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70407 / 한참 오리진 할 때 쓴 캐릭터메이킹용 단문. 이름란에 내 아이디를 적는 바람에 이름없는 아멜 


0.
케일런헤드 호숫가

꼭대기가 달에 닿을 듯 까마득한 첨탑에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평생을 함께 산다. 까마득히 어린 나이에 세상 곳곳에서 끌려와 같은 옷을 받아입은 사람들, 바깥 세상에서 몸에 걸쳤던 의복은 밑단에 진흙이 들러붙은 치마부터 수예업자가 수를 놓은 레이스 셔츠까지 한데 모아 태워졌고 아이들은 자라나며 가족의 이름을 잊었다.
스승을 부모처럼 수련생을 형제처럼, 옷을 입고 벗을 때 항상 등 뒤에 누군가 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입모양만으로 말하는 법을 배운다, 누구와 누구의 관계는 누구나 안다. 비밀은 없다, 비밀이 없어 특별한 일도 없다. 호숫가 마을에서 몰래 들여온 크림이며 연지는 대필한 숙제 그리고 입맞춤과 맞바뀌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런 일들에마저 무관심하다. 수련생 아멜은 거칠게 일어난 핏기없는 얼굴에 걸리적거리지 않을 길이로 자른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호수에서 올라온 습기 때문에 탑 안 공기는 언제나 눅눅했고 식탁에는 민물고기가 자주 올라왔다. 나이든 마법사들은 관절염을 호소했다.



1.
도피

어떻게 이 세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끝없는 땅을 헤매다닌다. 어떻게 하면 이 탑을 떠날 수 있을까? 어떤 이는 더 높은 층에 오르고 싶어한다. 스태프의 금장식 수를 늘려가면서.
아멜은 책을 좋아했다. 서가가 늘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선생들이 짐작하듯 학구열이 높아서도 동기들이 속삭이듯 출세욕 때문도 아니었다. 수련생 대다수에게 마법이란 언젠가 찾아올 운명적인 시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그들 수준을 넘어서는 상급자용 서가는 늘 적막했다. 아멜은 그곳에서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책을 뽑아들고 책장과 책장 사이 틈으로 기어들어가 비스듬한 그림자 속에 몸을 감췄다.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사라지고 발은 두둥실 떠오르고 탑도 아이들의 은밀한 눈짓도 불편한 잠자리도 아무것도 없이 혼자뿐, 오직 나 혼자뿐.



2.
속삭임

때로 목소리를 들었다. 벽 너머에서 장막 저편에서 감미롭고 신경에 거슬리고 유혹적이고 낮고 높고 가늘며 둔탁한, 쇠처럼 무겁고 집처럼 그립고 책처럼 오래된 목소리들이 합창하듯이, 때로는 속삭이듯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 너는 장차 대단한 마법사가 될 거야.
- 천둥을 끌어내리고 햇빛을 얼리고 영혼을 일으켜세울 거야.
그 약속에 자만심을 느낄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도 결국 마법사일 뿐이잖아? 그렇게 대꾸하면 목소리들은 흩어졌다.



3.
선생님

그녀는 수련과정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게 이수했다. 하급반 선생은 그녀에게 같은 말을 두번 할 필요가 없었다. 칠판에 쓰인 지시대로 마나를 부리면 허공에 불이 붙고 손끝에서 서리가 피고 분필로 그은 원 가운데에 뇌우가 내렸다. 돼지와 쥐와 양의 영을 단번에 불러냈고 오래된 마법사의 수수께끼에 능통했다. 무얼 더 배울 필요가 없었다.
수석 마도사의 방에 그래서 불려갔다. 탑에 처음 들어오던 날 보았던 대로 그는 풍성한 흰 수염을 갖고 있었다. 깊은 눈엔 위엄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처럼 훌륭한 마법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므로 경외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수석 마법사가 요구하는 마법을 그녀는 다 부렸다. 손을 흔들고 뻗고 지시하고 상상을 현실로 불러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주문을 완벽히 마치고 나자 수석 마도사가 넌지시 물었다.
이 모든 일을 훌륭하게 해냈는데도 너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가 보구나.
잘 해내면 좋은가요?
어떻게 생각하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수석 마도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열네살 난 소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네가 여기서 무엇인가를 찾게 되면 좋겠구나. 우리에겐 이곳이 집이니 말이다.
그 일이 있고부터 아멜은 특별 수업을 받게 되었다. 지그재그 석조 계단을 올라 템플러가 늘어선 복도를 지나 탑의 심장과도 같은 방의 문을 열어젖히면 커다란 책상 뒤에 선 수석 마도사가 있다. 그들 사이에 많은 말이 오가지 않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탑 밖 아이들이 가진 아버지가 이런 사람일까? 수련 구역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애정을 잘 주지 않았다. 자신을 특별하게 바라봐 주는 애호가 기뻤다. 그 방 안에선 저도 모르게 마나를 부리는 손에 맵시가 들어갔다. 반짝이는 별가루를 책 속에 나오는 유월의 꽃밭처럼 피워내고 숨을 몰아쉬며 옆을 돌아보면 자상한 두 손이 천천히 박수를 친다.
방금 불러낸 별빛이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수석 마도사는 누구와도 집무실을 나누지 않았다. 아멜은 조용히 생각한다. 나도 시험을 통과하면, 어른이 되면, 이 높은 탑의 계단을 위로 위로 밟아 올라가면 이런 방을 가질 수 있을까. 나만의, 오직 나만의 외로운 방.



