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짤대 

외전 #1 

w.데자와 



넌 내가 지킨다



봄맞이 단합대회 공고가 붙었다. 심지어 피 같은 주말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단체행사에 체육대회냐는 볼멘 소리가 나왔지만 최근 임원이 바뀌어 강경 성향을 띠게 된 지원부문은 사내 여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듣자하니 지원부문 내에서는 주말에 등산까지 끌려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신규사업팀 회식 자리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인사팀 사람들이 상사 욕을 걸쭉하게 하고 있어서 알게 된 정보였다. 가려면 지 혼자 가지 왜 아래 직원들까지 동원해서 서울 근교 산이란 산은 다 정복하려드는 거냐며 분노를 토해내던 하대리는 다음날 단합대회 기념 타월 제작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다. 심지어 지원부문장이 하대리를 딱 찝어 하달한 지시사항이었다.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어! 지원부문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을 찾은 하대리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울부짖었다. 그때 마침 화장실로 들어선 지훈은 뭔 일인지도 모른 채 한참 선배인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었다. 


괜한 데 힘 뺄 필요 없으니 단합대회 따위 일찌감치 떨어지고 쉬면 된다던 임원들의 태도가 어째 시간이 갈수록 변했다. “1등은 안 해도 되는데, 00본부는 이기자.” 혹은 “XX부문한텐 절대 지면 안 된다.” — 이런 식으로.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법이다. 경쟁 구도가 일단 형성되면 이 모든 게 별 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기는 또 싫어진다. 본부 및 부문 대항전으로 구도가 짜여지다 보니 임원들간의 견제 및 자존심 싸움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이번에 바뀐 지원부문장의 성향이 딱 그랬다. 화합과 상부상조보다는 경쟁과 적자생존을 중시하는 사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A를 줄이고 C를 더 많이 뿌리는 방식으로 고과 평가 비율 자체를 바꿀 예정이라고도 했다. 끔찍한 일이지. 소문을 전하며 옹팀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과와 연동되는 성과급이 대폭 줄어들테니 회사 전체로 보면 인건비가 절감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팀워크나 로열티에 나쁜 영향만 끼칠 거라며. 


그래서 단합대회 날이 다가올수록 신입들의 잡일이 점점 많아졌다. 처음엔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몸만 와서 잘 놀다가면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하던 지원부문에서 가급적이면 편 구분이 가도록 본부/부문별 유니폼을 따로 맞춰 오라는 메일을 팀장급들에게 뿌렸다. 뒷처리는 당연히 사원들의 몫이었다. 팀내 막내들은 원래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회의실에 모였다. 그리고 어떤 디자인 무슨 컬러의 단체복을 맞출 것인가, 예산은 어느 계정에서 끌어올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하루를 쏟아부었다. 임원회의가 끝날 무렵엔 지원부문장이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자기는 그런 걸 시킨 적이 없는데, 아래 직원들이 응원전까지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서 너무 대견하다고. 그런 마른 장작을 임원들 다 모인 자리에서 던져버렸으니 이건 뭐 부문간 응원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다. 


단 한 곳, 신규사업본부만이 예외였다. 전사의 대리급 이하 실무진들이 주경야독 하듯 낮에는 업무 밤에는 단합대회 준비를 하는 와중에 신규 직원들만이 평온하게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데 기력 빼지 말고 원래 할 일만 잘 하자는 강다니엘 본부장의 지시 덕분이었다. 단합대회에 아예 불참할 수는 없으니 단체복만 적당한 단가 선에서 맞추라는 첨언에, 박지훈 대리 총괄 비공식 TFT가 꾸려졌을 뿐이었다. TFT라고 해봤자 신입사원 라이관린과 이승희가 더해진 단 세 명 짜리 구성이었지만. 


“이 색 예쁘지 않나요?”

“......아...”


거의 만점에 가까운 학점과 토익 점수, 중국어 중급 실력과 2개의 공모전 당선 이력. 미친 경쟁률 만큼이나 미친 스펙으로 무장한 끝에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N 인터네셔널에 들어온 승희에게 입사 2주만에 닥친 위기였다. 화장한 제 눈보다도 더 큰 눈망울을 도르륵 굴리며 후배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제 사수, 박지훈 대리. 그가 들고있는 노오란 색 티셔츠를 한 번 봤다가 그 강렬한 색상에 시력이 저하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승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별로에요?” 

