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를 조심해야 하는 분들은 읽기를 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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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시마 케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라이온 킹, 로빈 훗, 알라딘, 특히 헤라클레스. 즉 영웅물이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아무리 해도 뮬란만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건 가짜야, 라고 뮬란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어린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뮬란이라는 이름의 뜻을 츠키시마가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의 일이다. 목란木蘭. 즉 목련木蓮. 그때 츠키시마는 이미 목련이 목련목 목련과의 식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꽃은 프로테아목 연꽃과에 속한다. 생김새만 련蓮인 식물.


23살의 야마구치 타다시를 다음과 같은 말들이 수식한다 : 쾌활, 성실, 적극, 성적우수 장학생, 두 개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함, 교내 플라멩코 동아리 회장. 맡은 일을 완벽히 수행.

덧붙여 장기 연애 중. 애인의 생일과 사귀기 시작한 날과 기타 기념일을 절대 빠트리지 않음.

야마구치가 내민 만년필을 받고, 츠키시마는 자신이 한 번이라도 이 만년필을 갖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있었는지 되짚었다. 없었다. 대체 어떻게 야마구치가 만년필에 대해 알았는지 알 수 없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가 아르바이트를 늘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가된 단기 아르바이트의 급여는 애인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쓰인 것이다. 갖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는 꽤 고가의 물건을.

<야마구치, 너 무리하고 있어.>

츠키시마는 말했다.

<무리하는 게 아니야.>

야마구치는 말했다.

만년필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DVD 대여점이 있었다. 츠키시마는 뮬란을 빌렸다. 트레이에 DVD를 얹고 노트북에 밀어넣자 윙 소리가 났다. 츠키시마는 작은 화면으로 고전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츠키시마는 어린 시절 자신이 짚어내지 못했던 위화감의 정체를 짚어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거지.

어린 츠키시마 케이는 영웅물을 좋아했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은 쇄빙선처럼 나아갔다. 전진은 언제나 목표를 향했다. 누군가는 왕위를, 누군가는 백성들의 구원을,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누군가는 있을 곳을. 그러나 뮬란만은 이상했다. 그는 강하고, 악당을 물리치고, 칭송받았으나, 어린 츠키시마 케이는 그가 진짜 영웅이 아니라고 느꼈다.

노트북 앞의 츠키시마 케이는 위화감의 원인을 감지했다. 그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뮬란이 싸우는 이유는 아버지 같기도 동료들 같기도 장군 같기도 황제 같기도 했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뮬란이 받은 것은 박수갈채 한 번이 전부였다. 그 짧은 영광에 만족하기라도 했다는 듯 뮬란은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뮬란은 가짜, 라고 츠키시마 케이는 다시 생각했다.

가짜 영웅. 타인들의 영웅. 츠키시마 케이는 훌륭한 야마구치 타다시를 생각했다.

야마구치 타다시는 주위 모두가 인정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츠키시마 케이는 실패 없이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하고 구직도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고 불안정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음 구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고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가짜 영웅, 이라는 말을 츠키시마는 오래 중얼거렸다.

츠키시마의 생일은 9월 27일이다. 햇볕이 나른한 날이었다. 야마구치의 생일로부터 한 달 반쯤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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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타다시의 생일 전날, 구름이 검었다.

생일에는 못 만나. 다른 중요한 일이 있거든. 그 전날에도 못 만나. 수업이 끝나고 계속 동아리 연습이 있어. 야마구치는 생일 일주일 전 그렇게 통보했다.

생일에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마구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츠키시마는 말했다.

츠키시마는 시내에 야마구치의 선물을 사러 나왔다. 미리 보아둔 물건이 있었다. 예정대로 구매하고 츠키시마는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츠키시마는 노랗게 탈색한 짧은 머리카락의 사람을 보았다. 츠키시마는 그 사람을 야마구치의 동아리 단체사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플라멩코 동아리의 부회장이었다.

