뻔했다.

 

“다른 애들은 훈련 있어서 먼저 갔어.”

“너는 왜 남았는데? 나 아침 차려주려고?”

“그런 것도 있고. 아주 중대한 임무를 맡았거든.”

 

싱크대 안으로 접시를 겹겹이 쌓은 다니엘이 뒤돌아 웃었다. 그 웃음이 꽤나 의미심장해서 오이카와는 방울토마토와 함께 긴장을 삼켰다. 뭐가 되었든 밥 먹고 있을 때는 건드리지 않아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럴 시간이 없는지 오이카와의 앞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던데. 오이카와는 모 만화에서 본 듯한 기억이 있는 대사를 중얼거렸다. 다니엘은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불도저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직구를 던질 때가 있다는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그의 그런 점이 싫지 않았지만 어째 오늘 이후로 싫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대한 임무, 뭐.”

“잠깐 기다려봐.”

 

다니엘은 식탁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에서 정사각형 모양의 색지를 몇 장 꺼냈다.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사인을 받을 때 쓰는 그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색지와 다니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설마 자신에게 사인을 부탁하는 게 중대한 임무인가 싶어 조금 우쭐해졌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걱정해서 손해 봤네. 오이카와는 다시 분주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하지만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다니엘의 이어진 말에 입을 떡, 벌렸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사인! 우리가 색지까지 준비해뒀다. 받아다 줄 거지?”

 

오이카와는 자신이 로봇이라면 지금 당장 고장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장을 일으키다 못해 군데군데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강제 종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방금 전까지 우적거렸던 샐러드가 쓴 맛으로 변해 혀 위를 간질였다.

왜 다니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다니엘이 어떻게 토비오를 알고 있지? 둘이 친분이 있었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연관된 물음표를 하나씩 늘려나갔다. 정확하게는 물음표가 멋대로 증식한 모양에 가까웠다.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리는 것은 오이카와의 의지가 아니었으므로.

 

“나 지금 좀 정리가 안 되는데. 중대한 임무라는 게… 카게야마 사인을 받는 거라고? 그것도 내가?”

“카게야마 선수랑 친하다며.”

“뭐? 대체 누구랑 누가….”

 

누구랑 누구긴. 너랑 카게야마 선수지. 다니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색지를 집어 팔랑거렸다. 눈앞에 하얀 종이가 흔들리자 오이카와는 약이 올랐다. 이 자식 설마 나랑 토비오 사이를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사실은 나를 아주 미워했던 거 아냐? 오이카와는 종이가 팔랑거림을 멈추고 다시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는 것 같다. ‘나와 토비오 사이’라니. 자신과 토비오가 대체 무슨 사이기에. 언제부터 어떠어떠한 사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친밀했다고. 오이카와는 시선을 내리깔면서 고개도 함께 숙였다. 다니엘이 오이카와의 눈앞에 커다란 손을 휙휙 휘저었다.

 

“너 기억 안 나? 네가 그랬잖아. 어제.”

“… 하나도 기억 안 나. 내가 토비오랑 친하다고 그랬다고? 내가?”

“그래. 그러면서 일본은 친한 사람들끼리는 성이 아니라 이름을 부른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토비오, 토비오, 아주 시끄러웠어.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듣고 보니 얼핏 그런 것도 같았다. 술자리에서 카게야마의 이름이 나왔고, 그의 올림픽 영상을 다 같이 보던 중 화장실에서 돌아온 오이카와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는 척을 했다.

 

‘어? 토비오잖아.’

 

오이카와는 갈기갈기 찢어진 필름이 이어 붙여지는 것을 느꼈다. 퍼즐로 치면, 한 순간 삐끗함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린 조각들이 시간을 역행해 원래의 자리로 척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을 끔찍하다 여기며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내가 또 술을 먹으면 쿠소카와 토오루로 개명을 하리라.

 

 



 



이번 시즌 MVP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더 정확하게는 곧 있을 오이카와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큰 제목이 오이카와의 생일 축하였고, 부제가 MVP 축하 자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MVP가 오이카와였으므로 누구도 축하파티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지에 관심 두지 않았다.

구단은 팀에 값진 승리를 가져다 준 오이카와에게 이례적으로 열흘의 휴가를 주었다. 오이카와의 생일을 포함한 기간이었다. 특별한 날을 타지에서 보내지 말고 고향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재미있게 보내라는 배려이자 일종의 포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제게 좋은 것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넙죽 손을 내밀었다.

동료들은 오이카와의 활약을 쏟아내며 그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친밀함의 표현이었고 네가 있어 다행이라는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친밀함과 감사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문제는 그 형태가 어깨동무에서 술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어깨동무는 몇 백 번이라도 어울려줄 수 있었지만 술은 달랐다. 오이카와는 술을 잘 마시는 체질도 아니었으므로 거절할 줄 아는 요령에도, 내재된 자제력에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은 생일과 겹치게 받은 휴가에 신이 났는지 조절도 하지 않고 마셔버렸다. 주는 대로 마시는 게 얼마나 후회를 부르는 일인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랬다.

사건은 열두 명으로 시작한 인원이 오이카와를 포함해 네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오이카와는 술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달라붙은 사람처럼 맥주를 들이켠 탓에 화장실이 급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점원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점원이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던 것도 같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부축하려고 하는 점원에게 손을 휙휙 저으며 늠름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은 막 화장실에서 돌아온 오이카와가 아니었다. 파티의 주역이 컴백하셨다는데 반응도 안 해줘? 오이카와는 괜히 심술을 부리며 세 명의 시선이 모이는 곳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엔 카게야마가 있었다.

 

‘어? 토비오잖아.’

 

핸드폰에 카게야마의 경기 영상을 띄운 사람은 다니엘이었다. 몇 년 전 브라질에서 열린 올림픽 영상이었다. 누군가가 카게야마가 활약하는 부분만을 편집했는지 영상이 재생되는 내내 카게야마의 얼굴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이카와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에 카게야마의 얼굴 밖에 보이지 않는데 다른 이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고 배구에 미친놈들이 있는 곳에서 함부로 카게야마와 아는 사이임을 어필해서는 안 됐다.

다니엘을 포함한 세 명의 시선이 오이카와에게 쏠렸다. 오이카와는 딸꾹질을 하며 하이에나 같은 동료들의 눈동자와 컨택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술기운도 같이 올라와 위기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오이카와 씨. 술 마셨습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의 핸드폰 너머에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갑자기 정신이 말똥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이미 가게도 아니었고 시끄럽게 굴던 동료들은 곯아떨어져 바닥을 점령하고 있었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나는 게 한 움큼도 없었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고 화면 위로 드러난 이름을 확인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 네 글자가 선명하게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씨?]’

‘어. 어어…. 어.’

 

오이카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정신을 차리기 직전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면 속 통화시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행히 이제 겨우 1분이 지난 참이었다. 그렇다면 별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마도. 오이카와는 제발 자신의 자제력이 마지막 힘을 짜냈기를 바랐다.

 

‘[오이카와 씨. 하실 말이 있어서 전화하신 거 아닙니까?]’

 

건너편에서 카게야마가 물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전화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먼저 물은 것이었다. 5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가끔 인터넷에서 카게야마의 경기 영상을 본 적은 있었지만 거기에 그의 목소리는 녹음 되지 않았고, 한 번도 통화를 해본 적도 없었으니 5년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차분해졌다. 하긴, 그도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거기에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속에서부터 울컥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누군가 왜 그러느냐 묻는다면 후배의 성장이 대견스러워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유연하게 넘길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이 새벽에 깨어있는 사람은 오이카와 뿐이었고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오이카와에게 그렇게 물을 사람은 없었다.

아르헨티나로 오기 전 카게야마를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청회색의 머플러를 샀던 날이었다. ‘그런 날도 있는 법이지.’ 하고 넘기기에는 오이카와가 그 밤 흘려보냈던 그리움이 너무 무거웠다. 아직 제대로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흘러넘치는 그리움은 손 안에서 흐르는 머플러와는 달랐다.

청회색의 머플러를 손가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가둔 채 긴 밤을 걸었던 날, 오이카와는 입 안에 퍼진 비린 맛을 삼키고 또 삼켰다.

오이카와는 인정해야만 했다. 언젠가 ‘그냥’이라는 말로 퉁 쳐버린 그것을, ‘그냥’이라는 말로 갈무리해버린 그것을, 오이카와는 삼켜야만 했다. 그 무거운 그리움도 꿀꺽꿀꺽 삼켰는데, 사랑이라고 삼키지 못할까. 오이카와는 건너편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할 말은 없고. 갑자기, 보고 싶어서. 그냥. 그래서.’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는 도망치 듯 통화를 끝내버렸다. 덕분에 카게야마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아니, 대답이랄 것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질문을 한 게 아니었으므로.

