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는 기본 상식이란게 없어요?

유정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쏴 붙였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진짜 가만히 있는게 어이가 없어서. 사거리 골목을 돌기 직전까지 쳐다보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질 않나.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와보니 아까 같은 자세로 그대로 있었다. 화도 안 나는지, 수연은 맹하고 커다란 눈을 깜빡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 그런가? 나 여기 온지 얼마 안 돼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뭔 말이에요? 외국이라도 있다 왔대요?

- 외국? 외계도 외국인가.

일발 장전해 놓은 말이 막혔다. 무슨 개헛소리야. 참새 한 무리가 지저귀며 나는 소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활기 넘치는 휴일 대낮 시내. 평소랑 다를 거 하나 없는 풍경이었다. 그 곳에 서서 수연은 믿을 수 없는 고백을 했다. 외계에서 왔다고. 그러니까 시발, 지수연 외계인이라고.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는 수연을 보고 아득해졌다. 외모만 비현실적인게 아녔다.

*

유정은 제 몫의 딸기막걸리를 쭉 마셨다. 낮술이라도 없으면 진정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 앞에서 부추전을 오물대는 수연. 아니 씨발 장난치나. 장난 치고는 너무 진지했다. 그래요 저는 씨발 사실 달의 공주였어요. 언니 세일러문이라고 알죠? 그거 저에요. 라고 하니까 진짜? 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맞받아쳤다. 미친 사람. 그나저나 부추전 먹는 외계인은 처음 본다. 유정은 툭 내뱉었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 진짠데.

- 아니 시발, 아.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 너가 물어봤으니까.

취기라곤 하나도 없는 수연의 말간 뺨. 유정은 술을 더 들이부었다. 수연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기도 했고, 차라리 존나 만취해서 믿어버리려고. 창밖이 주홍빛이었다가 검게 물들고 저녁 술인파가 오기까지 둘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꼬부라진 혀로 먼저 말을 튼건 유정.

- 언니 막, 광선총 쏘고. 어? 유에프오 타고 날아다녀요?

- 못 해. 자격증 없어서.

- 씨발 갈수록 태산이다...

생각해보니 지수연에 대해 아는게 없었다. 첫 만남도 무슨 드라마 같았다. 기숙학원에서 받아 든 4월 모고 성적표를 구겨쥐고 울고 있을 때, 공원에서 편의점 맥주를 까니 수연이 갑자기 말을 걸어 온 거다. 여기서 뭐 하냐고. 사이비도 요즘은 존나 예쁜 사람들이 전도하나봐. 될대로 되라 싶어서 말 텄다가 연락처 교환. 이후론 지속적인 데이트. 그런데 말을 섞을 수록 취향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간 같고, 과거도 썩둑 잘려 있는 것이다. 어릴때 본 만화나 아이돌, 수능 얘기를 하면 거의 못알아듣고 해사하게 웃기만 했지. 말이 안 통한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유정은 수연이 좋았다. 말은 구실일 뿐 얼굴 감상하느라 바빴으니까.

- 지구엔 왜 왔어요. 침공하려고?

- 여행.

- 여행? 한국 뭐 볼거 있다고. 나라면 몰디브 갔다.

- 갔다 왔어. 여기가 마지막으로 들른 데야.

- 몰디브어 해봐요.

- ދިވެހިރާއްޖެ.

- ...씨발 언니 방금 제 욕했죠?

너한테 왜 욕을 하겠어. 라며 수연은 제 몫의 막걸리를 따랐다. 저 빙글대는 웃음. 유정은 볼을 부풀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술냄새가 코 끝을 맴돈다. 모르겠다. 외계인 인터뷰나 하자.

- 지구에서 제일 좋은 건 뭐에요?

- 너.

- 싫은 건?

- 밤에 다들 자는 거. 할 게 없거든.

- 언니는 안 자요?

- 잘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가. 생각해보니 유정이 술에 꼴아 새벽 세 네시에 징징대도, 밤을 샌 뒤 아침 여섯시에 전화해도 수연은 꼬박꼬박 받았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직업도 가족도 불명인데 돈은 술술 나오고. 문득 떠오르는게 있어 지갑을 보여달라 했다. 민증에 경상남도 진주시 어쩌구 이런거 있으면 죽을 줄 알아. 외계인이 출생신고를 할 리가 없으니. 수연은 순순히 지갑을 내밀었다. 검정 반지갑 안엔 수많은 영수증과 카드 딱 하나. 흰 카드인데 일련번호도 카드사 이름도 없었다. 소름이 조금 끼쳤다. 언니 맨날 이걸로 긁는데.

