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드라마에서 저승사자가 마지막에 차를 먹이고 그 찻잔을 보관하더래요. 그걸 보더니 눈이 돌아서 그때부터 찻잔을 모으기 시작한 녀석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차는커녕 아무것도 안 먹이거든요. 대체 왜 모으는지 몰라.”

“천천히 좀 가게.”

“날개를 달아드렸는데 왜 이렇게 느리세요?”

“날개를 단 건 처음이란 말일세.”

“토르 님이 집요하게 요구하셨으니 저와 같이 다니셔도 된다고 허락해드릴게요.”

“오, 드디어 내 호의를 받아들이는 건가? 잘 생각했네.”

“받아들이지 않아도 끝까지 따라붙으실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리고?”

“보고할 때 토르 님 이름을 팔면 정상참작될 여지가 있잖아요.”

“허허.”

“제가 대놓고 토르 님을 판다고 했는데 화나지 않으세요?”

“처음 겪는 일도 아니라네.”

“오딘의 아드님이신데요?”

“로키가 나를 자주 팔아먹었지.”

“진짜 대단하시다……토르 님, 동생 분에게서 저 지켜주기로 약속하신 거예요?”

“그대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저는 말단이에요. 힘이 없다고요.”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나.”

“…….”

둘러댈 말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토르를 향해 치솟는 욕설을 삼키는 것인지, 잠시 저승사자의 말이 없어진다. 아마 저울질하는 중이겠지. 토르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의 이름을 팔아 징계를 줄일 것인지,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윗선에 탈탈 털릴 것인지. 이 상황 자체를 만들어낸 문제의 원흉인 주제에 토르 나비는 지금 서툴게 균형을 잡아나가는 일에만 집중한다. 믿을 수 없을만큼 화창한 날씨에 바람 한 점 없는 곳이지만 날개를 파닥이는 토르 나비는 꼴사나울 정도로 흔들린다. 걸음마를 뗀 이후로 균형을 잡는 것이 이토록 어려웠던 적이 있었는지 잠시 궁금해졌지만 그 생각조차 오래 할 여유가 없다. 제가 파닥이는 날개에서 이는 솜털 같은 바람에도 전신이 흔들린다. 슬슬 멀미가 나는 기분이라, 토르 나비는 지금은 어디 붙었는지 알 수도 없는 입이 마르는 것만 같다.

“……열과 성을 다해 저를 보호해주셔야 해요.”

“이를 말인가, 친구.”

“친한척 하지 마시고요.”

“어허. 왜 이렇게 수줍어하나. 이런 인연을 친구가 아니면 무어라 할텐가?”

“악연이죠. 진짜 친해지면 얼마나 더 살떨리는 일을 겪을지 생각만해도 소름끼쳐요. 절대 사절이예요.”

“매정하군.”

“어차피 이번 일 끝나면 다시 만날 것 같지도 않은데요, 뭐. 지금부터 대충 설명해드릴 테니 집중하세요. 저를 만나지 못해 세상을 떠도는 영혼이 8천. 그들을 데려오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이제 영혼을 구분하실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일단은 저와 함께 다니시면서 영혼을 거두는 일을 도와주세요. 그 굉장한 직감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알았, 억-”

“토르 님?”

돌아오는 말의 맺음이 영 개운치 않아 저승사자가 뒤를 돌아본다. 조금 전에도 생각했지만, 기나긴 영생 가운데 이토록 황당한 날은 참 오랜만이다.

“나비가 왜 나무를 들이받아요? 그런다고 얘가 부러져요?”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네.”

벚나무를 들이받고 벚꽃 사이에 끼인 토르 나비를 발견한 저승사자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좀 꺼내줘. 용을 쓰느라 그 말을 미처 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저승사자가 다가와 낫을 들이민다. 토르가 소스라치지만 지금은 꼼짝없이 가냘픈 나비 신세. 꽃 무더기에도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처지이니, 그 무기를 막기는커녕 피할 수조차 없다. 다행히 그 낫은 토르 나비를 해치는 대신 꽃송이들을 톡톡 건드려 가볍게 흔든다. 그 덕에 토르 나비가 간신히 빠져나온다. 여린 꽃잎이 마치 태풍처럼 덮친 기분이다.

“좀 더 무게가 있는 생물로 바꿔주게. 새는 어떤가.”

“안 돼요. 꽃을 뜯어먹는단 말예요.”

“뜯어먹지 않겠다고 오딘의 이름에 맹세하겠네.”

“안 돼요. 꽃을 밟아 뭉갤 수 있잖아요.”

“아, 정말-!”

