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후덥지근한게 무덥다 못해 푹푹 쪘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열기가 몇 주고 계속되고는 하는, 흔한 여름이었다. 평소보다 훨 더운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뉴스에서는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몇 년 만의 최고 기온을 갱신했다느니, 일사병이며 열사병으로 몇 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느니 하는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아스팔트가 후끈 달아오른 서울의 도심 한 가운데에 사는, 서부지검 검사 최태수도 예외없이 이례적인 폭염에 힘겨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관공서부터 전기 절약을 시작한다고 사무실에서는 에어컨마저 제대로 틀 수 없는 것. 물론 그녀도 환경을 사랑하는 만큼 그 부분에서야 아무 말 없이 땀흐르는 사무실을 지켰지만, 가끔은 환경보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싶었다. 아무리 그런 생각이 곧 지구를 지키자, 라는 슬로건 하에 사라졌다고 해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떨구는 땀방울같은 더위였다. 

아, 이런- 다섯번째 맺힌 땀방울이 보던 서류 위로 흘러 자국을 남기자 그녀는 마음속으로 욕을 억누르며 플라스틱 파란펜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이거 참, 짜증이 나서 버틸 수가 없네. 자조적인 웃음은 기분을 나아지게 만들지는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지만, 그녀는 절대로 여름을 잘 이겨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온도변화라는 면에서 보면 약한 축에 들었다. 그건 겨울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사우나도 잘 안 가는 사람한테 이런 찜통같은 곳에서 업무를 본다는 것은 크나큰 고역이었다. 이런 날 만큼은, 아무리 온도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다리가 익는다고 해도 변온동물이었으면 했다. 

“선배, 이거 드세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무실 반대편에 앉아있던 어린 후배가 다가와 건넨 것은, 이 상황에서 가장 반가운 얼음 띄운 아메리카노다. 손을 내밀어 어두운 액체가 담인 플라스틱 컵을 받아들자 피부가 냉기에 놀라 움츠러든다.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들이키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저는 더위 별로 안 타요.”

“고마워, 정진.”

“어? 방금 제 이름…”

어린 후배는 놀란 듯 했지만 그녀는 피곤에 지쳐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줄도 몰랐다. 아메리카노를 쪽 빨며, 그녀가 반응이 없자 시무룩해 자리로 돌아가는 후배를 태수는 멍하니 지켜봤다. 대구 출신이라 더위에 익숙하다는 그는 셔츠 손목을 걷지도 않고 있었다. 확실히 더위에 강하기는 한가보지. 또 더위 안 타는 사람이 누가 있더라. 

아, 그래. 이 건물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황시목도 그랬다. 

따지자면 시목은 더위만 안 타는 것은 아니엇다. 추위도 똑같았다. 물론 여름철 태양빛이 정통으로 내리쬐거나 빌딩 사이의 칼바람을 맞으면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사람 자체가 무딘 그였다. 생리적인 면에서도 덤덤한 건지, 그냥 밖으로 내보이기 싫어하는건지, 아니면 그녀보다 계절에 대한 준비를 더 철저히 하는건지-사실 겨울에도 가끔 목도리를 깜빡하는 그녀였기에-  

오늘은 일찍 집에 갔으면 좋겠는데. 

얼음을 와그작대며 그녀가 생각했다. 마지막 얼음을 입에 물고 나서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으아- 태수가 한숨을 뱉어내며 이마를 훔쳤다. 축축했다. 죽어도 못 해, 이건 진짜로 못해. 어떻게 낮보다 밤이 더 더울 수 있지? 말도 안돼. 푸념을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퇴근 후, 그녀는 지금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피난처로 대피한 상태였다. 소파에 털쩍 주저앉자, 그제야 긴장했던 근육이 풀렸다. 시원한 소파가 그녀의 체온을 확 앗아가고,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집에 못 가."

"집에 가."

"이 상태로 지하철을 탔다가는 죽어버릴거야. 찐만두가 될 거라고."

찐만두 먹고 싶다. 이 날씨에 또 식욕은 기후 안 가리고 충실하다. 

"가면서 사가던가."

"제발, 내일 토요일이잖아. 아침에 갈래."

"지금 가."

단호한 그의 대답에, 그녀가 소리를 빽 지르며 항의했다. 

"아, 좀! 뭐든 할테니까 오늘만 봐 줘. 내가 너의 개가 될게, 응?"