- 이거 어디 회사 카드에요?

- 내 고향 꺼.

- 아니, 진짜 거짓말 치지 말고.

-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말 안했어.

- 그리고 이 영수증은 다 뭐에요?

- 여행 기념.

차곡차곡 접힌 영수증은 잡다한 항목이었다. 어디 마트, 어느 카페, 저 술집. 미치겠네. 유정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수연은 유정의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합탕만 젓가락으로 쿡쿡 쑤셨다.

 - 홍합 껍질 까 줄까?

- 됐어요. 언니 많이 드세요.

- 나 많이 먹을 필요 없어. 껍질 까는거 재밌다.

유정은 수연의 앞접시를 바라본다. 수북한 껍질과 알맹이들이 분리된 채 있다. 먹지도 않는지 물기가 조금 빠진 채로. 밑국물 내려고 넣은 새우도 껍질이 까여 있고. 음식 취향에 이어 인터뷰를 더 하다가(음식도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수연이 거취 없이 밖에서 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기겁을 하고 손목을 이끌었다. 모텔로 데리고 가려고.

*

- 그럼 맨날 밖에서 자요?

- 아니. 산책 다녀.

- 옷은 어떡하고?

- 더러워지면 새로 사.

-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 인간 아니라니까.

수연은 지치지도 않는지 유정의 의심을 몇번이고 되받아쳤다. 외계인 맞다고. 유정은 제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수연을 본다. 수치심도 없는지 훌렁훌렁. 섹스는 한 번도 안했으면서. 외계인이라고 가슴이 네 개거나 엉덩이가 여섯 짝은 아니었다. 굳이 인상적인 거라면 털이 없다는 거? 수연이 씻으러 들어갔을 때 유정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문다. 빨아당기고 푸욱 내뱉을 때 한숨도 섞여 나왔다. 씨발. 또 중얼거렸다. 욕 끊어야 하는데. 어처구니 없어서 계속 나온다. 남은 손으론 외계인을 계속 검색해봤다. ET나 에일리언, 음습한 음모론자 블로그 뿐. 수연이 씻는 동안 유정의 검색어 기록은 외계인으로 꽉 찼다. 외계인 진짜, 외계인 실존, 외계인 존재.

있다고는 하는데 아무도 못 본거. 실재하는 외계인은 지수연 한 명 뿐이었다. 저 새끼 국과수로 넘길까. 해부 당할게 불쌍해 생각을 접었다.

- 유정아.

자기를 부르는 소리. 유정은 폰을 내려놓고 욕실 쪽을 돌아봤다. 젖은 머리를 한 수연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다.

- 왜요?

- 나 몸이 너무 빨개.

듣도 보도 못한 끼부림. 유정은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욕실로 향했다. 문을 열어보니 온통 뿌연 김. 시뻘개진 피부의 지수연. 욕실은 사우나처럼 후덥지근 했다.

- 아니, 괜찮아요?

- 모르겠어.

유정은 수연의 팔뚝에 손을 얹어본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뗀다. 존나 뜨겁다. 외계인은 열도 내나? 식히려고 샤워기를 대려 하는데, 수도꼭지를 보니 왼쪽으로 쭉 밀어져 있길래 기겁했다. 몸 삶을 일 있냐고. 유정은 기가 막힌다는 듯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려 놓는다.

- 미쳤다 진짜. 외계인은 통증도 못 느껴요?

- 응.

돌겠네. 운동화 끈도 제대로 못 묶어. 젓가락질도 못 해. 물 마시면 맨날 흘리거나 사레 들리고. 이게 다 외계인이라 그런거였다니. 유정은 미온수가 나오는 샤워기를 수연에게 갖다댔다. 벌건 피부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 때 수연을 쳐다보는데, 또 나왔다. 챙겨줄 때 마다 나오는 멍한 표정. 얄미운 듯 귀엽고. 탑에만 십년 갇혀 산 공주 같은 그거. 그런데 몸 씻겨주니까 공주라기보단 대형견 같네. 유정은 다리까지 벌리게 해 수연을 알뜰살뜰 씻어주고 수건을 둘러준다.

- 나 없으면 어떡할래요?

- 고마워.

