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여동생이 메이지로 태어났듯 가렛은 그들의 장남이자 오빠로 태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날때부터 세상과 반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지키며 살아갈 운명이다. 오직 그들을 사랑해서다. 누가 뭐라든 상관없다.
옳지 못한 일이래도 상관없다. 존경받는 챈트리 신모들은 말씀하셨다. 마법은 사람을 섬길 것이며, 지배해서는 안 된다. 일요일, 신도들은 마을 외곽의 황야에서 악마들린 혈마법사와 싸우다 죽은 세 명의 템플러를 위해 기도했다. 마법의 본성은 불안정해 인간을 타락시키기 십상이니 메이지들은 안드라스테의 안전한 보호 아래 놓여야만 했다. 그것이 조물주의 질서다. 그러나 아홉 살 먹은 여동생이 동네에서 가장 사나운 남자아이를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2미터 밖으로 날려버렸던 말을 들었을 때 가렛 호크는 소식을 전한 꼬마의 목에 검을 겨누고 침묵을 강요했다.
그날 밤 호크 가족은 십오년 가까이 살아온 집을 떠났다. 언제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기라도 했던 양 신속한 대처였다. 구름에 가린 달은 흐렸고 잎이 얼마 남지 않은 나뭇가지들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으며 이내 빗방울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부는 점점 보폭을 늘렸고 아이들은 숨가쁘게 따라 걸었다. 길은 진창이 되어 베서니의 새 부츠는 엉망으로 젖었다. 카버는 자꾸 뒤처졌고 코를 훌쩍거렸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머나먼 어둠 너머로 여관의 희미한 불빛이 보였을 때 호크 부부는 멈추어 서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악천후의 바다에서 고립된 작은 섬처럼 단단히 가족을 안고 부부는 끊임없이 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술처럼 속삭였다. 오직 사랑이 중요하단다. 가렛, 베서니, 카버,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단다.
소년 가렛 호크는 그 말을 칼처럼 심장에 품고 자라났다. 그는 로더링 방 침대 밑에 검을 두고 잠들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가렛이 배운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혼자 진 어깨의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던 날 그는 예배당에 찾아가 창조주께 기도를 올렸다. 제가 사랑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

그런 가렛이 사랑하게 된 이가 하필 그인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리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호크는 커크월에서 일확천금의 기회를 찾는 퍼렐든 난민이었고 앤더스는 대가 없이 난민을 돕는 이단마법사 힐러였다. 원정에 끼기 위해 가렛이 구하던 지하대로 지도는 도망친 그레이 워든 앤더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퍼렐든 서클 출신인 앤더스는 옛 연인 칼 테클라를 갤로우즈에서 빼내고 싶어했고 가렛 호크는 대인전투에 능한 용병이었다. 그들은 이해가 맞아서 함께했다. 한밤중의 챈트리에 잠입해 '정의'와 함께 템플러들을 죽이고 평온화된 칼 테클라의 목숨을 거두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어둠의 피조물이 우글거리는 깊은 땅 속으로 함께 들어가 막대한 보물을 지고 돌아왔다. 서로 한 번씩 호혜를 주고받았고 금화까지 나누었으니 더 이을 것 없이 거기서 끝낼 수도 있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관계가 깊어진 게 언제부터든가? 아마 지하대로 원정에서 돌아오고부터였을 것이다. 드디어 가족을 로우타운 밑바닥에서 구원해 낼 보물을 짊어지고 얹혀살던 숙부 집의 나무문을 열었을 때 가렛을 맞은 건 가족의 따듯한 환대가 아니라 성벽처럼 여동생을 둘러싼 한 무리의 템플러들이었다. 가렛은 반사적으로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지만 일단 들킨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언제나 두려워했던 그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고 베서니는 운명에 순종하는 흰 양처럼 고개를 숙이고 갤로우즈로 향했다. 호크 가족은 하이타운의 저택을 되찾았지만 그 번듯한 집에는 주인을 찾지 못한 방이 너무 많았다.