야마구치의 말대로 동아리가 연습 중이라면 시내에 있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츠키시마는 몸을 숨기고 핸드폰으로 야마구치가 다니는 대학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동아리 소개를 찾았다. 다행히 회장과 함께 부회장의 연락처가 나와 있었다. 츠키시마는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야마구치 타다시의 형입니다. 타다시가 오랫동안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아 걱정되어서 예전에 타다시에게 받았던 번호로 연락드립니다. 타다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최근에 만나신 건 언제였나요.

어어 별일 없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 연습은 어저께였는데 평소하고 똑같았어요 오늘은 연습이 없는 날이라 아마 도서관이나 자기 자취방에서 공부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가 어느 건물에 사는지 알았다. 야마구치가 늘 지니고 다니는 열쇠의 열쇠고리에 적힌 숫자로부터 야마구치가 몇 호에 사는지도 알았다.

츠키시마는 찾아갔다.

복도 양옆으로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야마구치가 사는 방의 문도 있었다. 낡은 문틈으로 빛이 새어나왔다. 츠키시마는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츠키시마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문 열어. 설명을 들어야겠어.>

정적 이후,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야마구치가 말했다.

<오늘 만나고 싶지 않았어. 이 방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츠키시마는 조용히 경악했다. 방이 순백이었다. 천장과 벽과 바닥. 매트리스와 책상과 의자. 박스 하나와 쇼핑백 하나. 그뿐이었다. 물건들이 야마구치의 방에서 사라져 있었다. 휴지, 빗, 그릇, 전부.

<그렇지만, 들어와.>

야마구치가 말했다.


츠키시마가 침대에 앉자 야마구치는 문을 잠갔다. 츠키시마는 눈짓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택배를 부칠 일이 있다, 라든지 중고 거래를 했다, 라든지 물건 판 돈을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같은 말들을 야마구치가 가끔 했던 것을 츠키시마는 기억해냈다. 그런 말들이 시작된 시점으로 미루어,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버리거나 팔아치우기까지 서너 달이 걸렸을 것이라고 츠키시마는 짐작했다.

바닥에 놓인 박스에는 귀여운 조각 케이크 모양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파티 용품 업체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박스에 담긴 것은 영어 대문자로 내용물의 이름이 적힌 금속제 통으로, 말하자면 헬륨가스 통이었다.


<오늘은 내가 태어난 지 23년 365일째야. 내일이면 24살이 돼. 24는 좋은 숫자지.>

야마구치가 말했다. 야마구치는 말을 이었다. 츠키시마의 차례는 없었다.

<전갈자리는 오리온을 찔러 죽인 전갈이래.>

야마구치는 말을 이었다.

<내일 낮에 태양은 전갈자리를 지나가.>

야마구치는 말을 이었다.

<24년이면 인생을 완성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어.>

쇼핑백에 담겼던 물건들을 야마구치가 꺼내놓았다. 비누와 수건이 있었다. 그 외에는 전부 야마구치가 내일의 목적을 위해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가장 먼저 이 방법을 시도할 거야, 실패하면 이렇게 할 거야, 만약 문제가 생기면 이걸 쓸 거야, 라고 야마구치가 하나씩 말했다. 여행용 알약 케이스가 가득 차 있었다. 야마구치가 각 약물의 효과를 설명해주었다. 케이스에 담긴 알약들은 색이며 형태가 다채로워, 미니 애프터눈 티세트나 와인 플래터처럼 보였다.

야마구치가 설명을 마쳤다.

<내일 정오에 하려고 해.>


<……완전한 수로 여겨지는 건 24보다도 12, 아니면 60이지.>

츠키시마가 말했다.

