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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카이야. 신발 브랜드 라카이 알지? 거기서 따온 거야.

 

오성욱의 새로운 하수인으로 소개된 카이는 밝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외국은 여행으로, 그것도 가장 속성의 코스를 짜 빠르게 훑고 다닌 게 다라는 데 꼭 외국 출생의 혼혈아를 보는듯 했다.

 

전반적으로 알쏭달쏭한 인물이었다. 뚜렷한 생김새의 인상과 대비되는 성질이었다. 소풍 때 먹은 음식, 성격이 괴팍했던 학창시절 선생님, 지금도 훌쩍이며 볼 수 있는 영화 등, 추억을 뒤적거리며 교집합을 키우는 식의 대화를 멀리하는 나인지라, 그에게 딱히 무언가를 물어보지 않았으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가 그렇게 뒤죽박죽 나열한 정보들이 어제와 오늘, 심지어는 아침과 밤에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실 라카이가 아니라 타카이에서 따온 거야. たか-い. 일본어로 크다는 뜻. 난 손도 크고 키도 크잖아.

 

혹시 발리우드에 관심 있어? 카이츠라는 인도 영화를 본 적은? 무려 장르가 액션 로멘스 멜로야.잡탕 같은 게 딱 내 스타일. 예명을 무엇으로 하나 고민하는데 이거다 싶었거든.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검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붙인 옷차림이며 밝은 갈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머리카락까지, 그를 이루는 웬만한 것들이 내 기준에는 과한 까닭에 멀리하고픈 마음이 컸는데 그는 그런 내 속내와는 상관없이 집 안 곳곳을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오성욱이 구해다 준 3m짜리 나무가 이리저리 비틀려있어 난감하던 찰나에 나무끼리 로프로 묶으면 되지 않냐고 훈수를 둔 것도 그였다.

 

깊고 좁은 구멍에 나무를 넣고 붙들고 있자 그가 허리 정도 높이의 나무를 받치고 나타났다. 잡고 있어 봐. 용도만 지레짐작하고 있던 도구를 겁 없이 다뤘다. 보기 흉할 정도로 튀어나온 부분을 빠르게 쳐냈다. 아래에 두 개를 묶고 위에 적당한 간격을 두어 세 개를 격자무늬로 묶자 보라고 부를 법한 모양이 나왔다. 그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즐거이 외쳤다. 땀으로 젖은 그의 앞머리가 이마를 비스듬히 가렸다.

 

“왜 자꾸 거짓말만 해?”

 

나의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으나.

 

슬픔을 슬픔으로 가리는 사람이 사는 세상에, 슬픔을 기쁨으로 가리는 사람도 산다. 슬픔과 더 큰 슬픔은 생김새가 비슷해 아주 큰 노력 없이도 남들을 속이는 게 가능하지만, 슬픔을 기쁨으로 덮기 위해선 짙고 강렬한 기운이 필요하다. 눈이 멀 것 같은 햇빛. 입꼬리가 찢어질 듯한 웃음. 내가 추측한 카이는 후자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말을 노래하듯 뱉을 수는 없을 테니까.


펄럭이는 옷자락에 나무 부스러기가 붙은 게 보였다.

 

“…거짓말만 하지는 않아.”

“…그렇구나.”

“진실 하나를 감추기 위해선 백 개의 거짓이 필요하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해.”

 

빠르게 맞장구쳤다. 비슷한 명제가 내게도 있어. 하나의 거짓이 살기 위해서 백 개의 진실이 사라졌지.

 

“말하자면, 쌀보리 게임 같은 거.”

“…”

“보리, 보리, 보리, 보리…”

 

카이가 주먹을 쥔 손을 내게로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펴 주먹을 막아 내었다. 보리, 보리, 보리….

 

쌀.