그 일이 있고 가렛은 한동안 제대로 생활하지 못했다. 부친의 죽음과 블라이트로부터의 피난길, 힘겹고 지리한 난민 생활을 버텨도록 그를 붙잡아준 지지대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이단마법사 가족의 장남으로서 가렛은 거리의 템플러들은 물론이요 수줍은 얼굴로 앞치마를 뒤적여 잘 닦은 사과를 내미는 앞집 소녀마저 경계하며 살았다. 피난길에 오른 이후로는 더욱 힘들었다. 죽은 남동생을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시체의 가슴팍을 뒤져 동전을 모아야 했고 용병으로 고용된 후엔 이름도 모르는 무고한 이들의 피를 손에 묻혀 가족을 먹일 빵을 샀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 양 두 동생을 다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차마 이제는 평온화된 자의 이마에 찍히는 태양 문장 앞에 무릎꿇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동료들도 만나지 않고 한동안 로우타운의 지저분한 펍을 전전하던 가렛이 어느 밤 커크월 정상에 선 챈트리를 향해 걷다 발길을 거꾸로 돌려 찾아간 곳이 다크타운의 진료소였다.

문간에 선 그를 보자마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네 고통을 능히 짐작한다'는 듯 숙연한 표정을 지어보인 앤더스는 침착하게 캐비닛 맨 아랫칸의 자물쇠를 땄다. 그가 꺼내든 건 도대체 언제 모았는지 모를 갖은 빛깔의 술병들이었다. 그는 탄식하듯 말했다. "….이런 일로 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축배를 들 수 있다면 좋았겠지." 그들은 아직 원정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도 열지 못했다. 둘은 환자들의 손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유리컵을 쨍 소리가 나게 맞부딪히고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잔을 계속 채워주었다. 그날 밤엔 위급한 환자도 없었고 사방은 가슴 속 어둠처럼 고요했다. 커크월 셰리주, 오스트윅 사과주, 싸구려 올레이 와인에다 심지어 환자용 브랜디까지 동낼 기세로 그들은 병을 비웠다. 다른 동료들 없이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건 그러고 보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앤더스는 취기가 오르자 조심스러운 태도를 잃고 목소리를 높여 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베서니에게 내 서클 탈출법을 다 알려줬을 텐데. 하지만 갤로우즈는 너무 위험해, 거기선 도망친 메이지를 붙잡으면 바로… 빌어먹을 나이트 커맨더!" 가렛은 순간 앤더스의 눈에서 번득이는 푸른 불꽃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밤이었다. 정작 가족을 빼앗긴 가렛은 침몰하는 배처럼 말이 없는데 앤더스는 의분에 차 연설하듯 나무상자에 한쪽 발을 얹고 갤로우즈 방향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그는 열성적으로, 눈을 맞추고, 이 일은 호크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다. 테다스의 모든 메이지 가족의 아픔이며 전적으로 템플러와 챈트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 목소리의 뜨거움, 손을 대면 데일 듯한 열기.
앤더스는 가렛이나, 가렛이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과 전적으로 달랐다. 호크 가족은 고된 생활 와중에도 한 번도 챈트리와 안드라스테를 욕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에 꼬박꼬박 나갔고 감상적인 분노에 기력을 소모하지 않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면 식탁에 앉아 식전 기도를 올렸고 자기 전엔 난롯가에 모여 포옹을 나누었다. 시체에서 거둔 동전으로 산 빵을 가족끼리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으면 족했다. 하지만 앤더스는 세상을 향하여 주먹을 흔들고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가족은 없었고 머릿속엔 정의가 살았고 돈이 생기면 가난한 이를 도왔다. 얼굴도 모르는 '테다스의 모든 메이지'를 위해 목을 내놓으려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가렛의 마음에 묘한 위안을 주었다.
무엇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연설을 이어나가던 앤더스는 느닷없이 호크의 어깨를 잡더니 맹세했다. 그에게선 독주와 약초, 그리고 피흘리는 환부의 냄새가 났다.
"내가 열두살 때…. 그놈들은 날 어머니에게서 떼어놓았어. 그게 무슨 기분인지 알아, 가족과 헤어지는 거 말이야…. 어떤 메이지 가정도 이런 고통을 겪어선 안 돼. 앞으로 그들이 또다시 무고한 어린아이를 데려가려 들면 난…. 난 무슨 짓을 해서든 막을 거야. 약속해."
하지만 사실 호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모든 메이지들.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이 위험해."
"상관없어."