 

“하하하… 아하하하……. 나는 망했다.”

 

오이카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체크인과 각종 심사를 마치고 탑승만을 위해 게이트 앞 의자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웬 잘생긴 동양인 남성의 고개가 단번에 꺾이자 흠칫 놀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아우라가 상당히 칙칙했다.

이제야 다 설명이 되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사나웠던 이유나 오이카와의 안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감정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설마 이게 사랑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애초에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건 아닌지 망설여졌다.

살면서 몇 번이나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 중에는 오이카와가 고백을 받은 경우도, 그가 먼저 고백을 해서 사귄 경우도 있었다. 물론 오이카와는 연애를 하는 내내 그녀들을 좋아했다. 끝이 어찌 되었든 분명한 것은 오이카와는 연애를 하는 동안 상대를 꽤 좋아했다.

하지만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오이카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난 연애는 너무 어렸고, 아르헨티나로 오고 나서는 한 번도 연애다운 연애를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험으로 사랑을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검색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아니, 사랑은 원래 우스운 거 아닐까. 오이카와는 몽글몽글 영역을 넓혀가는 생각들을 손으로 휘휘 저어 흐트러뜨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카게야마를 사랑한다고 인정하면 뭐, 달라지는 게 있나?

 

“왜 없어…. 많아도 너무 많지. 멍청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진다. 아니, 무서워진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니까 꺼려진다고 하자. 오이카와는 푹 숙인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등 뒤로 칙칙한 아우라가 먹구름처럼 짙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머리 위로 두꺼운 빗줄기를 쏟아 내렸다. 그 빗줄기에 이 어처구니없는 감정도 함께 쓸려가기를 바랐다. 신이 있다면 그런 작은 소원 하나쯤은 들어줬으면 싶다.

그 때 오이카와의 발끝에 에코백 하나가 치였다. 캐리어에 담지 못한 물건을 담은 가방이었다. 다니엘에게서 받은 색지도 그 안에 있었다. 오늘 아침 오이카와는 색지를 밀어내며 거절할 타이밍을 쟀다. 애들도 아니고 카게야마의 사인이 그들에게 왜 필요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절할 구실도 찾을 겸 넌지시 이유를 물었더니 다니엘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우리가 가지려고 이러는 거겠어? 물론 난 가질 거지만. 우리 애도 그렇지만, 쟤네 조카들이 요새 배구에 빠졌잖아.’

 

5년 전 속도위반으로 급하게 결혼식을 치른 다니엘에게는 올해로 네 살이 되는 딸이 있었다. 오이카와가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할 무렵부터 봐 온 아이는 전직 수영 선수였던 어머니와 현직 배구 선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포츠에 관심도 많고 재능도 있었다. 그런 아이가 최근에 빠진 게 배구란다. 다니엘은 딸이 해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며 오이카와의 등을 팡팡 때렸다.

결국 거절의 ‘ㄱ’ 자도 꺼내지 못하고 사인 색지를 받아든 오이카와는 그것을 구겨지지 않게 파일에 넣어 에코백 속에 넣어야 했다. 오이카와는 발치에 치인 에코백을 끌어안았다. 탑승까지 앞으로 10분이 채 남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고 일본은 나중에 가면 되지 않을까. 그동안의 생일도 아르헨티나에서 보내왔는데 올해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Airlane항공 Z02편, 일본 센다이 행을 이용하시는 승객 분들께서는…,”

 

그러나 오이카와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끌어안고 있던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여권을 꺼냈다.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영어 순으로 나온 안내방송을 따라 지정된 탑승구에서 여권을 내밀었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오이카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울상을 지었다. 겨우 다섯 장뿐인 색지가 고철덩어리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진다.

설마 색지에 정말로 고철이라도 매달아 놓은 것은 아닐까 싶어 가방을 열고 슬쩍 얼굴을 밀어 넣었다. 당연하게도 그럴 리는 없었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나야 한다는 운명만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에코백 속에서 핸드폰을 발견한 김에 화면을 켜고 오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두 개국을 경유해야하기 때문에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꼬박 비행기 안에서 보내야 했으므로 미리 연락을 해줘야 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의 대화방을 터치해 글자를 입력했다.

 

[17일 23시 30분 도착 예정]

[이와쨩 나 생일인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 ´•̥ו̥` )]

 

일본은 출근시간이라 바쁠 텐데 이와이즈미에게서는 생각보다 빠르게 답장이 왔다. 오이카와가 막 핸드폰을 비행기모드로 해놓기 전이었다. 오이카와는 친구로부터의 답장에서 감격과 실망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네가 갖고 싶다던 신발 이미 사놨으니까 먹고 떨어져]

 

 



 



예정과 달리 도착이 30분이나 지연된 오이카와가 캐리어를 찾아 입국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7월 18일 00시 7분. 오이카와는 핸드폰 화면에 비친 숫자를 읽고는 바로 잠금을 풀었다. 와이파이를 연결하자 밀린 라인이 화면에 알림을 띄웠다. 전부 이와이즈미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오이카와는 지잉─ 지잉─ 하는 진동을 느끼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이제 나온 거냐?]

“응. 지금 밖으로 나갈 건데, 이와쨩 어디… 아. 찾았다.”

 

오이카와는 택시 승강장 근처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발견했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떠나 있던 5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친구여서인지 반가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후배로부터 몇 번 이와이즈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 법이다. 오랜 인연의 소꿉친구는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영상통화마저 거부했으니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는 것은 5년 만이었다.

하지만 낯간지럽다니 뭐니 해도 이와이즈미 역시 5년 만에 얼굴을 본 친구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오이카와의 등짝을 소리 나게 때리며 활짝 웃었다.

 

“미안~ 이와쨩. 많이 기다렸어? 그냥 근처에 호텔 잡고 대충 묵는다니까.”

“야. 여기 호텔들 1박에 얼마 하는지는 아냐? 너 부자야?”

“에이. 그래도 거지는 아니거든. 이와쨩 주차요금 낼 정도는 있어.”

“됐어. 여기 한 시간까지는 무료다. 이제 15분 남았어. 가자.”

 

어? 진짜? 오이카와가 조금 전의 이와이즈미를 따라 활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멀지 않은 주차장에서 익숙한 모양의 자동차를 발견했다. 이와이즈미가 차의 잠금을 풀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트렁크를 여는 버튼을 누르니 트렁크가 끼기긱─ 괴기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오이카와가 흠칫 놀라며 캐리어를 끌고 차 뒤쪽으로 향했다.

 

“이와쨩, 차 이거… 새로 샀어?”

“물려받은 거다. 아버지 거. 새로 하나 장만하신다고 쓰던 건 나 줬어. 이래봬도 쓸 만해.”

“… 이거 이제 단종된 거 아냐?”

“…… 적어도 여기 오는 2시간 동안은 사고 난 적 없어.”

“2시간 전에 처음 몰아본 거야…?”

 

오이카와의 불안한 동공이 이와이즈미의 뒤통수에 닿았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오이카와의 캐리어를 번쩍 들어 트렁크 안으로 던져버렸다. 오이카와가 난리 법석을 떨며 그러다 차 무너지면 어쩌느냐 절규를 해댔다. 흡사 뭉크의 절규와도 같은 모습에 이와이즈는 결국 오이카와의 멱살을 잡고야 말았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엄청난 힘에 의해 조수석으로 패대기 처졌다.

뒤이어 이와이즈미도 헛기침을 하며 운전석 시트에 등을 기댔다.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걸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는데, 부릉─ 하고 애매한 소리만 날 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은 척 웃고 있는 이와이즈미의 옆에서 오이카와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오이카와의 미래는 두 가지였다. 여기서 친구와 오붓하게 하룻밤을 보내든가 출발부터 불안한 차로 지옥의 레이스를 즐기든가. 오이카와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전자를 택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선택권을 쥔 쪽은 이와이즈미였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선택할 듯싶었다.

오이카와는 이틀 뒤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인생을 돌아보는 김에 미래 계획도 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선, 뭐든 좋으니 신을 믿어야겠다. 그래. 종교를 가지는 것이다. 신이시여, 당신이 누구든 열렬하게 믿을 테니 일단 오늘은 좀 살려주세요. 오이카와의 속마음이 작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오이카와. 네 애매한 재력을 자랑할 시간이다.”