 

마지막 쌀이 자리한 곳은 내 가슴이 아닌 어깨였다. 오그라든 뼈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너 때릴 것도 아닌데 힘 좀 빼. 손바닥을 오므려 차양을 만들곤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한층 장난기가 넘쳤다. 넘친다는 것은 쏟아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무언가 단단히 가슴 속에 고여 있다는 뜻이었다. 기포가 부풀어 오르는 시체를 떠올렸다. 으쓱이며 먼지를 털어내는 카이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 역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카이가 나타난 뒤로 오성욱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애먼 짓을 저지를까 봐 CCTV처럼 나를 감시하던 게 한낮의 꿈처럼 느껴졌다. 하루에 한 번 가이딩을 할 때면 그가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감았다. 손가락에 힘을 실으면 그의 긴 속눈썹이 파들거렸다. 그의 손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희고 매끈했다. 변백현의 손을…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늘어서 더 도드라져 보이던 상처들까지. 변백현. 좋은 건…정말 다 사라지는 걸까?

 

오성욱이 집중, 하고 흐트러진 내 정신머리를 붙잡았다. 일기는 잘 써지나? 아직도 생활계획표 수준인가. 불시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카이가 대신 대답했다.

 

“그게 일기야? 난 차용증이라도 쓰는 줄 알았는데.”

“…”

“하긴 도경수 일기에 하트 뿅뿅 꼬리표 땡땡이면 그게 더 당황스럽긴 하겠다.”

 

카이는 의성어를 좋아했다. 반질거리는 광대를 손으로 누르면 깜찍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근데 둘은 이게 다야? 손바닥 밀기 게임 하는 것도 아니고.”

“…”

“미스 오가 그걸로 돼?”

 

어쩐지 나를 일찍 부르더라, 골골대는 거 보기 싫은데. 카이는 염려에도 음을 실었다. 이가 나간 피아노의 건반처럼 삐딱한 음계였다.

 

오성욱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인 카이가 대뜸 오성욱의 티셔츠 밑으로 손바닥을 집어넣었다. 맥을 짚듯 꼼꼼하게 훑었다. 내 기억으론 오성욱은 결벽증이 심해 머무는 공간의 위생 상태에 각별히 신경쓰는 것은 물론 누군가 자신의 몸을 안전장치 없이 더듬는 게 싫어 가이딩도 주기를 완벽하게 계산해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시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디로 보나 결격사유 뿐인 나를 제 공간에 두고 가이딩을 하게끔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눈앞의 상황에 아연해졌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접은 카이가 내 쪽을 보며 웃었다.

 

“모르는 눈치네. 나도 가이드야.”

“…”

“도경수가 퍼스트라면, 난 한 네 번째 정도?”

 

가만히 듣고 있던 오성욱이 카이를 슬쩍 밀어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

“경수 군은 이만 나가봐.”

“그 말투 도대체 뭐야? 진짜 안 어울려. 미스 오는 연기로는 영, 꽝이다. 내가 훨씬 낫네.”

“웃기는 소리를 하네. 네가 나보다 나은 건…이런, 곰곰이 생각해봐도 없군.”

 

카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힘을 줘 우그러뜨린 것 같이 위축되어 있던 몸의 구석구석이 반듯하게 펴지며 보기 좋은 직선을 만들어냈다. 한 발자국 떨어져 본 카이와 오성욱은 바깥의 번화가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십 대 같았다. 디디는 곳마다 여행지로 탈바꿈하는 젊음의 에너지가 서려 있었다. 중년의 오성욱에게 그러한 객기가 남아 있는 것이 놀라웠다.

 

부모님이 내게 기대한 모습이었다. 무모한 계획에도 주눅 들지 않고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는 청년들을 보며 너도 집에만 있지 말고 저렇게 돌아다녀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말없이 책상에 메콩강이 담긴 동남아 여행 책자를 두고 가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제일 먼저 섭렵한 것이 여행 책이라고, 방비엥에 가보고 싶은 화덕 피자 집이 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어디에도 착륙하지 못한 삶에 또 무슨 비행기를 띄울까.