그 결연한 선언을 끝으로 앤더스는 정신을 잃고 작동을 멈춘 골렘처럼 주저앉았다. 곧 호크의 손에서 떨어진유리잔이 바닥을 굴렀고 다음날 두 사람 모두 중천까지 일어나지 못했으며 앤더스는 퍼렐든 서클 비장의 숙취해소 포션을 만들겠다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며칠 뒤 앤더스는 템플러들이 먼 농가에서 호송해오는 어린 소년을 구하겠다며 뛰쳐나갔고 가렛은 그를 뒤따랐다. 앤더스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알면 알수록, 앤더스는 지독하게도 위험한 메이지였다. 그는 호크에게는 정확히 정체를 알리지 않은 어떤 지하단체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메이지와 템플러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가렛은 매번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앤더스를 혼자 보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둘은 함께 마법을 타고난 어린아이를 가족에게 도망보내고, 서클 메이지의 탈출을 돕고, 그들을 뒤쫒던 템플러의 시체를 바닷속에 던졌다. 가렛은 템플러 갑주의 틈에 칼을 교묘하게 찔러넣어 치명상을 입히는 법을 익혔다. 몇 년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호크 가족은 위장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는 편이었고 퍼렐든에서 템플러들은 대체로 존경받았다. 하지만 앤더스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가렛은 사람을 고용해 진료소 주변에 수상한 인물이 지나가지 않는지 감시했고 혹시라도 템플러가 나타나면 자신에게 연락이 오도록 했다.
앤더스는 호크와 같은 이가 모든 메이지의 편에 서 줘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의 존재가 메이지 가족들의 운동 참여를 고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렛은 그런 편에 선 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메이지 가족에겐 관심없었다. 모든 메이지를 구하려던 앤더스 안의 정의가 그를 '악마'라 부른 메이지 소녀를 죽이고 도망쳤을 때 가렛 호크는 침착하게 편지와 은화 몇 닢을 챙겨 돌아왔다. 상심한 앤더스의 기분이 나아지도록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거듭 말했다 거듭, 사실 그 일이 누구의 잘못이든 상관없었는데도.
얼마 뒤 앤더스에게 고백했을 때, 템플러들이 당신을 데려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난 당신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해 온 거라고 말했을 때 앤더스는 가렛이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엄중히 경고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사냥당하고, 미움받고, 온 세상이 우리를 쫓게 될 거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연옥과 같은 도시의 무엇이든 그를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 가족이 함께 도망치던 밤처럼 함께라면 어떤 삶이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렛은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더스는 사랑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배릭의 주도로 다같이 위키드 그레이스를 한 밤, 잃은 점수만큼 잔을 비운 앤더스는 가렛의 팔에 기대어 '매달린 남자'를 나섰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는 별이 총총했고 후텁지근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서는 쓰레기 냄새가 풍겼고 가렛의 어깨를 붙들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경사진 골목을 걸어내려가며 앤더스는 낭만적인 어조로 자신은 지금 커크월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나와 칼은 그랬어. 서클에 있을 때 말야. 함께 있으면 우리가 템플러의 죄수들이란 걸 잊을 수 있었지. 그리고 당신도 그래 호크,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은 것만 같아."
앤더스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환했다. 가렛이 그의 허리를 당겨 안자 앤더스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노란 새의 깃털처럼 분노가 없는 웃음이었다. 앤더스는 때로 그렇게 웃었다. 풀숲에 숨은 얼룩무늬 고양이를 보았을 때,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가렛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마를 쓸어줄 때 앤더스는 평소 그를 괴롭히는 분노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문득 호크의 팔을 뿌리치고 앤더스는 자유로운 새처럼 날듯이 가벼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 돌연 무엇에 발목을 붙들리기라도 한 듯 멈춰섰다.
앤더스의 입술에서 조용히 독백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난 자유로워. 하지만… 다른 메이지들은 그렇지 못해." 그의 어조는 갑자기 무거워져 있었다.
그 순간 가렛은 자신과 앤더스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멀어졌다고 느꼈다.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래도… 그래도 당신과 함께라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두를 구하는 거 말야. 혼자일 때 난 외로웠고 확신이 없었어. 내가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지 두려웠어." 앤더스의 시선은 가렛 대신 먼 하늘의 별들을 향해 있었다. 별처럼 무수히 많은 온 세상의 메이지들.
"그렇지만 이제는 모든 게 확실히 보여. 호크, 당신이 믿어준다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당신은 나에게 용기를 줘.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줘."