“어, 어?”

“지갑 열고 400엔 꺼내.”

 

장기전이 될 것을 예감한 이와이즈미의 빠르고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가 주차장을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40분 뒤의 일이었다.

 

 



 



주말에도 출근을 요구하는 직장이라니 때려 쳐야 마땅하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배웅하기 위해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얇은 티셔츠 속으로 배를 긁적거리며 나오는 꼴이 영락없는 백수였다. 이와이즈미는 강아지 마냥 제 뒤를 졸졸 쫓아오는 친구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고는 한숨부터 쉬었다. 누가 알까. 이 후줄근한 복장의 남자가 올해 상반기 아르헨티나 프로 배구에서 MVP를 따낸 꽃미남 세터라는 것을.

시차 때문에 오늘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던 오이카와의 눈에는 잠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일본과 열두 시간의 시차가 있는 나라에서 왔는데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와이즈미는 ‘그냥 더 자지?’ 하고 오이카와의 배를 팡팡 두드렸지만 그는 그럴 수는 없다며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구두를 마저 신은 이와이즈미는 문고리를 돌리며 다시 한 번 뒤돌았다. 오늘 새벽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일러두었고 어린 아이도 아니니 알아서 잘 챙겨 먹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금 꼴을 보니 자신이 돌아올 저녁까지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며 문고리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졸린 눈으로 하품까지 하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졸려 그대로 시선을 내렸더니 바닥에 온통 검은 색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졸음이 기겁하며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이부자리로 돌아가려하다가도 다시 현관 앞으로 돌아와 버린다. 회귀본능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람. 오이카와가 허탈하게 웃으며 결국에는 그곳에 털썩 앉아버렸다.

 

“나만 왕따야, 뭐야.”

 

어젯밤 이와이즈미는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 오이카와에게 던졌다. 오이카와가 캐리어를 받으며 ‘에이. 옮겨주는 서비스 없어?’ 하고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이와이즈미는 헛소리하지 말라며 뒤이어졌을지 모를 영양가 없는 대화를 미리 차단했다. 어차피 진심으로 한 말도 아니었으므로 오이카와의 투덜거림은 얌전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뒷좌석에서 하얀색 상자 하나를 꺼내 옆구리에 끼었다. 상자의 크기나 모양으로 봤을 때 그 안에 든 건 필시 운동화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오이카와는 그게 제 생일선물인 줄 알고 히죽거렸다. 앞장 서 계단을 오르던 이와이즈미는 친구의 기분 나쁜 입꼬리를 느끼곤 뒤돌아 말했다.

 

‘네 거 아니거든. 뭘 히죽거리고 있어.’

‘이와쨩. 이미 다 들켰어. 그 안에 든 게 운동화 아니면 뭔데?’

‘운동화는 맞는데 네 거 아니라고. 아, 맞다. 네 거 트렁크에 있는데 두고 왔다. 네 건 내일 줄게.’

 

이와이즈미가 이렇게까지 단호한 것을 보면 정말로 상자 안에 든 게 자신에게 줄 생일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이카와는 입술 사이로 아쉬움을 흘렸다. 제 생일선물이 아니라면 그 안에 뭐가 들었든 관심 없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상자에서 시선을 뗐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던가. 오이카와는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 위에 상자를 놓고 으스대는 이와이즈미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어라. 이거 왠지 어디서 많이 느껴봤는데. 그래. 다니엘이 색지를 내밀며 카게야마의 사인을 받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다. 신이시여, 이번 소원을 들어주면 정말로 당신이 누구든 맹신하겠습니다.

 

‘야. 어떠냐. 멋지지?’

 

이와이즈미가 상자의 뚜껑을 오픈했다. 그의 말 대로 그 안에는 운동화가 들어있었지만 오이카와에게 줄 생일 선물은 아니었다. 온통 검은색을 입힌 운동화 끄트머리에 거친 붓글씨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잘 읽을 수는 없었으나 아마도 근성根性이라 적혀있을 듯싶었다.

 

‘뭐야 이게. 이와쨩 취향이긴 한데 이런 것도 신고 다녀?’

‘신고 다닐 거 아니야. 장식용 겸 힐링용. 카게야마한테 받았다.’

‘… 뭐?’

 

신이시여, 맹신하겠다는 거 취소. 종교를 가지는 건 조금 더 고려해볼게요. 오이카와는 이번에도 예고 없이 꽂힌 이름에 화들짝 놀라야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께 애들이랑 카게야마네 놀러갔는데 주더라. 주문 제작이라는데 개수 설정 잘못해서 집에 세 개나 왔대. 하나 준다기에 받아왔어.’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말에서 몇 번을 더 깜짝 놀라야했다. 거기서 더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한 ‘애들’이라 함은 킨다이치와 쿠니미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그들이 뭉쳐서 카게야마네 집을 ‘놀러’갔다는 것도 놀라웠고 이와이즈미가 카게야마에게서 허물없이 선물을 받아온 것도 놀라웠다.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부터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는 은근 맞는 구석이 많았다. 센스 없는 티셔츠 취향이나, 고지식한 면이나. 쿠니미와 킨다이치 또한 지치고 지쳐 카게야마의 토스를 거부한 일이 있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카게야마의 친구였다.

오이카와만이 카게야마를 마주했을 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만약 카게야마에게 그렇게 말을 하면 그는 눈썹을 비대칭으로 씰룩이며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카게야마의 살인적인 점프 서브는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가 오이카와를 눈으로만 관찰하며 몸에 익힌 기술이었다. 그 밖의 블로킹이나 토스를 올릴 때의 요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큰 존재로 새겨져 있을 터였다.

하지만 거기서 배구를 빼버리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갈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카게야마를 사랑하고 있음을 자각한 지금, 그 사실이 오이카와의 안에 깊게 박혔다. 아직 고백은 하지도 않았는데 실연부터 당한 것 같았다. 기분을 말하자면, 비참하고 초라했다.

오이카와는 현관에서 일어나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쥐어 들었다. 그리고는 충전이 완료된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생각을 환기시킬 요량으로 아무나 불러 약속을 잡으려는데 불현 듯 카게야마의 이름 네 글자가 눈에 띄었다.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인식한 뇌가 오이카와에게 속삭였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전화해서 만나면 되잖아.

말은 쉽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눈에서 떼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액체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게야마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주전 세터였고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몸 상태가 불량일 때를 대비하여 벤치에 자리를 틀고 있는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카게야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무엇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것이 배구든, 다른 무엇이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번호를 카게야마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때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알려주는 거야. 연락할 생각은 하지도 마.’

‘… 그치만 내일 오이카와 씨 생일인데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일 연습 없는 날이잖아요. 축하한다는 말도 안 됩니까?’

‘절대 안 돼.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이잖아.’

 

자신의 무엇도 줄 수 없었고, 카게야마로부터 그 무엇도 받고 싶지 않았다. 어린 오이카와는 그랬다. 카게야마와 관련된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던 시절이었다. 청회색의 눈동자 속 동경조차 끔찍했으면서 더 깊은 곳에 있는 겨울은 사랑했다. 모순이었다. 사랑이 끔찍한 감정이라면 모순이라 단정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여름에 태어난 탓인지도 몰랐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 본능적으로 이끌린다고 하지 않던가. 같은 맥락이었다. 불덩이를 품고 태어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겨울에 기대서 그저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카게야마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서 손가락의 위치가 조금만 더 내려갔더라면 또 전화가 걸렸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머저리 같은 짓인지 모르겠다.

아니, 머저리 같은 짓이 아니라 완전히 머저리 짓이었다. 사랑을 삼켜버린 순간부터 오이카와는 구제할 길 없는 머저리였다. 카게야마를 사랑하는 일이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면, 사랑을 자극한 이후의 폭풍도 지극히 당연해서 동요할 일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폭풍 속에 갇힌 한 명의 머저리였다.

오이카와가 위로 고개를 꺾고 한 쪽 팔을 눈 위에 턱, 올렸다. 한낮의 밤이 그의 눈꺼풀 속에 붙었다. 환한 대낮에도 오이카와는 눈을 감아 밤을 찾았다. 결국, 카게야마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오이카와─ 너 아직 저녁 안 먹었…. 뭐하냐?”

“… 어서 와, 이와쨩. 아직 저녁 안 먹었어.”

 

이와이즈미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오이카와는 식탁 의자에서 쿠당탕 굴러 떨어졌다. 현관으로 들어선 이와이즈미가 깜짝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식탁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오이카와는 넘어진 상태에서 거의 기어오다시피 하며 이와이즈미를 맞이했다.