 

“…나가보겠습니다.”


내 손으로 문을 닫았는데도 쫓겨난 기분이었다. 청록색 문종을 건드리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어떠한 상황과도 무관하게 아름다운 것들. 내게는 구슬픈 울음소리 같아도 누군가에겐 봄철의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닮았을 것이다.

 

최악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 미동 없는 오성욱의 옆에 앉아 그의 손가락을 붙드는 행위가 내 짐작보다 내게 큰 위로가 되었음이 분명해졌다.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세상에 변백현이 죽었다고…말하는 사람밖에 남지를 않아서, 나는 기꺼이 그의 명을 따랐다. 그의 긴밀한 경계를 넘나들며, 언젠가 그가 변백현의 생사에 대해 속삭여주는 꿈을 꿨다. 가련한 도경수 군. 변백현은 살아 있다고. 좀 고장은 났지만.

 

나는 특별한 가이드가 아니었다. 오성욱은 나를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가 시킨 일을 다른 센티넬과 가이드에게 들려주면 아마 폭소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를 위해 매일 ET가 된다고 고백하면 배를 움켜잡고 바닥을 떼굴떼굴 구를지도 몰랐다. 그마저도 나보다 밝고 활기찬 새 가이드가 대신하게 생겼음을 털어놓으면 너 같은 머저리가 또 있느냐고 놀랄지도.

 

아아.

언제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이 제일 쉬웠지.

 

무거운 이불이 몸을 짓눌렀다.



*

 


원두막의 지붕으로 올릴 각목을 다듬다 손에 멍이 들었다. 카이가 톱으로 자른 각목에 못질을 하는 것이 내 일이었는데, 집중력이 흐트러져 사달이 났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오성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를 그의 침대 위에 앉혀 놓곤 어쩔 줄 몰라했다. 내 무른 뼈마디를 쓰다듬는 그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성욱의 방은 크림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5단 서랍장 위에 있는 푸른 액자를 제외하곤 온통 유백색이었다. 액자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오성욱다웠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소매의 단추를 푸르던 오성욱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빛을 다 알 수는 없었고, 기다리는 답변은 나오지 않을 듯 했다.

 

“카이면 되지 않아?”

“카이 말고요.”

“그럼 누구?”

“…그냥.”

“밖에 나가고 싶다는 거야 아니면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다는 거야. 말을 똑바로 해.”

“…”

“참고로 둘 다 안 돼.”

“왜죠?”

“너에게 이유를 말할 의무는 없지. 여태껏 집에 잘만 처박혀 있었으면서 갑자기 왜. 탁 트인 정원을 가두리 양식으로 만들게끔 하지 마.”

“…”

“그렇게 다른 사람이 만나고 싶은 거면 도경수에게 면회를 신청하게끔 해주지.”

“…”

“물론 내 심사를 거친 사람만 허락이야.”

 

널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성욱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말한 ‘다른 사람’은 불특정 다수의 여러 명이 아니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오성욱의 자택일지라도 아직 센터의 일부였다. 변백현 얘기를 마구 꺼낼 만큼 나는 천치가 아니었다. 그가 만약 살아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됐다.

 

“원두막이나 마저 지어.”

“…”

“카이가 그러던데. 네가 꽤 열심이라고.”

 

어디까지가 마음인지 분간이 어려울 때가 있다. 심장 말고 마음 말이다. 감각의 촉수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살피다 보면 손톱의 모양까지도 서글퍼 보인다. 삐뚜름한 발톱의 모양마저 측은하다. 오성욱이 시킨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렇다. 나는 대패질에 서툴고 나무의 모양을 잡는 일에도 소질이 없고 내가 세운 나무들은 아무리 동여매도 기울고 만다.

 

“카이가 잘못 봤군요.”

“…”

“제가 도대체 뭘 열심히 할 수 있겠어요.”