유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수연의 머리를 닦아준다. 수연이 중얼거린다. 머리가 긴 건 불편해. 깎을까. 미쳤냐고 등짝을 짝 갈겼다. 이 인간은 진짜 삭발하고 올 거 같아서. 삭발하면 언니 다시는 안 본다고 으름장을 놨다. 수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알겠다고 약속했다. 

*

다음 데이트에 유정이 선물한 건 호신용 스프레이, 전기충격기, 삼단봉이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혼자 밤산책을 하냐고. 누가 말이라도 걸면 이걸로 갈기라고 신신당부했다. 수연은 신기하다는 듯 삼단봉을 몇 번이나 펼쳐보았다. 인간들은 별 걸 다 만든다고. 수연은 통각도 없겠다 상식도 없겠다. 이런 거라도 꼭 있어야 했다.

유정은 곧 기겁하게 된다. 전기충격기를 켜 보더니 냅다 자기 팔에 갖다대보는 수연. 언니 미쳤어요?! 하는 소리가 길에 쩌렁쩌렁 울렸다. 푸른 스파크가 튀었으나 막상 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눈만 껌뻑댄다.

- 아니 진짜 또라인가. 언니 괜찮아요? 안 아파?

- 응. 근데 몸이 안 움직여. 이거 그런거야? 근육 굳게 해서 못 움직이게 하는거?

- 아니 감전 당하면 당연히... 뭔 씨발... 진짜 괜찮아요?

괜찮대두. 라고 말하는 수연의 표정은 평온했다. 외계인 진짜 무적이구나. 아프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어제 끓는 물로 샤워하던 것도 보통 피부라면 백퍼 화상이었다. 그런데 벌개진게 끝. 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 존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언니 때문에 수명 깎이는 거 같아요.

- 진짜...?

관용어라곤 하나도 모르네. 유정은 됐다 싶어 주제를 바꿨다.

- 근데요. 외계인 수명 몇 년이에요?

- 모르겠어. 안 죽어봐서.

- 언니 몇 살이에요?

- 음...

- 나보다 오래 살았어요?

- 일단은? 나 지구 두 번째로 오는데, 뭐가 많이 달라져 있더라.

- 그땐 어땠길래?

- 공룡이 있었어. 고사리도 엄청 컸고.

공룡?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현기증이 났다. 말 하는 것 마다 무슨 우주급 스케일이야. 이후의 대화는 계속 외계인 토크였다. 고향은 어땠냐고 물어봤다. 어땠다 할것도 없댔다. 얼음 투성이고 자기 자신 뿐이었댄다.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른댔다. 그냥 눈 떠보니 태어나 있었다고. 계속 잠만 자다가 할게 없어서 돌아다녔댄다. 말머리 성운도 장미 성운도 보고. 별 세면서 놀고. 별들은 대개 얼어붙거나 불타고 있었을 뿐이랬다. 뭔가 꿈틀대는 행성은 있지만 인간 같은건 없다고. 지금도 존재할진 모르겠다고.

그래서 지구엔 생각보다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할게 많고 어딜가나 시끄러운게 재밌어서. 별 일이 많았지만 안 죽어서 괜찮다고 했다. 인간은 너무 빨리 죽는다고. 그게 좀 아쉽다고.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덜컥대는 걸 느꼈다. 아. 언니 여행왔다고 했지. 불안감을 애써 외면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골목으로 왔다. 담배꽁초가 수북한 전봇대 밑. 시내의 비공식적인 흡연 구역. 둘은 각자의 담배를 꺼냈다. 수연은 능숙한 폼으로 라이터를 켜고 빨아들였다.

- 외계인은 폐암도 안걸리나.

중얼대는 말에 수연이 웃었다. 안 아파서 편하다고, 너 다음으로 좋은게 담배라고 했다. 유정은 벌개진 얼굴로 수연의 팔뚝을 쳤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게나 하냐고. 담배가 좋다고 남이 말하면 허세같아 보이는데, 수연이 말하니까 뭔가 괜히 특별한 취향 같다.

- 왜 좋아요?

- 숨 쉬는 기분이라서.

- 잠깐만, 언니 숨도 아예 안 쉬어요?

- 응.

유정은 수연의 손목을 쥐어본다. 어릴 때 궁중드라마가 유행해서 다들 아는 것. 맥 짚어보기. 엄지손가락을 요리조리 옮겨봐도 맥이 뛰는 곳은 없었다. 유정은 수연의 코 끝에 손을 갖다대본다. 숨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보라고. 유정은 스톱워치를 켰다.