“아... 별로인 건 아닌데요......”

“네, 별로에요.” 


난처한 승희를 구원해준 건 입사 동기 관린이었다. 승희의 바로 옆에 훤칠하게 서있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노오란 티셔츠 샘플을 옆으로 밀었다. 박대리의 잘생긴 얼굴이 옷주름과 함께 와락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린은 제 할 말을 했다. 


“대리님. 이거 너무 대리님 스타일이에요.” 

“힝구.”


시발. 박대리님! 그 얼굴로 저런 의성어라니요. 존나 너무 심각하게 귀엽잖아요! 승희는 내적 흥분을 잠재우기 위해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길게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색깔 이쁜데...”

“대리님한테만 이쁘면 안돼요. 다른 사람 눈에도 예뻐야 돼요.” 

“그럼 승희씨 의견 마저 들어보죠. 승희씨, 솔직하게 얘기 해주세요. 이 중에 뭐가 제일 이뻐요?” 

“어... 그러니까... 그게요......”


평소엔 순하디 순한 관린이 오늘따라 강직했다. 지훈 역시 물러섬이 없었다. 나름 확고한 패션 철학을 가진 두 명이 맞붙었으니 난데없이 등이 터지는 건 승희였다. 말꼬리만 질질 끌고 있자니 두 쌍의 눈이 대답을 채근했다. 


“전 이 색 좋은데요.” 


승희의 갈등은 손쉽게 종결되었다. 쌩뚱맞게 등장한 부문 최고 권력자에 의해. 탕비실 문을 열고 나타난 강다니엘 본부장이 박지훈 대리가 고른 노란 병아리 색상에 한 표를 던졌고, 의사결정은 그걸로 끝이었다. 관린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간택 받은 티셔츠를 집어들었다. 자신이 이 옷을 걸쳐야 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


대망의 단합대회 날이 밝았다. 조기 축구회 개근 회원이라는 총무팀 권대리가 평소 자주 뛰던 고등학교 운동장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헛말은 아닌 듯 <2018 N 인터네셔널 봄맞이 단합대회> 플랜카드가 교문에서부터 펄럭이고, 천막이 쳐진 구령대 위에는 대체 어디서 갖고 왔는지부터가 의문인 푹신한 소파 의자들이 놓여졌다. 대표이사 및 임원들이 앉을 상전 전용 좌석이었다. 


그러나 절반 정도의 임원들은 현재 운동장 귀퉁이에 서있고, 또 절반의 절반 정도는 운동장도 구령대도 아닌 애매한 위치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다. 로열 패밀리 출신 임원 — 강다니엘 본부장이 제 휘하 평사원들과 함께 몸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랫 것들이 땀흘리며 뛰는 동안 천막 아래에서 고상하게 호텔 도시락 까먹고 낮술이나 할 생각이었던 50대 임원들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블랙 커피 디스펜서만 잔뜩 있고 다방 커피는 하나도 없다며, 오늘 행사의 케이터링을 담당한 직원을 한창 타박하던 지원부문장이 10분에 걸친 설교를 드디어 마치고 임원석으로 돌아왔다. 대표이사야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늦게 오신다 했으니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당연한데, 다른 임원들도 근처에서 어정거리기만 할 뿐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그가 영업본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편한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 무얼 하고 계십니까.” 

“아, 문이사.” 

“이상 기온이라 3월이라 해도 날이 덥습니다. 어서 올라들 가시죠.” 

“그게... 말이지. 강본부장이 저기서 저러고 있어서 다들 차마...”


영업본부장이 가리킨 곳에는 노란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 차림을 한 강다니엘 본부장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길게 뻗은 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것이, 배경지식 없이 보면 N 인터 임원이 아니라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운동선수의 몸 같았다. 


“강본이야 젊으니까요. 우리는 저러면 무릎에 바람 듭니다.” 

“그래도 로열 패밀리가 저러고 있는데...”

“그래봤자 서자죠.” 

“문이사!”