 

겨울의 해처럼 인내심이 짧아졌다. 가만히 있어도 달리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변백현이 사라지고 두 달이었다. 고작 두 달. <경수>를 기다리다 미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는 남의 비극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내게 내가 원하는 답을 가져다주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실낱같은 힌트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죽여주길. 내게는 돈을 주고서라도 삶을 저버릴 의지가 있었다.

 

나는 그날 변백현을 따라가지 못했다. 신디가 문 앞을 막고 있었다. 신디는 가이드용 무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신디의 공격에 맥을 못 췄다. 내가 센티넬이었으면 좋았을 걸. 내가 <경수>였다면 나았을 것을. 가이드였다 센티넬이었다 자유자재로 몸을 바꿀 수 있는 종자였어야 했는데. 흩어지는 정신으로 그렇게 바랐다. 바람은 바람에서 끝났다. 아니 바람은 바람에서….

 

변백현이 날 증오한 게 아닐까? 날 죽도록 미워했을지도 몰라. 사랑에 빠진 척이야 우습지. 가이드를 사랑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그도 말했었잖아. 난 쉬우니까. 날 버리는 것도 쉬웠던 거야.

 

찡찡거린다고 흉보는 거 다 알아. 흥미로울 정도로 나약하다는 것도.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꼴이 다들 신기한 거지? 쓰러진 오뚝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의 틈을 두고 지상과 떨어져 있으니 얼마나 쇼킹하겠어. 그러나 누구도 건들지는 않고. 낭떠러지의 묘기를 흥분하며 구경해도 다가오기를 꺼리는 것처럼.


“…거기까지.”

 

오성욱이 나를 침대 한가운데로 옮겼다. 이불을 끌어다 내 머리를 덮었다. 더운 숨이 확 올라왔다. 팔다리가 저릿해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멋대로 중얼거렸다.

 

“그 애 말이 맞았어.”

“…”

“좋은 건 다 사라지는 거야.”

 

오성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삼월의 밤은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툼한 야구 점퍼를 골라 입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했다.

 

벤치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내 옆을 루머가 비집고 들어왔다. 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의 무게가 상당했다. 탁한 빛으로 무른 숙주나물이나 밑동이 썩은 무일 터였다.

 

장사에 소질이 없는 데다 채소를 보는 눈은 더더욱 없는 루머는 하루 장사가 끝나면 더는 팔 수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서 귀가하곤 했다. 한쪽 어깨로 봉지를 받쳐 멘 루머를 우스워했다. 하필 검은 색이라 좀 도둑같다-고 얘기하면 루머는 질세라 눈썹을 구기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좀, 도둑 같다는 거야 아니면 좀도둑같다는 거야? 나는 무릎을 모으고 웃었다. 낡은 운동화의 밑창을 비빌 때마다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오그라들었다.

 

노을이 가라앉는 순간이 두려웠다. 경계 없이 하늘을 물들인 빛깔이 사라지는 것이 무서웠다. 밤은 깜깜했고 시야가 좁았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건 한참 후에야 발각될 것이라는 은밀한 속삭임과 다투는 것이 매일의 과업이었다.

 

결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벌어진 데다 틈새마다 빨대나 플라스틱 조각 같은 자잘한 쓰레기가 끼워져 있는 벤치를 사수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심해 속의 해초처럼 부옇게 빛나는 가로등을 바라보면, 루머를 딱히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멀리서부터 익숙한 형상이 다가와 점점 선명해지는 꼴을 보자면,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네가 말한 책, 나도 심심해서 한 번 읽어봤는데.”

 

루머가 젠 체를 했다. 중심을 계산하지 않고 벤치 끄트머리에 봉지를 세워두는 바람에 안에 있던 것들이 데구루루, 굴렀다.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는데.”

“…반 쪽짜리 사랑?”

“반 쪼가리 자작.”

“그래 그거. ”

“그거 뭐.”

“너 왜 앞부분만 얘기해.”

