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


인사는 허망하게 흩어졌다. 넓은 공간은 신음과 소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의료진들은 부산했고 분위기는 빠듯했다. 센터의 작은 의무실만 알던 미도리야는 본격적인 분위기에 위축 돼 어깨를 움츠렸다. 시선을 흘린 히자시가 카운터로 발을 옮겼다. 그 뒤를 따르려던 차, 비명이 공기를 흔들었다. 비상등이 켜진 것처럼 많은 발소리가 한 곳에 모였다. 침상 위 환자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웃으며 울었다. 울면서 화냈고, 화내며 자학했다. 벅벅 긁어댄 곳은 상흔이 남고 피가 흘렀다. 진정제, 진정제 가지고 와! 가이드는 언제 오는 거죠? 진정제가 들질 않아요! 많은 말들이 웅성웅성 날카로운 형태를 그렸고 그건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미도리야는 창백한 낯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기회가 된다면 도망칠 사람처럼 주춤거리다 벽에 가로막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여줘, 제발 날 놔줘. 살려줘.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를 견딜 수 없어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벌컥벌컥 피를 뱉고 있었다. 하나, 둘 씩 색깔이 사라지며 하얗게 물든 세상에 지독한 고독이 자리 잡았다. 캇쨩… 구명줄을 잡듯 작게 읊조린 말은 메아리도 없었다.


“미도리야!”


목소리가 손목을 잡고 현실로 이끌었다. 파드득 놀라 앞을 보니 히자시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따라온 숨이 길게 이어졌다. 큰 손이 우악스레 뺨을 짚었다.


“정신을 차려 다행-! 일단 여길 나서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끌 듯 의무실을 나섰다. 복도엔 등받이 없는 의자가 줄지어 있어, 아무데나 앉히고 무릎을 굽혔다. 아까부터 느꼈던 건데, 또래 아이들보다 많이 작아. 차갑게 식은 손을 꾹꾹 주물러 준 히자시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일정도 없고 충돌도 없어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어.”


센티널은 불완전한 존재라 쉽게 휩쓸리고 꺾였다. 발작은 파동과 같아서 다른 센티널의 동요에 쉽게 동조하고 말아. 경험이 있는 센티널들은 넘길 줄 알지만 이제 막 온 풋내기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하물며 가이드와 연결이 희미한 센티널이라면 더. 히자시는 안타까운 마음에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지.”


미도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 푸스스 웃어 보인다. 그게 전부 시늉임을 잘 알면서도 구태여 따라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 아이는 남에게 자신의 괜찮음을 보여줘야 안심하는 착한 아이인 모양이었다. 정-말 쇼타의 고민 너무나 잘 알겠어서 싫다니까. 쓴웃음을 삼키며 주머니에 있던 약통을 손아귀에 쥐어주었다.


“이게 약이야. 발작이 오면 한 알씩 먹으면 돼.”


손을 꾹 감싸며 힘을 준다. 미도리야는 고개를 들었고, 히자시는 그것을 똑바로 마주했다.


“다만, 이건 임시방편이야. 제대로 가이드와 대화해야 해.”


줄곧 유지했던 경쾌함이 싹 빠졌다. 그 무게에 우물쭈물 못한 미도리야가 마지못해 답했다. 일반 병사를 따라 기숙사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난다. 이런 일은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숨 돌릴 시간도 못 주는 현실이 썼다. 당장 내일부터 훈련이 잡혔고, 능력에 따라 일주일 내로 현장에 배치됐다. 아이자와가 최대한 지연하려 들겠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게 전선이었다. 히자시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몇몇의 우려를 이불 삼아 침대에 누운 미도리야는 지친 표정이었다. 탁하게 꺼진 녹색 눈동자가 하얀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의지와 달리 떨어지는 눈물은 능력의 여파인지 감정의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옆 침대에 돌아누운 바쿠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미약한 기대는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리광은 안 돼. 몸을 일으켜 약통을 열었다. 하나를 집어 물도 없이 삼켰다. 서서히 고독이 잦아드는 기분은 버틸만한 안식을 주었다.


“오른쪽!”


증강계 능력의 중점은 근거리였다. 센터 내 수업에서도 곧잘 A를 받던 미도리야라 초반은 잘 따라갔지만, 중반에 들어선 곤혹을 면치 못했다. 능력을 사용하면 기술 따위 아무 의미 없는 강자였으나 해치우지 못한 문제점이 있는 관계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내자는 게 아이자와의 생각이었다. 미도리야도 힘을 쓰길 저어하는 바. 의견에 동조하며 있는 힘껏 훈련을 따라갔지만 몸이 문제다.