티셔츠와 무릎을 탁탁 털고 일어선 오이카와의 복장은 아침에 이와이즈미가 출근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다고 아침에 예상 했던 대로 하루 종일 이부자리에만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오이카와의 멋쩍은 웃음 속 진실을 파헤치려했지만 금방 관두었다. 탐정 역할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 AV라도 보고 있었냐?”

 

오이카와가 부자연스럽게 쥔 핸드폰과 그 핸드폰의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숨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몸을 튕겼다. 양 손을 좌우로 휙휙 흔들기까지 한다. 손 안에 쥔 핸드폰 화면은 이미 암전되어 있었으므로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 나한테 부탁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냐.”

 

이와이즈미가 식탁 위로 반투명한 봉투 몇 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이카와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하기 전에 보낸 메시지 내용 중 하나였다. 뒤에 붙인 이모티콘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워 고운 말이 안 나왔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용에 따라서는 못 들어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내용에 따라서는.

오이카와는 과장되게 흔들던 손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오른손에 쥔 핸드폰에 한 번 눈길을 주곤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시선도 고개를 따라 비스듬히 아래를 향했다. 이와이즈미의 머리 옆으로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푱, 하고 떠올랐다. 무슨 부탁이기에 저렇게도 말하기 꺼려하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약 3분 뒤, 이와이즈미는 프라이팬 위로 사온 고기를 올려놓곤 집게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자식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 하나 없는 머저리라고.

 

“너는 아직도 카게야마랑 그런 식이냐!?”

“내, 내가 뭘 어쨌다고….”

“아주 애새끼 시절에서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그래서. 나한테 카게야마의 사인을 부탁하고 싶었다?”

“예, 그렇… 그렇습니다….”

 

프라이팬 위로 고기 덩어리가 하나 더 뉘어졌다. 옆으로 새는 연기를 휘휘 저으며 이와이즈미가 집게를 딱딱, 접었다 폈다. 말 하나라도 잘못 뱉었다가는 저 뜨거운 집게로 볼살이 고문당할 것 같다. 오이카와는 아직 어떤 짓도 당하지 않은 볼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이와이즈미의 집게질은 더 속도를 높여 딱딱, 소리를 냈다. 정정. 말 하나라도 잘못 뱉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말이라도 덧붙였다가는 죽을 것 같다.

카게야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이카와가 그에게 ‘내가 부탁을 받아서 그러는데, 여기 사인 좀 해줄래?’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상해도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5년 동안 연락도 한 번 없던 선배, 그것도 자신에게 아주 못되게 굴었던 선배가 불쑥 찾아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인이나 부탁한다? 상대가 카게야마라도 이건 아니었다.

게다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사랑하고 있었고, 사흘 전에는 전화로….

 

‘갑자기, 보고 싶어서. 그냥.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끊었지. 오이카와는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이와이즈미는 너무 다그쳤나 싶어 집게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오이카와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카게야마의 꿈을 꾸었던 날 아침엔 사형을 선고 받은 죄수 같았는데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결국 오이카와가 엉망진창으로 구르고 있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와이즈미는 노릇하게 구운 고기를 한 번 뒤집고는 오이카와의 앞에 앉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네가 카게야마랑 싸운 건 아니잖아. 안 그래?”

“… 맞습니다.”

“좀 애매하긴 해도 굳이 표현하자면 킨다이치랑 쿠니미랑 한 게 싸움이지.”

“… 어… 그런가? 뭐…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근데 걔넨 지금 화해하고 절친 됐잖아. 사실 요즘 걔네 보고 있으면 친구가 아니라 부모랑 자식 같긴 한데, 아무튼.”

 

이와이즈미는 최근 카게야마의 집에서 그들과 식사했던 것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더는 참다못한 그들이 카게야마가 올린 토스를 거부했을 때, 오이카와와 함께 이와이즈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세터에게 저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은 카게야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면서 상처는 아문 듯 보였지만 카게야마가 킨다이치와 쿠니미와 제대로 화해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걸렸다.

각자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들도 지금은 화해하여 친구이자 때로는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데, 싸움도 뭣도 하지 않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어색해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한 유치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친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역시 그 때 조금 더 강하게 팼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었지만 그것이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는 될 수 없지 않을까.

 

“너 요 5년 동안 한 번도 연락도 안 했고… 뭐 여러 가지로 좀…… 그러긴 했으니까 창피할 순 있겠다. 근데 너 얼굴에 철판 까는 거 잘하잖아.”

“이와쨩… 병을 줬으면 다음엔 약을 줘야지. 병 뒤에 또 병을 주면 어떡해.”

“야, 잠깐만. 고기 타는 것 같아. 상 차릴 테니까 손 씻고 와라.”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흐르는 물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이 손 전체를 감싸며 옆으로 퍼졌다. 비누를 집어 들고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손을 씻은 오이카와는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욕실 벽면에 머리를 쿵, 박았다. 세게 박지는 않아 통증은 거의 없는 대신 이마에는 옅게 빨간 자국이 남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오이카와는 종종 얼굴 표면을 미소로 무장시키고 상대를 대하곤 했다. 상대가 그 카게야마 토비오니 오이카와가 미소를 띠우며 색지를 내밀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확신은 없었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그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선배일 때나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지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을 인정한 지 겨우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났을 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또 무슨 짓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날, 전화로 카게야마에게 터무니없는 진심을 쏟아내지도 않았던가. 오이카와는 이대로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와이즈미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반찬을 접시에 옮기고 있었다. 한입 크기로 잘려진 고기는 끝부분이 조금 탔지만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있었다. 마지막 반찬까지 옮겨 담은 이와이즈미는 냉장고에 나머지 반찬통을 정리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집주인이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맞대고 ‘잘 먹겠습니다.’ 인사하자 오이카와도 그를 따라 ‘잘 먹겠습니다.’ 중얼거렸다. 이와이즈미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아까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그냥 가서 부탁해. 뭐 어려운 일이라고.”

“… 이와쨩이 같이 가주면 안 돼? 아니면 이와쨩이 대신 좀 해줘. 응?”

“너 월요일에 나 출장 가는 거 잊었어? 내일 그거 준비하느라 엄청 바쁘다.”

“맞다. 그래서 내 생일도 당일에 못 챙겨준다 그랬지.”

 

그가 동행한다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중학교 때 선배’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 앞에서 ‘그를 사랑하는 머저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고민만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서면 얼마나 구차해질지. 오이카와는 입에 넣은 고기가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기라도 했는지 바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그저께 만난 후배의 이름을 찾았다. 분명 내일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와 만날 약속을 했다고 들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와 단 둘이 되는 상황을 피하고 있다면 동행하는 상대가 꼭 자신이 아니어도 될 듯싶었다.

킨다이치로부터의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가 카게야마와 저녁 먹을 약속을 했고, 쿠니미가 이후의 술자리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다는 답장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거의 밥을 다 비운 오이카와의 얼굴 앞으로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너무 들이민 탓에 초점이 맞지 않았는지 오이카와가 얼굴을 뒤로 빼고 나서야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 뭐야 이게?”

“카게야마랑 둘만 있는 상황만 피하면 될 거 아냐. 기왕 가는 거 얘네 술 마실 쯤 가. 정신없을 때. 말은 내가 해놓을 테니까.”

 

그는 ‘이제 됐지?’ 하는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오이카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일로 신경을 써준 친구의 배려가 고마워서 거절하지도 못하고 웃기만 했다.

 

 



 



실연의 가장 비참한 형태는 감정이 송두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리라. 거의 대부분의 실연이 그럴 터였지만 짝사랑의 경우에는 초라함까지 더해질 것이다. 오이카와는 끊임없이 카게야마를 밀어냈던 날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움직여 내딛을 때마다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아프지는 않은 따끔거림이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중요하다면 오이카와는 이 사랑의 시작이 딱 그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아프지는 않은데 피부를 콕콕 찔러오는 것이 거슬리는 정도. 요컨대, 어딘가에 호소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각과 인정이 나흘 전이었을 뿐 시작은 상당히 이전부터였다.

