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은 벌써 며칠 내내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남자가 자꾸만 생각났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이상한 남자. 멍청하게 웃는 얼굴이 귀여운 그 남자. 자신의 입술에 키스하고 다정하게 엘리엇이라고 부르던 남자. 

헤벌레 웃던 표정도, 볼에 와닿던 손가락도, 그 부드럽던 입술의 감촉도.

모든 감각이 밤새 되풀이되면 엘리엇의 가슴께가 자꾸만 근질거렸다. 이따금은 커다란 가시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기도 했다. 위통과 묘하게 닮은 감정이었다. 새벽녘이 되서야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고 잠에 들기도 수 일째. 다시 클럽에 와주지 않을까. 엘리엇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일주일을 넘어 한 달이 넘도록 가게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엇은 사장에게 남자의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이름을 알아서 뭘 어쩌겠어. 이름을 안다고 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도, 만난다고 해도 딱히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한 번 더. 엘리엇은 중얼 거렸다. 한 번 더, 한 번만 더 남자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선명하게 엘리엇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늘은 기필코 사장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어 봐야겠다고 결심한 날이었다. 엘리엇은 삽질을 하다 말고 허리를 쭈욱 폈다. 허리에서 드드득, 거친 소리가 났다. 공사 중인 도로 건너편의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팔자 좋구만 그래."

엘리엇은 처음에 자신에게 말하는 줄 알고 돌아보았다. 하지만 엘리엇에게 말을 건 인부는 건너편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쳐다 보고 있었다. 저기 메뉴 봤어? 런치가 우리 일당보다 비싸. 인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마의 땀을 거칠게 닦아내더니 다시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엘리엇도 다시 삽을 드는데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남자가 눈에 박혔다.

 “어..!”

엘리엇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뛰쳐 나갔다. 땡그렁, 엘리엇이 던져버린 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힌다. 수트 차림으로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남자는 틀림없이 그 남자였다. 엘리엇이 한 달 넘게 생각한 그 남자. 어떻게 해도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던 그 남자. 어이, 엘리엇!! 어디 가! 뒤에서 외치는 반장의 목소리는 이미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엘리엇은 막 차에 타려는 남자의 팔을 탁 잡아챘다. 엘리엇의 얼굴을 본 남자의 눈이 놀란듯 커졌다. 옆에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가드가 엘리엇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저지하려는 걸 남자가 황급히 손을 들어 막았다.

 “엘리엇이었죠?”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엘리엇은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 올랐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엘리엇에게 준은 어색하지 않게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남자의 미소를 처음 보았던 그 때처럼 엘리엇의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아직도 남자의 팔을 잡고 있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자신이 손을 뗀 자리에는 하얀 먼지가 묻어 있었다. 

"어, 미, 미안해요."

엘리엇은 말을 더듬으며 사과했다. 비싸 보이는 양복에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어떡하지. 그러나 준은 아무렇지 않게 먼지를 털어내며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고마워서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깜빡했네요.”

준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눈짓을 하자 비서처럼 보이는 남자가 매트하게 빛나는 은색의 케이스를 열어 그에게 내밀었다. 준은 거기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엘리엇에게 건넸다.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을 때 연락하세요.”

준은 예의바르게 웃었다. 바빠서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그럼 이만. 준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곤 차를 탔다. 준의 옆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던 남자가 엘리엇를 위아래로 쭉 훑어 본다. 엘리엇이 마주 쳐다보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어보이곤 준을 따라 차를 탔다. 엘리엇은 저 눈길을 잘 안다. 사람을 자신의 아래로 보는 눈빛이다. 그제서야 엘리엇은 자신의 옷차림에 정신이 미쳤다.

콘크리트 부스러기와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형광 주황색의 조끼와 더러운 목장갑. 수치심에 엘리엇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스워보였을까. 엘리엇은 입술을 꾹 깨물고 남자가 건네고 간 명함을 내려 봤다. 금박으로 쓰인 June Ryu가 반짝반짝 빛났다. June, June이란 이름이구나. Ryu라면 한국계 성일까? 아니면 중국계? 

공사 현장으로 돌아가면서 엘리엇은 그 명함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히 조끼 안에 넣었다. 그날 밤도 엘리엇은 쉬이잠들지 못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준의 명함을 계속 바라보았다. 회사나 직책같은 건 전혀 적혀있지 않았고 단순히 이름과 전화번호만 심플하게 금박으로 박혀 있는 명함이었다. 사적인 용도로 쓰는 명함인걸까. 준 류.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가슴께가 또 떨려왔다. 난생 처음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을 엘리엇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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