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로비 의자에 핸드폰을 두 손에 꼭 쥐고 앉아 있던 석진이 태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허옇게 질려서는 창백한 얼굴이다. 그걸 본 석진이 낮게 침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거친 숨을 헐떡이는 태형의 머리칼이 온통 젖어 있다. 인제 보니 외투도 없이 덜렁 티셔츠 차림이고 가방도 없다. 손에 든 건 핸드폰이 유일했다. 밖이 얼마나 추운데 이러고 병원까지 오다니. 태형이 이런 꼴로 돌아다니는 걸 민윤기가 알면 또 애 놀라게 만들었다고 제게 지랄을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외투는 어디다 버리고 왔어.”
“…형, 형은요? 형 지금 어디에 있어요?”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챙길 여유도, 정신도 없이 연락받은 순간 태형이 자리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을 석진은 알고 있다. 몰랐어도 지금 눈앞에 서 있는 태형을 보면 누구라도 알아챌 것이다. 아마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통화 마지막이 어땠는지, 어떤 말을 제가 뱉었는지.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말끝에 마른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는 것도. 이럴 줄 알았으면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지금 수술실에 있어.”
“수…술실이요? 수술까지 해야 할 정도로 다쳤어요? 그 정도로 크게 다친 거예요? 어디가요? 얼마나요?”

수술실 안에 있다는 말에 태형의 얼굴이 더욱 허옇게 질린다. 수술실 어디에 있어요? 어디가 다쳤는데요? 우리 형 괜찮은 거죠, 그쵸? 연이어 묻는 말에 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대다 말았다. 이걸 어떻게 다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사고를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해야 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태형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릴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난데없이 브레이크를 밟는 차 한 대 때문에 사고가 시작됐고, 윤기는 앞서 추돌 중인 차들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서울을 코앞에 둔 IC 근처에서 차가 완전히 뒤집혔고. 구조대에 의해 병원까지는 잘 실려 왔는데 하필이면 뇌에 출혈이 생겼고, 결국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얘기까지.

이런 이야기를 태형이 맨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떨고 있는데. 불현듯 석진은 돌아가신 문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태형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충격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장례식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 또한. 트라우마와 직결되는 문제라 둘은 문인의 이야기를 나누기는 해도 돌아가신 순간에 대해선 얘기를 잘 나누지 않는다고도 윤기에게 들었다. 그러니 태형에게 사고는 함축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석진은 마신 숨을 짧게 내쉬고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태형의 어깨 위에 걸치며 말했다. 

“대기실로 가자. 여긴 너무 춥다.”

입고 있던 제 코트를 태형에게 입힌 것을 민윤기가 알게 되면 미친 거 아니냐고 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중의 일이다. 문제를 삼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을 해야겠다. 둘 다 쓰러져 병원에 누워있을 수는 없지 않겠냐고. 그러면 내가 너무 버겁지 않겠느냐고. 







/








석진은 윤기가 사고가 나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를 나눈 사람이었다. 물론 윤기를 구조해 병원으로 이송하던 대원의 연락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이다. 통화를 나눈 지 3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또다시 핸드폰 화면에 뜨는 윤기의 이름을 본 석진이 떫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야, 바빠 죽겠는데 왜 또 전화를 하고 그래, 어?’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사색이 되었지만.

3시간 전이었다. 겨우 3시간. 그저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에 친구와 무람없는 통화를 나누고 끊은 것이.  

‘지금 다시 서울 오고 있다고?’
「어, 휴게소야 지금.」

휴게소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는 윤기의 목소리는 거래처 설비 문제로 2박 3일 출장 일정이 완전히 꼬인 바람에 서울로 다시 오고 있는 사람치고 꽤나 가벼웠다. 다음 주에 다시 가야 한다며. 허탕 치고 돌아오는 사람 목소리가 왜 그렇게 신났냐? 석진은 이유를 알면서도 물었다. 놀리고 싶었으니까. 부끄럽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윤기는 태형과 달라서 생각보다 이런 질문에 면역이 있는 사람이다. 태연하고 또 뻔뻔해서 오히려 성질을 돋우는. 그러나 안다. 이게 민윤기의 스타일이고 매력이라는 걸. 태형만큼은 놀리는 맛이 없지만 석진 또한 포기할 성정은 아니라서.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게 좋냐, 꼬맹이가?’
「어.」
‘전화 끊….’
「아, 맞다. 형.」
‘뭐.’
「그 꼬맹이라는 호칭, 이제 쓰지 마.」
‘…뭐?’
「이제 쓰지 말라구.」
‘참나, 그걸 또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어요?’