담배가 한 대 다 탔다. 시간은 3분 29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유정은 두려운 표정으로 수연을 본다. 얼굴도 희게 질리지 않고, 숨 막히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와. 진짜 외계인 맞구나. 중얼대며 유정은 말했다.

- 언니. 숨 쉬어요. 이제 그만.

- 안 쉬어도 된다니까.

- 존나 불안하잖아요. 죽은 사람처럼. 내 앞에선 숨 쉬어요. 알겠어요?

- 응.

- 까먹지 말고.

유정은 수연의 손을 꼭 잡고 이끌었다. 수연은 순한 애기처럼 유정을 졸졸 따라온다. 얘가 없으면 지구생활 많이 힘들었겠지. 유정은 지 성격이 나쁘다고 자학을 하도 해댔는데. 새벽 세네시에 진상부리다가 미안하다고 툴툴대고. 자기 성격 지랄 맞아서 싫냐고. 수연은 언제나 아니라고 했다. 지랄 맞은지도 모르겠고 지랄이라도 좋았다. 지구인들을 이해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그 짧은 삶 동안에 만나서 좋아하고 애낳고 죽다니. 하지만 제 손을 이끄는 유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삶이 짧으니까 꼭 그래야겠구나. 수연은 이지러진 낮달을 흘끔 본다. 그럼에도 떠나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

언젠가 그런 걸 본적 있었다. 바람핀 남자친구에게 존나 무섭게 이별을 고했다고. 남자친구를 용서해주고 아무렇지 않게 데이트 한 뒤, 거실은 선선하고 사과 깎아 먹으며 행복한 순간에 이렇게 말하는거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그 뒤로 잠수 타서 모르겠는데 남자가 우울증 걸리고 여자 못 만난다는 근황을 들었다고. 유정은 그 얘기를 본 뒤 어깨를 쓸면서 말했다. 씨발 존나 소름끼쳐.

유정은 같은 상황을 겪었을 때 씨발, 까지만 말할 수 있었다. 수연은 홍합을 까다가 말했다. 자기는 내일 떠난다고. 유정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쳤다.

- 뭐라고요?

- 그러니까 오늘 같이 자자.

- 아니 씨발, 뭐?

- 마지막 밤이잖아.

마지막. 먹던 막걸리가 확 체하는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년. 진짜 개같은 년이다. 욕지기가 올라와서 목이 턱 걸린다. 유정은 혼이 빠진 눈으로 말했다. 왜 가야 하냐고.

- 나 원래 한 곳에 오래 못 있어.

- ......

- 다시 올게.

- 언제요?

- 글쎄. 지구 시간으로 얼마인지 모르겠어.

심지어 기약도 없어. 유정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찬물을 끼얹는 일은 없었다. 수연의 고요한 눈은 진심 뿐이었고, 오늘이 정말 마지막 밤이니까. 마지막 밤을 망칠수 없다는 생각이 유정을 자리에 묶어두었다. 유정은 머리를 쓸면서 물었다. 울컥대는 눈물을 참으면서.

- 왜 가요? 지구 좋다며. 다른데는 좆도 볼거 없다면서요.

- 나는 이래야 해. 지구 사람들이 밥 먹고 자는 것 처럼.

- ......

- ......

- 안 가면 안 돼요?

- 미안해.

- 씨발 미안하단 말 듣고 싶댔냐고요. 가지 말라고요.

- ......

그 후론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한 주전자가 금방 동난다. 어지러워서 이리 저리 기대는 몸. 지수연은 꿈쩍 없이 술을 마신다. 존나 웃긴다. 취하지도 않으면서 뭔 맛으로 마시지.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그 후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들. 술집 화장실에서 토하고, 수연이 등을 두드려주고, 다시 토하고, 비틀대는 몸으로 모텔에 가고, 수연이 어깨동무를 해주고,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 지수연이 옆에 누워있고. 있는대로 진상을 부렸다. 가면 죽어버릴거야, 아니 지수연 죽여버릴거야. 이런 말들을 했다. 수연은 난처하다는 듯 유정의 등을 쓰다듬었다. 수연은 못 죽고 유정이 죽으면 슬프니까. 하여간 농담도 몰라. 아, 지수연 떠나는거 농담이면 좋겠다.

*

베갯잇을 적시다 깨어났다. 깨질것 같은 머리. 머리맡엔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유정은 곧장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옆을 돌아보니 수연이 앉아 있었다. 잘 필요가 없다더니 안 자고 있었다.