"필요 없어."

"고양이라도 할게."

"차로 데려다 줄 테니까 가."

"집에 에어컨 안 틀어놨단 말이야. 나도 사물 인터넷 설치할 걸..."

기술 발전이 이렇게 빠를 줄 누가 알았겠어. 한사코 고개를 내젓는 그녀를 바라보던 시목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더위 타는 것 알고 있었고 많이 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뻔뻔한 성격 어디 안 간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관찰한 최태수의 역사가 긴 만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집에 보내기에는 글렀다.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그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옷 빌려줄테니까 먼저 씻어."

"네, 검사님."

그녀가 좋다는 듯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시목은 닫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체격 차이가 났다지만 그의 키가 큰 편은 아니었기에 어떤 옷을 던져줘도 입기는 입을 테다. 대충 눈에 뵌 편한 바지와 티셔츠를 욕실 문 앞에 내려놓고, 그는 냉장고 안을 살폈다. 

"...만두 없는데."






밤이 점점 깊어갔다. TV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시목은 화면 안의 재미도 없는 개그에 웃어대는 방청객들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 소파에 누워있는 인물을 바라봤다. 

그녀는 벌써 잠든지 오래다. 

독특한 체질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면서, 이상하게 여름에는 침대에 머무르기를 선호했다. 잠들면 더운게 안 느껴진다나.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더운 여름만 되면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다시피 했고, 이미 그녀의 곁에서 충분히 겪은 일이기에 적응한 그였다. 

“최태수. 들어가서 자.”

대답은 없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탁자 위 리모컨을 눌러 TV를 껐다. 사람도 없으면서 왁자지껄하던 거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시목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태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그녀였기에. 시목이 고등학생때 궁금해 하던 것은 이렇게 잠귀가 어두운 그녀가 어떻게 한 번도 학교에 늦지 않고 도착하는가였다. 그때야 수면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가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알람을 스무 개 맞춰둔다는 것을 알았다. 

"최태수."

그는 한번 더 어깨를 쥐었으나, 이내 손에 힘을 빼고 주저앉았다. 얼굴이 성큼 가까워졌다. 땀에 젖어 붉던 얼굴이 지금은 홍조의 흔적도 없이 잠들어있다. 조금의 떨림도 없는 눈꺼풀이, 그녀가 이미 깊은 수마에게 먹혀들어갔다는 것을 보였다. 그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태수야."

가만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목은 그녀를 깨우려 노력하는 대신 웅크려 있는 몸 아래로 양 팔을 넣어 들어올렸다. 그가 몸 위에 던져놓다시피 올려놓았던 담요가 흘러내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 막상 침대 앞에 서니 어떻게 이불을 치워야 할 지 고민됐지만, 곧 더운 날씨에 이불을 덮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밖의 담요를 가져오기로 했다. 

천천히,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는 밖에서 담요를 가져다 그녀의 위를 잘 덮었다. 그리고 잠시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그는 아침,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소파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푹 파였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는 거실 창 밖으로 밝은 빛이 비쳐내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몸을 일으킨 후에야,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을 살폈다. 주방이었다. 

"깼어?”

그는 말 없이,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다시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그녀를 살폈다. 가볍게 묶어낸 머리가 옅게 흔들렸다. 그녀가 등을 돌린 상태로 물었다. 

“너 엄마가 준 반찬 다 먹었어?"

"...아니. 아직."

"그치? 집에서 밥도 안먹는 데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디야?”

"거기, 야채 칸..."

이걸 왜 야채칸에 넣어놔, 바보야. 그녀가 타박하는 소리를 뒤로, 그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아슬하게 걸려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목은 그것을 잘 접어 소파 위에 놓은 뒤, 주방으로 향했다. 다가온 그에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마주보았다. 미소를 띈 얼굴이었다. 

“내가 멋대로 침대를 차지하긴 했지만, 다행히 소파에서도 잘 잔 것 같네. 씻고 와, 밥 먹게.”

너 머리 완전 새집이야, 그녀가 웃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그녀가 그에게 고갯짓했다. 

"그릇에 밥 좀."

"...그릇이."

그가 가만히 서서 단말마를 내뱉자, 그녀가 한심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왼쪽 찬장 위.”

그는 팔을 뻗어 찬장을 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그릇들이 보였다. 그녀가 그런 그의 뒤로 말했다.