머리도 좋고, 근성도 있고, 결정타도 있지만 어렸다. 또래보다 체격이 작고 미성숙해. 순수한 육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다. 국경선에서도 손꼽히는 무도가 아이자와를 상대하기엔 기량이 덜 자랐다. 보고서도 피하지 못한 미도리야가 바닥을 굴렀다. 타격이 컸는지 배를 움켜쥐고 일어서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바쿠고가 하. 기가 찬 목소릴 냈다. 히자시는 그 모양을 흘리며 미도리야를 담았다. 제대로 된 가이딩만 해 준다면, 이 번거로운 과정은 뒤의 문젠데.


훈련을 시작한 지 4일 차. 바쿠고의 가이딩 능력은 터무니없이 형편없었다. 재능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미도리야의 유래 없는 능력만큼, 바쿠고의 역량 또한 엄청났다. 폭주만 아니라면 힘의 여파를 고스란히 흘려보낼 수 있단 소리였다. 결국 관계의 문제고, 태도의 문제였다. 아이자와는 눈살을 찌푸렸다.


“웃음이 나나?”


바쿠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자와의 검은 눈이 서늘하게 힐난을 말했다. 최대한 힘을 억누른다 해도, 타고난 것을 배제할 순 없었다. 하나, 둘 자기도 모르게 쌓여만 가는 것들이 해소되질 않으니 점점 쳐지는 게 눈에 보였다. 연신 기침하던 미도리야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괜, 괜찮… 괜찮아요.”


상황을 소화하고 싶었는지 손등으로 입술을 훑고 비적비적 일어나더라. 바쿠고는 그 꼬락서니에 웃음밖에 안 났다. 처음에야 공과 사를 구분 못할 감정이 치솟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은 공. 사는 사. 업무라고 생각하면 역겨운 가이딩도 못할 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손 내밀지 않는 건 저 새끼였다. 감정을 끌어안는 것도, 거리를 두는 것도 전부.


“정말 괜찮으니까…”


미간을 찌푸린 아이자와가 한 걸음 움직였다. 눈이 따라갔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가드도 못 한 채 날아 간 미도리야는 벽에 처박혔다. 가까스로 쥐던 정신을 놓은 모양인지 미동도 없었다. 몸을 숙인 아이자와가 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미도리야 품에서 작은 약통을 꺼내 살핀 아이자와는 한숨을 쉬며 바쿠고를 바라보았다.


“말했을 텐데, 공은 공. 사는 사.”


던진 약통을 가볍게 받은 바쿠고였다. 안엔 알약 두어 개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게 뭔지 바쿠고는 잘 알고 있었다. 이딴 것에 의지하는 데쿠 새끼도 화가 났고, 계속 힐난만 하는 주변도 짜증이 났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뚜껑을 닫고 검은 눈을 직시했다.


“태도를 바꾸란 소리다.”


아이자와는 답답한 모양으로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얀 연기가 길게 늘어졌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바쿠고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계속 정진했던 길도, 그것을 상실한 고통도, 수습하기도 전에 이어진 좆같은 상황도 받아들이라 하니 받아들였다. 원하던 걸 위해 쌓아올린 시간도, 긍지 높던 자존심도, 원하고자 하는 갈망도.


“꺾고”


바르르 떨린 손이 기어이 피를 봤다.


“꺾고 또 꺾었습니다.”


뿌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이제 뭘 더 꺾으란 말씀이십니까?”


목 끝까지 치솟은 욕지거릴 꾹 참았다. 일그러진 얼굴에 흐른 모순적인 감정은 감출 수 없었다. 아이자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보였다.


“아직 남아있나 보군.”

“뭐가! 뭐가 남아있냐고!”


쥐고 있던 약통이 소음을 내며 찌그러졌다.


“좆같은 상황밖에 더 남았어? 저 새끼 뒤꽁무니나 봐 주는 삶밖에 안 남았냐고!”


안주머니에서 재떨이를 꺼낸 아이자와가 꽁초를 처리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히자시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른 아이자와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을 남겼다.


“뭘! 뭘, 뭘 더! 뭘! 씨발, 씨발!!”