- 뭐하고 있었어요.

유정은 덜 트인 목소리로 물었다.

- 너 보고 있었어.

- 존나 웃겨. 곧 갈거면서 왜 정붙여요.

- 좋아하니까 보고 있었지.

- 지랄하지 마요. 언니는 그냥 내가 신기했죠? 지구인이라서. 강아지나 고양이 귀엽단거랑 같은 마음이겠죠. 그러니까 씨발...

- 사랑해.

- 개수작 부리지 마요.

- 너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유정은 무너지듯 수연의 품에 안겼다. 사랑하니까 이렇게 붙잡지 미친년아. 하고 욕지거리를 하며. 원망은 자꾸만 새어나왔다. 언니 진짜 안 가면 안되냐고.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려도 수연은 철옹성이었다.

- 언니 씨발 바람피죠. 외계인 여자친구 만나러 가요?

- 난 너 말고 사귄 적 없어.

- 그러면 거기 가서 새 여친 사귈거에요?

- 앞으로도 그럴거고.

- 거짓말.

- 진짜.

속삭이는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을 맞추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옷이 벗겨지고 손이 유정을 파고들어도, 조심스럽게 핥고 깨물 때 유정은 우는 듯 신음을 흘렸다. 상상만 해왔던 수연과의 밤. 언제 분위기 잡고 덮치려고 했는데. 누워 있을 힘 밖에 없다. 내가 처음이란거 사실 거짓말 아닐까. 이렇게 슬픈데도 너무 좋아 죽겠는데. 수연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유정의 몸을 파고들었고, 유정은 수연의 어깨를 꾹 붙잡았다.

- 흐윽,

- 아파?

- 좋아요.

섹스 중엔 말을 별로 섞지 않았다. 조금만 다정하게 말해도 울까봐. 수연은 손을 놀리는 동안 계속 유정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 뺨, 이마 할 것 없이. 그게 진짜 사랑한단 것 처럼 느껴져서. 너무 실감나서 유정은 더 울어버렸다.

*

창문은 어슴푸레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수연은 창문을 열고 유정을 불렀다. 여기로 와 보라고. 유정은 후들대는 다리로 주춤주춤 걸어왔다. 수연의 손끝이 가리킨 곳엔 새벽달이 걸려 있었다.

- 봐. 저기 별 없지.

- 근데요.

- 이제 생겨.

수연은 집중하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하는 건지. 가만히 보고 있으니 정말, 빛이 없던 허공에 샛별이 생겼다. 샛별은 달 옆에 가만히 박혀 있었다. 꽤나 크고 반짝였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불사신이고 외계인인대다 자길 떠난다는데 별도 만들 수 있구나. 그래도 예쁜 건 사실이었다. 수연은 큰 눈이 접히도록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날씨 흐려도 보이게 했어. 알겠지.

- ......

- 나 보고 싶을 때 봐.

유정은 말 없이 수연의 품에 안겼다. 너무 짧은 밀월이었다. 쥐톨만한 다이아몬드로 결혼이니 뭐니 호들갑 떠는 사람이 태반인데, 별을 선물해놓고 이제 떠나겠다니. 퉁퉁 부은 눈에 다시 눈물이 찔끔 고인다. 수연은 유정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런 노래 가사 있지 않아? 사랑은 은하수를 타고.

- 몰라요. 그딴 거.

- 그 노래 듣고 내가 너 앞으로 내려왔잖아. 은하수가 비포장 도로라 걷기 불편했어. 알아?

- 지랄. 몰디브 찍고 왔다면서.

- 굳이 돌아서 왔어. 너 사랑하려고.

- .....빨리 와요.

그 말엔 대답이 없었다. 그게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지수연이 존나 싫은 점. 절대 빈 말을 못한다는 것. 거짓말도 못한다는 거. 여행 그딴 거 안가면 안되냐고. 차라리 같이 가자니까 한참 타이른다. 인간은 성층권도 가기 전에 죽는다고. 위험하다고. 그렇게 위험한데 왜 가냐고 씨발. 외계인 존나 싫다. 지수연이 인간이면 좋겠다.

수연은 매정하게도 옷을 주워 입었다. 유정을 침대에 앉히고 뺨을 쓰다듬었다. 수연은 조심히 물었다.

- 기억 지워 줄까?

- 좆까요.

- 힘들텐데.

- 언니가 지금 이 지랄 하는게 더 힘들거든요? 안 오면 죽여버릴거야. 진짜.