“넌 어떻게 혼자사는 애가 식기 위치를 몰라.”

“수저도?”

"갖다 놔줘. 너 진짜 집에 아무것도 없다, 시장 한 번 봐야겠어."

그녀가 냉장고 안의 반찬들을 꺼내 식탁 위에 올리며 투덜거렸다. 그는 그녀가 부탁한 대로 찬장에서 밥그릇을 꺼내 밥을 펐다.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눈 앞이 뿌예졌다. 식탁 위에 뭔가를 올리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양 손에 그릇을 들고, 아직까지 냉장고 안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아침부터 맥주는 무리겠지?"

"그만하지, 좀."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일어나 단호하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문이야 단호히 닫았지만, 그러고서도 잠시 앞에 서 있는 것을 그가 등을 떠밀어 데려왔다. 데려왔다. 그녀가 거실 리모컨을 집어들어 TV를 켰고, 때마침 방영하는 토요일 아침 고정 여행 프로그램이 밝은 음악과 함께 화면을 채웠다. 간간히 달그락거리는 접시의 소리와 TV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좀 괜찮던데, 보니까. 밥 먹고 시장보러가자."

"됐어."

"넌 집에서 밥을 좀 먹어야 해. 요리 할 줄 알잖아, 대충."

"너 때문이잖아."

"영화 볼까? 이터널 선샤인 재개봉 한대. 주위에 영화관 어디있더라..."

아, 가깝네. 걸어가도 되겠다. 그녀가 휴대전화 화면을 뒤적이면서 밝게 말했다. 액션 영화도 있어. 이거 볼까? TV에서 소개하는 거 봤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상관없어. 그녀가 물었다. 

"점심 때 먹고싶은 거?"

"아침 먹으면서?"

"나 알잖아. 그럼 영화 보고 밖에서 밥먹자. 파스타? 아냐. 멕시코 음식. 어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 영화 할까? 지금... 아홉 시 이십 분이니까, 열 시 십 분? 열 시 반?"

"열 시 반."

"알았어, 열 시 반으로 예매할게."

그녀가 잠시 화면을 두드리다, 옅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왜?"

"중간은 다 찼어. 앞자리 할까 뒷자리 할까?"

"알아서 해."

"뒤에 잡을게. 열 시 반. 팝콘은 카라멜?"

"응."

"커플 세트로 하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한 층 밝은 얼굴로 다시 수저를 들었다. 

"나중에 들어올 때 시장 봐서 와야겠다. 잊지 마."

"그래."

여전히 밖은 밝았고, TV 속 트래블 프로의 프로듀서는 기쁜 얼굴이었으며, 담긴 밥은 따듯했다. 묵묵히 자기 몫을 해치우고 있던 시목이, 문득 고개를 들어 물었다. 

"무슨 영화라고?"

"음, 짱구 극장판."

보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큰, 그렇지만 미세한 한숨이 새어나왔고, 동시에 태수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싫어? ...그런 거 아냐. 맞잖아, 싫은 거.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시목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밥을 씹었고,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웃음을 멈췄고, 이집트를 취재하던 여행 프로는 끝이 났다. 시끄러운 광고가 시작하자 시목이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껐다. 젓가락을 입 안으로 가져가던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걸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다른 영화 볼까?"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터널 션샤인?"

"이미 예매했잖아. 그, 짱구."

"두 편 보면 되지."

그녀가 웃었다. 



나 어제 저녁에 꿈꿨다? 근데 잠자리가 달라서 그런지, 내용이 완전 엉망진창이었어. 수맥이라도 흐른다던가...

비과학적인 미신이야.

아냐,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니까. 아! 너도 나왔어. 무슨 꿈이었냐면...









사족: 시목이는 사실 짱구와 이터널 션샤인 둘 다 재미있게 봤다. 

토요일 아침 여행 프로는 걸어서 세계속으로입니다. 토요일만 되면 그걸 보면서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9시에 하는 딩동댕 유치원의 번개맨 좋아해서 본 건 안비밀. 가끔이지만 아직까지 보는건 비밀. 지금은 촌스러운 고글을 쓰고 등장하는 번개맨. 제 우상이었습니다. 요즘 번개걸도 있다면서요? 번개걸도 백텀블링 할 수 있나... 없다면 인정할 수 없어.

이터널 선샤인은 꼭 보세요. 사랑 영화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겁니다.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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