<그리고 내일 태양이 지나는 건 전갈자리가 아냐. 천칭자리지. 전갈자리는 네 별자리일 뿐이야. 실제 천체하고는 차이가 있어.>

<만나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잘못 생각했나 봐. 너한테 생일 선물을 안 받고 24년이 완성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야마구치가 말했다. 츠키시마는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전기 콘센트는 살아 있었다. 츠키시마가 자기 손으로 플러그를 꽂았다. 츠키시마가 산 것은 캔들 워머였다. 향초를 얹었다. 향초가 은은하게 녹아내렸다. 화이트 매그놀리아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향이 퍼져나갔다.

츠키시마는 선물을 택하던 순간을 회상했다. 연인 간의 선물로 유행하는 것은 향초보다는 향수였다. 그러나 향초여야만 할 것 같았다. 야마구치의 방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츠키시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흰 꽃의 향이 방을 채웠다.

청아한 향으로 물든 방은 더욱 새하얘졌다. 야마구치의 얼굴이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츠키시마는 그가 삶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시트도 이불도 없이 한 섹스는 처음이었다. 조금은 더러워진 채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애욕이라는 명분으로.

수건은 한 장밖에 없었다.

<사와야겠어. 내가 먼저 씻고 밖에 나가서 한 장 더 사올게.>

<그러지 마.>

<새 물건을 가지라는 게 아니야. 당장 필요하니까 사자는 거야.>

<안 속아, 츳키.>

<……수건 한 장을 둘이서는 못 써.>

<괜찮아.>

츠키시마에게 기어코 앞 차례를 양보하고, 축축해진 수건으로 야마구치는 자신의 몸을 닦았다. 물기가 남은 자신의 몸에 차례대로 옷을 입혔다. 벗기 전에 입고 있던 차림 그대로였다. 야마구치는 단정하게 입었다. 바짓단을 한 단 접어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트까지 맸다.

<만나야 하는 거였네.>

야마구치가 말했다.

<이제 됐어. 네가 와주지 않았으면 미완성인 채로 끝났을 거야. 와줘서 고마워.>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야마구치의 윗옷을 적셨다. 츠키시마도 마찬가지였다. 한 벌 남은 야마구치의 옷은 캐주얼한 외출복이었다. 떠나는 사람의 차림이었다.

<아직은 못 가.>

<넌 머리가 짧으니까 금방 마를 거야.>

<우산이 없어.>

츠키시마가 말했다. 어느새 비가 도로를 적시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야마구치는 창밖을 보았다. 빗소리는 순식간에 거세어졌다.

<금방 그칠 거야.>

야마구치가 말했다.


츠키시마는 안경을 벗었다.

<아니, 날이 밝기 전까지는 안 그칠 거야.>

츠키시마는 안경을 접어 빈 책상에 올려놓았다.


츠키시마의 겉옷이 롱코트였다. 둘은 시트 없는 매트리스에 누워 코트를 나누어 덮었다. 상반신 정도는 코트가 덮어주었다. 캔들 워머는 계속 작동되고 있었다. 방에 들어찬 화이트 매그놀리아 향에 머리가 어질했다.


목련에는 꿀샘이 없다. 목련은 꿀을 만들어 나비나 벌을 불러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목련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츠키시마는 더는 뮬란이 가짜라고 느끼지 않았다.

뮬란은 왕위도 백성들의 구원도 부와 명예도 있을 곳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뮬란에게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츠키시마는 떠올렸다. 뮬란은 자신을 원했다.

24년이면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야마구치는 완성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목련은 딱 보름 피고는 진다.


밖에서는 우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들이 영역다툼을 하며 울부짖는 소리였다. 야마구치의 방은 정갈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매트리스를 적셨다. 그러나 금세 마를 것이었다. 비 역시, 금세 내렸으니 금세 그칠 것이었다. 비가 그치고 아침이 오면 츠키시마는 떠나야 했다. 그러고 나면 야마구치를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도한다면, 구원을 달라 기도할 수는 없었다.

자비도 긍휼도 아니었다. 야마구치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츠키시마는 비가 영원히 그치지 않기를 기도했다.

목련 향기가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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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야마 교류회 참가자 분들께 단어를 하나씩 받아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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