해가 떠 있는 낮은 괜찮았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거대해지는 계절에 태어난 덕분에 낮이라는 시간에는 제법 면역이 있었다. 시끌벅적, 혹은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도 듣기 좋은 소음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그런 소리들은 오이카와가 애써 ‘진심’이라는 덩어리를 무시하기에 형편 좋은 이용물이었다. 아무리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른 곳에 집중해버리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밤에 있었다. 태생적인 면역도 주변의 소음도 전부 사그라진 밤에는 낮 동안 오이카와의 관심을 받지 못한 마음이 제 세상을 찾은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러면 그는 기댈 곳 하나 없이 그 마음을 맨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죽어도 싫어서 늘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봤자 똑같은 밤이었고 그걸 알았음에도 오이카와는 그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 카게야마를 찾은 날이 있었다. 문득 그가 보고 싶어졌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던 날이었다. 그 날 오이카와는 집으로 가는 길에 혼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밤이다. 필연적으로 내리는 밤. 무수하고도 영원한 밤. 그 때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쯤 되니 이 비유에도 확신이 선다.

오이카와는 무수한 밤을 걸었고 지금은 영원한 밤 아래에 서 있다. 다음 날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아 줄곧 밤이었다. 그 밤은 오이카와가 맨몸으로 사랑을 받아내야 했던 시간이었고 결국엔 그를 사랑해온 시간으로도 치환할 수 있었다.

 

“머저리.”

 

폐부에 뜨거운 바람이 달라붙었다. 여름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진득하기도 진득했지만 무엇보다 아팠다. 장기 내벽에 달라붙어 오이카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출렁였다. 빌어먹을. 폐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다. 오이카와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어쩌면 지금이 진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사인이고 뭐고 여기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다니엘이나 아이들에게는 미안하다고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과자라도 대신 쥐어주면 될지도 모른다. 마음을 써준 이와이즈미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무서웠지만 화는 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잔소리도 버틸 만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고민은 채 1분을 넘기지 않고 사라졌다. 구겨지지 않도록 파일에 잘 끼워놓은 사인 색지는 좋은 구실이었다. 자신이 카게야마를 만나기 위한 형편 좋은 구실.

2시간만 있으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인생의 ¼을 살아온 시점에서 지나온 시간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시간도 어떻게 살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종교를 갖는 것은 차치하고, 머저리 짓부터 졸업해야 했다. 이와이즈미가 알려준 술집으로 향하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오이카와는 동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걷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사인 따위,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어 오이카와의 폐부를 흔들었다.

여름, 낮과 마찬가지로 제법 면역을 가지고 있는 계절이었지만 오이카와는 힘겨워 죽을 것 같았다. 하늘에 밤이 내려앉은 탓이었다. 오이카와는 늘 밤 아래에서는 그리고 카게야마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일행이 자리를 잡고 있… 아, 저기 있네요.”

 

점원이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일요일 밤은 비교적 한산해 제법 큰 술집이었음에도 홀 점원은 두 명이 고작이었다. 오이카와는 일행을 묻는 점원에게 검지를 들어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창가 쪽 구석자리를 차지한 후배들은 한참 즐기고 있었는지 오이카와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도 모르고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어, 오이카와 선배다.”

“와. 선배! 오랜만이에요!”

 

귀까지 빨개진 쿠니미가 가장 먼저 오이카와를 알아봤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았다. 쿠니미와 킨다이치가 마주보고 앉아있으니 남은 두 자리 중 하나는 카게야마의 자리일 터였다.

그 때 오이카와의 눈에 익숙한 색깔이 들어왔다. 짙은 푸른색의 핸드폰이었다. 나이 든 어르신들도 웬만해선 스마트폰을 쓰는 시대에 이런 피처폰을 쓰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이 놓인 자리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선배. 카게야마한테 볼 일 있으셨다면서요.”

“응. 근데 안 보이네. 화장실 갔어?”

“카게야마 집에 갔어요.”

 

오이카와의 눈치를 보던 킨다이치의 목소리 사이로 쿠니미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이카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눈동자를 떨었다. 킨다이치는 제 옆자리의 오이카와의 어깨를 잡으며 ‘중요한 볼일이셨어요?’ 하고 물었다. 오이카와에게서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그는 고개를 들어 쿠니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쿠니미는 킨다이치의 시선을 의식하곤 어깨를 으쓱일 뿐, 여전히 고개 숙인 오이카와의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술자리가 막 달아올랐을 무렵이었다. 추가로 주문한 안주가 먹음직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랐고 웃고 떠드느라 반쯤 빠진 술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맥주 한 잔을 추가로 주문할 때였다. 킨다이치는 오이카와 몫의 술과 안주를 미리 주문해놓는 게 좋을 듯싶어 그의 이름을 꺼내었다.

 

‘… 오이카와 씨가 지금 여기 오신다고?’

‘어. 너한테 무슨 할 얘기가 있다던데. 나도 자세하게는 몰라.’

 

카게야마는 처음 이름을 꺼낸 킨다이치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쿠니미로부터 나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움켜쥐며 눈동자를 떨었다. 쿠니미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킨다이치와 눈이 마주쳤다. 옛날부터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사이에는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얽혔다가는 귀찮아질 재질의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쿠니미는 그 옛날부터 고개를 돌리곤 했다.

킨다이치가 뭐라고 더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급한 일이 생각나 가봐야겠다며 빠르게 가게를 나갔다. 두 사람이 잡을 새도 없는 속도였다. 쿠니미는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다가 뱉었다. 공중에 허망하게 남은 킨다이치의 팔이 어색하게 테이블 위로 올랐다.

 

‘오이카와 선배한테 뭐라고 말씀드리지.’

‘뭘 뭐라고 그래. 선배 얘기 꺼냈더니 집에 갔다고 하면 되지.’

‘쿠니미 너…. 네가 말해. 난 못하겠다.’

 

이야기를 끝낸 쿠니미가 ⅓쯤 남아있던 맥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냈다. 킨다이치는 여전히 오이카와의 눈치를 보며 제 티셔츠 끝자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쿠니미의 직설적인 이야기에서 오이카와가 알아낸 것은 하나였다. 카게야마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제멋대로 끊어버린 통화였다. 오이카와 인생 최고의 머저리 짓으로 기록될 일이었다.

푹, 고개 숙인 오이카와의 시야로 카게야마의 핸드폰이 들어왔다. 사람은 없고 테이블 위에 핸드폰만 놓여 있기에 화장실이라도 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도 챙기는 것도 잊고 나갈 정도로 자신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아랫입술에 이를 박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의 일을 이대로 묻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이카와는 이미 비참하고 초라했다. 그는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손 안 가득 힘을 넣어 그러쥔 것은 카게야마의 핸드폰이었다.

 

“어? 그거 뭐… 뭐야, 얘 핸드폰 두고 간 거야?”

“뭔…. 소중하다고 할 땐 언제고….”

 

그제야 카게야마의 핸드폰의 존재를 눈치 챈 킨다이치가 깜짝 놀라 오이카와가 쿠니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쿠니미도 핸드폰은 방금 눈치 챘는지 놀란 얼굴로 킨다이치와 시선을 얽었다.

쿠니미는 몇 년 전 최신형 스마트폰을 장만하면서 카게야마에게도 스마트폰으로 바꿀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카게야마는 확고하게 싫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 안에 소중한 게 들어있다고 하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더 물어봤다가는 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소중한 게 무엇인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 이런 고물 폰이라도 현대인한테 핸드폰은 소중하지.”

“아니, 그런 의미가….”

“내가 갖다 줄게.”

“예?”

 

오이카와가 손 안에 쥔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오이카와는 킨다이치와 쿠니미가 손을 뻗어 잡을 새도 없이 가게를 나갔다. 킨다이치가 다급하게 손을 뻗던 찰나에 쿠니미는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선배! 카게야마 집은 어딘지 알고 가세요?”

 

가게 중앙에 선 오이카와가 뒤를 돌아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웠으나 기분 나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옛날과 어쩜 저리도 똑같은지. 오이카와의 입이 크게 열렸다.

 

“알아!”

 

 



 



인간이 어리석은 이유는 타고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다.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나 여러 위인들의 말이 현재까지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실제로 그 말을 들은 인간 대부분이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란 그렇게 기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이름을 더듬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전히 두 눈에는 카게야마의 이름 네 글자와 그의 전화번호 열한 글자가 비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저주 같았다. 카게야마의 이름이 메두사의 얼굴도 아닌데, 그 네 글자를 보고 있으면 온 몸이 굳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돌처럼 굳어 있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연락처 화면을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더 지나서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 이름이 저주라도 되는 모양인지 오이카와는 인터넷 검색창의 그의 이름 네 글자를 입력했다. 인간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케이스에 오이카와의 이름이 올랐다.

 

‘[그럼 지금 카게야마 선수는 자취생활을 하고 계신 거네요.]’

‘[네. 올해 초 구단 측에서 마련해 준 맨션으로 이사했습니다.]’

