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생존기 IF. 기억상실 외전

(본편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조아라 연재란을 습작 처리함에 따라 포스타입으로 옮깁니다.)




권차빈이 지영윤을 잊어버렸다.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 닥친 것은 어제 오후였다. 언제나처럼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영윤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차빈이]


영윤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빈이 아닌 최 실장의 목소리였다.


‘영윤 씨. 저 최승경 실장입니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차빈이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데 머리를 부딪쳤는지 잠깐 의식을 잃어서…….’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목소리 대신 꽉 막힌 숨만 새어 나왔다. 


최 실장은 놀란 기색을 눈치챘는지 검사 결과상 이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영윤을 달랬다. 다만 차빈이 놀랐을 수도 있으니 깨기 전에 병원으로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영윤은 네, 가느다랗게 대답한 뒤 그대로 집을 나섰다.


다온병원 VIP 병동은 아주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영윤을 더욱 겁에 질리게 했다. 별일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조급해지는 발걸음은 막을 수 없었다. 


꼭대기 층에 있는 차빈의 병실 앞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보안요원들이 영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막상 문 앞까지 오자 두려움에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영윤은 작게 심호흡한 뒤 병실 문을 열었다.


“영윤 씨. 오셨어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응접실에 최 실장과 소속사 직원 몇 명이 서 있었다. 영윤이 희게 질린 얼굴로 들어서자 최 실장은 곧바로 영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영윤은 뒤를 따르다가 침대에 누운 익숙한 얼굴을 보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얀 침대에 누운 차빈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처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영윤은 침대맡으로 바짝 다가갔다. 최 실장의 말대로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붕대를 감고 있거나 생채기가 난 곳도 없이 말끔했다. 차빈의 몸에 연결된 기계 역시 안정적인 맥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서 숨을 쉬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윤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최 실장은 안내만 마친 뒤 자리를 피해 주었다. 


“권차빈……. 왜 사람을 놀라게 해?”


영윤이 침대에 반쯤 엎드렸다. 투정과 달리 차빈의 손등을 감싸 쥐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일어나면 혼내줄 거니까 빨리 눈떠……. 어, 어어?”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든 영윤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영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긴 속눈썹이 팔랑였다. 갈색 눈동자에 햇빛이 둥글게 들어차는 광경은 꼭 기적처럼 느껴졌다. 영윤이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함부로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차빈아. 일어났어? 너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어?”


차빈의 시선이 질문을 쏟아내는 영윤의 얼굴에 닿았다가 곧 간절하게 맞잡은 손에 닿았다.


탁, 차빈이 영윤의 손을 소리가 날 정도로 떨쳐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에 영윤의 모든 말과 행동이 멎었다. 삐걱삐걱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내려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차빈이 미간을 좁혔다.


“누구세요?”

“……차빈아, 너 왜 그래? 어디가 많이 아파?”

“누구시냐고 물었는데요.”


들어본 적 없는 냉랭한 말투가 영윤을 향했다. 차빈이 자신에게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칠 리가 없다. 이게 장난이라고 믿느니 권차빈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갔다는 말을 더 믿을 것 같았다.


영윤은 당장 의사를 불렀다. 의사의 소견은 일시적인 기억상실이었다. 검사 결과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사고 당시 물리적 충격 자체도 크지 않았기에 외상이 아니라 심리적인 원인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나 습득했던 지식은 멀쩡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화적인 사건들을 통째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제니스나 최 실장도, 영윤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아, 차빈아. 더 크게 안 다친 게 어디야. 기억은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창백할 만치 희게 질린 얼굴에 차빈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영윤은 소매로 눈가를 벅벅 비비고는 애써 씩씩하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자.”

“…….”


차빈은 내밀어진 손을 미동 없이 응시했다. 영윤이 손끝을 옹송그렸다.


“싫어? 집에 가서 편하게 쉬는 게 너한테도 더 좋지 않겠어?”

“……집이나 여기나 똑같은데.”

“어?”


차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영윤이 얼굴을 굳혔다. 우리 집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갈 곳 없는 원망이 길을 잃었다. 


그러나 곧 영윤의 눈이 이불을 움켜쥔 커다란 손에 닿았다. 차빈은 무언가를 참아내듯 손끝까지 힘을 주고 있었다. 영윤은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저기, 잠시만. 차빈이 네가……지금 몇 살이지?”