행여나 누가 들었을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영업본부장을 뒤로 하고, 지원부문장이 구령대 계단을 올랐다. 이미 와서 앉아있는 제 사람이 둘. 그들과 눈으로 인사를 나누며 대표이사 바로 옆 자리에 앉았다. 샛노란 색을 입어 더욱 눈에 띄는 강다니엘이 모래 먼지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그래봤자 서자. 애송이. 


지원부문장은 방금 전 제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읊조려 보았다. 그래. 제 아무리 호랑이 새끼라 한들, 다 크기 전에 잡아버리면 될 일이다. 지레 겁 먹을 이유는 없었다. 


*


“N 인터네셔널 임직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희는 오늘 일일 MC를 맡은—”

“옹!” “성!” “옹!” “성!” 

“네! 신규사업팀장 옹성우,”

“총무팀장 윤지성입니다!” 

“오늘 컨디션 다들 좋으신가요? 저는 긴장돼서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대표님 앞 PT보다 더 떨리네요옹—” 

“왜요? 노잼일까 봐요? 근데 옹MC님, 저희 벌써부터 노잼 스멜인데 어쩌면 좋죠?”

“아악! 노잼 앙대— 노잼 시러—”


지훈은 옹팀장의 비즈니스 애교를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로 무려 석달 가까이 옹팀장으로부터 놀림을 당했던 지훈이었다. 안그래도 장난기가 흐르고 넘치는 그가 그런 대형 떡밥을 물어버렸는데, 그걸 그냥 묵힐 리가 없었다. 회의 중간에 지훈과 눈만 마주쳐도 온 얼굴 근육을 다 써가며 윙크를 날리고, 팀원 생파 때는 폭죽 잔해를 주워서 부러 지훈 앞에서 다시 뿌리는 통에 지훈은 그날의 이불킥 사건을 잊을만 하면 떠올리고 또 떠올려야 했다. 그러니 지훈은 반드시 복수를 해야했다. 오늘의 흑역사를 박제해서 두고두고 놀려 드리리라.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무대를 씹어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지훈은 자신을 두고 뒤에서 어떤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몰랐다.


“본부장님! 짝피구 룰이 원래 그래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나요? 인터넷 아무리 찾아봐도 남녀가 짝을 지어야 한다는 말은 없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이번 단합대회 짝피구에 적용할 룰은 남녀 한 팀이라니까요.”

“그러니까 그걸 누가 정했냐구요.” 


이번 단합대회 프로그램을 짠 총무팀 권대리가 한숨을 쉬었다. 고작 짝피구 룰을 두고 강다니엘 본부장이 너무 강경하게 어필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램 진행이 지체되지 않도록 협조 부탁드린다며 간곡한 부탁을 드렸지만 강본부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부문간 남녀 성비 격차였다.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짝피구 경기를 위해 지원 부문과 신규 본부의 페어 수를 맞춰야 했는데, 지원 부문의 여성 직원 수가 신규 본부보다 많았던 것이었다. 권대리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신규 본부 페어 수에 맞춰서 지원 부문의 참가 인원을 줄이면 되겠다고. 그렇게 참가자 정리를 하고 있던 차에 강다니엘 본부장이 반기를 들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남x남 페어는 왜 인정하지 않느냐고. 그는 지원 부문의 참가자를 줄일 필요 없이 신규 본부에서 남x남 페어를 더 출전시키면 된다고 주장했고, 이에 권대리는 주최측 입장이 아니라 지원 부문의 일원으로서 반대했다. 


“본부장님 말씀 대로 하면 지원 부문은 남녀 20쌍 참여인데, 신규 부문이 남녀 19쌍, 남남 1쌍 이렇게 참여하면 전력 자체가 차이나게 됩니다.” 

“그럼 지원 부문이 신규 부문 전력에 맞춰서 똑같이 남남 페어를 하나 넣으면 되잖습니까.” 

“......”


신박한 해결책이긴 했다. 아니 그전에, 이렇게까지 해서 본부장이 짝피구에 참가하려고 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권대리였다. 