청첩장을 받던 날이 떠오른 석진이 당황스러운 마음 반, 또 골려대고 싶은 마음 반으로 물었다. 하긴, 그때 표정이 꼭 언젠가는 한마디 할 것 같더라니만 결국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다. 참, 민윤기도 은근히 내숭쟁이라니까. 확 대답하지 말아버릴까? 그러나 그는 석진이 대답 없이 고민하는 그 찰나를 눈치라도 챈 듯, 다시 한번 말했다.  

「나 분명히 하지 말라고 했어.」
‘…….’
「다시 쓰면 그때는 진짜 화낸다, 형.」

단호하긴 했으나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데 이상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민윤기의 예전 모습이 별안간 모서리에 툭 걸리듯 떠올랐다. 목소리는 분명 그때와 달리 한층 누그러져 있는데. 말투가 꼭 그랬다. 말투가 꼭… 꼭 처음 만났을 때 민윤기 같았다. 그때의 너는…. 떠오른 김에 곱씹어 보려 했지만, 지금과는 너무 다른 그때가 흐릿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애칭이라 했던 건 순전히 실수였다. 그때 호칭이라 정정했던 것도 같은데. 역시 눈 밖에 난 모양이다. 별수 있나, 아이의 애인이 쓰지 말라면 쓰지 말아야지. 그렇지만 죽어도 태형 씨라는 호칭은 입에 붙지 않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놀리지 말고 처음부터 석훈처럼 태형 씨, 석훈 씨. 하는 사이가 될걸. 팔자에도 없는 장거리 연애시키며 민윤기를 독수공방하게 만든 게 괘씸해서 놀려주던 것이 이 사달이 났다. 이건 분명 민윤기 네게도 책임이 있어! 소리치며 한마디 해도 그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겠지. 한 수 물러 주는 척하며 석진이 대꾸했다.

‘그래도 나 태형 씨라고는 못 부르겠어.’
「…….」
‘그냥 앞으로 이름 부른다? 그건 괜찮지?’

설마 이 정도는 봐주겠지. 한참 대꾸가 없던 윤기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 석진아.」
‘죽을래?!’

소득 없이 농담 따먹기나 하다가 끊은 통화였다. 통화를 끊으며 그저 집에 잘 도착하겠거니 했지, 사고가 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사실 석진은 집에 잘 도착하겠지 하는 생각도 안 했다. 왜냐면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니까. 해가 지면 밤이 되고 해가 뜨면 다시 아침이 되는 것처럼. 민윤기가 김태형이 있는 집으로 가는 것은 이제 그의 삶의 섭리나 다름없으니까.

수술실 앞 대기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기실 맨 앞쪽 비어 있는 좌석에 태형과 석진이 가운데 좌석을 띄운 채로 나란히 앉았다. 석진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포갠 채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고 태형은 그저 멍한 얼굴로 앉아 앞에 놓인 화면만 봤다. 화면에는 가운데 이름이 *자로 표시된 환자들의 이름과 수술 시작 시각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속에는 민*기도 있었다. 태형은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윤기의 이름만을 하염없이 보고 또 봤다. 그러다 고개를 뒤로 돌려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얼굴들. 제 얼굴도 그렇겠구나 싶었다. 

“……하아.”
 
좋지 않은 얼굴로 벽에 붙어 있는 화면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태형은 남몰래 숨을 돌렸다. 적어도 윤기만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물밀듯이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위태로운 생사로 감히 위안으로 삼았으니까. 그러다 이내 덜컥 겁이 났다. 제가 이렇게 삿된 마음을 먹어서 혹여 형이 잘못될까 봐. 태형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 출장 갔거든요… 강원도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병원에…. 어떻게 지금 여기에….”
“…….”

뜬금없이 터지는 목소리에 석진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얼굴이 젖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 젖겠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석진은 입을 벙긋대다 그저 침음했다. 이런 얼굴을 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걸 보고 있자니 더욱 이 순간이 현실처럼 느껴져서 그랬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민윤기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나와주기를.









/






버스정류장 앞에서 윤기가 건너편 언덕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익숙한 곳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저 언덕을 이제 올라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조금 전에 내려온 길이었던가. 방금 전의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부아가 치민다. 왜 내가 또 여기에 있는 거지. 윤기는 고개를 숙이고 제 손을 바라봤다. 버석하게 말라 있는 손등을 한참 들여다보는데 시선이 손에서 제 발로 떨어진다. 다 떨어진 운동화를 인지하는 순간 난데없이 거친 비가 쏟아졌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꿈이다. 꿈이구나. 내가 꿈에서 계화(季畵)에 왔구나.