농담이었지만 동료들은 그와 사랑을 하게 된 후 앤더스가 만드는 빛이 더 밝아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정의의 푸른 빛까지도 말이다. 이 순간 앤더스는 장막 너머에 한 발을 걸친 것마냥 희끄무레한 푸른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고, 가렛은 그 빛에 왼쪽 가슴을 찔린 듯 급작스런 통증을 느껴 앤더스의 마른 어깨를 얼른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렇게 겹쳐 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이 아닌 먼 수평선과 밤하늘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날 밤 진료소의 더러운 침상에 연인을 눕히고 가렛은 한참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잠든 앤더스의 금빛 머리카락은 부석거렸고 뺨은 뜨거운데다 말라 마치 종잇장 같았다. 이렇게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 숨이 꺼지는 환자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그, 싸구려 셰리주가 든 더러운 유리잔을 흔들며 흐느끼듯 웃는 그를 볼 때, 서로의 손가락을 하나씩 얽을 때, 허리를 안고 함께 쓰러질 때 가렛은 사랑을 느꼈다. 앤더스가 위험에 처했을 때, 템플러의 검날 앞에서 마력을 잃고 휘청거릴 때, 이름도 모르는 이를 감싸려 무작정 함정으로 뛰어들 때 가렛은 끔찍한 사랑을 느꼈다. 쇳덩어리같은 심장이 둔중히 아래로
가라앉는 사랑.
과분한 고백을 받았지만 가렛은 앤더스가 느끼는 사랑에 공명하지 못했다. 사랑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용기를 준다고,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앤더스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 외로워졌고 불안해졌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면 달랐을까, 덜 위험하고 더 행복한 사람이었다면, 그러나 애초에 사랑은 불가항력. 타고난 운명처럼 무거운 쇠사슬에 한 번 발목이 매이고 나면 그 노예된 자는 한 발짝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날카롭게 간 칼을 침대 밑에 두고 잠들자, 사랑을 앗아 가려는 만인을 죽여버릴 수 있도록. 가렛은 사랑할 때만큼 세상이 두려운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앤더스를 혼자 두고 진료소를 나서기가 두려웠다.

어느날은 언쟁을 벌였다.
호크 저택의 침실에서였다. 한차례 정사를 마치고 그들은 붉은 이불에 휘감겨 서로에게 기댄 채 누워 있었다. 벽난로에선 마른 장작이 타닥타닥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방안에는 훈훈하고 부드러운 열기가 감도는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그 때 가렛의 두꺼운 팔뚝을 베개 대신 베고 연인의 배를 어루만지며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던 앤더스의 입술에서 문득 떠오른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요즘 부모들은 메이지 아이들을 가두어두고 있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말야. 어제도 한 명 그런 아이를 만났어."
"가둔다고? 템플러들 때문에?"
"응. 몇 달동안 저택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어."
"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호크, 애가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니까?"
"감시가 점점 심해지고 있잖아.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앤더스는 가렛을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다니, 호크, 너무 쉽게 말하는데, 하루종일 애를 방 안에 가둬 둔단 말야. 주변엔 멀리 사는 친척에게 보냈다고 거짓말하곤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창도 없는 방에서 하인들도 모르게 끼니만 연명하게 하면서, 그래 목숨만 연명하면서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몇 달을 혼자 보내도록… 그 애가 차라리 템플러를 바란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건 감옥이야. 또 다른 서클이라고!"
앤더스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또 극단적으로 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은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호크는 어쩐지 울컥하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마주 언성을 높였다.
"앤더스, 그들은 자기 아이를 템플러로부터 지키려고 한 거야. 너도 요즘 같은 때 서클에 보내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
"하지만 그들이 하는 짓이 템플러와 뭐가 다르지? 그 부모는 템플러와 똑같은 짓을 한 거야, 소위 '안전한 보호'말이지. 정확히 템플러들이 하는 말이야. 다 널 위한 일이다, 널 악마한테서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 말을 하면서 우리를 동물처럼 가두고, 날 서클 독방에 처넣고 일 년을, 꼬박 한 해를 내버려뒀어.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난 누구와도 난 말할 수 없었어... 오직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 말이야, 그게 어떤 건지 알아? 너는 절대로 모르겠지 메이지가 아니니까. 누구도, 어떤 아이도 메이지라는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해선 안 돼!"
완전히 무엇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앤더스는 몸을 일으켰고 헝클어져내린 금발 사이로 형형한 눈이 호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앤더스 안의 정의가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속마음을 들킨 듯한 기분에 가렛의 뒷목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황급히 앤더스의 손을 잡았다.
