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ok At






*오래된 노트는 과거시점입니다.



오래된 노트-민윤기 2





"진짜 관심 없어?"

"없어."


친해진 다음 알고 보니 이 녀석은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었다. 평균을 한참 웃도는 속도로 인턴까지 마치고 유학 중이었으니, 당연스레 나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유추했던 것이었다. 이미 익숙해진 동갑내기 호칭을 되돌리기도 참 애매하던 차에, 김석진은 내 생일을 묻더니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아메리칸 스타일을 들먹였다. 나는 대충 그래, 하고 대답했던 것 같다.

또한 녀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상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한 마디로 천재였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천재 타이틀을 거머쥔 나에 비해 타고난 브레인 자체가 월등하게 좋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가끔은 재수 없게 느껴졌고, 또 가끔은 부러웠다. 비단 외과 분야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었다. 자기 전공 하나만 죽어라 파고드는 것도 힘에 부쳐 다들 하루가 멀다 하고 나가떨어졌으나 녀석은 달랐다. 내과, 외과 할 것 없이 재능이 다분했다.


"그럼 나한텐 관심 있나?"

"그건 더더욱 없지."


가끔 저런 미친 소리도 잘 뱉었다. 공부에 미친 놈들은 다 저런가? 내일 모레면 출국이라는 같잖은 이유로 김석진은 나를 더더욱 못살게 들들 볶았다. 흉부외과로 이전하라며…. 징글징글한 놈.


"넌 내과보다 흉부외과가 딱이라니까?"

"그러는 너나 해."

"싫어. 난 성형외과 할 거야."

"엥? 네가? 왜?"

"돈 잘 벌잖아."

"미친놈."

"한국에서는 돈 잘 버는 성형외과가 최고지. 다른 건 배고파서 못 해 먹어."

"넌 의사의 자질이 없는 놈이야."

"그러니 네가 흉부외과에 딱이지. 환자의 심장에 남는, 뭐 그런 멋진 의사가 되고 싶다며?"

"어."

"근데 심장에 남는 그런 게 되고 싶다고 해서 꼭 심장을 치료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냐?"

"뭐가? "


대답 대신 실없이 웃으며 내 등을 한 번 치고 멀찍이 뛰어가는 김석진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매일 장난만 치던 녀석이 이런 말로 훅 치고 들어오니 도리어 내가 당황스러웠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당장 닥치지 않을 일들은 가볍게 여기곤 한다. 나도 그랬다. 그땐 너무 어렸고,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또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MEDIC 03

밤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벽을 이룰 수 없다. 








야간 회진을 돌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얀 가운 속주머니에서 신호가 느껴져 호출기를 보니 내과 계열 중환자실 병동에서 호출이 와 있었다. 그 병동은 약 삼 개월 전 내가 근무했던 곳인데, 당시 소아 흉부외과와 응급의학과를 거친 직후였던 덕분에 수월하게 일했던 기억이 있다. 아직 병실을 다 돌기 전이었으나 흉부외과에 나 말고 의사가 몇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즉시 중환자실 병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가벼운 결정이 내 흉부외과 인턴 시작에 중대한 첫 오점을 남기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겨 중환자실에 들어서자, 예전 중환자실 인턴으로 있을 때 친했던 간호사 한 명이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바쁘신 거 아니죠?"

"아, 예, 뭐."

"아니, 지금 정맥 주사를 놔야 하는데 신입 인턴들은 커녕 레지던트 선생님들도 못 놓고 있어서요."

"대체 환자 상태가 어떻길래…. 레지 선생님들도 못 하시는 건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에이, 그래도 전정국 선생님 유명했잖아요."

"네? 뭐가요?"

"내과 계열 중환자실 역대 최고 인턴으로요."


쑥스러워서 괜스레 뒷목을 긁적였다. 오랜만에 보는 간호사는 그래도 익숙한 얼굴이 못내 반가웠던지 약간은 들뜬 말투로 살갑게 몇 마디 말을 잇다 나를 안내했다.


"이쪽이에요, 선생님."


레지던트들도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는 그 환자 앞에 섰다. 환자의 팔뚝은 이미 바늘에 여러 번 찔려 곳곳에 주사 바늘 자국이 가득했으며 푸르스름한 멍으로 얼룩덜룩했다. 옆에서 끙끙거리던 레지 선배들은 '네가 여긴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며,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실패했을 경우 주제 모르고 나대는 짱돌 의사로 찍힐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사를 놓는 부위가 아닌(나 역시 실패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위를 노렸다. 환자의 팔 한 쪽을 살짝 돌려 핏줄이 바로 보이지 않는, 근육 혹은 지방으로 둘러싸여 있는 연한 뒤쪽 팔뚝에 주사 바늘을 깊이 찔러 넣었다. 환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손바닥에서 약간의 땀이 배어나긴 했으나, 나는 실패한 선배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번에 성공했다.