남아있는 분을 소거하지 못한 바쿠고는 찌그러진 약통을 내던지고 미도리야에게 다가갔다. 엎어진 몸을 우악스레 일으켜 그 위로 올라탔다. 움켜 쥔 목덜미가 너무 가느다래서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젠장, 젠장! 이를 악물고 힘을 주는데 바르르 떨린 손은 힘이 실리질 않았다. 파르르 떨린 눈 꼬리를 감추듯 고개를 숙인 바쿠고는 기어이 피를 보고 말았다. 입술을 따라 흐른 피를 손등으로 대충 훔친 채 몸을 일으켰다. 어스름이 깔린 얼굴은 습기가 졌지만 울고 있진 않았다.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업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자국을 따라 남은 비참한 심정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숨과 함께 내던지듯 미도리야를 눕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깨가 아팠다. 힘을 줘 누르니 감정이 계속, 계속 고개를 들었다. 입술에 힘을 줄 때마다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비리고 썼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치는 건 싫다. 자존심이 상했고, 기분도 상했다. 늘 결과가 나빴다. 두 번의 큰 실패는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했다. 잠시 숨 돌릴 틈 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첨예하게 갈았다.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선다면 그 끝은 절벽이라 생각했다. 묻었던 고개를 들고 미도리야를 보았다. 뻗은 손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댔다.


상황이. 현재가 바쿠고를 미치게 했다. 자존심이 다치고, 결과가 나락이어도 도망치고 싶었다. 아이자와가 했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시간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바르르 떨린 손은 우악스레 주먹을 쥐었다가 느슨해졌다. 차가운 손은 온기를 찾아 다른 손을 잡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갚을 수 없었다. 이 온기도, 그 시간도, 네 안식도.


어스름이 떴다. 세계에 홀로 남은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이었다. 화드득 놀란 미도리야가 몸을 일으키려다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맡에 기대 잠든 바쿠고를 보며 떨린 눈을 감추지 못했다. 마주잡은 손이 뜨끈해서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덩어리 진 한숨을 삼키며 다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이 났다. 심하게 다쳐 나가지도 못한 채 병원에만 있었다. 지겨울 법 한데도 매일매일 출석도장을 찍었다. 말은 사나웠지만, 행동은 다정했다.


분명 살가웠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어두워진 낯빛을 그림자 속에 묻고 맞잡았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수척해진 얼굴을 쓸어보려다 그만두고 침대를 벗어났다. 얇은 홑이불을 꺼내 어깨에 덮어주고 입고 있던 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약이 있었을 텐데… 싸우다가 잃어버린 건지 약통이 보이질 않았다. 곤란했다. 발작적으로 찾아온 감정은 하루에 몇 번이고 미도리야를 헤집었다. 약이 아니었다면 진작 미쳤을지도 몰랐다.


초조함을 씻듯 마른세수 하며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눌러가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창문 가득, 파란 일출이 조금씩 따듯한 빛을 머금었다.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보다 고개를 도리질하며 의무실 문을 열었다. 카운터로 걸어가자 꾸벅꾸벅 졸던 직원이 깜짝 놀랐다.


“어디 안 좋은 곳 있나요?”


아이자와의 언질이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해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여차하면 「수면」이 필요할 거라고. 의료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수면이지, 기약 없는 죽음이었다. 가이드를 잃어버린 센티널이 미쳐 날뛰지 않도록 행하는 장례와도 같았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한 명이 조심스레 의견을 꺼냈고 ‘락樂 단계 센티널도 어쩌지 못하는데 애哀를 무슨 수로.’ 아이자와는 현실을 말했다. 쓰지 못할 거면 피해라도 입지 말잔 소리였다. 그래서 더 시선이 갔다. 의자에서 일어난 직원은 카운터를 나와 미도리야를 보았다. 작다.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니 머쓱한 듯 웃는 표정은 무해했다.


“혹, 혹시… 약이 좀 남았나요?”


보편적인 기간을 훌쩍 앞당긴 사용이었다. 가이드와 사이가 나빠도 약통 하나면 한 달은 썼는데… 일주일도 못 채운 사용기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초록색 눈동자가 불안을 품어, 지우듯 웃어보였다.


“본부에 요청해 놨어요. 오늘 올 거예요. 급한가요? 진정제라도 놔 줄까요?”


오늘… 작게 중얼거린 미도리야가 바닥을 보며 자기감정을 정리했다. 참는 건 쉬웠다. 괜찮다고 생각하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직원을 마주보며 웃었다.


“괜찮을 것… 같아요. 대신 약이 오면 알려주시면 안, 안 될…”


여기까지 말하자 너무 실례 같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고쳤다.


“아니 제가 찾으러 올게요. 점… 점심쯤이면 괜찮을까요?”

“네. 점심이면 충분해요.”