"그래 맞아 앤더스. 네 말이 맞아"
"모든 메이지에겐 자유로울 권리가 있어! 누구도 그걸 억압할 수 없어!"
"맞아, 내가 말실수를 했어…. 어렸을 때가 생각나서. 우리 집은 템플러의 눈을 피해 도망다녔지, 숨어 다니던 시간동안 그 애가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오, 호크……."
앤더스의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그는 언제 위협적으로 굴었냐는 듯 가렛의 손을 마주잡았다. 사실 가렛은 어릴 적 생각에 그렇게 말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상황을 무마하려 둘러댄 거짓말에 불과했다.
"나는…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어. 미안해, 베서니 일은 유감이야. 정말로... 그놈들이 그 애를 끌고 갔지. 하지만 너희는 최선을 다했어."
앤더스의 목소리는 점차 가렛이 아는 그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너와… 가족들은 그 애를 가둬두지 않았잖아. 너희 아버지는 용감하게 서클에서 도망치셨고 자식들에게 최고의 삶을 주려고 노력하셨어. 너희 어머니도… 그 참혹한 부모와 비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너희 부모님은 뭐가 정말 소중한지 알고 있었어, 너희 가족은 자유로웠어. 비록… 잡혀갔지만… 그 애는 자유로웠던 시간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거야."
가렛의 심박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둘 사이의 공기는 너무나 감정적이었고 너무나 뜨거웠다.
"내가 당신과 자유롭게 보내는 시간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처럼 말이야. 설사... 설사 그놈들의 손에 트랭퀄이 되더라도."
앤더스는 심지어 조금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가렛은 앤더스의 벗은 어깨를 끌어안았고 가렛의 어깨에 턱을 대고 앤더스는 횡설수설 우리는 테다스의 모든 메이지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고, 서클로부터 구해야 한다고, 먼 미래에 너나 나 같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저히 가렛은 모든 메이지니 백 년 후의 아이들 따위는 상관없다고, 이 순간에도 사실 난 당신을 이 방에 가두고 싶다고, 당신을 밖에 내보낼 때마다 두려워서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가렛은 눈가가 시큰해졌고 그걸 본 앤더스는 챈트리를 욕했다. 가렛은 앤더스를 안고 자리에 누웠고 연인의 머리를 받친 팔이 돌덩이처럼 굳어도 움직이지 않고 동이 틀 때까지 그대로 누워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생 증오받는 것과 그를 잃는 것 중 무엇이 더 끔찍할까? 가렛의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무엇으로부터든 지키는 거였다. 그의 챔피언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의 연인은 스스로를 위험에 던져 넣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건 절대 가렛은 앤더스를 지키기 위해 그를 가둘 수는 없으리라는 거였다. 서클의 단단한 벽도 감옥의 창살도, 그레이 워든의 규율도 앤더스를 가둘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모든 걸 버리고 이 빌어먹을 쇠사슬의 도시를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모든 걸 버리고 단둘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곳을 떠나서 어딘가 평화로운 땅으로, 하지만 다른 곳에 간다고 뭐가 다를까? 챈트리는 테다스 전역에 핏줄처럼 퍼져 있고 앤더스는 모든 고통받는 메이지를 버리지 않으리라. 절대로.


그래도 상황은 가렛이 커크월의 챔피언에 오르고부턴 훨씬 나아졌다. 텅 비어버린 저택이 연민을 자극했는지 앤더스는 짐을 챙겨 가렛의 거처로 들어왔다.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퍼포먼스처럼 가렛은 앤더스에게 저택을 나가는 비밀 통로의 열쇠를 선물했다. 앤더스는 뛸 듯이 기뻐했지만 그가 위험에 몸을 던지러 살그머니 가렛의 시야에서 빠져나가면 가렛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의자를 가져다두고 위장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꼼짝않고 어둠을 응시했다.
그래도 전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작 관저에서의 결투로 호크와 그 동료들은 커크월 주요 인사들에게 알려졌고 이제 누구도, 도시 한복판에 아리쇽을 무찌른 위대한 챔피언의 동상이 서 있는 한 함부로 호크의 친구를 건드릴 수 없었다. 심지어 저 가공할 나이트 커맨더조차 갤로우즈의 심장부 되는 집무실에서 앤더스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던 것이다. 챔피언이라는 호크의 위치가 그를 지키고 있다고. 그건 가렛이 지위를 유지하고 도시에 책무를 다하는 한 템플러는 그의 연인을 건드리지 않겠단 승인이었다. 그 말이 가져다준 짙은 안도감이란,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아무도 챔피언의 연인을 앗아가지 못하리라.