 

화면 속 카게야마는 인터뷰어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다. 그는 카게야마와 대화를 나누면서 대중이 궁금해 하던 정보를 얻어내야 하는 직업이었으므로 카게야마와 정신적 친밀감을 쌓기 위해 사람 좋은 웃음을 마구 지어보였다.

인터뷰는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코트 밖 모습을 좀처럼 노출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카게야마는 사생활을 묻는 질문에도 척척 답변을 붙여나갔다. 덕분에 오이카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시간을 보낸 카게야마를 그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사전에 카게야마 선수의 팬들로부터 사연과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저희가 몇 개를 골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인터뷰어는 한 번 질문지를 쓱 훑더니 키득키득 웃으며 카게야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할 질문을 기다렸다.

 

‘[저는 카게야마 선수의 살인 서브를 보고 반한 팬입니다. 카게야마 선수에게 스마트폰 케이스를 선물하고 싶어서 며칠 전, 주문 제작 사이트에서 직접 그린 디자인을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카게야마 선수의 핸드폰이 피처폰이라는 걸 알아버려… 아쉽지만 주문을 취소했습니다. 아직도 피처폰을 고집하고 계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바꾸시게 되면 꼭 알려주세요! … 네, 이렇게 보내주셨네요.]’

‘[…… 주문 제작…? 사이트? 그게 뭡니까.]’

‘[앗. 거기부터 설명해드려야겠군요.]’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카게야마의 옆자리로 옮겨가 인터넷 상에 널려 있는 사이트를 아무거나 터치해 보여주었다. 카게야마는 노인이 젊은이들의 세계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곧 샘플로 전시되어 있는 완성품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인터뷰어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인터뷰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카게야마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어떻게 디자인을 보내고, 항목을 선택해야 하며, 개수는 어디서 설정하는지 등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드디어 모든 것을 이해한 카게야마가 자신용으로 지정된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고 답변을 시작했다.

 

‘[이 핸드폰을 바꾸지 않고 있는 건, 아직까지 고장 난 적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대답에 망설임이 없던 카게야마가 처음으로 대답하기를 망설여하자 인터뷰어가 허리를 숙이고 귀를 열었다. 카메라도 카게야마의 얼굴을 조금 당겨 잡고 있었다.

 

‘[소중한 게 들어있습니다. 예전에 아주 소중한 사람한테서…,]’

 

카게야마의 나머지 말이 이어지려고 할 때였다. 돌연 철컥,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 식탁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쿠당탕 넘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와이즈미는 엎드린 채 어서 오라고 인사하는 오이카와를 내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AV라도 보고 있었냐?’

 

오이카와는 차라리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화들짝 놀라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저 카게야마가 인터뷰를 하는 30분짜리 영상이었는데도 오이카와는 웬만한 AV를 본 것보다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날 밤 그는 어서 자라는 이와이즈미의 구박에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졸리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피곤에 찌든 직장인 친구는 그의 거짓말에 간단히 속아주었다.

역시, 비참하고 초라했다. 맨 정신으로 카게야마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만날 용기는 나지 않지만 보고는 싶어서 그가 나온 영상이나 찾아보고 있다는 게 미치도록 서글펐다. 한 때 여자 동급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우쭐대던 남자는 어쩌다가 이런 머저리가 되었는지.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카게야마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없는 5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배구가 인생의 전부인 카게야마라고 할지라도 하루 24시간 동안 배구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서 배구를 뺀 시간이 궁금했다. 신경이 쓰였고, 그래서 알고 싶었다.

 

“헉… 어흐억……. 힘들어 죽겠네. 분명 여기 근처인데.”

 

오이카와는 턱끝에서 뚝뚝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허리를 숙였다. 무릎에 손바닥을 붙이고 상체를 지탱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더니 호흡이 조금씩 돌아왔다. 하지만 호흡이 완전히 원래의 페이스를 찾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킨다이치와 쿠니미와 만났던 술집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30분을 이동해 겨우 슈바이덴 애들러스 소유라고 알려진 체육관 근처에 도착했다. 그 날 인터뷰에서 본 내용에 따르면 카게야마가 올해 초 이사했다던 맨션이 이 중 하나일 터였다.

 

“오이카와?”

 

그 때 오이카와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기억 속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보다 더 낮은 어른의 목소리를 낸 인물이 오이카와의 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뒤를 돌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과거, 미치도록 마주치기 싫었던 상대가 이토록이나 반가울 수는 없었다.

 

 



 



우시지마와 오이카와도 질긴 인연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인연은 싫든 좋든 오이카와를 진창으로 쑤셔 넣곤 했다. 그 시절 오이카와에게 우시지마 와카토시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전략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네트 너머로 좌절했던 순간을 떠올리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짜증을 냈다.

하지만 지금, 오이카와는 자신의 어린 시절 분노 유발의 촉진제가 이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가 카게야마와 같은 팀에 속해있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경기 영상만큼은 눈에 띌 때마다 유심히 관찰한 덕분이었다.

 

“아르헨티나에 있다고 들었는데.”

“휴가다, 휴가. 내가 아르헨티나에 천년만년 있을 줄 알았어?”

“그렇군. 생일이라 온 건가.”

 

우시지마와 적당히 말을 주고받은 뒤 카게야마의 행방을 물어보려던 오이카와가 깜짝 놀라 두 눈을 끔뻑거린다. 방금 전까지 이죽거리기 위해 으쓱였던 어깨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 오이카와는 다시 이죽거리려고 했지만 당혹감을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와. 기분 나빠. 어떻게 안 거야? 뒷조사?”

 

덕분에 어색해진 몸짓과 파도처럼 흔들리는 목소리가 오이카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정면에서 봤다면 확실하게 비웃었을 터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그러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카게야마가 말했다.”

 

오이카와가 당황해서 뒷조사라는 말로 과장해버렸지만 그의 생일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인 프로 배구 선수의 생일은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그런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 ‘카게야마’에게서 들은 정보임을 밝혔다.

이제는 카게야마의 이름이 나오기만 해도 동공이 떨렸다. 오이카와는 어깨에 두른 에코백의 끈을 힘주어 쥐었다.

 

“그런데 축하해줄 수 없다고 했다.”

“뭐? 왜.”

 

우시지마는 며칠 전 체육관에서 나와 카게야마와 귀갓길을 함께했다. 올해 초부터 그도 우시지마와 같은 맨션에 살게 되어 방향이 같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배구 얘기만 나누었던 이전과 달리 최근 카게야마는 배구 이외의 것들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드물게 제 손길을 피하지 않았던 골목길의 고양이나, 고등학교 동창에 관한 이야기가 대화의 주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이카와 토오루의 이름이 나올 때가 가끔 있었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 보이는 집착이 배구에 한정되어 있다고 여겼었다. 배구를 할 때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두려운 사람처럼 보곤 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두려움만 있다고 생각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동경? 비슷하지만 달랐다. 카게야마는 배구를 하는 오이카와에게도, 배구를 하지 않는 오이카와에게도 집착을 하고 있었다.

 

“자격이 없어서.”

 

잠들 수 없는 날이 있다, 고 카게야마는 말했다. 매년 그런 밤을 버텨왔다고 덧붙인 그의 얼굴 반쪽으로 가로등의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졌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카게야마는 기본적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매일 일지를 써서 자신의 상태를 기록하고 검토하며 배구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어 나갔다. 전문 트레이너도 가끔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카게야마는 제 컨디션 조절에 있어서 미끄러진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우시지마에게 말했다. 잠들 수 없는 날이 있다고. 우시지마는 이유를 물었다. 병인지 아닌지 그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유를 알아야 치료든 뭐든 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시지마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는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그 얼굴은 아는 얼굴이었다.

잠들 수 없는 이유 같은 건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얼굴로, 모른다고 대답한 카게야마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시지마도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본인이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했으므로.

 

“무슨….”

“오이카와. 너의 생일을 축하하려면 자격이 필요한가?”

 

그것은 단순히 궁금한 것을 묻는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공격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예민하기로 소문 난 오이카와였다. 푹, 하고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자격. 두 글자가 오이카와의 뇌에 들어와 떨어지지 않는다. 폐부 다음은 뇌였다. 그 중에서도 기억을 담당하고 있는 부품이 펑, 하고 고장을 일으켰다.

참 간사하다. 참 간사하게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짙은 푸른색의 핸드폰을 건넸던 때를 기억해냈다. 이미 알고 있는 기억이었다. 머릿속에 잘 저장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런 기억이었다. 하지만 지금 오이카와의 지배를 벗어난 필름은 그 뒷부분이었다.