결론적으로 강다니엘 본부장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강본님 말대로 짝피구가 꼭 남녀 커플만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법도 없고, 어차피 동일한 조건만 유지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지원 부문 내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뽑힌 지원 부문의 선수 군단이 한줄로 섰다. 19쌍의 남녀와 인사팀 남자 대리 페어를 본 신규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평가 담당 김재환 대리랑 전보 담당 하성운 대리라니. 이거 뭐 무서워서 저쪽에 공 한 번 제대로 던지겠어요?” 

“그쪽은 그럼 본부장님부터 빼세요! 임원한테 공 던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 말도 맞다. 룰까지 바꿔가며 피구 경기에 끼어든 강다니엘 본부장이 씨익 웃었다. 박지훈 대리의 뒤에 버티고 서서. 


그러니까, 원래 지훈과 짝이었던 승희를 밀어내고 강다니엘이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이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제가 축구 말곤 구기 종목이랑 친하질 않아서요.”라고 선수를 치며 앞에 선 박대리의 어깨 뒤로 숨었다. 그러자 짐짓 근엄한 얼굴을 한 지훈이 “본부장님은 제가 지킵니다!” 하고 주먹 쥔 두 손을 옹골차게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본부장을 비롯한 신규 직원들이 모두 주먹을 입에 물었다. 분명 승희와 서있을 때는 건장해보였던 지훈의 어깨와 덩치가 본부장 앞에 서자 상대적으로 쬐끄매진 것도 귀여움 포인트인데, 본인은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제 몸으로 본부장님을 지켜드리겠다는둥 학교 다닐 때 별명이 피구왕 통키였다는둥 신이 나서 뽀짝거리고 있으니 귀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승희는 고개까지 돌려가며 주먹울음을 터뜨렸다. 분명 신입은 자신이고, 저 분은 대리에 사수인데 어째 반대인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게다가 뒤에 떡하니 강다니엘 본부장이 서있으니 미남 뒤에 미남이다. 그 옆에는 황민현 책임이 서있고 저 앞에선 팀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아아, 이것이 바로 무릉도원인가. 죽을 힘을 다해 N 인터네셔널 입사하길 잘했다. 승희는 기쁨의 눈물을 삼키며 취준하느라 죽어났던 과거의 자신에게 엄지를 치켜 올렸다. 바뀐 짝인 이대리가 그런 승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누가 이 남남 페어들에게 공을 던지겠냐고 했던가.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진영 사이에는 무시무시한 불꽃슛이 오가고 있었다. 특히 김재환 대리의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그의 공을, 박지훈 대리가 온몸으로 잡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데칼코마니처럼 공을 주고받는 와중에 둘의 뒤에 달린 피보호자들만이 정반대였다. 아무리 몸을 구겨도 전혀 숨겨지지 않는 180의 덩치와, 재환 대리의 등 뒤에서 휙휙 잘도 숨는 작고 소중한 하셍운 대리.


그렇게 핑퐁이 수십 번 왔다갔다 했지만 너무 치열해서 오히려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미 이전 경기를 끝내고 온 기획부문 사람들이 이거 대체 언제 끝나냐고 투덜거릴 무렵, 튀어나온 돌부리에 맞은 공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박지훈 대리의 옆 얼굴 방향으로 맹렬하게.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원부문의 남남 페어와 대치 자세로 서있던 지훈 대리가 공의 존재를 눈치챘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아 안돼! 그 자리의 모든 이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저 국보 99529호 같은 얼굴이 공을 맞는다니. 


하지만 국보는 보존되기 마련이다. 지금껏 지훈의 뒤에 잘 쭈그러져 있었던 강다니엘 본부장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찬 배구공이 그의 손바닥을 강타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을 본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몇 초 후 지원부문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본부장님 아웃! 아웃! 


이후 신규본부는 급격히 무너졌다. 최전방 박지훈이 사라지자 김재환 대리가 펄펄 날뛰었고, 피구 신이 강림한 듯한 그의 플레이에 생존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나가 떨어졌다. 결국 승리를 거머쥔 지원부문은 기획부문과의 다음 대전을 위해 옆 세트로 유유히 떠났다. 


“본부장님 지금 배구 하세요?”

“무슨 뜻인가요?”

“거기서 공을 잡아야지 스파이크를 하시면 어떡해요. 이건 피구잖아요.” 