4.
템플러

들을 그녀는 딱히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거운 갑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수석 마도사에게로 가는 복도를 지키고 서 있거나 그들의 식사 시간을 감시하곤 했다. 수련생 중 몇은 그들을 극심히 증오했음에도, 어쩐지 그녀에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 탑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누가 미워하겠는가?



5.
선택받은 아이

동료 수련생들은 그녀를 약간은 선망하듯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에 별다른 우월감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선망에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선택받은 아멜. 그녀에겐 보증이 있었다. 모두가 그들 앞에 놓인 미지의 시험에서 그녀만은 살아남으리라고 믿었다. 한 번 수련생 구역을 떠난 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중 어떤 아이는 영영 떠나버린다.
- 나는 선택받았나?
어느 잠 오지 않는 밤 그녀는 자문해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별다른 안도감은 들지 않았다.



6.
친구

그녀보다 몇살 더 나이가 많은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어릴적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았는데 이것저것 잘 해주려 하길래 호의를 몇 번 갚았더니 대단히 고마워했다.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어느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가끔 그를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꽤 좋아했다. 그는 나이에 안 맞게 걱정이 많았고 늘 불안해했다. 과제를 제대로 못 해내서 도움을 청하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속 텅 빈 방이며 이곳에 발이 붙여지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 고백할 때 비웃거나 형편 좋은 이야기라고 코웃음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7.
비밀

사실 어렸을 때, 탑에 들어온 지 이년이 채 안되었을 때 아멜은 손등에 피가 맺히도록 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른 일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서가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데 왠지, 막힌 벽 너머 날씨가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거의 확신이었다. 이 칙칙한 돌벽 너머엔 분명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그  상상이 눈앞을 지나가자 있는 줄도 몰랐던 가슴속 열이 덩어리져 치받히고 몸이, 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돌벽을 마구 치고 소리를 지르다 천정을 올려다보고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그러다 정신이 조금 돌아오니 로브는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고 깨져나간 손등은 쓰리리고 아팠다. 몸을 쓰다니 바보같아, 무슨 마법을 써야 하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돌아보니 어린 견습 수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얼굴을 가리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벽에 쓰려던 마법들이 희뿌연 뇌리에 계속 지나갔다, 뭘 쓰면 좋았을까 석권? 낙뢰? 마법사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탑이 고작 수련생의 마법에 무너질 리 없는데도.

가끔 다같이 호숫가로 야유회를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 일은 모두의 정신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8.

아주 멋지고 영웅적인 이야기

이곳에 오기 전, 이제는 기억에 없는 시절 이름을 잊은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 몇 가지를 기억했다. 아니 유모였던가? 나는 귀족의 딸이었던가? 뭐든 간에 이제 자세한 우여곡절은 잊은 그 이야기들엔 언제나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나왔다. 외적의 침입에, 제국의 압제에, 악마의 횡포와 지하에서 올라온 재앙에 맞서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위대한 희생을 하고 세상을 구한다.
마법사의 생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 이야기들을 그저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되뇌어본다. 어느날은 내가 영웅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해보지만 마법사 영웅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구해야 하는 세상이란 걸 영 상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저 벽 너머에는 왕비가 있고 왕이 있고 아름다운 왕자와 귀족과 지붕이 낮은 저택과, 사과나무와 황금 밀밭, 베 짜는 사람이 있겠지? 탑과 상관없고 탑을 모르고 평생 살아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겠지? 그 보통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일지 몰라 아멜은 그들을 구한다는 상상은 도무지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을 구한다고 해도 결국 탑의 마법사밖에 더 되겠는가?








+

어느날 여느 때처럼 특별 수업을 받으러 수석 마도사 집무실에 들어가려는데 문 안쪽에서 노기띈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온화한 수석 마도사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드물게도. 문 앞을 지키고 선 템플러들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어정쩡 복도를 서성이다 문틈을 살짝 들여다보니 한 금발 남자가, 평소 저가 앉곤 했던 책상 맞은편 의자에 등 뒤로 팔이 포박된 채 앉아 있었다. 그는 귀걸이를 했고 술이 잔뜩 달린 금녹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분명 마법사의 로브였지만 탑 안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은 아니었다.
그는 수석 마도사가 무슨 말을 하든 지루하다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틀어 대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틈을 들여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인사를 건네 왔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