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일어나.”


본즈는 오늘도 늦잠을 자는 룸메이트를 흔들어서 깨웠다. 맨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아침이면 수업은 나 몰라라 하는 커크라서 아침마다 이렇게 손이 가곤 했다. 커크는 5분만 더 자겠다고 이불을 말면서 찡찡 거리다가 결국 감긴 눈을 하고서 씻으러 들어갔다. 본즈는 한숨을 쉬면서 자연스럽게 커크 자리 이불을 평평하게 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커튼도 걷었다. 본즈는 이미 생도복도 다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커크 자리만 돌면서 뭐 더 할 게 없나 하면서 보고 있었다.


커크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옷을 일단 다 벗어두고 일단 상의부터 걸치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서 있기는 한데 여전히 눈은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그렇게 단추를 채우려다가 커크는 귀찮다며 침대에 다시 드러누웠다. 상체는 눕고 발로는 바닥을 짚은 채로. 본즈는 속옷 차림에 다 풀어 젖혀진 재킷만 걸쳐져있는 커크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게 뭘 한다고 밤에 그렇게 늦게 들어오냐면서 잔소리도 좀 했다. 커크는 듣기 싫다고 으으응 하면서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자기를 쳐다본 본즈랑 눈이 마주치고 배시시 웃어보였다.


“키스해줘.”

“일어나야 하지.”

“귀찮아. 니가 누우면 되잖아.”


본즈는 책장을 정리하다 말고 결국 커크 쪽으로 왔다. 본즈는 등에 손을 받쳐서 커크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서 재킷을 끌어다 단추를 마저 채워줬다. 커크는 아직도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본즈는 마지막 단추를 채우면서 커크를 살짝 봤다. 그러면서 커크한테서 손을 떼기 전에 짧게 입을 맞춰줬다. 커크는 그제야 침대에서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본즈에게 자기 바지를 못 봤는지 물었다. 본즈는 옷장에서 어쩌다 섞여 들어간 커크 바지를 꺼내서 던져줬다.



커크는 친구들이랑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시간 직전에 같이 수업을 들었던 지휘부 동기들과 함께였다. 대여섯 명이 그렇게 식판에 다식을 받아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커크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테이블 사이사이로 걸어가는 여생도들에게 눈을 찡긋하며 인사를 했다. 그 뒤에서 걸어오던 본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늘 그렇듯 본즈는 다른 의료부 동기들은 버려두고 혼자 제일 먼저 식당으로 뛰어왔다. 본즈는 통로 쪽에 앉은 커크 옆으로 가서 식판을 살짝 테이블에 걸쳐놓고 커크와 인사를 나눴다.


“언제 왔어?”

“그냥 좀 전에.”

“기다리라니까. 하여간.”

“미안. 깜빡했어. 너도 얼른 앉아. 자리가...”


그러면서 커크가 테이블을 쭉 보는데 이미 커크랑 가까운 쪽에는 친구들이 다 앉아있었다. 빈자리에 앉으려면 커크 머리카락밖에 안 보일 저 멀리에 앉아야 했다. 커크는 그냥 본즈를 올려다보면서 히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본즈는 커크 맞은편에 앉은 친구를 곁눈질로 열심히 째려봤다. 쎄한 눈길에 그 친구가 자기는 밥을 다 먹었다면서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본즈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옆에 앉은 다른 친구들도 눈치를 보더니 하나 둘 일어나서 둘에게 인사를 했다. 커크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손을 흔들어주면서 같이 인사를 했다.


“뭐야. 내가 늦게 먹나 봐.”

“급하게 먹는 것보단 낫지.”


본즈는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커크를 챙기느라 바빴다. 이미 식판에 배식을 받아올 때부터 커크가 먹으면 안 되는 다식이 있는지는 스캔을 마친 상태였다. 커크가 아까 친구들이랑 했던 얘기를 전해주면 본즈는 대꾸를 해주면서도 손으로는 커크 식판에 있는 걸 자기 쪽으로 옮기느라 바빴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조잘대고 있는 커크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입에 묻은 걸 닦아준다면서 티슈로 닦아주고 그랬다. 주변에서는 다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탓에,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자각도 없었다.