그는 계화의 버스정류장 앞에 서 있다. 깨닫는 순간, 씨발. 별안간 욕이 터졌다. 터진 건지, 아니면 생각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꿈속에서도 여기를 찾아오다니. 기가 찼다. 꿈은 꿈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라면 절대 하지 못할일 같은 거. 여기에서 저기로 번쩍 날아다닌다거나, 아니면 높은 구름 위에 올라 서 있다던가. 아니, 솔직히 꿈 같은 거 필요 없다. 고단한 현실에 잠이라도 달게 자야 하는데. 피곤함에 피곤을 얹는 꿈 따위.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근데 어디? 계화라고? 익숙한 곳, 익숙한 분노…. 그는 자신이 이곳을 이제 떠나야 하는 건지, 아니면 막 도착한 건지 몰랐기에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느새 몸이 빗물에 흠뻑 젖는다. 운동화가 젖고 양말이 젖는다. 그러다 보면 마음까지 젖고 이내… 수몰된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렇게 잠기면 커지는 건 결국 독(毒)뿐이었다. 타인보다 저를 해치는 독. 

비를 피하고자 낡은 정류장 안으로 몸을 숨길 수도 있고, 의자에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윤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계화에 올 때마다 그는 이랬다. 이곳에서는 어디에도 내려앉고 싶지 않다. 그것이 설령 정류장 의자라 하더라도. 이 작고 초라한 시골 동네에 마음을 내어주고 싶지 않다. 단 한 꼬집도. 그 꼬집의 꼬집만큼도. 

‘아, 같이 가 박지민!’

아이의 목소리에 윤기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계화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멀찌감치에서 노란색과 파란색, 작은 우산 두 개가 윤기 쪽으로 걸어온다. 종종걸음으로 걷는 아이들은 우산 색에 맞춰 우비와 장화를 신고 있다. 자세히 보니 책가방까지 메고 있다. 하굣길인 모양이었다. 

‘같이 가자니까아!’

앞서 걷는 파란색 우비를 입은 아이가 뒤따라오며 연신 같이 가자고 말하는 아이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걸음을 늦춰주며 기다리더니 따라잡힐 것 같아지자 다시 뛰어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하며 놀려대는 걸 윤기는 젖은 빗물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면서도 말없이 관찰했다. 궁금했다. 쟤넨 누굴까.

아니, 누구였지?
분명히… 아는 얼굴인 것 같은데….

어느덧 우산 두 개가 윤기의 바로 앞까지 왔다. 파란색 우산을 쓴 아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보여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그냥 그를 지나친다. 윤기는 그 뒤를 걷는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골려 먹는 친구 때문에 한참을 뛴 아이는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쓰나 마나 할 만큼 빗물에 얼굴이 홀딱 젖어 있었다. 이런, 넌 집에 가면 혼 좀 나겠구나. 까뭇한 피부에 도드라진 이목구비. 젖어 있는 얼굴이 익숙한데. 기억이….

‘…형아?’

순간 기억을 하려 애쓰는 윤기와 노란색 우비를 쓴 아이의 눈이 맞는다. 형아? 내가 네 형이야…? 나는. 나는….

‘우와, 진짜 윤기 형이다.’

우산을 던지고 달려온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윤기를 꽉 안았다. 안았다기보다는 매달렸다는 게 더 정확했다. 허리춤을 잡은 채로 몸을 달랑거리며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이 가물가물한 기억 어딘가에서 어떤 한 얼굴이 툭 튀어나와 겹친다. 그래….

이제 알겠다.

‘아저씨가 이제 형 안 온댔는데요. 분명히 그랬는데요.’
‘…….’
‘그럼 아저씨가 그럼 거짓말을 한 건가?’
‘…태형….’
‘네?’

네가 누군지.


“…형아.”
“…….”
“태형…아….”
“……형?!”

배드 옆, 간이 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 졸던 태형이 바람에 흩날리듯 불리는 제 이름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형의 목소리. 잘못 듣지 않았다. 분명 윤기가 제 이름을 불렀다. 

수술실 밖으로 나온 간호사가 대기실 문 앞에서 민윤기의 보호자를 불렀다. 태형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바람에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박고 설잠에 들었던 석진이 번쩍 눈을 뜨며 일어섰다. 수술이 얼추 끝난 모양인지 간호사는 둘에게 곧 있으면 의사가 나와 수술에 관해 이야기할 거라는 말을 뱉고 곧장 자리를 떴다. 5분 남짓. 의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어쩌면 이렇게 영겁보다 긴 것 같은지. 태형은 초조했고 또 무서웠다. 혹여 의사가 나와서 나쁜 말을 할까 봐서. 저를 정말로 지옥으로 보내줄 것만 같아서. 지옥이 뭐 따로 있나. 형이 없는 그곳이 내게는 지옥이지. 

파란빛이 도는 수술복을 입은 의사는 태형과 석진을 번갈아 보더니 석진에게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태형이 자주 들어 본 적이 없던 용어들을 입에 여러 번 담았다. 수술은 잘 끝났고 생각했던 것보다 출혈이 적어서 다행이라는 요지였다. 오히려 부러진 늑골이 폐를 압박하고 있었다며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태형과 석진 둘 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일곱 시간 내리 윤기의 머리만 생각했는데. 정작 그의 생사를 쥐고 있던 건 뇌가 아니라 늑골이었다.

