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다과회가 열렸다. 응접실에 차와 디저트들이 차려졌다. 그러나 담소는 없다. 리아가 차를 따르는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주위의 면면을 살폈다.

불편해 죽겠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나와 아돌포가 마주 앉았고 리아는 내 옆에, 루치오는 뒤편에 섰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는 잔뜩 긴장한 병사들도 있다. 문 너머에도 다들 대기하고 있겠지. 다 고귀하신 법황님께서 난리를 쳐주신 덕이다. 리아는 대놓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아돌포를 보고 있고 흘끗 뒤를 보니 루치오는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허튼짓하면 가만 안 있겠다는 듯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불청객은,

나만 보고 있군. 아까부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늦은 밤에 찾아온 아돌포는 저번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간편한 차림이었다. 지난번엔 수단이라고 하던가? 그 신부님들이 입는 복장에 금실을 수놓은 망토를 두르고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장식한 허리띠를 두르고 나타났었는데 오늘은 아무런 꾸밈없는 하얀 사제복 차림이다. 지난번엔 격식을 차려 왔었고 오늘은 그냥 쳐들어와서겠지.

복장이 간편한 건 루치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갑주 위에 아무 무늬도 없는 망토만 둘렀다. 한밤중에 경비를 서면서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이상하지.

그래서 이 자리에서 꾸며 입은 사람은 나뿐이다. 리아도 수수한 차림이니까. 이거 참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네.

“성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오신 까닭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을 꺼내지 않으면 계속 이 모양일 것 같다. 어차피 격식 있는 말 따위 모른다. 이미 저쪽에서 예의고 뭐고 무시하고 쳐들어왔으니 나도 신경 안 써도 되지 않을까? 수행원도 없이 홀로 온 법황은 내 결례를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삐뚜름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대답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일이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내려 했다.”

그 싹, 나지? 싹이라니. 푸릇푸릇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 루치오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무례하군요. 성하라 하셔도 부인께 해가 되는 것을 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고민 중이야. 말레벤토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그대를 방치해서 일어날 일 중 어느 쪽이 더 귀찮을지.”

우리 기사님 깔끔히 무시당했다……

아돌포의 시선은 좀처럼 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놈 때문에 한 번 회귀하고 느낀 건데, 아무래도 쟤는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아는 눈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밤에 뭐 하는 짓인지 설명이 된다.

어떻게 내가 회귀자란 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가 왜 성하께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말레벤토를 적으로 돌려야 할 정도로 제가 위협적인가요?”

회귀자임을 법황님이 아시더라도 내 쪽에서 먼저 얘기할 필요는 없기에 딴에는 의뭉스럽게 물은 거였다. 이 연약한 몸뚱이 어디가 위협적이라는 거야. 아돌포는 내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퀼로께서 말씀하셨다. 네 시간이 기형적이라는군.”

“그게 누군데요?”

“바람 중에서도 가장 거센 바람이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 바람의 정령이 있구나. 정령은 시간의 흐름까지도 알 수 있는 거야? 하긴 보통 정령이 아닌 신적인 존재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신과 계약하면 인간을 초월한 사실들도 알 수 있는 모양이다. 신(神)급 정령 셋과 계약한 법황도 이런데 이한새는 얼마나 괴물인 걸까? 소설에서 그가 정령들과 계약하려고 고생하던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존재가 여기 있는데 나는 못 본다고?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제 시간이 기형적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이 귀띔해줘서 아돌포는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벗어난 존재니 죽여야겠다 생각한 모양인데 여기서 내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절 죽이시지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계속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를 죽이려 하신다니, 신의 대리자께서 너무하시네요.”

무릇 종교의 기본 교리는 사랑과 자비 아닌가? 물론 내가 앞으로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나도 모른다. <이방중>은 베아트리체가 죽어서 시작하는데 내가 살아있고 회귀까지 하니 원작대로 시작할 길은 이제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심각한 상황이 맞다. 어쩌면 이 세계는 정하리라는 이름의 또 다른 마왕을 맞이한 걸지도. 아니 그렇지만 난 억울하다고! 내가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까짓 회귀 좀 했다고 마왕 강림 위기에서도 안 나타났던 교황이 와서 날 죽이려 하는데 진짜 억울하네. 애초에 소설 속 인물이 회귀를 왜 이렇게 빨리 알아채는 건데.

이건 너무하잖아. 나한테!

소설 속 인물에 빙의해서 어쩌면 나는 주인공이 된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상황은 이상하지만 어쩌면 누군가의 소설에서 내가 주인공이 된 걸 수도 있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나? 그렇지만 다짜고짜 절대자가 날 죽이려고 하다니 이런 주인공은 사절이다. 어디 그 신 좀 나와보라고 해.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나는 이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 같은 거 추호도 안 하니까 날 내 세계로 되돌려줄 방법이나 알려달라고!

생각할수록 열 받네.

“마님의 시간이 기형적으로 흐른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발테우스 교단에 실망했습니다. 성하께서는 지금 하신 말씀이 저희를 이해시킬 죄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으니 리아가 내 편을 들었다. 역시 내 사람이야. 아주 든든해. 루치오도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부인께서는 이미 살해 시도를 겪으셨습니다. 그 충격으로 본인에 대한 기억이 없으신 상태고요. 험한 일을 겪은 피해자를 추궁하다니, 기사가 아닌 자가 기사도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나 측은지심조차 없는 신의 사도라니, 이를 교회에 정식으로 항의해도 되겠습니까.”

괴한에게 죽을 뻔한 데에 이어 이세계 최대 종교단체의 우두머리가 날 죽이려 한다. 상황을 모르는 두 사람의 눈에는 부당해 보일 것이다. 나는 쟤가 왜 저러는 건지 가닥은 알겠지만 역시 억울하고.