본즈는 이제 영양소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생도들은 기숙사에서 24시간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 건강을 챙기는 것도 본인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의사였던 본즈가 보기에 커크가 생활하는 방식은 곧 골로 가기 딱 좋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본즈는 늘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커크는 입을 삐죽 내밀고 듣고 있더니 들고 있던 포크를 딱 내려놨다. 아, 안 먹어. 커크는 토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열심히 3대 영양소를 설명하던 본즈는 얼른 말을 멈추고 커크 표정을 살폈다.


“그만할게. 먹어.”

“싫어.”


본즈는 토라진 표정으로 앉아있는 커크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커크가 내려놨던 포크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그 포크로 커크 식판에 있는 아보카도 조각을 하나 찍었다. 그렇게 커크 입 쪽으로 내밀면 그제야 커크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식을 받아먹었다. 본즈가 다시 네 손으로 먹으라고 포크를 넘겨주면 삐지려고 해서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본즈가 먹여줘야 했다. 커크는 두 손은 식탁 위에 고이 놔두고 입만 오물오물 거렸다. 옆 통로로 지나가는 생도들이 조심스럽게 미안하다고 팔 좀 치워달라고 그러면 삐죽 나왔던 팔꿈치를 집어넣으면서도 끝까지 둘만 보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니 혈기왕성한 20대 생도들이 연애 좀 하겠다는 게 그게 뭐가 그렇게 나쁘겠는가. 본즈는 30대가 다 되어가는 중이긴 했지만 아무튼 뭐 어떻겠나. 사랑에는 종족도 없다는데. 좋을 때지, 뭐. 공공장소에서 좀 뽀뽀도 할 수 있고 포옹도 할 수 있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서로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눈에 꿀 떨어질 듯 보느라 주변 분위기 다 어색해지고 이런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둘은 연애 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매우' 소중한 친구였다.


처음에는 다들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아카데미 내는 좁기도 하고, 나중에 졸업하고 나면 다 같이 일할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냥 비밀로 하나보다 싶었다. 서로 죽고 못 살 것처럼 물고 빨아대다가도 다음해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는 체도 못하게 되는 커플들이 꽤 있었으니까. 가뜩이나 둘이 같은 방을 쓰기도 하고 그래서 가십거리가 될까봐 숨기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둘 다 서로가 아니더라도 이미 아카데미 내에서 충분히 유명하기도 했고.


커크가 어디서 처음 보는 기술부 남자애랑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딥키스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장면을 본 생도들은 저마다 수군대며 의견을 냈다. 커크는 원래 지조가 있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저 남자도 커크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하룻밤 상대 중 하나일 거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커크에게 직접 남자의 정체를 물어본 생도 때문에 아카데미는 난리가 났다. 커크는 답지 않게 얼굴까지 붉히면서 대답했다. 아,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우리 사귀는 중이야. 벌써 꽤 됐어.


“걔가 어디가 좋은데?”

“잘생겼잖아.”


모여든 생도들 중 하나가 본즈가 해야 할 것 같은 질문을 대신 했다. 그리고 커크는 가볍게 대답을 하고서 일어섰다. 그 한 마디면 대답이 모두 될 거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생도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 남자와 있을 때면 대화의 80프로 이상은 전부 커크가 억지로 끌어갔다. 그러다가 남자가 피곤하다고 먼저 일어나곤 했다. 무엇보다도, 남자는 커크가 다른 생도랑 키스를 하든 오럴 섹스를 하든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엉겁결에 공개 연애를 한 후로도 커크는 여전히 여생도들에게 보내는 눈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커크가 잘생겼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남자가 뭐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못 생기지야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 우주에 파파라치 직찍이 뿌려져서 연방 경계지역에서 당장 소형 우주선을 끌고 청혼하러 찾아올 뭐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 그래 잘생기긴 했네. 생도들은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딘가 못마땅했다. 잘생기기로는 커크도 아카데미 내에서는 연예인이었다. 오죽하면 이름 소개만 해도 하룻밤 잘 곳이 생겼겠나. 그런데 저 남자는 커크랑 자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연인이라는 거 아니겠는가. 저딴 식으로 커크를 대하면서도.