하지만 일단 안전해지자 앤더스는 자신이 모든 메이지를 위한 새로운 책무를 졌다고 느끼게 된 모양이었다. 갇혀있는 다른 메이지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게 된 모양이었다. 저택의 안락한 서재에서 앤더스는 피로 글을 썼다. 이제 그는 주로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서재 바닥에 난잡히 떨어진, 구겨진 종이를 집어들면 마구잡이로 쓰여진 문장들,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에 거친 줄이 죽죽 그어져 있다. '억압' '자유' '권리' '영원한 수감생활' 같은 대목에선 무슨 감정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잉크가 종이에 구멍을 뚫을 듯 까맣게 번졌다. 그는 자신의 글이 모든 메이지의 가슴에 불씨를 지피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꿀 불길을 일으킬 수 있길 바랐다. '앤더스 선언' 초고를 완성한 밤 앤더스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서 연설하듯 한 손을 들고 원고를 읽어내려갔다.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진정한 자유이니, 온 테다스의 메이지들이여…." 그 목소리의 격정, 그 손짓에 담긴 분노, 글자를 따라가던 시선은 어느새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고 언어는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는 진실로 원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마치고 지친 어깨를 늘어뜨린 그에게 유일한 청중이었던 가렛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지만 그의 지지는 앤더스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가렛이 메이지가 아니어서, 어쩌면 그의 말 속에 진심이 없는 걸 알아서였는지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가렛은 앤더스의 열띤 목소리가 언젠가 테다스의 모든 메이지를 위한 불로 화해 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는 앤더스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저 행복하게 해 주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모든 대화를 메이지 문제로 끌고 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고, 의견이 부딪히기라도 하면 '당신은 메이지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이라며 불식간에 선을 그었다. 언더그라운드의 활동 자금 대부분이 호크의 금고에서 나가고 있었는데도. 나이트 커맨더와 퍼스트 인챈터는 끊임없이 서로를 못살게 굴었고 가렛은 그들 싸움에 계속해서 불려나갔다. 양 진영 중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받았고, 한쪽을 고르면 다른 쪽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챔피언의 개입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피의 커크월, 미쳐돌아가는 커크월, 매일같이 템플러와 메이지가 서로 죽고 죽이는 커크월, 호크가 챔피언에 오른 뒤로 갤로우즈 메이지의 반은 트랭퀼이 된 것 같았다. 아무리 구하려고 노력해도 계속 더 많은 메이지가 죽어나갔고 커크월의 모든 메이지의 운명을 피부로 느끼듯 앤더스는 괴로워했다. 잠을 잘 자지 못했고 가끔은 한밤중 혼자 깨어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그는 가렛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자신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이, 남들 사는 사정이 그에겐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왜 자신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남들의 행복을 신경쓰는가? 왜, 앤더스는 가렛 호크의 방식대로 행복할 수 없단 말인가?

그렇지만 때로, 가렛은 희망을 느꼈다. 아주 늦은 밤 침대에 기어들어온 앤더스가 조용히 뺨에 입맞춰올 때, 아침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다 문득 뒤를 돌아보고 저를 소중하게 응시하는 한 쌍의 따듯한 갈색 눈동자를 만날 때, 그들이 함께 자는 침대에 올라가려던 마바리를 붙잡고 그 개가 사람이라도 되는 양 훈계를 늘어놓던 앤더스가 웃음을 참는 가렛의 얼굴을 흘긋 보곤 함께 웃음을 터뜨릴 때, 그럴 때면 가렛의 왼쪽 가슴엔 따듯한 온수가 가득 차오르는 듯하고 오직 이런 나날이 영원히 계속되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가렛이 앤더스를 안으면 앤더스도 가렛을 안고, 둘의 맞닿은 몸은 따듯하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연인의 숨을 느낀다. 연인은 서로의 것. 저 창 바깥에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언제나 앤더스는 이 집으로 돌아오고 그러면 우리는 따스한 난롯가에서 체온을 나눌 것이다.
그런 순간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서로를 끌어안은 팔은 고립된 섬처럼 단단할 것이고 그래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집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킬 수 있다. 절대로 잃지 않겠다.