옆에 놓인 생수병을 뜯어 목을 축이던 다니엘에게 지훈이 겁도 없이 쫑알거렸다. 저 편에서 누군가가 발로 모래를 찼는지 흙먼지가 날아왔다. 다니엘은 둘 사이에 부옇게 날리는 모래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뿔이 난 지훈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내가 말했잖아요. 축구 말고 구기 종목이랑은 안 친하다고.”

“구기랑 왜 안 친해요. 지난 번에 골프도 치러 가셨잖아요.”

“내가 언제요.”

“지난 번에...! G그룹 차남이랑 라운딩 있다고 아침에 저 놔두고...”

“놔두고......?”


헙. 지훈이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왼쪽 오른쪽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는데, 저럴 거면 말을 꺼내질 말든가. 다니엘한텐 회사에서 티 낸다고 맨날 퉁을 주면서 정작 들키기 직전까지 몰고가는 건 지훈이다. 다행히 다들 응원전 얘기를 하느라 둘에게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아 들은 이는 없는 듯 했다. 다니엘이 이럴 거면 비밀 연애가 무슨 의미냐며 지훈의 볼을 가볍게 꼬집고 있을 때였다. 


무대에서 열심히 MC를 보고있던 옹팀장이 잠시 짬이 생겼는지 신규본부 천막 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왔다. 목이 말라 죽겠다며 다니엘의 손에 들린 생수를 뺏어 마신 그가 이번엔 신규 직원들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던 승희를 급히 불렀다. 


“잘 되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아무 것도 준비를 안 하고 있다가 오늘 갑자기 맞춰보는 거라... 다들 어려워 하시네요.” 

“흠... 결국 그걸 써야 하는 건가. 승희씨, 그거 준비는 해놨죠?”

“아... 그거 결국 쓰시게요?” 

“그거 말곤 답이 없으니까요.”

“그럼 누가...”


승희가 말을 하다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옹팀장의 시선 역시 어떤 방향을 향했다. 


“왜... 절 쳐다보시나요?”

“팀장이 팀원을 쳐다보지도 못 하니.” 

“아니. 그런 사무적인 표정이 아니시잖아요, 지금.” 


지훈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부사수 신입마저도 이미 옹팀장의 편인 듯, 그와 똑같은 미소를 띠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지훈아.” 

“네.”

“우리 본부만 응원전 준비 안 한 거 알지.” 

“네.” 

“근데 하긴 해야 된대.”

“......”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말을 잇지 않아도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해서 뒷걸음질을 치던 지훈의 등에 바위 같은 몸이 부딪쳤다. 다니엘이었다. 지훈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잡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본부장님, 감사합니다.” 

“팀장님! 저한테 또 뭐 시키시려구요!”


악악거리며 발버둥치는 지훈의 상체를 뒤에서 안아버린 다니엘이 어서 얘기하라는 식으로 옹팀장에게 눈짓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반나절만에 구호 외우고 빡세게 굴려지는 것보다, 누군가가 총대 메고 장기자랑 한 번 하고 오는 게 사회 전체의 후생이 더 커지지 않겠니?” 


웃으며 윙크를 하는 옹팀장의 뒤로 승희가 커다란 짐꾸러미를 끌고 왔다. 이번엔 관린이도 함께. 지훈은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 제 상체를 힘껏 두르고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상사 of 상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자, 이번엔 신규본부의 차례죠?”

“MC 옹님, 듣자하니 신규본부에서 이번 응원전을 위해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던데, 진짜인가요?”

“하하. 저는 지금 신규팀장이 아니라 MC 옹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옹.” 

“발뺌하시는 걸 보니 진짜 대단한 걸 준비하셨나 보군요. 그럼 빨리 그 비장의 무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해주세요!” 