“왜 벌써 와? 뭐 놓고 갔어?”

“몰라. 잘 거야.”


다른 생도들은 몰랐지만, 사실 커크는 그와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룸메이트인 본즈는 매일 그럴 때마다 지쳐하는 커크를 달래주곤 했다. 같이 술도 마셔주고, 남친 욕하는 거 맞장구도 쳐주고, 니가 아깝다는 말도 천 번쯤 더 해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잘 된 거 축하한다면서 웃어주기도 했다. 남친과 관련된 뭘 물어봤는데 저렇게 뾰족하게 반응하면 또 뭐가 잘 안 풀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본즈는 하던 걸 놓고 조용히 술을 꺼내왔다. 독한 술 한 병만 비우고 나면 커크는 금방 눈물 바람으로 달려 나가서 화해를 하고 오고 그랬기 때문이었다.


본즈는 일어나지 않겠다는 커크를 안아서 억지로 침대에 마주보게 앉혔다. 그리고 컵에 술을 가득 따라주고 일단 마시게 했다. 커크는 술을 물마시듯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본즈를 올려다봤다. 본즈는 걔가 다 잘못했네 이러면서 커크가 하소연할 수 있게 말꼬를 터주었다. 그러면 커크가 탕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으면서 열을 내기 시작하곤 했다. 이번에는 그 남친이 무슨 말을 하다가, 너는 아버지가 조지 커크라 아카데미에 편하게 들어와서 좋겠다며 비꼰 게 시작이었다. 끝까지 말실수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는 남친 때문에 커크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헤어지자며 엄포를 놓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니, 그래놓고 어떻게 먼저 연락이 하나 없어? 이게 말이 돼?”

“미안해서 그런 걸 거야. 먼저 말하기가.”

“뭐? 그래서 넌 누구 편인데?”

“당연히 지미 네 편이지.”


본즈는 커크를 토닥토닥해서 컵에 술을 또 가득 채워줬다. 한창 열을 내고 나니 커크는 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중얼중얼 원망을 했다. 본즈는 한숨을 쉬면서 빈 술병 뚜껑을 닫았다.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이런 날은 이미 수백 번도 더 보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본즈도 그냥 헤어지라고 열도 내봤다. 니가 대체 왜 그런 사람을 만나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런데 그렇게 눈이 빨개져라 소리를 쳐준 게 무색하게 커크는 몇 시간 만에 남친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했으니 헤어지지 말자고 빌었다. 지금도 분명히 커크는 그 절차를 밟을 거라는 걸 알았다.


본즈는 이미 잔뜩 취한 상태인 커크의 손에서 컵을 뺏으려고 했다. 커크는 침대에 눕혀놓고 정리를 조금 하고 오려고 한 거임. 그런데 문득 커크가 고개를 들어서 본즈를 봤다. 술에 잔뜩 취해서 동공은 풀려 있었다. 외로워. 커크는 그렇게 말했다. 결국 커크가 남친에게 받고 싶었던 건 관심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남친 보라고 원나잇도 하고 다니고 그러는 거였다. 하지만 남친은 그러던 말던 이었다. 심할 때는 같은 아카데미 내에 살면서도 일주일을 코빼기도 안비치고 잠수타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커크는 절대 이 관계를 놓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그는 결국 돌아와서 커크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이번에는 정말 마음을 굳게 먹고 헤어질 거라고 그러다가도, 커크는 미안해 사랑해 이 두 마디만 들으면 금방 마음이 풀어졌다. 남들이 했으면 구질구질한 미친 짓이라고 했겠지만, 그래도 커크는 자기가 하는 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대하기는 해도 남친도 표현이 서투른 것뿐이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헤어지자는 말은 절대 먼저 안 했으니까. 그렇게 커크는 지치고 힘들어도 한 줄기 희망을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본즈.”