"역시 전정국 선생님은 다르시네요."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맥 주사만 놓고 남은 회진을 위해 바로 내려가야 한다니 마음 한 구석이 못내 씁쓸했다. 걸음을 옮기며 오랜만에 올라온 중환자실을 주욱 둘러보니 몇 달 전 이곳에서 바쁘게 지내던 날들의 기억이 모락모락 떠올랐다. 다시 올 일이 생기면 전에 쓰던 당직실이라도 한 번 들러야지 했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복도를 따라 걸으며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음, 내가 확실히 정맥 주사에 타고난 재능이 있단 말이지. 지민이 형이 자칭 A-line의 황제라 한다면 나는 정맥 주사의 달인이라 하겠다. 물론 더 잘하는 친구들도 많겠지만. 대학교 시절엔 주사 놓는 것조차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나였으나 현실의 냉정함에 몇 번 부딪히고 나서부터는 주사 바늘을 정확히 꽂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집중력이 생기니 자연스레 침착함이 따랐고. 작은 성공을 복기하는 내내 나는 한결 들떴다.

그렇게 다시 흉부외과 병동으로 내려가는 도중, 주머니에서 또다시 호출이 울리기 시작했다. 장소는 흉부외과 수술실 앞. 인턴에게 이번 달의 업무를 인수인계하려는 집합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조금 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결국 안 바꿨네?"

"예. 아, 저만 늦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얼른 들어와."


수술실 문을 열자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건 다름 아닌 태형 선배였다. 많이 늦은 게 아닌가? 해사하게, 그리고 다소 멍청하게 웃기에 나도 덩달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내 손목을 잡고 이끄는 선배를 따라 수술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수술실엔 나를 제외한 나머지 인턴들과 레지던트 선배님들이 모두 와 있었다. 망할 싸가지 민윤기 과장도 함께. 뻘쭘해진 나는 선배의 신호를 받아 다른 여자 인턴 옆에 섰다. 업무 인수인계가 이미 시작된 후였는지 다른 인사나 소개 없이 바로 설명이 이어졌다. 몇몇 레지던트들은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인턴에게 흉부외과의 전체적인 업무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재빨리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평소 들고 다니던 작은 메모장을 꺼내 병실 회진 시 해야 할 기본 사항들을 받아 적었다. 일반적인 병실과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놓친 부분이 있었나 싶어서.

이어 태형 선배가 수술실에 두 명, 병실에 한 명을 배치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뒤에 앉아 쭉 지켜보던 민윤기 과장이 일어나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잠시만, 했다. 어리둥절한 선배를 두고 민윤기 과장은 나와 다른 인턴들 앞으로 다가섰다.


"인턴은 모두 세 명인가?"

"네."

"내가 알기론 두 명이었는데."

"네?"


선배가 당황한 표정으로 민윤기 과장을 슬쩍 살폈다.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앞의 두 인턴 중 잘못 찾아 온 사람이 있다는 얘긴데…. 인턴 근무를 10개월이나 했으면서 자기 과도 잘못 찾아오다니 세상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잔뜩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두 인턴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그때까지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얼떨떨했다.


"그쪽은 뭔데 여기 있는 거죠?"

"예? 저요?"


그와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 옆에 있던 인턴들 역시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턴 근무를 10개월이나 했으면서 자기 과도 잘못 찾아오다니 세상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그 멍청한 인턴이 바로 나였다. 끔찍한 순간이었다. 나는 창피함에 황급히 해명을 하려 했으나, 왕싸가지 민윤기 과장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전정국 선생님은 응급실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저, 저는…!"

"응급실에서 지금 급하다고 하네요. 워낙 수재이시니 응급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죠? 그럼 수고하시구요. 나머지 레지들은 오늘 새벽부터 있을 수술 일정 차트 찾아서 내 방으로 가지고 오고, 새로 들어온 인턴들은 수술 전까지 병실 회진과 동시에 수술 준비 같이 진행하세요. 그럼 이따 새벽 수술 때 뵙도록 하죠. 해산해도 좋습니다."


맙소사, 이런 어이없는 일을 내가 당해야 하다니. 민윤기 과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다음 일정을 위해 흩어졌다. 흡사 나를 투명인간 취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하나둘 빠르게 빠져나간 수술실에는 갈 곳을 잃어버려 벙찐 나와 민윤기 과장 둘만 남아 있었다. 나는 황당함과 또다시 받은 모욕감에 씩씩거리며 민윤기 과장을 쳐다봤다. 슬슬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저기요, 과장님.