스피커 음량이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작년 대히트를 쳤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메인 테마 곡이었다. 신규 직원들이 교복 입고 우르르 뛰어 나와서 삼각형 대형이라도 서는 건가. 타 부문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쯤 신규본부 천막에서 웬 곰탱이 하나가 또르르 굴러나왔다. 굴러나왔다는 표현이 맞는 게, 누군가에게 엉덩이라도 차인 듯 갑자기 튀어나와 운동장에 털썩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모래 위에 앉은 밤색 궁뎅이 옆으로 먼지가 날리고, 노래의 간주 외엔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는 그때. 망연자실 앉아있던 곰탱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엥 저게 뭐야’의 반응이 ‘헐 존나 씹덕’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갈색 곰탱이는 춤 자체는 꽤 잘 추는 편이었지만 둘러 쓴 옷이 옷인지라 모든 동작이 모에화 되는 효과가 있었다. 아니, 정정. 그 와중에 잘 추는 게 더 씹덕 포인트였다. 격한 안무에 맞추어 씰룩씰룩 움직이는 엉덩이와 자연스레 흔들리는 동그란 꼬리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엄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다른 부문처럼 화려한 마스게임을 하거나 카드섹션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원맨쇼로 무대를 채우고 있는데 허전하거나 빈 느낌이 들지 않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1절 도입이 끝나고 싸비가 나올 즈음 천막에서 인형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평창보다 유명해진 하얀 호랑이. 수호랑이었다. 


나란히 선 두 인형이 뽀짝거리며 무대 위를 누볐다. 뒷부분은 안무 숙지가 덜 된 듯 애드립 막춤이었지만 이미 씹덕 터진 마당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곰탱이의 귀여움에 수호랑의 인지도가 더해지니, 어쭙잖게 연습한 마스게임이나 단체 군무보다 반응이 훨씬 좋았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음이 터지고 N 인터 홍보 인스타에는 곰탱이와 호랑이의 댄스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업로드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 곡이 끝나는 순간에 맞추어 곰탱이와 수호랑이 꾹 쥐고있던 꽃가루를 공중으로 날렸다. 물론 옹팀장이 억지로 쥐어준 무대 장치였다. 원래 트라우마는 이렇게 똑같은 상황을 경험함으로써 강인하게 극복해야 하는 거라며. 


“와, 너무 귀여운 응원이었습니다. 그나저나 곰과 호랑이라니. MC 옹님, 아, 아니, 지금은 옹성우 신규 팀장님. 신규본부의 퍼포먼스는 단군신화를 상징한 건가요?”

“네네, 맞습니다. 사실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다가 둘이 눈 맞아서 도망 갔다고 하죠. 저희 신규본부는 인간의 육식 본성을 거스르는 구내식당의 채식 위주 반찬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기획, 전사의 후생 증가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을...”


뒷 내용은 옹팀장의 머리에서 방금 나온 아무 말이었지만 눈 맞아서 도망간 곰과 호랑이 썰은 사실이었다. 최소 2018년 봄의 곰탱이와 수호랑은 그러했다. 


*


“지훈 대리 수고했어! 너무 잘했어!”

“대리님 짱이에요. 너무 귀여우셔요.”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오자 팀원들이 부둥부둥 껴안고 난리였다. 지훈은 급히 인형탈을 벗으며 소리 쳤다. 


“저! 저 화장실!”

“인형 옷 벗기 전에 단체 사진 남겨야...”

“아 저 진짜 급해요! 이따 갔다와서 찍을 게요!”


이대리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이밀며 막았지만 이미 털옷도 훌렁훌렁 벗어버린 지훈은 반대편 천막을 들추고 뛰어나가버렸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물처럼 벗겨진 곰 털옷과 바닥을 구르고 있는 커다란 머리만이 남았다. 


“저, 그럼 본부장님이라도—”

“아. 저도 화장실 가려구요. 갔다와서 이따 다 같이 찍죠.” 


하얀 호랑이 탈을 벗자 백호만큼이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강다니엘 본부장이 호랑이 옷을 마저 벗었다. 옷 뭉치를 자루에 넣으면서도 지훈이 빠져나간 천막 귀퉁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그가 슬쩍,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연고통을 집어들었다. 체육대회에 수반되는 자잘한 부상을 대비하여 막내가 챙겨놓은 상비약이었지만 그 용도는 조금 달라질 예정이었다. 


천막을 들추자 교사(校舍)로 뛰어 들어가는 지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같은 방향으로 느긋하게 걸어가는 다니엘의 입가에 봄 같은 미소가 걸렸다. 



오동통통 귀염뽀짝 뒷태의 주인 잡아먹으러 갑니다



트위터 @tejava_milkt

데자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