“놔봐. 설거지하게.”

“차라리 너랑 사귈까?”


본즈는 커크 손에서 컵을 빼앗았다. 그리고 뒤늦게 취해서 헛소리 하지 말라며 반응했다. 커크는 그냥 해본 소리라며 투덜거리다가 침대에 누웠다. 본즈는 자리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빼서 커크를 힐끗 봤다. 커크는 누운 지 몇 초도 안 되어서 금방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커크는 별 생각도 없이 취해서 던진 말인 것 같았다. 본즈는 일부러 물을 세게 틀어서 컵을 벅벅 닦았다. 그래서 통하기만 한다면, 본즈는 커크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그 새끼한테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세상에 다른 좋은 사람도 분명히 많을 텐데, 대체 어디서 저런 쓰레기를 주워 와서는 여태 버리지도 못하고 있나 했다.


다음 날, 본즈는 술에 떡이 되어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커크를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방에서 쉬겠다는 커크를 앉혀놓고 억지로 옷을 갈아입혔다. 자꾸만 뒤로 누우려는 걸 등을 단단히 받쳐놓고 재킷을 둘러씌웠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는데 커크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씩 웃었다. 본즈는 베개 옆에 떨어져있는 커뮤니케이터를 봤다. 다시 기분이 좋아진 걸 보니 결말은 뻔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제 새벽에 이불 속에서 내가 잘못했다며 구구절절 통화를 하던 것도 모른 체 해주기로 했다.


“콘돔 있어?”

“콘돔?”

“니가 있을 리가 없긴 하다. 룸메이트 오늘 연구 때문에 안 들어온대.”


본즈는 갑자기 귓속에 꽂힌 tmi에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 룸메이트를 말하는 건지는 말 안 해도 뻔했다. 요새 애들은 연애를 하면 다 저렇게 화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본즈는 이건 네가 입으라며 바지를 올려주던 손을 멈추고 한 발작 떨어졌다. 커크는 실실 웃으면서 바지를 끌어올렸다. 커크는 너도 애인이나 좀 만들라고 모르는 소리를 하며 더 속을 긁어댔다. 그리고 이따가 콘돔을 사와서 너도 하나주겠다며 선심을 쓰는 체 했다. 본즈는 질색을 하며 거절했지만 커크는 언제 쓸지 모르니 가지고나 있으라며 웃었다. 넌 의사니까 이런 건 더 철저해야 한다며 어딘가 묘하게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소리를 덧붙였다.



본즈와 커크의 관계는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커크는 그 다음날 오후에야 본즈를 교정에서 만났다. 그리고 주머니에 정말로 콘돔을 하나 찔러 넣어줬다. 네 취향이 뭔지 몰라서 내 취향으로 샀다는 말을 덧붙였다. 본즈가 돌려주기 위해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그건 딸기 맛이었다. 딸기 향인 걸 잘못 읽었나 싶어서 다시 봤는데 딸기 맛이 맞았다. 본즈는 찝찝한 기분에 아무튼 그걸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 커크가 끝내 주머니에 넣어주려고 하는 바람에 둘은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커크는 담에 앉아서 발을 구르며 커피를 한 번 빨았다. 입으로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둘이 다투면 이유가 뭐든 본즈가 커크한테 이길 일은 없었다. 커크는 끝내 본즈한테 콘돔을 찔러주고 나서 그 대가로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본즈는 말이 안 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카페인을 낮추는 것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커크 옆에 앉아서 신나하고 있는 커크를 바라봤다. 커크는 생도복이 갑갑하다며 제일 위 단추 하나를 풀었다. 본즈는 커크가 저렇게 발을 휘젓다가 뒤로 넘어갈까봐 커크 허벅지를 붙잡고 있었다.