그 후 윤기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머리와 몸 전체에 기계 줄을 칭칭 감고 나온 그의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흔들이 가득했다. 석진은 생각했던 것보다 처참한 윤기의 얼굴에 깊은숨을 터뜨리고는 사람들에게 연락 좀 하고 오겠다며 이내 자리를 떴다. 태형은 중환자실 의자에 주저앉아 감사의 말을 곱씹어댔다. 의사인지 아니면 믿지 않는 신인지. 불분명했으나 그 누구라도 좋았다. 어쨌든 수술은 잘 끝났으니 윤기는 깨어날 것이고 저를 보며 웃어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보낸 뒤 윤기는 1인실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대기를 걸어도 자리가 없어서 쓰지 못하는 1인실을 쓸 수 있던 건 병원에 아는 지인이 있는 석훈이 미리 손을 써둔 터라 가능했다. 조용하고 쾌적한 그 병실에서 윤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친구들이 오고, 회사 직원들이 오고, 태형이 자리도 뜨지 않고 계속 저를 들여다보는데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러다 영영 눈을 안 뜨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을 알아챈 듯 석진은 언제고 눈을 뜰 테니 기다려보자는 태형을 안심시켰다.

“어떻, 어떻게 해야 하지.”

의식이 돌아오는 때에, 몸을 흔들지는 말되 빨리 깨어날 수 있도록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을 꽉 잡아, 쥐어 보라는 의사의 말이 문득 기억났다. 태형은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윤기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쥐고서 깨우기 시작했다.

“형, 윤기형, 내 말 들려요?”
“…….”
“형… 일어나봐, 응? 윤기 형!”

형이라는 단어를 뱉을 때마다 윤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좀처럼 눈은 뜨지 않는다. 눈꺼풀에 추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태형은 애가 닳았다. 그렇게 얼마나 형을 불러댔을까. 태형에게 잡힌 손가락이 움찔한다. 지금 먼저 움직인 거야? 놀란 태형이 고개를 숙여 그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이번엔 보다 더 크게 손바닥까지 움찔댔다. 호출, 호출 벨을 눌러야 해. 태형이 윤기의 머리맡에 놓인 호출 벨을 누르기 위해 고개를 다시 드는데. 어느새 그가 눈을 뜨고 있다. 눈을 뜨는 것도 모자라 인상을 쓰며 태형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잔뜩 상처 난 수척한 얼굴을 보는 순간, 태형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목 끝에 단단히 묶어 두었던 감정이 울컥 치솟아 터졌다. 

“…형.”
“…….”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내가, 내가….”
“…….”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태형의 눈 아래로 줄줄 흐르는 눈물은 안도였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서러움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윤기가… 여전히 제 옆에…

“그쪽은… 태형이가 아닌데….”
“…….”

깊은 호수 밑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다른 말을 한다. 잡은 그의 손을 입술에 대고 엉엉 울던 태형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라며 윤기를 바라봤다. 그의 갈빛 눈동자 속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뜻모를 시선이 있었다. 태형은 젖은 얼굴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그를 불렀다.  

“형, 나 태형이잖아요. 태형이 맞잖아요.”
“아닌데. 태형이는 훨씬 꼬맹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
“누구세ㅇ…”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한 윤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안 되는데. 다시 깨워야 하는데. 태형은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잔뜩 얼어붙은 채로 조금 전 말을 다시 곱씹었다. 그쪽은 태형이가 아닌데. 그쪽은… 태형이가… 아닌데…. 내가 왜 태형이가 아니야? 나 태형이 맞는데. 민윤기의 김태형이 맞는데. 내가 왜….

창백했던 새벽녘이 떠오른다. 미친 듯이 몸을 섞고 정신 못 차리고 단잠에 빠졌던 그날 아침. 태형에게 속삭여주던 그의 달큼한 목소리까지. 

형은 깨웠다?
나중에 화내면 안 돼, 알았지?
아침 차려 놓은 거 꼭 먹고 가.
…다녀올게.


이 순간에서야 기억하지 못했던, 윤기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흩날려 태형에게로 당도했다. 

형 없는 동안에도 밥 잘 먹고, 잘 자고 있어, 응?
사랑해….

 










*


앞으로 곧 오겠다는 말... 하지 않겠어요 이 말만 하면 만날 늦게 오니깐...!

해일을 쓰며 해적방송 회지에 포스트잇과 빨간색 책갈피 스티커가 잔뜩 붙여지고 있어요. 내용에 필요한 부분과 곱씹을 부분들...ㅎㅎ 다시 읽거나 들춰서 확인하는 것 넘나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재밌게 하구 있어여,, 여러분께도 그런 재미가... 있으셨으면 조..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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