그 날은 오이카와의 생일 전 날이었다.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서 사람의 짜증을 솟구치게 하는, 그런 날이었다. 무덥고도 습한 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핸드폰을 쥐고 자신의 번호를 꾹꾹 힘주어 눌렀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아서 더 짜증이 났다.

오이카와는 어려서부터 사람을 대하는 요령이 있었지만 그 때는 그도 어렸다. 어린 오이카와는 짜증을 얼굴에서 지울 줄을 몰랐다. 그보다 더 어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짜증스러운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의 눈치를 본다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하여간 망할 애새끼였다.

 

‘내일 연습 없는 날이잖아요. 축하한다는 말도 안 됩니까?’

‘절대 안 돼.’

 

파랗고, 또 하얀 체육복을 입은 소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카게야마의 버릇이었다. 어이도 없고 짜증도 나는데 자신을 그렇게 만든 상대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을 때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거리곤 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대체로 오이카와였다.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소꿉친구가 대걸레로 체육관 바닥을 닦으며 그에게 ‘1학년 그만 놀려!’라고 주의를 주지 않았어도 무척이나 유치하고 대단히 소모적인 감정싸움임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카게야마만 보면 짜증이 났고, 그러면서도 밤이 내려앉으면 어김없이 아팠다. 타죽을 것 같은 계절이 되면 청회색의 눈동자를 찾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겨울을 탐했다.

그저, 너를 사랑했다.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이잖아.’

 

사랑이 끔찍해서가 아니었다. 사랑이 왜 끔찍해야 하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럼에도 오이카와가 사랑을 외면하고 긴 시간, 무수히도 많은 밤을 홀로 걸어야 했던 것은 상대가 카게야마였기 때문이었다.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를 사랑해서였다.

 

‘소중한 사람들한테 축하 받고 싶어.’

 

그것은 오이카와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비참하고 초라한, 이제는 후회로 점철되어 동정同情만이 남은 기억이었다.

 

“…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는 숙였던 얼굴을 들었다. 눈앞에 카게야마가 서 있었다. 뛰어온 모양이었다. 머릿결 사이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5년 만에 마주한 카게야마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또 달라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입술 안쪽으로 말려들어간다. 뭐라고 시작을 꺼내야 할지 몰라 오이카와는 망연하게 웃었다.

그 시절 오이카와는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쓰며 울었던 것이다. 네가 내 소중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앞으로 견뎌야 할 무수한 밤들에 지레 겁먹고 울었던 것이다.

 

 



 



우시지마는 등 뒤에서 카게야마를 발견하곤 오이카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제 물음에 대한 답은 받지 못했지만 오이카와는 답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그와 더는 얘기를 나눌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마침 카게야마에게 줄 것도 있었다.

그는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영수증 사이에 넣어두었던 명함 하나를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키리타니 수면 클리닉. 명함을 받아든 카게야마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을 쓰게 한 것 같아 미안함이 번졌다. 카게야마는 두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괜찮은데….”

“가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정 안 되겠다 싶을 때 네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하라고 주는 거다. 너는 우리의 소중한 세터니까.”

“…… 감사합니다.”

 

소중하다. 그 말이 주는 따뜻한 울림이 얼마나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지 카게야마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옛날 반한 상대에게 실연부터 당했을 때도 카게야마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더 정확하게는 비스듬히, 우시지마의 어깨 너머 오이카와를 향했다. 우시지마는 그런 카게야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가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우시지마가 다시 카게야마의 시선을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을 때도 그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오이카와가 머물렀다.

 

“토비오.”

 

시선 끝에 매달려 있던 오이카와가 한 발자국씩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왔다.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사이에 서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나 토비오랑 할 말 있으니까 눈치껏 자리 좀 비켜줄래? 하여간 센스 없긴.”

 

카게야마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오이카와가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말을 듣는 대신 콧등을 찡그리며 카게야마의 곁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우시지마의 위치가 카게야마 쪽으로 쏠렸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악당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난 그냥 토비오가 두고 간 핸드폰 전해주러 온 것뿐이거든? 그리고 원래부터 토비오한테 할 말 있어서 약속도 잡았고.”

 

우시지마의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향했다. 카게야마는 두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떴다. 그리고는 우시지마의 팔을 밀어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우시지마는 종종 생각을 말로 변환하지 않아도 카게야마와 통하곤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텔레파시처럼 카게야마의 ‘괜찮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맨션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곤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카게야마를 만났다. 카게야마와 단 둘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둘이 되니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뭐라고 시작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중요하지 않은가.

 

“도중에, 핸드폰을 놓고 온 걸 알았습니다.”

 

어색한 정적 사이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삽입되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오는 도중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이카와와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만 급급해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놓고 그대로 몸만 빠져나온 것을 떠올렸다.

카게야마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오이카와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지만 운이 좋으면 그가 오기 전에 핸드폰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카게야마에게 그 핸드폰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소중한 게 그 안에 들어있었다. 언젠가 쿠니미가 제 최신형 스마트폰을 자랑하며 카게야마에게 핸드폰을 바꿀 것을 권유했을 때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요즘엔 사진이나 번호도 다 이전해줘. 날아갈 걱정 없다니까.’라고 덧붙이며 카게야마를 설득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카게야마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핸드폰이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질 일은 없었다. 알고 있는데도, 싫었다.

매미가 징그럽게도 울어대던 어느 여름, 두 살 위의 선배가 건네준 핸드폰이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해보기도 전에 거부당했으므로. 그래도 좋았다. 좋은 기억이 아니었지만, 좋았다. 자신의 부족한 어휘력으로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전을 뒤지고 뒤져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킨다이치가, 오이카와 씨가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밤 카게야마는 턱 끝을 손등으로 쓸며 달렸다. 술집은 자신이 나갈 때보다도 사람이 적어져서 제 친구들을 제외하고 손님이 있는 테이블은 두 개밖에 없었다. 붐비지 않은 덕분에 쿠니미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게야마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킨다이치도 뒤돌아 카게야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 그렇게 말한 건 킨다이치였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곧 무언가 말하려 입을 떼었지만, 결국 그 입에서 소리가 되어 터지는 말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달렸다. 이번에도 어색하게 허공을 가로지른 킨다이치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카게야마에게 있어 두 살 위의 선배는 늘 어려웠다. 선배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자신과 같은 나이거나, 혹은 자신보다 어렸어도 똑같이 오이카와를 어려워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냥,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이 어려웠다. 그가 카게야마에게 보이는 반응이나 태도는 거의 일정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어려운 건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깨달아버린 사랑은 카게야마가 감당하기에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그래서 그게 사랑인 줄도 몰랐다. 반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게 곧 사랑인 줄은 몰라 한참의 시간을 헤매어야 했다. 그래서 무리에서 배척당한 마음이 미련이 되어가는 것도 줄곧 모르고 있었다.

 

“그래. 너도 참 너다. 하여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돼.”

“네?”

“별나다는 소리야. 요즘 세상에 누가 핸드폰을 두고 다녀? 몸에 착 붙이고 다녀야지.”

“죄송합니다.”

 

카게야마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반사적으로 죄송하다는 말부터 나왔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혼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이카와의 눈썹이 비대칭으로 굳어지고 입술마저 삐죽거리는 것으로 봐선 그가 화를 내고 있음에는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숙여 오이카와의 시선을 정수리로 받았다.

 

“그리고 너 핸드폰 그대로더라. 옛날 거. 우리 할머니도 요즘엔 스마트폰 쓰셔.”

“…… 그냥… 고장 나지도 않았으니까요.”

 

소중한 것.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핸드폰을 바꾸지 않은 이유를 ‘그 핸드폰에는 소중한 것이 들어있어서.’라고 말했다. 그리고 화면 속 어느 날의 카게야마도 같은 대답을 했다. 쿠니미는 거기서 더 물어보지 못했다고 했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들어오는 바람에 인터뷰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말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알고 있으면서도, 또 알지 못했다.

 

“소중한 게 들어있어서?”

“네?”

“맞잖아. 소중한 게 들어있어서 못 바꾸는 거. 아니야?”

“맞는데. 맞긴 맞는데,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이판사판이었다. 오이카와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느꼈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인벤토리에 포션도 없고 부활할 기회도 제로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만약 손 안에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포션이 가득했고,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도 오이카와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줄곧 외면해온 사랑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서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부끄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밀어낸 감정은 생각보다 상냥했다. 자신이 외면 받아 온 시간에 대해 오이카와를 책망하지 않았다.

