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과 한 마리 말은 낮의 더위가 식어가는 시간대가 되며 폭증한 인파를 피해가며 저택으로 향했다. 이번엔 릴리도 말에 타지 않고 걸었다. 올 때는 한산했던 길이 돌아갈 시간에는 사람이 몰렸다. 커다란 말까지 데리고 지나가기엔 좀 곤란한 상황이 되어있었던 탓에 나올 때 지난 길을 그대로 거스르지 않고 아예 방향을 틀었다. 

축제 분위기로 물든 곳을 피해서 돌아가는 길에도 연주 소리가 들렸고 흰 것을 걸친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걷는 골목에도 음악 소리와 축제의 소음이 들려왔다. 집 밖에 자수를 놓은 흰 천을 걸어놓거나 벌써부터 장대에 불을 밝혀놓은 곳도 있었다. 밤새 축제를 즐기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릴리가 흔들흔들 갈지자로 걷기 시작했다. 결국 릴리가 필리엔의 손을 잡고 방금 본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그러나 완전히 틀린 동작으로 춤 추기 시작했다. 묵묵히 걷는 느와 주위를 빙 돌며 말에게 무시당하거나 리르먼 옆에서 깝죽거려 리르먼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구경하고 갈래요?"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릴리는 자신이 과했음을 깨닫고 슬그머니 손을 놓고 다시 나란히 걸었다. 하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여전히 하얀 것들이 축제를 알리고 바로 건물 너머에서 음악이 들려오는 곳이었다. 결국 릴리의 발걸음이 다시 잔망스러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자제하려는 것 같지만 들썩이고 마는 릴리의 어깨를 본 필리엔이 가볍게 릴리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반쯤은 그저 걷는 것처럼 아주 느긋하게 움직이며 느슨하게 리드했다. 릴리가 필리엔에게 슬쩍 기대며 올려다보았다.

"축제에서 추는 춤이에요?"

"네. 이렇게 오른발부터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천천히요."

필리엔은 릴리의 뒤에서 가볍게 손을 받쳐 들고 발동작을 보여주었다. 릴리는 대충 필리엔이 움직이는 걸 따라 밀려다니며 썩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진지하게 배우는 자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발을 디딜 자리에 제가 떡하니 버티고 서거나 필리엔에게 뒤로 기대 무게를 싣거나 하며 장난치기 바빴다. 

"필리엔은 이런 걸 어디서 배웠어요? 혹시 중서부인의 교양이라든가 그런 거면 저도 배워야겠는 걸요. 리르먼씨도 출 줄 알아요?"

"그레이스 씨가 보기엔 어떨 것 같으세요?"

리르먼이 빙긋 웃었는데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그래요. 자신감이 참 보기 좋네요. 그럼 이 중에서 이걸 못 하는 사람은 저 뿐이군요."

"어렵지 않으니 저랑 똑같이 하면 돼요."

"그거야 쉽죠."

따라 하는 거라면 릴리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축제에서 여러 사람이 추는 춤이다 보니 그렇게 어려운 동작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복잡하지 않은 스텝을 반복하는지라 배우는 것도 금방이었다. 하기로 마음 먹으니 필리엔이 하는 양을 보고 금세 동작을 익혀서 적당히 동작을 맞출 수 있었다. 

기본 스텝을 익힌 릴리는 곧 제멋대로 응용 동작을 섞으며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을 혼잡하게 쏘다니기 시작했다. 반쯤은 베르타가 선보인 걸 따라 한 것인 덕에 상당히 정신없어졌다. 그래도 본인은 만족했다. 릴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요. 아, 이건 필리엔이 잘 가르쳐서 그런 거죠? 설명 같은 걸 잘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군요."

"안 가르쳐도 릴리라면 잘 했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때가 특수했던 거라고요. 몸을 써서 알려주는 건 그렇게 못하는 편은 아니에요."

"아하,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신다?"

그렇게 말하며 릴리가 필리엔의 주위를 거의 스치듯 빙글 돌았다. 두 번째 바퀴에는 기어코 손으로 등을 쓸며 움직이더니 필리엔의 목에 팔을 감으며 반쯤 쓰러지듯 몸을 기울였다. 필리엔이 자연스럽게 릴리의 상체를 받치자 기왕 그렇게 된 김에 릴리가 폴짝 뛰어 안겼다. 필리엔이 다른 팔로 릴리의 허벅다리까지 척 받쳤다. 릴리가 짠하고 팔을 뻗자 필리엔이 그대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릴리가 와하하 웃었다.

필리엔이 안아 든 것에서 폴짝 뛰어내린 릴리가 그대로 팔짝팔짝 뛰어 리르먼 옆으로 갔다. 농담과 장난과 춤과 음악과 노닥거림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 저조했던 기분이 회복되면서 오히려 양껏 부풀어 오르는 바람에 릴리는 지금 좀 흥분한 상태였다. 릴리가 호흡을 훅 내쉬며 리르먼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아요?"