차빈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불만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낯선 표정이었다.


“열다섯.”


무감정한 목소리로 튀어나온 숫자에 영윤은 할 말을 잃었다.


열다섯. 그의 연인은 부모님을 잃은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



차빈은 거울을 보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키가 한 뼘쯤 더 자라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기는 했으나 그가 기억하는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빈을 놀라게 한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의 직업이나 동거인 같은 것.


“내가 아이돌이라고?”

“응? 응……. 왜? 연예인 싫어했어?”


영윤이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물론 이때의 차빈에게 데뷔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차빈의 대답은 예상과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직업을 떠나서 그렇게 열심히 살 생각 자체가 없었을 텐데.”

“…….”


영윤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나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 엄청 열심히 살았어.”


웃음기가 가시자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차빈이 낮게 읊조렸다.


“왜 그랬지.”

“…….”


고작 열다섯의 기억을 가진 연인은 진심으로 의구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너무 아파서 영윤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방은 저기야.”


영윤은 쭈뼛거리며 차빈의 방 쪽을 가리켰다. 차빈의 시선이 집안 곳곳에 닿았다. 차빈은 두 사람이 함께 산 지 몇 년째라는 말에도 반신반의 했으나 일단은 얌전히 따라와 주어서 다행이었다.


“저기……. 차빈아.”


늘 불러왔던 이름인데 꼭 낯선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았다. 서늘한 시선이 얼굴에 닿자 영윤은 이상하게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배 안 고파?”


차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영윤으로부터 금세 시선을 돌렸다. 영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잘 쉬어…….”


축 처진 얼굴로 떠나려던 영윤은 이어진 말에 걸음을 멈췄다.


“왜.”

“어?”

“왜 물어봤어.”


짙은 눈썹이 짜증스럽다는 듯 작게 찌푸려져 있었다. 영윤이 작게 입을 벌렸다. 세상에, 권차빈이 나한테 짜증을 내……. 다정한 차빈을 겪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나니 괴리감이 너무 컸다.


“그냥 물어봤어.”


영윤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답지 않은 대답 탓인지 차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먼저 등을 돌렸다. 오늘 아침에도 껴안았던 너른 등을 보며 영윤은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겉옷만 대충 벗어놓고 침대로 엎어졌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너무 피곤했다. 상심한 탓일지도 몰랐다. 영윤은 괜히 코를 훌쩍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다가 깜빡 잠들었는지 눈을 뜨니 한밤중이었다. 저녁도 거른 채 잠에 빠진 것이었다. 영윤은 밥시간이 지났는데도 차빈이 자신을 깨우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윤이 세상 모르게 자고 있으면 차빈이 어르고 달래서 깨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못하면 훌쩍 안아 허벅지 위에 앉힌 뒤 한 숟갈만 먹자며 입 앞까지 수저를 들이대지 않았던가. 한 입 먹고 잠이 깨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면 예쁘다는 듯 온 얼굴에 입맞춤까지 해왔었다.


……그런 일상을 다시 찾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니, 가능하기는 할까? 오랫동안 잊었던 먹구름 같은 감정이 영윤을 잠식했다.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적해 하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영윤은 이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감탄했다.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며 텅 빈 배를 문질렀다.


힘없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거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고개를 삐죽 내밀어 살펴보니 차빈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너.”

“으아악!”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영윤이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휙 돌리자 거실 소파에 새카만 실루엣이 앉아 있었다. 차빈이었다. 영윤이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쓸어내렸다.


“깜짝 놀랐네……. 왜 한밤중에 불도 안 켜고 있어.”

“…….”

“저, 저녁은 먹었어?”

“아니.”


딱 잘라 나온 대답에 영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끼니 챙기는 걸 목숨처럼 여기는 차빈이었다.


“어? 왜?”


어리둥절한 눈과 마주치자 차빈은 대답도 하지 않고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꼬아 앉은 다리가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하긴, 지금의 차빈에게는 온통 낯선 집일 터였다. 이것저것 만지기도 껄끄러웠을 텐데 먼저 챙겨주지 못한 영윤의 생각이 짧았다.


“미안해. 내가 금방 차려줄게.”


영윤이 다급히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에 차곡차곡 들어있는 반찬을 꺼내고 데우기만 하면 되었다. 