두 사람의 말에 아돌포는 대꾸 없이 나를 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우리의 호소를 들었음에도 변함없이 차가워 보였다.

“기억이 없다고?”

“네. 저는 제가 누군지 모릅니다.”

저거 왠지 눈으로 비웃는 거 같은데. 웃기지 말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 그렇지만 못 믿으면 어쩔 건데. 여기서 내가 이상하다고 말해도 말이지. 그런 이유로 날 죽이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보통 생각한다고. 회귀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게 뭐. 내가 사람을 죽였어, 누굴 때렸어? 아 때리긴 했구나. 괴한을. 그렇지만 그건 정당방위잖아. 날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도끼눈을 뜨고 보고 있자니 아돌포는 정령과 뭔가 얘기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우리의 항의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걸까?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은데 너무 작아서 귀 기울이는 사이 아돌포가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럼 그대는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시간을 두 번이나 되돌렸다는 건가?”

갑자기 핵심을 찌르고 들어온 말에 나는 그제야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이 사람은 지난 회차에는 아침이 되길 기다려 나를 찾아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침이 오기 전에 왔지.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건 시간이 몇 번이나 되돌려졌는지도 알 수 있는 거다.

사실상 내가 회귀자임을 밝힌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루치오를 돌아보았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호위기사도 미간을 찡그린 채 날 보고 있었다.

“이 공간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리고 아돌포는 이번에도 루치오를 무시했다.

“저들은 못 듣게 했으니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기사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 태세인데 법황은 태연했다. 루치오랑 리아는 못 듣는다고? 나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데 그는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없다고?

“소리를 차단해요? 어떻게요?”

내 질문에 아돌포는 멍청이를 보는 눈빛으로 날 봤다. 쟤 표정 변화는 없는데 왜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히지?

“침묵 마법을 응용한 거지. 2계급 사제도 할 수 있는 마법인데 모른다고?”

“마법에는 쥐뿔도 재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야?”

처음 만났을 땐 존대했었잖아. 이번에는 왜 바로 말 놓는 거냐고. 두 번째라서냐. 갑자기 튀어나온 거친 언사에 법황은 놀란 눈이었다.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원래 성격인가 보군.”

“그렇다. 어쩔래.”

나는 원래 받은 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진작 말을 놓고 싶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잃었대도 베아트리체가 난폭하게 굴면 리아와 루치오가 충격받을 거 같아서 참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안 들린다면 참을 이유가 없지. 못 참지.

어때. 내가 반말하니까. 맘에 안 들지? 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서 마법에 소질이 없다니.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건가.”

루치오를 무시했던 것처럼 법황은 내 반말도 신경 안 쓰는 눈치다. 그보다는 왜 내가 마법을 못 다루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화제를 원래 하던 내용으로 돌렸다.

아 재능이 없다니깐.

회귀할 수 있는 이유는 나도 모른다. 죽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막막하기도 하다. 이 녀석은 법황이자 최고의 마법사지. 거기다 내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아니까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이미 나더러 세계의 대적자라고 했던 놈이다. 내가 빙의자라고 말하면 악마로 여기고 퇴마하려 들지도 모른다.

유일신을 섬기는 건 아니지만 발테우스 교단은 가톨릭에서 따온 부분이 많았다. 당장 복장부터 신부님 같다. 그럼 구마사제도 있을 거고 법황이 곧 SSS급 마법사니 친히 날 퇴마하려 할지도 모른다. 빙의자라는 걸 말하는 순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지도 모르겠다.

“뭐, 그대가 마법을 알든 모르든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아.”

이미 나를 한 번 죽였던 놈인데 두 번째가 어려울까. 날 죽이려고 여기 온 놈이다. 경계하며 말이 이어지는 것을 기다리니 아돌포는 차가운 눈으로 내게 선언했다.

“내가 왜 그대를 살려둬야 하는지 직접 말해봐. 들어보고 판단하지.”

살고 싶으면 자길 설득해보라는 건가. 대화를 하자고 한 게 나였으니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온 셈이다. 할 말은 있다.

“소용없으니까.”

넌 내가 회귀한다는 걸 알잖아. 그런데 못 알아챘다면 직접 말해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두 번 회귀했다고 했지?”

아돌포는 대꾸 없이 가만히 나를 보았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한숨 쉬듯 말을 내뱉었다.

“맞아. 지난번에 네가 날 죽여서 그래.”

그러니 네가 지금 날 죽여도 나는 또 돌아갈 뿐이다. 목이 졸리던 순간으로. 그럼 나는 횟수 제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기회 한 번을 날리고 너는 죽일 사람을 못 죽이고 또 대면하겠지?

피차 소용없는 짓 싫잖아. 안 그래?

이제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 도전적인 표정으로 바라봐주니 아돌포는 처음으로 나에게서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로 시선을 내린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믿으라는 건가?”

아니 니가 방금 내가 시간을 되돌렸다고 말했잖아요. 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이야? 이 자식아? 저번 회차에 네가 날 죽였다는 게 믿기 힘든 소리야? 울컥 짜증이 치밀어올라 고개를 돌렸다가 루치오랑 눈이 마주쳤다.

이런 실례. 하마터면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일 뻔했다. 지금 내 얼굴은 내 것이 아닌데 함부로 쓰면 안 되지. 나는 애써 분노를 누르고 사회생활용 미소를 지었다.

“그럼 또 죽여 보시든가요.”

그냥 기회 한 번 날리자. 그리고 다음 회차에는 괴한으로부터 빠져나오자마자 성으로 도망치자고 해야겠다. 무서워서 여기서는 못 자겠다고 떼라도 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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