 

그야 뒷부분은 읽지를 못했으니까.

 

“너 몰랐지? 나중엔 남자의 착한 반쪽도 등장해.”

“그런 내용이 아닐 텐데.”

“안 읽었으면서 아는 척은.”

“못 믿겠는데.”

“진짜라니까. 남자의 착한 반쪽이 갑자기 등장해. 그리곤 선행을 마구 저지르지. 양치기 소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병든 사람을 보살피고 동물들을 치료하고, 또.”

“그래서?”

“거기까지 읽었는데.”

 

재미없어서 관뒀어. 루머가 여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기댔다. 착한 마음씨를 가진 반쪽의 말로가 궁금했으나 읽을 용기는 없었다. 루머가 내 어깨에 정수리를 비비며 애교를 떨었다. 루머는 덩치완 다르게 몸짓이 귀여웠다. 나를 생애 처음 사귀어 본 친구라며 따랐지만 나는 루머를 귀애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랑 하루에 인사 세 번씩 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내가 나쁜 기질만 남은 반쪽이라면 루머는 반대일까. 메다르도 자작이 마구 선행을 저지르듯 너또한 내가 가여워서 보듬는 걸까.

 

“거기까지 해.”

“뭘?”

“괜히 얘기했다. 나도 책 좀 읽었다고 자랑 좀 한 건데. 너 머리 굴릴 때 다리 떨잖아. 지금 완전 디스코 팡팡이야, 나.”

“…앞으로도 많이 읽어.”

“됐거든.”

 


*

 


오성욱의 예언대로였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지붕으로 얹은 각목의 길이가 들쑥날쑥해 짜임새가 어설픈 것을 카이가 지붕 한쪽 전면에 기둥을 두어 해결했다. 못을 대중없이 박아 가까이서 보면 나무들이 흉기처럼 느껴졌다. 데크를 삥 둘러 등받이가 될 나무를 둘러주자 골조 작업은 얼추 마무리됐다. 도면을 설계하는 것도 끌과 톱을 만지는 것도 능력 밖의 일이라 형태를 갖추었을 뿐 빈말로도 잘 만들었다고 하기 힘든 모양새였다.

 

“그래도 앉아 있을 순 있겠다.”

“바닥이 있으니까요.”

“지붕에 천만 두르면 되겠지?”

“아마도요.”

“뿌듯해하는 표정이네?”

“…아마도요.”

 

소년원에서 제빵 기술을 배운 아이는 재범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기사를 본 적 있었다. 노력하는 만큼 빵은 부풀고 결과물에선 허기를 달래는 포근한 냄새가 풍긴다. 시계를 보지 않던 아이들이 시계를 보게 되고 시계를 들여다볼수록 탈선의 가능성이 낮아진다.

 

밀가루를 치대야 하는 시간. 재료를 섞어야 하는 시간. 빵을 굽는 시간. 그리고 친구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시간. 생애 처음 따뜻한 시간에 예속된 아이들의 얼굴이 환했다.

 

나무를 다듬는 시간. 톱밥이 날리는 시간. 그리고 일기를 쓰는 시간.

 

오성욱이 반은 옳았다. 할 일을 하는 동안에는 살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누구, 아.”

 

말문이 막혔다. 집 앞에 나타난 손님은 검은색 잉크가 담긴 양철통을 뒤집어 쓴 양 머리가 새카맸다. 나는 이런 묘사를 쓴 적이 있었다. 언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설명할 때에.

 

“신디.”

 

신디가 하는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녀의 말은 거대한 솜사탕 같았다. 빠르게 크기를 불렸고 확실하게 달았다. 그녀의 사랑 타령을 듣다 보면 열에 한 번은 내게도 저런 순정이 있을지도 모른단 착각이 들었다. 경험해 본 적 없지만 그녀의 가이딩은 아주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녀의 말투로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들어봐, 변백현. 나도 이렇게 속삭이고 싶은 순간이 있어.