밥을 다 차린 후 차빈을 부르자 그는 예상 외로 묵묵히 다가와서 숟가락을 들었다. 얌전한 건 비슷하네. 영윤이 몰래 웃으며 밥을 떠먹었다. 영윤의 손이 닿은 유일한 음식인 흰쌀밥은 조금 퍼석했다. 


대화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영윤은 말을 걸어도 될지 내내 눈치를 보며 입을 우물거렸다.


“네가 했어?”


그때 차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윤은 반가워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웃었다. 정작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어야 했다. 


“응? 뭐가?”

“……이거 네가 했냐고.”


차빈이 천천히 목울대를 한 번 울린 뒤 다시 물었다. 영윤은 단정한 젓가락 끝이 향한 식탁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릇에 담긴 반찬은 차빈이 직접 만들어 냉장고 가득 채워둔 것이었다. 차빈이 바쁠 때도 자신이 밥을 잘 챙겨 먹도록, 영윤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아니. 다 네가 한 거야. 너 요리 엄청 잘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

“요리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데.”


차빈은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 나는 너 처음부터 잘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배웠나 보네.”


열심히 밥을 우물거리는 뺨은 다람쥐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싹싹 비워져 가는 영윤의 밥그릇을 내려다본 차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왜 배웠는지 알 것 같긴 해.”

“응? 뭐라고?”

“밥이나 마저 먹어.”


남을 대하듯 무뚝뚝한 말투에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흥, 작게 콧소리가 들린 듯해서 차빈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영윤은 모른 척 밥그릇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차빈도 밥그릇을 모두 비웠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영윤은 괜히 들어가기가 싫어서 거실에서 어슬렁거렸다. 차빈도 매정하게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대신 소파 한편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관찰하듯 거실 여기저기에 닿았다.


“차빈아, 뭐 궁금한 거 없어?”


영윤이 슬그머니 말을 걸며 차빈의 한 뼘 거리에 앉았다. 꼭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날로 돌아간 것 같은 거리였다. 옆에 앉은 영윤을 보던 차빈이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뭔데?”

“나랑 정확히 무슨 사이야?”

“…….”


영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죽고 못사는 연인이었으니 얼른 기억해내라고 다그치고 싶은 자아와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으니 일단 오래된 친구라고 말하자고 다독이는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이, 차빈이 말했다.


“침대에 베개가 두 개던데.”

“아.”


영윤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보니 이 집안에는 서로의 흔적이 너무 많았다. 방 구분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서로의 옷이며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다.


“서랍에 콘돔도,”

“으악!”


영윤이 기겁하며 차빈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빈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제 입술에 닿은 영윤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너, 너는! 열다섯 짜리가 어디서.”

“기억이 열다섯 살까지밖에 없는 거지. 내가 열다섯 살이 된 건 아닌데.”


차빈은 어이없는 기색으로 웃었다. 뜨거운 숨결이 손바닥에 닿아와서 영윤이 후다닥 손을 떼어냈다. 손을 떼어내자 오늘 처음 보여주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고작 하루였는데 너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져서 영윤은 그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봐야 했다. 영윤의 눈빛을 마주하던 차빈이 손을 뻗었다.


뺨을 덮듯이 그러쥐는 손길은 익숙했다. 손의 크기와 온도, 부드러움까지 어제와 똑같았다. 차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가왔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영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코끝이 부드럽게 스치자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영윤은 숨까지 참으며 눈을 감고 있다가 더는 다가오는 기척이 없어 조심스레 눈을 떴다. 코끝이 스치는 거리에 차빈의 얼굴이 멈춰 서 있었다.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설마 사귀는 사이였어?”


설마라는 단어에 영윤은 울컥하는 심정이 들었다. 영윤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어땠을 것 같은데?”


차빈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이 영윤의 코와 입술에 차근차근 닿았다. 속눈썹 아래 감춰진 눈빛은 읽을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왜 그럴 리가 없냐고, 이젠 내가 싫은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네가 그래봤자 권차빈이지, 날 다시 안 좋아하고 배길 수 있을 것 같냐고 호언장담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서글픈 서러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네가 날 좋아했었다는 소리야?”