확답에 안심이 든다. 고작 6시간이니. 쉬고 가라는 직원의 걱정을 뒤로 의무실을 나섰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로비로 나서니 창문 가득 햇살이 들어섰다. 마음 속 감정도, 불안도 녹아든다. 따사로운 빛에 눈을 감고 있으니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규칙적이고 또 기분 좋은 소리였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박에 옆을 보자 복도 끝에 네가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이 조마조마해서 한달음에 다가가자 붉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눈썹을 구부리며 두 팔을 뻗었다.


“…캇쨩”


한 걸음. 딱 한 걸음. 의식하지 않던. 그러나 마음에 두던 그 도망. 미도리야는 가슴 속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황한 바쿠고가 손을 뻗지만 닿지 않았다. 벽이 폭사했다. 두 사람 사이 잿빛이 남실거렸다.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렸다. 안내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분 바람은 지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데쿠!”


바쿠고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곱씹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입술을 자근거리며 발을 옮겼다. 여기저기 고통 섞인 신음과 괴로운 울음이 뒤섞였다. 진창 가운데 안개처럼 아른거린 잿빛이 한데 모였다. 그것이 쓰러진 미도리야를 굽어본다. 주먹을 말아 쥔 바쿠고가 그대로 나아갔다. 속절없이 흩어진 것은 비웃고 있었다. 치욕조차 잊었다.


허겁지겁 미도리야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잡아 뜯듯 단추를 풀어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 죽지 마. 제발, 제발. 제발 하느님, 제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턱을 잡았다.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춘다. 숨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또 다시 박동에 맞춰 누른다. 목전에 앉은 살의가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살아, 살아. 제발 살아. 제발…! 차가운 이성이 죽고, 뜨거운 감성이 남아 기어이 흐느끼고 만다. 눈두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습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토록 간절한데, 이토록 슬픈데, 이토록 괴로운데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감정을 숨겼고, 결국 빛바래 형태를 잃어버렸다. 설령 돌아온다 한들, 바쿠고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의 길에 널 지키는 내가 있었다. 커다란 빚을 전부 갚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행복해질 너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잿빛이 속삭였다. 너는? 바쿠고는 입술을 자근거렸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도, 땀으로 흥건해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네가 살길 바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소름이 돋았다.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잿빛은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손을 뻗었다. 끝에 빛이 고였다. 눈앞이 선연했다. 바쿠고는 처음으로 미도리야의 내부를 보았다. 신록이 흐드러진 공간, 찌는 듯 더운 공기가 숨통을 틀어막았다. 발치에 가시나무가 꼬였다. 허술한 신발은 금방 넝마가 되고 만다. 저기로 가면 분명 엉망이 되겠지. 어쩌면 발을 못 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다. 거기에 네가 있으면 가. 망설임 없이 발을 뻗었다. 피로 물들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널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어린 날, 숲에서 길을 잃었던 네가 떠올라 웃음마저 나. 바보 같아서. 멍청해서.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워서. 고개를 든 감정을 순순하게 인정한다. 그렇지만 조용히 묻는다. 자신은 면죄부를 받아선 안 됐다.


다다른 곳에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네가 보였다. 바쿠고는 숨을 헐떡이다 웃었다. 잘 영근 붉은 눈이 호선을 그렸다. 다리의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무릎을 구부려 두 팔을 뻗었다. 작은 어깨를 감싸자 감격이 들었다. 마주한 연둣빛 눈 위로 입을 맞췄다.


‘돌아가자’

‘…캇쨩은 내가 싫잖아.’

‘싫어하지 않아.’


작은 손을 꾹 잡았다.


‘싫어…하잖아.’


입술을 꾸물거리다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바쿠고는 푹신한 머리 위로 제 얼굴을 기댔다.


‘미안해. 잘못했어.’


눈가를 따라 흐른 뜨거운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


‘싫어하지 않아. 데쿠.’


사실은 아주 좋아해. 아니 네가 없는 세계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정진했던 길도, 상실했던 고통도 네가 살아주기만 한다면,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데쿠, 돌아가자.’


옷자락을 잡은 작은 손은 힘없이 품에 기댔다.


‘나 미워하지 말아줘.’

‘응.’


처음과 마지막은 똑같은 빛이었다. 바쿠고는 품 안에 새근거리며 자는 미도리야를 안아들었다. 무수히 많은 총구를 훑어보다 아이자와와 눈이 마주했다. 느릿하게 미도리야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한숨을 쉰 아이자와가 손을 들었다. 총구가 바닥을 보았다.


“알았으면 됐어.”


줄줄이 써야 할 서류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짚자, 도와-줄게! 히자시의 경쾌한 목소리가 공기를 흩었다.


1 - 끝


천천히 복귀합니다. 건강이 좀 안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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