 

우스꽝스러운 상상이 됐다. 그녀는 입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김민석을 들어 올리기 위해 변백현을 짓밟았으니까. 생과 사가 달린 청기백기에서 그녀는 당연하게 김민석을 선택했다. 그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스러진 변백현을 생각하면, 이마를 긁게 됐다. 피가 날 정도로 긁다가 꺼지라고 고함을 지르게 됐다.

 

“좋은 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

“어쭙잖은 위로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요.”

 

센터를 거역하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명대로 청기와 백기 중 하나를 고르다간 끝이 없지만 청기와 백기를 모두 들면 게임이 종료된다. 신디가 혁명가였다면 좋았을 것을. 나와 절친했더라도 그것은 가냘픈 우정에 불과했다. 신디에게는 ‘가치’와 ‘김민석’이 동의어였다. 김민석을 제외하곤 아무도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

 

“근데 왜.”

“줄 게 있어서 왔어요.”

“오성욱이 말하지 않던가요. 나를 만나려면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신디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오성욱의 핑계를 댔다.

 

“허락, 받았어요.”

 

어째서?

 

“변…백현이 남긴 게 있어요.”

 

신디의 말은 모호했다. 변백현이 내게? 아니면 변백현이 신디에게?

 

“두 달. 두 달 동안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경수 씨한테 이걸 전해달라고.”

 

신디가 편지를 내밀었다. 가져갈 엄두가 나질 않아 망설이는 새 신디가 내 손에 편지를 쥐여주었다. 그러니까, 센터에 폭탄이 있었던 셈이다. 변백현이 무사했다면 터지지 않았을.

 


*

 


원두막을 짓는 데 필요한 연장 중에는 날카로운 게 많았다. 오성욱이 내게 허락할 리 없는 물품은 모두 카이만 쓸 수 있었다. 오성욱이었다면 작업 도중에도 내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끔 그것들을 엄격하게 관리했겠지만 카이는 내 안위에 오성욱만큼 지대한 관심이 없었으므로 톱이나 끌, 삽 같은 도구를 허술하게 다뤘다. 나는 며칠 만에 그것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톱이면 정말로 죽을 수 있을지도 몰라. 끌은 또 어떻고? 주먹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었다. 너무 오래 살아 있었지. 요사이 소원해졌지. 폭탄이 터질 줄도 모르고.

 

경수야,

좋은 게 사라지는 건 괜찮아.

그보다 무서운 건

더는 좋은 게 생기지 않는 거야.

너에게 좋은 것들이 많이 생기길.

 

가슴이 들끓었다. 변백현이 오지 않은 두 달. 두 달이 지나고 개봉된 편지. 너무 짙은 패색.

 

변백현이 잘못 짚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오성욱의 방문을 열었다. 카이가 쓰는 것은 네 번째 붙박이장이었다. 칸칸이 잡동사니를 채워 두었다. 임시로 걸어둔 봉에 걸린 외투를 치우자 요란한 색깔의 비닐봉지가 보였다. 실루엣으로 짐작하건대 저 안에 톱이 있을 듯했다.

 

이제 정말 잃어버릴 시간이야.

 

“거기서 뭐해?”

 

오성욱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기필코, 반드시….

 

“나 좀 봐.”

 

센터는 어느 곳에나 빛이 있어 건축물을 지을 때 방향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몇 가지가 존재하고 너무 많은 것들이 결여돼 있었다. 이를테면 사랑. 이를테면 겨울. 이를테면 우정. 이를테면 여름.

 

“나 이런 반전 좋아하잖아.”

“…”

“울 타이밍인데 안 우네.”

“…”

“친구 섭섭하게.”

 

오성욱의 셔츠를 입은 루머. 오성욱의 선글라스를 손에 든 루머. 오성욱의 방에 있는 루머.

 

“죽을 생각 좀 그만해.”

“…”

“친구 속상하게.”

 

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폭설 한가운데 반바지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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