리르먼은 얼굴이 상기된 채로 눈을 반짝이는 릴리를 향해 함뿍 웃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망아지 같네요."

망아지라니! 아무튼 사람 놀리는 데는 선수였다. 릴리는 코웃음을 치며 대거리했다.

"이왕이면 멋진 명마라고 해주시죠. 저는 지금도 그레이스 집안의 유일무이한 후계이자 당당한 한 사람이긴 하지만 내일모레면 제국 기준으로도 완전히 성인이니까요."

"생일인지 몰랐습니다. 필리엔, 너는 그레이스 씨 생일이라는 걸 나한테 말도 안 해준 거야?"

"어? 아니. 나도 몰랐는데."

갑자기 불똥이 튄 필리엔은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리르먼이 안타까운 걸 보듯이 필리엔을 보았지만 릴리가 좀 더 빨랐다. 리르먼이 동생에게 너는 그런 것도 몰라서 어떡하느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하며 골려대기 전에 릴리가 먼저 말했다.

"그야 제가 말을 안 했으니 모르겠죠. 어차피 제국식이고 서류로나 의미가 있지 저한텐 별 의미도 없는걸요."

이카트가 중서부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자기들만의 문화가 있듯이 그레이스에도 동부만의 문화가 있었다. 지금은 대체로 성인과 미성년자를 나누어 보는 문화가 일상화 되기는 했지만 태어난 날로부터 일자를 세어 18번째 생일 이후에 갑자기 어른이 된다는 방식은 어쨌든 제국의 것이다. 

더욱이 릴리 그레이스의 삶과는 다른 이야기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로렌의 딸은 태어날 때부터 로렌의 딸이니까. 다른 건 전부 부차적인 사항이다.

"정말 생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제국에서 인정하는 성인 기준이라 다른 생일보다 특별날 것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필리엔에겐 그렇게 들렸나보다. 먼 동부의 신비로운 땅에서는 생일을 기념하는 문화도 없다는 식의 오해를 샀다. 

릴리가 필리엔을 돌아보다 못해 아예 뒤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동부도 생일을 챙기고 축하하긴 해요. 집에 있었으면 전통적으로 하는 게 있는데 지금은 아니니까요, 뭐. 아, 로라가 선물로 그날 입을 옷을 지어줬어요. 완성은 이미 했는데 계속 뭐가 부족하다느니 하면서 이것저것 추가하느라 바쁘더라고요. 그래도 당일에 입을 수 있게는 해주겠죠."

동부에서도 생일은 평범하게 축하한다. 다만 릴리의 경우엔 위치가 있다 보니 생일에는 축하보다는 인사를 주고받느라 더 바빴다. 생일을 맞이해서 한 살을 더 먹었으니 후계자에 걸맞은 책임감을 고양하고 로렌의 정신을 잊지 말라는 어머니와 진지한 면담도 기다리고 있었다. 릴리의 기억으로는 생일은 피곤한 날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회가 된 김에 이번 생일은 그냥 조용히 보내려 했던 의도도 없지야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주위 사람들에게 축하 정도는 받는 것도 좋겠지. 애당초 로라가 옷까지 지어주었으니 하루 즐겁게 보낼 생각이기도 했고.

"이런, 선물을 준비하려면 저도 바빠지겠습니다."

"선물은 됐으니까 그날이라도 놀아줄 각오나 해두세요. 두 사람 다요. 요즘에 다들 바쁘다고 하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심심한지 아세요?"

"물질보다 비싼 걸 원하시니 역시 진짜 값진 걸 아는 분이군요."

"신소리 하지 말고요. 필리엔은 특히 유념해야 할 걸요. 하루 내내 안 놓아줄 테니까요."

필리엔이 맹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는 순간에 리르먼이 먼저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때는 정말로 바쁠 겁니다. 좀 큰 가족회의가 있어서 외지에 살던 사람들이 오거든요. 제 대모님까지 오시는지라 며칠동안 저도 필리엔도 정신 없겠죠."

"그래도 내 생일인데 너무하네!"

"너무한 건 생일을 이제 알려준 그레이스 씨겠죠. 미리 말씀하셨더라면 사흘 밤낮이라도 시간을 모두 내어드렸을 텐데, 안타깝게도 소식이 늦은 탓에."

사흘 밤낮까진 필요도 없었다. 물론 준다면야 고마운 일이긴 한데 릴리가 원한 건 그냥 하루를 자신을 위해 써주는 것 뿐이었단 말이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면 미리 선약을 잡아놓아서 이런 일을 피했어야 했던 것도 맞는 소리인지라 아무리 릴리라고 해도 통채로 내놓으라며 더 떼쓸 생각은 못 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조르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마 종일 손님 접대만 하는 건 아니겠죠? 중간중간 시간 정도는 내줄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당연히 노력해야죠. 그렇지, 필리엔?"