- 사랑해.

- 내가 더.

현관까지 따라나오지 않았다. 그게 유정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졸졸 따라왔다가 눈 앞에서 닫히는 문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신발을 끄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유정은 적막한 방안에서 멍하니 있었다. 만약 언니가 정말로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면. 사실 지금까지가 전부 치밀하게 준비한 거짓말이라 문 열고 농담이라고 해 줬으면. 쌍욕을 하면서도 안아줄텐데. 간절히 바랐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유정은 그 해 기숙학원의 최고 아웃풋이 되었다. 면회도 외출도 씹고 틀어박혀 공부만 하더니, 누구나 아는 대학의 천문학과에 떡하니 붙어버렸다. 부모님은 유정을 안고 헹가래를 했으며 명절마다 매일 유정의 칭찬이 이어졌다. 다만 과 이름을 들으면 조소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유정은 그 때마다 웃어 넘길수 있었다. 지구인이 꼴에 멕이려 들기는. 싶어서. 수연이 남겨준 좋은 점이었다. 많이 관대해졌단거.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유정은 미친듯이 공부만 했다. 입시생 때보다 더 열심히. 모두들 유정을 천문학 덕후로 알고 있었고, 교수들은 유정의 질문에 눈을 빛냈다. 자기 연구실에 들어오겠냐고. 같이 등산 가겠냐고 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유정은 등산 후 곤드레밥이든 뭐든 잘 씹어 삼켰다.

졸업하자마자 당연한 수순으로 랩실에 갔다. 학부생 때 한없이 인자하던 교수님들은 점차 빡빡해졌다. 랩실에선 모두가 교수의 수제자이자 인력이었으니. 졸아서 수식값을 잘못 입력하다 대판 깨진 날도 있었고, 학부생들의 터무니 없는 답안지 채점에 밤을 새웠다. 답 대신 교수님 우주만큼 사랑해요. 라는 애교가 적혀있길래 유정은 코웃음을 쳤다. 니가 우주를 아냐고. 가차 없이 감점을 했다.

머리가 굵어지며 꿈은 점점 소박해졌다. 그냥 우주박사가 되어 지수연에게 까지 닿을 수 있는 통신기기를 만들고 싶었고, 만들자마자 미친년아 빨리 안 와? 딴 년 만나? 라고 전송하고 싶었다. 현실은 녹록치 못해 그런 기술도 자본도 없고. 연구지원금이 승인 날 리도 없고. 나사에 있는 수백억대 장비들도 기껏해야 태양계 내에서만 통신이 될거고. 개인 메세지를 보냈다간 개좆될거다.

유정이 할 수 있는건 이 자리를 지키는 것 뿐. 유학 제의가 왔으나 모두 거절했다. 떠나있는 동안 수연이 올까 싶어서. 그래도 씨발 가봐야 하나. 한국에 있어봐야 취직이 되겠어 강사 자리 티오가 나겠어. 미래는 한없이 팍팍했다. 지수연은 좋겠다. 취직 걱정 없어서.

랩실에서 빠져 나온 유정은 교내 호수로 향했다. 고즈넉한 물가와 벤치. 그믐달과 옆에 박혀있는 샛별. 유정은 항상 교수님과 과 내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별 뭐냐고. 교수는 전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교수가 저런것도 모르냐. 하고 투덜댔으나 나중엔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관측해봤자 인력에 밥값에 논문에 할애하는 시간에. 연마비가 더 드는 쥐톨만한 다이아몬드 원석 같다는 걸.

나는 언니가 한 일이 존나 대단하다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관심도 없대요. 유정은 속으로 혼자 고자질을 했다. 맥주를 쭉 들이키자 몸이 나른해진다.

씨발 벌써 5년이 지났는데. 우주에선 지수연은 커녕 쪽지 쪼가리도 안 오고 있다. 개 같은 년. 나 그냥 현지처 아닐까? 그냥 지수연이 하룻밤 즐기고 만 거 아닐까? 유정은 씨발거리며 맥주를 마저 넘긴다. 몸은 점점 가라앉아 벤치에 털썩 눕게 된다.

샛별은 유난히 반짝이고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오늘은 지수연이 오는 거 아닐까. 유에프오든 은하수 타고 걸어오든 아무튼. 유정은 눈물을 훔쳐내며 흔들리는 별을 바라본다. 몇 시간이고 보다가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 날도 수연은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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