*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앤더스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음성에 담긴 슬픔에 주의를 뺏긴 것도 잠시, 굉음이 울렸고 거대한 기둥이 하늘로 치솟으며 커크월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날려버렸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폭발 지점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영원한 영광을 노래하는 웅장한 기둥과 성화였을 돌과 유리와 모래가루가 사람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교를 예비하듯 앤더스는 검은 수의를 입고 있었다. 앤더스는 모든 메이지를 위한 불로 화했고 그가 일으킨 피바람이 대륙 전역을 휩쓸 것이다. "이게 당신이 대주교의 주의를 끌어달라고 한 이유였어!" 가렛은 소리쳤다. 앤더스는 사랑에게 거짓말했고, 사랑을 이용했고, 사랑을 배신했다. "이 일을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면, 갚겠어. 어쩌면 저스티스는 자유로워질지도 모르지." 앤더스는 제단에 오른 검은 양처럼 유순히 흰 목덜미를 내밀었다. 가렛의 손엔 칼이 들려있었다. 가렛은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메이지를 욕했고 정의를 욕했다.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한 게 이거였어?"
일전에 대화가 있었다. 앤더스는 사랑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걸 위해 죽을 수 있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도, 목숨도, 자신의 모든 걸 정말 다 버렸다. 앤더스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렛은 그걸 볼 수 있었다.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외로운 검은 섬처럼 앉아 있는 그, 가렛의 연인은 그에 대한 사랑마저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가렛마저 그러겠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가렛은 가슴을 쳤다. 지위, 명예, 부, 그가 커크월에서 쌓아올린 모든 게 이 한 걸음에 달려 있었다.

커크월의 챔피언은 앤더스를 데리고 도망쳤다.

가렛 호크의 이름은 메이지 리벨리온의 봉화가 되었다. 나이트 커맨더에 맞선 챔피언의 무용담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테다스 전역의 서클들은 잇따라 반란의 횃불을 올렸다. 무기상들은 템플러 시체에서 벗겨낸 검과 갑옷을 팔았고 서클 근방에선 비명섞인 폭발음이 연일 울렸다. 길에 널린 시체의 품을 뒤지면 로브 입은 가슴팍에선 으레 꼬깃꼬깃 접힌 '앤더스 선언' 필사본이 나오곤 했다, 혹은 저주의 말. '커크월의 그 학살자'를 원망하는 어느 죽은 서클메이지의 일지를 앤더스는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조금씩 앤더스는 확신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약해져가는 것 같았다. 호크가 그를 업고 발목까지 푹 잠기는 늪지대를 건넌 날 내내 말이 없던 앤더스는 문득 '미안하다'고 말했다. 시선을 피하는 여윈 옆얼굴, 그걸 보니 가렛은 가슴이 턱 막혔다. 사실 가렛의 어떤 부분은 앤더스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한밤중 깨어나 부드러운 침구 대신 등에 배기는 딱딱한 돌을 느낄 때, 흙바닥을 짚고 일어나 비린 시냇물을 들이킬 때 가렛은 뱃속에서 치받혀오는 비이성적이고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네가 그 빌어먹을 정의를 위해 나한테서 뭘 빼앗았는지 보라고, 커크월에 두고 온 모든 건 내 부모의 유산이었으며 목숨 걸고 이 손으로 이뤄낸 것이었다고 그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은 건 가렛이었다. 어쨌든 그는 앤더스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렛은 앤더스를 꽉 끌어안았다.
그들은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갔다.
어떤 밤 가렛은 하이에버에서 로더링으로 내려오던 어린 날의 여정을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빛나는 여관의 불빛을 볼 때면.
더 따듯한 곳으로, 외진 곳으로, 가장자리로. 그들을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앤더스는 급격히 기력을 잃어갔다. 육체보다는 정신의 문제인 것 같았다. 초라한 모닥불을 피워놓고 먼동을 기다리던 어느 새벽 가렛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앤더스는 나직이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나머지는 세상의 몫이라고. 무어라 대꾸해야 할 지 몰라 뜸을 들이다 가렛은 "그러면 이젠 나와 지내면 되겠군." 했다. 그사이 잠에 들었는지 고개를 떨어뜨린 앤더스는 답이 없었다.