적당히 배제 되어있다가 갑자기 호명 당해 대화에 끌려들어 온 필리엔은 지뢰를 모두 피해 리르먼이 깔아둔 활주로에 연착륙했다.

"아, 응. 그렇지. 종일은 아니어도 최대한 시간을 낼게요. 저도 릴리가 태어난 날을 같이 축하하고 싶으니까요." 

"정말이죠? 기대할 테니까 적어도 하루 중의 절반은 저한테 줘야 해요."

"그래요……?"

"어느 분의 말씀이신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 기운이 꺾였으나 두 사람이 달래준 덕분에 릴리가 바로 회복해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필리엔은 자연스럽게 말려들었고 리르먼은 한술 더 떠서 릴리보다 더 뻔뻔하게 맞장구를 쳤다. 리르먼은 오가는 대화에 썩 즐거운 낯을 하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모사했다. 결과적으로 희극적인 묘한 표정이 되어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하루라는 게 자는 시간은 빼고 계산하신 거겠죠?"

릴리는 제법 뻔뻔스럽게 웃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미소를 입은 릴리는 오늘 로라가 힘써 꾸며놓은 덕분에 제법 부유하고 거만한 나으리처럼 보였다. 

"리르먼 씨가 보기엔 어떨 것 같으세요?"

대상만 바뀌었을 뿐 좀 전에 리르먼이 한 말과도 똑같았다. 리르먼은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필리엔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얼굴이었다.

승자의 미소를 지은 릴리가 다시 필리엔 곁으로 가서 손을 잡고 팔에 반쯤 기대었다. 여전히 발재간을 진정하지 못한 채였으므로 필리엔의 팔을 몸으로 조금씩 밀었다. 필리엔은 릴리를 따라 걸었고, 곧 두 사람이 함께 길 위를 흔들거리며 걸었다. 리르먼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꽤 괜찮은 축일이었다.




릴리는 한껏 게으름뱅이가 되어 있었다. 건강에 문제는 없었지만 최근 들어 몇 번이나 혼절을 했던 터라 피곤을 핑계 대니 로라도 별소리 없었다. 릴리는 자신이 여기서 할 일이 없기는 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 필리엔 보고 싶다……. 리르먼이 바쁘지만 않으면 같이 놀아달라고 할 텐데 왜 다들 바쁘지?"

이카트 저택에 속속 손님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이 많다더니 정말로 그런 모양새였다. 덕분에 필리엔도 바쁘고 리르먼도 바쁘고 심지어는 로라마저 바빴다! 릴리는 자수를 놓느라 바쁜 로라 곁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뒹굴거리고 있었지만 로라는 정말로 바빴기 때문에 릴리의 그런 간접적인 시위를 무시했다.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니까 그렇죠, 아가씨. 그리고 언제부터 리르먼 님을 그렇게 편하게 부르게 된 거예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람. 그래도 예전엔 극장에도 데려가고 자주 놀아줬는데 이젠 놀아주지도 않잖아. 심심한데." 

"그 연극 재밌었죠."

로라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로라의 작은 손가락들이 빠르고 정교하게 자수를 놓아 문양을 완성해 나갔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릴리는 리르먼에 관해 생각했다. 그가 들려준 가문의 이름을 받는 자격에 대한 얘기나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본 광경이나 말린 무화과의 식감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벌어졌던 사건까지. 

리르먼과 함께 셋이서 극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소매치기단에게 걸려 곤욕을 치렀었다. 다행히 큰일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위험한 사건이기는 했다. 그냥 물건을 훔치는 걸로 끝내려던 자들이라 다행이지 만약 일이 커졌을 때 그들이 사람을 해치려고 들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지치지도 않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로라의 손을 멍하니 보던 릴리가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반지 하나 때문에 그게 무슨 수모였니? 위험했잖아. 그런 반지 따위 강도에게 그냥 줘버려도 그만인데."

로라가 눈동자만 굴려 릴리를 보았다. 로라도 릴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위험한 행동이기는 했다. 그렇게 로라의 눈은 눈치를 살폈지만 입은 정직하게 진심을 말했다.

"아끼는 반지를 빼앗기기 싫었어요."

"반지가 가치 있어 봐야 그냥 가락지 하나일 뿐이잖아. 미련하게 또 그러지 마."

"하지만…… 그 반지는 아가씨가 주신 거였는걸요."

릴리의 입이 아교를 붙인 것처럼 딱 달라붙어 버렸다. 릴리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온갖 오묘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다 못해 콧김까지 훅 뿜었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로라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정말이지 치사할 정도로 예상치도 못한 감동을 주어 말문을 막다니 정말 너무했다! 

릴리는 잠시 머뭇대다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들린 듯 자수를 놓던 로라마저 놀라서 손을 멈추게 하는 기백이었다. 의도치 않게 로라를 방해한 릴리는 그대로 후다닥 방을 가로질러 가더니만 제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잘 정리되어 있던 것들이 방에 정신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는 몰라도 로라는 나중에 저걸 정리할 생각에 조금 착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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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르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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