마침 불어온 미풍에 날갯짓이 서툰 토르 나비가 또 휩쓸린다. 간신히 온몸을 비틀어 꽃송이 사이를 빠져나온 그가 저승사자의 후드 꼭대기에 내려앉는다. 저승사자가 고개를 휘휘 젓는다. 가느다란 다리로 사력을 다해 매달린다.

“비켜주실래요. 무례하시네요.”

“나는 지금 나비일세.”

“……아무튼 다니면서 가급적 뒷덜미 잡지 마시고 정중하게 인도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런데 말일세.”

“제 말 안 끝났지만 말씀하세요.”

“영혼을 하나 인도하면 한 송이를 심는다지 않았나. 그렇다면 꽃나무 한 그루도 한 송이와 동급으로 치는 건가?”

“아. 그건 대형 사고나 참사 때 단체로 인도한 영혼들을 위한 거예요.”

“참사?”

“그럴 때는 보통 사건 하나가 통째로 인도자 하나에게 배정되거든요. 한 장소에서 많이 죽으니까. 여럿이 배정되면 자기 담당 영혼 찾느라 더 복잡해요. 그렇게 데려오면 일일이 한 송이씩 심을 틈이 없어요. 그래서 대신 꽃나무를 심죠.”

“……나무가 제법 많군.”

“흔한 일이예요. 요즘에는 굳이 전쟁이 아니어도 한 번에 사람이 많이 죽는 사고가 많거든요. 오히려 한번에 죽는 사람 수는 전보다 훨씬 늘었어요. 전에야 전염병이 자주 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간차가 있었으니까 괜찮았거든요. 전쟁은 오딘 님을 겪었으니 뭐, 어지간한 건 감당할만했고. 그런데 요즘 일어나는 사고는 정말 눈코뜰 새가 없어요.”

“음.”

“저야 바쁘긴 하지만 하나씩 따로 오솔길만 걷게 해서 보내면 되니 다른 녀석들에 비해 시간이 짧아서 주로 저한테 넘어와요. 대부분은 자기 컬렉션 자랑하느라 좀 오래 걸리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가 보려고 심는 거라 보든말든 딱히 상관이 없어서요.”

“자네에게는 그런 의미로군.”

“저야 인간이 아닌데요, 뭐. 사고 나면 그날 일만 엄청 많아진다. 이 이상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답하겠지.”

“맞아요. 일일이 의미 부여하다보면 저만 고생한다고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가끔 멍청하게 자기 관리 못해서 감정 이입이라도 하는 날에는 아주 힘든 꼴 겪어요.”

“…….”

저승사자의 어조는 어떤 내용을 담든, 차별없이 가볍다. 썰렁한 농담을 던져도, 반가운 인사를 건네도, 항의를 할 때도, 심지어 씁쓸한 기색이 묻어나는 때마저. 저승사자가 낫을 들어 멀찍이 한 지점을 가리킨다.

“저-기, 개나리처럼 늘어진 흰 꽃줄기 보이세요? 저게 제가 처음 심은 꽃이에요. 오딘께서 치른 전쟁에서 죽은 인간들을 보내면서 심은 첫 꽃이자, 첫 꽃나무죠. 이름 웃겨요. 조팝나무.”

“…….”

온갖 색이 뒤덮인 꽃밭에서 유독 폭포처럼 빛나는 흰 꽃줄기를, 후드 꼭지에 매달린 토르 나비는 망연히 바라본다. 지구에서, 아니, 이곳을 과연 지구라 할 수는 있는 것일까. 이토록 정의할 수 없는 공간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흔적은 그를 잠시 복잡미묘한 감정 속으로 밀어 넣는다.

찬연한 빛으로 부서져 돌아간 나의 아버지. 마치 당신의 마지막과도 같은 꽃이 당신을 기억하는 이에 의해 세상에 남았군요. 저것이 이 우주에 남은, 당신을 기리는 유일한 흔적이라는 것이 사무쳐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재건 아스가르드에는 사람이 부족하다. 인간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지난 5년은 인구가 회복세로 접어들기에는 너무도 짧은 기간이었다. 왕실의 역사를 기록하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흔적을 세우기에는 토르의 백성들은 너무 적고 너무 바빴다.

“여기가 장미 정원이에요.”

멀리 떨어진 흰 꽃 폭포에 정신을 판 시간이 길었을까. 저승사자의 목소리에 토르는 문득 정신을 차린다. 줄곧 흰색을 보던 눈에 갑작스레 온갖 화려한 색상의 장미가 쏟아져 들어온다. 눈이 저릿한 기분이라 잠시 감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눈꺼풀을 찾을 수가 없다. 나비는 눈꺼풀이 없구나. 깨닫는 중에 갑자기 높이가 낮아진다. 땅에 쪼그려 앉은 저승사자의 머리에서 토르 나비가 비틀대며 날아 내려온다.