마주한 눈동자는 순수한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한 질문과는 달라서 영윤이 눈을 크게 떴다. 영윤은 고개를 비틀어 차빈의 손안에서 빠져나왔다. 차빈은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가 빈손을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순간 영윤이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각도였다.


촉, 부드러운 뺨에 입을 맞추자 젖은 소리가 났다. 차빈의 눈이 커졌다. 그는 꼭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뺨에 손을 올렸다. 영윤은 그 손등 위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좋아해, 지금도.”


자신을 잊어도, 이제 와서 차갑게 군다고 해도, 모든 걸 기억하는 영윤은 이제 차빈을 좋아하지 않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얼른 나를 기억해내, 권차빈.”


마음 같아서는 근사하게 웃는 얼굴에 키스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그래도 어린애라서 뺨으로 봐줬다. 영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듯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에 따라붙는 시선이 새벽보다 짙었다.



**



밤이 긴 적은 오랜만이었다. 혼자 자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영윤은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늘 영윤의 몸을 뜨끈하게 데워주던 연인을 대신해서 베개라도 푹 끌어안아 봤지만 역시 솜뭉치 따위가 차빈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영윤은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시계를 노려보다가 기어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같이 자자고 하면 엄청 난감하겠지. 그럼 그냥 몰래 가서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영윤은 차빈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뒤꿈치까지 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나 곧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방안은 어둑했고 차빈은 깊게 잠들어 있었다. 영윤은 금방이라도 옆자리에 파고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색색거리는 차빈의 숨소리가 들렸다.


영윤은 문득 이상함을 깨달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평소에는 영윤이 숨만 조금 다르게 쉬어도 잠에서 깨어날 만큼 예민한 차빈이었다. 오늘은 피곤해서 그런 건가, 혹시 어디 아픈가. 영윤은 차빈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아…….”


영윤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둠 속에 잠긴 차빈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을 비집고 투명한 눈물이 서글프게 떨어졌다. 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뺨만 적시는 얼굴은 절망을 끌어안고 있었다.


열다섯의 차빈은 이런 얼굴로 홀로 울었을까. 텅 빈 집에서.


상상만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영윤이 무릎으로 침대 위를 기어 차빈에게 다가갔다. 손끝이 부드럽게 뺨을 감싸고 뜨거운 눈물을 연신 훔쳐냈다. 손바닥 안이 금세 젖어 들었다. 영윤이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를 맞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차빈아, 많이 아파? 많이 슬펐어?”


영윤의 목소리도 슬픔에 잠겨 있었다. 차빈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리더니 그가 곧 눈을 떴다. 천천히 눈꺼풀이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물기로 무겁게 젖었다. 잠기운이 남은 몽롱한 눈이 영윤을 담았다.


“……나만 두고 갔어.”


속삭임에 가까운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연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헤매고 있었다. 영윤이 차빈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다녀와서 같이 저녁 먹자고 했는데……다시는 그럴 수 없겠지.”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이미 바닥까지 가라앉아 더는 추락할 곳이 없다고 느낄 때면 저런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영윤도 잘 알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말렸어야 했는데. 나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할걸.”


눈을 내리깐 차빈이 덧붙였다.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니, 그냥 나도 같이 갈걸.”


영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예쁜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영윤은 차빈을 탓하지 않았다. 수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자책하고, 죽음을 생각했을 어린 차빈을 그저 안아주고 싶었다. 영윤이 차빈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행히도 차빈은 밀어내지 않고 몸을 맡겼다.


잠시 뒤에 차빈이 물었다.


“왜 네가 울어?”


영윤은 얼굴을 숨기려고 차빈의 어깨에 더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대체 왜 우는 건데.”


미치겠네. 작은 중얼거림에 난감함이 묻어났다.


“……미안해서.”


숨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울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가.”

“네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같이 못 있어 준 게 미안해. 그리고 너는 이렇게 우는데,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안도하게 돼서…….”


영윤은 식은땀에 젖은 차빈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이기적인 진심을 토해냈다.


“차빈아, 살아줘서 고마워. 나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거칠던 차빈의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영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빈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런 영윤을 응시했다. 차빈이 손을 들었다. 손끝이 영윤의 뺨 언저리에 닿을 듯 말 듯 맴돌았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허락 따위 구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영윤이 양손으로 차빈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움직여 뺨을 타고 흐른 눈물에 가져다 댔다. 손끝이 눈물을 머금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내 차빈이 스스로 영윤의 얼굴에 손을 대고 움직였다. 여린 과일처럼 짓무른 눈가와 붉게 달아오른 코끝, 뜨거운 숨을 내뱉는 입술을 차례대로 덧그렸다. 뜨거운 체온이 금세 옮겨왔다.