 

“소중한 게 뭐야?”

 

무심코 소중한 것의 존재를 인정해버린 카게야마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의 빈자리는 다른 질문으로 채워졌다. 오이카와가 알지만, 또 모르는 것. 그는 카게야마의 소중한 것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안다.

아니, 어쩌면 포함되었다는 표현은 자만일지도 모른다. 제 소중함에서 꾸역꾸역 카게야마를 밀어냈던 과거가 오이카와의 자만을 비웃었다. 그렇다면 관련되어 있다, 정도로 해두자. 오이카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느린 움직임에는 그런 마음속의 갈등이 있었다.

 

“… 전화번호요.”

“누구의.”

 

카게야마가 입술을 꽉, 물었다. 그것은 이미 짓씹고 있는 수준이었다. 때리려면 꺾일 때까지 때려라. 어린 카게야마가 서브 토스의 요령을 물었을 때 오이카와는 엉뚱한 대답으로 카게야마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이 닿지도 않은 곳에서 그를 지리멸렬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리고 또 어디까지 찢기고 흩어져야 이 지긋지긋한 불면不眠에서 해방될 수 있나. 카게야마는 씹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차라리 전부 뱉어내면 속이 시원해질 것도 같아서였다. 오이카와처럼 언변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를 상대로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저 오늘은 자고 싶었다. 오늘 만큼은 눈을 감고 잠에 취하고 싶었다. 당신이 아니라 잠에, 취하고 싶다.

 

“오이카와 씨의 전화번호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오이카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나를 툭, 던졌다.

 

“그게 다야?”

“네?”

“소중한 거 말이야. 내 전화번호가 다냐고.”

 

그럼 더 무엇이 있어야 하나. 고개를 든 카게야마의 시야에 오이카와의 얼굴이 한가득 담겼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낯설어서 어떤 이름의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읽을 수 감정은 ‘허탈함’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틀릴지 몰랐지만, 그랬다.

오이카와는 마치 카게야마의 감정을 한데 뭉쳐 아무렇게나 정리해버린 것 같았다. 미지의 무언가에 호기심을 빛내던 소년이 현실의 하찮음을 깨닫고 눈에서 생기를 없앤 것과도 닮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화가 났다. 이제는, 화가 났다. 자신의 사랑을 만들고, 버리고, 또 멋대로 재단해버린 오이카와에게 화가 났다.

 

“네. 그게 답니다. 그럼 또 뭐가 있어야 합니까? 오이카와 씨가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씀하시면, 그대로 대답해 드릴게요.”

 

그래서 오이카와도 화가 났다. 오이카와는 끊임없이 카게야마를 밀어냈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검은색 크레파스를 들고 카게야마의 앞에 선을 그으며 말했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돼, 너는 내 소중한 사람이 아니니까. 카게야마의 핸드폰이 오이카와의 손을 떠났을 때 그가 그어버린 선은 벽이 되었다. 얄궂게도 그것은 건너편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벽이었다.

보는 것은 할 수 있다. 듣는 것도 물론 할 수 있다. 다만 닿는 것만이 허락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투명한 벽 앞에 망연하게 서 있었다. 오이카와가 만든 것은 선이었다. 결단코 벽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벽 아래쪽 끄트머리에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이름이 박혔다. 그래서 화가 났다. 후회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정말? 내가 원하는 거 그대로 대답해 줄 거야?”

“… 네. 해보세요.”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오이카와의 얼굴이 비쳤다. 오이카와가 사랑하는 청회색의 눈동자였다. 카게야마를 사랑했으므로 그 시린 눈동자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긴 시간을 돌고, 또 돌았으니 내게 남은 건 너를 사랑하는 일뿐인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속으로 사랑을 삼켰다.

습기 찬 여름날이었다. 매미는 지겹도록 울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카게야마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면서 손가락을 살짝 닿은 것조차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카게야마의 심장을 긁었다. 예리한 칼날 같은 것으로 마구 긁어버렸다. 뒷일 따위 알 바 아니었으므로.

오이카와는 언젠가의 여름 뒤로 캔버스를 하나 세웠다. 빛이 바랜 낡은 캔버스였다. 오이카와는 붓끝으로 캔버스 위를 유영했다. 붓을 움직이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여름날을 정면에 두고 그린 그림이었지만 캔버스 속의 두 사람은 어린 오이카와도, 더 어린 카게야마도 아니었다. 서 있는 것은 어리석은 어른 둘이었다.

어깨에 멘 에코백에서 오이카와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는 카게야마의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카게야마는 영문도 모른 채 어벙한 표정으로 그의 힘에 이끌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오이카와가 그 위로 제 핸드폰을 올려두었다.

 

“너 스마트폰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

 

카게야마는 여전히 오이카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옛날부터 사람 속 뒤집어 놓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보란 듯이 핸드폰 아래쪽, 정중앙에 놓인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밝은 빛을 내며 켜진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표정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읽어봐.”

“네?”

“화면에 떴잖아. 시간이랑, 날짜. 읽어보라고.”

 

소중하다는 감각은 그 자체로 무거운 법이다. 소중하니까 무거운 것인지, 무겁기에 소중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소중함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무거운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자신은 카게야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짊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지레 겁먹었던 것이다. 너는 처음 만났던 그 때부터 다른 무엇과도 달랐으므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소중하다는 범위에 넣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소중하다 생각해도 카게야마 하나의 무게만큼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 네 글자는, 그 자체로도 이미, 오이카와에겐 무거웠다.

무수하고도 영원한 밤, 그리고 또 다시 무거운 밤이 오이카와의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지금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무거웠고, 그 무게가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 7월 19일.”

“그리고?”

“23시 59분.”

“딱 좋은 타이밍이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전원이 꺼져가는 화면을 일부러 카게야마에게 보여주었다. 카게야마는 깜깜해진 화면과 오이카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이카와가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한테 축하 받고 싶어.’

 

자신이 머저리인 것만큼이나 카게야마도 머저리라고 생각한다.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 될 기회를 처음부터 빼앗겼으면서 그에게 받은, 그의 이름이 새겨진 전화번호 하나가 뭐가 그리도 소중했는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카게야마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오이카와는 웃으며 다시 다가왔다.

이번에는 뒤로 물러나지 못하도록 아예 카게야마의 허리에 제 팔을 둘러버렸다. 그는 카게야마가 당황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그대로 카게야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오이카와는 그저, 품 안의 소중함을 끌어안았다.

 

“벌써 1분 다 지났겠다.”

 

인기 많은 오이카와의 핸드폰은 잠들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카게야마 토비오, 혼자였다. 오이카와는 힘주어 카게야마를 껴안았다.

 

“토비오. 나한테 할 말 없어?”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 그런 날 만큼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축하 받고 싶다. 오이카와는 그 때 그 마음에서 단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않았다. 달라졌다고 하면, 그것은 거리가 아니라 무게일 것이다. 마음의 무게. 수치로는 잴 수 없는, 만에 하나 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수치에 의미는 없는 마음의 무게가 오이카와의 안에서 달라졌다.

카게야마의 팔이 덜덜 떨리며 오이카와의 등에 닿았다. 늘 닿고 싶었던 등이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등에 닿아, 잠들고 싶었다. 언젠가의 7월 20일, 그 날 새벽부터 줄곧 카게야마는 잠들고 싶었다. 이 등에, 이 소중함에 기대서.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의 소중한 사람은 평생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매년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잠은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달라붙은 밤이 끝없이 펼쳐졌다. 카게야마는 그 밤이 싫었다. 너무 끔찍하고, 또 끔찍하기만 해서 어서 아침이 되기를 바랐다.

비참한 와중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이 다행이었다. 자신이 그의 소중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럴 수 없어도, 오이카와는 가장 특별한 날에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을 터였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그것만이 끔찍함과 비참함 속 유일한, 다행이었다.

오이카와 씨. 저는 오늘 잠들 수 있을까요. 그에게 물어본다 한들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오늘 밤 잠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이카와도 모를 터였다. 그러니 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이 품에 갇혀서, 이 등에 기대서, 밤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등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힘으로 끌어안았다.

 

“생일…──,”

 

사랑을 삼킨 소중함이 온전히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너무 무거워서 자꾸만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원래 사랑이란, 또 소중함이란 그런 게 아니던가.

그런 당연한 것을 쥔 날 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무수하고도 영원한 밤을 걸었다. 무겁고 무거워서, 더없이 소중한 손을 놓지도 않고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음이 늦어지면 다른 한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들었다. 여전히 손은 놓지 않은 채로, 그 밤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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