길게 끌리는 소매를 사려 쥐고, 손끝-으로 추정되는 부분-으로 가리킨 자리. 그곳에 뾰족이 머리를 내민 짧은 장미 가지 위에 토르 나비가 내려앉는다. 제가 뒷덜미를 잡아 이끌어 온 영혼이 이곳을 지나 다음 세계로 넘어갔다는 흔적.

“저라면 거기서 내려오겠어요.”

“왜-?”

“그렇게 될 테니까요.”

저승사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빨리 감기라도 한 것처럼 장미가 쭉 자라난다. 그 흐름에 휩쓸린 토르 나비가 굴러 떨어진다. 저승사자가 킬킬 웃는다. 토르 나비가 최선을 다해 흘겨보지만 나비의 눈으로 표현이 될 리가 없다. 고운 흙조차 나비의 몸에는 너무 큰 자연재해다. 이런 호된 통증은 태어나 처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비이기 때문에 아픈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잠시 안도한다. 애초에 아픈 것도 나비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런 인과관계는 잊었다.

“좀 더 일찍 말해줬어야지.”

“보세요.”

토르의 항의를 무시하고 저승사자가 다시 낫으로 한 지점을 가리킨다. 난데없이 솟아난 아치를 온통 휘감으며 자라난 장미 넝쿨. 그 긴 넝쿨 가운데 붉은 장미가 딱 한 송이 피어났다.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 짙은 빛깔. 겹겹이 감싸인 탐스러운 꽃.

“저렇게 자랐는데 고작 한 송이란 말인가? 본래 넝쿨 하나에 여러 송이가 피지 않나?”

“그래서 저는 장미를 피울 때는 원래 있던 넝쿨에서 한 송이를 새로 피워내요. 이건 토르 님을 위해 새로 심은 거예요.”

“나를 위해서?”

“당신이 이끈 영혼이라는 표시로. 일이 끝나면 이 아치는 아름다운 장미 동굴이 되겠죠.”

“…….”

“열심히 하시라는 말이에요. 안 그러면 여기가 얼마나 휑하게 남겠어요?”

“자네, 나를 부려먹으려고 단단히 각오한 눈치군.”

“부려먹다뇨. 자원하셨으면서.”

“붉은 장미라…….”

“어울리죠? 토르 님의 망토 색을 따서 붉은 장미예요. 역시 내 미적 감각은 탁월해.”

“나는 백합을 좋아하네.”

“…….”

“고결한 왕의 꽃이지.”

“토르 님.”

“장미는 그닥-”

“혹시 누가 이런 말 한 적 없어요?”

“장미가 잘 어울린다고? 내가 이래봬도 온 우주에 먹히지 않은 곳이 없는 몸이라네. 갖은 찬사는 이미 너무 많이 들었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네.”

“그거 말고, 짜증난다고요.”

“자주 듣는다네. 내 동생과 그의 연인, 미드가르드의 친구, 내 나라의 대장군, 절친했던 친구…….”

“저한테 또 들으셔도 별 충격은 없으시겠네요.”

“부디 그러지 말아주게. 허허.”

“어쩌다 당신과 얽혀서…….”

“오딘께서 그대를 내게 이끄신 모양이지.”

“엥.”

“인연이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 아닌가.”

“뭐……제가 오딘 님 때문에 태어나기는 했는데요.”

모자란 아들의 마음에 남은 앙금을 해결하라고, 그 해법이 되어줄 이를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신 모양이지.

모두 사라졌을지 모르는 그의 친구. 그 가운데 유일하게 행방을 알 수 없는 레이디 시프의 생사를 확인해 줄 내게 보내신 것은 과연 어떤 이유일까. 나를 깨우치기 위함인가. 아니면 외로운 아들의 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친구를 돌려주기 위해서인가.

“이미 만들었으니 못 물러요. 무조건 장미예요.”

“지금부터라도 바꿔주게.”

“싫어요. 기껏 아치도 저렇게 공들여 만들었는데 달랑 한 송이면 멋이 없잖아요.”

“나중에 다른 기회로 채우면 되잖나. 나는 백합이 좋단 말일세.”

“아, 제 마음이죠! 여긴 내 공간인데!”

휘적휘적 꽃밭을 돌아 나오는 저승사자의 뒤를 쫓으며 토르 나비가 비틀비틀 날갯짓한다. 옥신각신 오가는 말다툼에 이내 아릿한 생각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토르가 겨우 저승사자의 후드 끝에 올라앉는다.

Shearose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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