그들은 북쪽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저 아래 난리통에서 왔다니 쉽게 믿어준다, 아니 등에 멘 스태프와 양손검을 상대해서 좋을 게 없다 여겼는지도. 시체가 많은 시기였다. 그들은 마을에서 삼십분쯤 떨어져 있는 삭은 나무집을 샀고 넓은 나뭇잎이며 잔가지를 얽어다 지붕에 얹고 보호의 주문을 걸었다. 소리가 없는 숲에서 동물을 사냥해와 그 고기를 그슬리고 설익은 열매를 모아 조리해 먹었다. 향신료를 사고 옷을 새로 지었다. 가렛은 사람을 수소문해 괜찮은 땅을 알아보았다. 땅을 얻으면 작물을 기르리라. 커크월의 전 챔피언은 검 쥐는 법보다 씨 뿌리는 법을 먼저 배운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퍼렐든과는 기후도 작물도 다를 테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다, 이번에도. 그러고 보면 그들의 처지는 가렛이 한때 꿈꾸었던 도피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템플러도 서클도 없고 하수구의 악취도 가죽과 쇠 냄새도 나지 않는 이 낯선 땅에 그와 그의 연인은 이제 뿌리를 내릴 것이다. 서로의 빈손을 잡고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곳에 온 뒤로 그의 연인은 침상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본디 잠이 많지 않던 그는 이제 그간 못 잔 잠을 다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종일 누워 지냈다. 북부의 더운 바람이 그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지 가렛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는 계속해서 악몽을 꾼다, 그 날 저희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갤로우즈의 절망한 메이지들이 꿈에 나온단다. 가렛은 곁에 붙어앉아 그의 어깨를 쓸어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신이 선언문에 적었듯 변화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아니냐고 끊임없이 말해준다. 한 서클이 또 반란에 성공했다고, 더 많은 메이지들이 자유로워졌다고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면 그래 웃기는 하는데 그 말들이 앤더스에게 닿는지는 잘 모르겠다. 앤더스는 가렛이 메이지 문제에 자신만한 관심이 없다는 걸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빈 말들을 잔뜩 늘어놓고 재우면 앤더스의 표정이 조금은 평안해 보여 가렛은 안도했다.
더운 바람이 더러운 린넨 커튼 사이로 불어오던 어느 새벽 가렛은 눈을 떴고 희미하고 이른 빛에 감싸여 제 곁에 누운 바싹 마른 금발의 메이지를 보았다. 그의 모습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석한 머리카락은 제법 길어 빗장뼈를 덮었고 곧잘 흥분의 열을 띄우곤 하던 뺨은 핏기없이 해쓱했다. 힘주어 주먹을 쥐곤 하던 굳센 손은 우유처럼 부드럽고 투명해 보였다. 가렛은 조심스럽게 그의 여윈 어깨를 쥐어 보았다. 속이 빈 새의 뼈처럼 힘주어 쥐면 손안에서 부서질 것 같았다. 손바닥에 닿는 피부의 체온은 어쩐지 전보다 낮아진 것 같다, 그 속에 살던 불이 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렛은 지금 자신이 떠난다면 앤더스가 누운 그대로 말라죽어 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불이 다 타고 남은 재 같았다. 가렛은 갑자기 속에서, 말이 되지 못할 어떤 뜨거운 덩어리가 치받히는 걸 느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뒷마당으로 나갔다. 이 집의 전 주인이 독실한 안드라스티안이었는지 마당 한켠에는 작은 단 위에 놓인 성녀 목상이 있었다. 하이타운이었다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서툰 손길로 깎은 나무 성녀는 붉은 꽃즙으로 칠한 의복을 둘렀고, 철제 불그릇 없이 빈 두 손만 공연히 모아들고 있었다. 가렛은 마른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거진 십 년만이었다. 가렛은 모든 인간을 위해 불길에 휩싸인 성녀에게 빌었다. 그녀와 꼭 같은 한 인간이 있었다. 자신보다 남의 고통에 더 아파한 사람, 불의로부터 세상을 구하려 쓴 잔을 삼킨 사람이 있었다. 그를 도울 이는 지상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죄를 지었으나 사람을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자신을 죽였고, 가진 걸 세상을 위해 다 쓰고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르고 비명도 없이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그는 당신을 버렸지만, 당신은 그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의 가여운 영혼을 돌봐주십시오. 그가 저를 버리더라도 저는 그를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영원히 그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굳게 눈감은 가렛의 얼굴은 점차 시뻘게지더니 이내 눈물에 조금 젖었다. 오래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그는 간혹 가슴을 치기도 하며 자신이 구하지 못한 연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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