“시원하다. 고마워.”

“됐어. 아침에 방은 들렀어?”

“시간 없어서 그냥 왔어. 이따 가려구. 너도 한 입 마실래?”


커크는 마시던 빨대 그대로 본즈에게 커피를 건넸다. 본즈는 자연스럽게 컵을 받아서 한 입을 길게 빨았다. 이틀 동안 그 남친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커크는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자세도 평소보다 삐뚜름한 게 근육도 좀 뭉친 것 같았다. 본즈는 이따 뜨거운 팩이라도 좀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빨대를 입에서 놓았다. 그리고 다시 커크에게 커피를 돌려줬다. 하지만 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커크 남친이 보였던 것이다.


본즈가 몇 초라도 시선을 붙잡아두려고 했지만 커크는 금방 남친을 발견했다. 그리고 넘겨받으려던 커피를 그냥 본즈 손에 그대로 들려놓고 남친한테 손을 흔들었다. 본즈는 커피를 한 쪽에 내려놓고, 그 손으로 괜히 커크의 재킷 단추를 채워줬다. 커크는 고맙다며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친구가 아니라 5살짜리 여자 조카한테 한 대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친을 따라가려고 했다. 본즈는 커크의 허벅지를 짚었던 손을 어색하게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남친과는 눈짓으로 마지못해 인사를 나누었다.


“지미, 둘이 무슨 사이야?”

“응? 내 친구인 거 알잖아. 왜 그래.”

“내가 병신이야? 무슨 사이냐니까?”

“갑자기 왜. 알잖아. 레너드 맥코이. 의료부.”

“야, 너 똑바로 나 보고 말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아이, 너 어디서 이상한 소문 들었나 보다. 일단 다른 데 가서 얘기하자, 응?”


아무 계기도 없었는데 남친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본즈랑 커크는 몇 초 동안 당황해서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셋이 이런 식으로 마주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커크의 남친은 커크가 정말로 섹스를 하고 온 상대를 봐도 아무 말도 안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섹스는커녕 대딸 한 번 쳐준 적 없는 진짜 친구 본즈를 보고서 이런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커크도 커크대로 처음 받아보는 질투에 고개만 갸우뚱하고 있었다. 본즈는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언성이 높아지길래 일단 남친을 말리려고 했다. 그런데 커크가 눈짓으로 본즈를 말리면서 남친 손을 끌고 가버렸다. 가면서까지 커크 손을 뿌리치고 소리를 지르는 남친 때문에 본즈는 커피를 손에 잡고서 엉덩이를 계속 뗐다 붙였다 했다.


[ 나 오늘도 못 들어가. ]


방에 돌아와 한참을 기다린 끝에 본즈가 받은 문자는 저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봤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순전히 자기 때문에 괜한 오해가 생긴 것 같아서 본즈는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단순히 친구인데 연인 관계에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는 거였다. 본즈는 어제 이미 충분히 청소해서 더 정리할 것도 없는 방을 계속 정리하며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바지를 벗어서 개려는데 주머니에서 콘돔이 툭 떨어졌다. 본즈는 그걸 주워들어서 쓰레기통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그냥 그걸 서랍 안에 곱게 넣어놨다.


본즈는 혼자 조용히 침대에 누우면서 불을 껐다. 그리고 커크가 처음으로 남친이랑 사귀기로 하고 방에 들어온 날을 떠올렸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그가 유일해. 그 말을 듣고 본즈는 자기가 한 박자 늦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커크가 혼자 그와 영화도 찍고, 장편 드라마도 몇 시즌씩 찍어대는 동안 본즈는 가만히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다. 커크에게 본즈는 그저 의지되는 친구일 뿐이었다. 그러니 저 콘돔에서 정말 딸기 맛이 나는지 여부 같은 건 평생 확인할 길이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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