울음이 진정되었을 무렵 차빈이 물었다.


“우리가 몇 살 때 만난다고 했지.”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같은 반이 돼.”

“3년…….”


훌쩍임과 졸음이 묻은 대답을 듣고 차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영윤이 몸을 뒤척이자 차빈이 조금 급한 움직임으로 팔을 잡아당겼다.


“가지 마.”

“응, 안 가. 옆에 있을 거야.”


애초에 갈 생각도 없었던 영윤이 말갛게 웃었다. 대답을 들은 차빈의 입가에도 미소가 서렸다. 영윤은 머뭇거리다가 뺨에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맞춤이었다. 잠결에는 등을 어설프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



영윤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깼어?”

“으응…….”


다정한 목소리가 의식을 깨웠다. 영윤은 반사적으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이마에 따듯한 입술과 숨결이 닿아왔다.


“우리 영윤이 많이 울었나 보네. 눈이 붕어처럼 부었어.”

“그야 네가……어? 어, 어어?”


영윤이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다정하게 웃음 짓는 차빈이 있었다. 그러니까, 영윤에게 익숙한 차빈이.


“너, 권차빈?”


멍청한 물음이었지만 차빈은 어제처럼 삐딱한 조소를 날리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영윤아, 나야.”


대답과 동시에 입술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잃은 것은 단 하루였으나 무척이나 그리웠던 키스였다. 


영윤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가득 들어찼다. 영윤은 진짜 차빈인지 확인하려는 듯 어깨며 팔 여기저기를 만져댔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차빈의 손끝이 눈물을 닦아냈다.


“너, 너 정말 내 차빈이야……?”

“그럼 나지 누구야.”


불그스름해진 눈가에 입을 맞추며 차빈이 영윤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무서웠어?”


차빈의 눈에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영윤이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걱정, 흑. 걱정했어.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이 다 없던 일이 될까 봐. 네가 더는 나를……사랑하지 않을까 봐.”


영윤의 말에 차빈이 작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영윤이는 괜한 걱정을 다 하네.”


정말이지, 그건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기억을 잃고 영윤을 처음 봤을 때부터 차빈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남자가 허리를 끌어안고 울먹이는데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자신이 이상했고, 별것도 안 했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예뻐 보이는 지영윤의 존재는 더욱 이상했다.


괜찮다고 속삭이는 말은 다정했고 얼굴에 내려앉는 눈빛은 햇살처럼 따뜻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마음이 햇볕에 잘 달궈진 조약돌처럼 변한 것은 금방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스물 후반의 아이돌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저 남자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침대 위에 놓인 베개 2개와 마구 섞여 있는 사이즈가 다른 옷, 꼭 두 쌍씩 맞춰져 있는 수저며 슬리퍼, 서랍 안에서 나온 몇 상자의 콘돔까지…….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고 괜히 낯이 뜨거워져서 눈도 맞추지 못했다.


자신은 목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미친놈처럼 고장 나는데 지영윤은 이런 생활이 당연한 것 같아 보여서 조금 심술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깟 심술은 지영윤의 미소 한 번이면 맥을 못 추리고 사라졌다. 커다란 눈이 휘어지고 입술이 달콤한 웃음을 토해내는 순간, 지영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첫사랑에 넋 빠진 애송이였다.


3년만 버티면 지영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귀띔해줬더라면 그 시간도 그렇게 지옥 같지 않았을 텐데. 수없이 무너졌던 시간도 기껍게 견뎠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울음 자국이 남은 지영윤의 등을 서툴게 토닥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제게 안겨 자는 영윤을 보는 순간 모든 게 거짓말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동시에 차빈은 깨닫고 말았다. 


언제, 어떤 순간에 만났어도 너를 사랑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내게는 너무 쉬웠으니.


차빈은 울먹이며 파고드는 영윤을 꽉 끌어안았다. 평생을 쌓아온, 변하지 않을 사랑이 여전히 품 안에 있었다. 황홀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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