"저는 왜 응급실로 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요? 급하다는 말은 콧구멍으로 들었나?"

"궁금해서 그럽니다. 궁금해서. 저는 이번 달에 흉부외과를 맡았는데, 왜 첫 근무부터 저만 응급실로 내려가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실 상하 관계를 떠나서도 꽤나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말투였지만 이미 너무 흥분한 탓에 자제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번엔 흉부외과의 모든 레지던트들와 인턴들 앞에서 나를 멍청한 짱돌 인턴으로 낙인 찍은 것이 아닌가. 방금 전 활약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민윤기 과장은 살짝 충혈된 눈으로 나를 빤히 보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대단하게도 미소는 잃지 않은 채였다. 내가 덜 자란 다섯 살짜리 골칫거리라도 되는 양.


"타당한 이유라… 전정국 선생님, 아까 야간 회진 때 어디 계셨죠?"

"야간 회진 때요?"

"흉부외과에 계셨나요?"

"아뇨, 그게…."

"내과 계열 중환자실에 계시더군요. 야간 회진도 빼먹은 데다 다른 곳에서의 진료. 게다가 인턴 교육 첫날인 오늘 집합에도 늦었죠?"

"그건…! 일단, 네. 제가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중환자실 호출이어서 급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랬고, 또한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정국 선생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요?"


솔직히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말은 조금 과장을 보탠 표현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당위성 정도는 입증이 되지 않을까? 병동에 연락 한 번만 하면 결국 내가 해결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왔다는 걸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민윤기 과장은 내 마지막 말에 가볍게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웠고, 나는 처음으로 상사의 정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했다. 절로 주춤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정맥 주사 놓는 일은 전정국 선생님 말고는 못하는 일이군요. 그것 참 이상한 소리네요."

"네? 그게, 저기…."


민윤기 과장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도청기라도 달아 놨나.


"내과 계열 중환자실 인턴들은 모두 멍청이들만 모아 놨나요?"

"예?"

"아, 그래요, 뭐 인턴들 중엔 정맥 주사도 놓지 못하는 얼간이들도 몇몇 있으니까. 그럼 레지던트들은 뭘 했죠? 거기 레지들은 죄다 눈이 병신인가? 환자 핏줄도 못 찾아서 다른 과 인턴한테 정맥 주사를 놔 달라고 하게? 아님 레지던트의 특권, 뭐 이딴 걸로 숙면 중이라 전정국 선생님이 가서 놔 주고 온 건가요?"

"환자가 워낙 상태가 안 좋았고, 또한 이미 몇몇의 실패로 인해 핏줄 찾는 게 쉽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민윤기 과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흐르는 침묵 속에 불현듯 깨달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무슨 말을 듣든 거기서 그만 끝냈어야 했다. 애꿎은 자존심 때문에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려고 들었으니 나라도 짜증이 있는 대로 솟구쳤을 거였다. 뒤늦게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손을 모았으나 민윤기 과장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통할 리도 없지만). 스스로 보호하려 했던 몇 마디로 인해 나는 더한 모욕을 당해야 했다.


"내가 장담 하나 하는데."

"……."

"오늘 이후 내과 계열 중환자실 전 레지던트는 이 병원을 나가거나 의사 일을 그만 두어야 할 겁니다."

"네?"

"주사 하나도 제대로 놓지 못하는 쓰레기들은 의사를 할 자격이 없으니까 말이죠. 안 그런가요?"

"과, 과장님. 그건 그분들 잘못이 아닙니다! 다 제가…."

"중환자실은 더욱이 환자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곳입니다. 정맥 주사는 인턴이라면 누구라도, 심지어 의대 다니는 친구들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쉬운 업무고. 물론 어려울 수도 있지만 주사를 여러 번 놓고 계속 연습하다 보면 안 잡히는 혈관도 금세 잡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조차 못해서 쩔쩔맨다는 건 용납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 그런 건 쉬운 업무, 인턴들이나 해야 하는 업무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했던 사람들이 있어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거겠죠? 인턴이건 레지건, 또는 과장이건 모두 다 같은 의사예요. 의사는 어떤 응급 상황이 생겨도 대처할 수 있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과장인 나도 채혈처럼 쉬운 업무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네.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중환자실 레지던트 선배님들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전정국 선생님."

"예?"


민윤기 과장이 굳었던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내 몸은 오히려 한층 더 굳어질 뿐이었다.


"그것들은 신경 끄시고 어서 응급실이나 가시죠."


왜냐하면 나에게 그러했듯, 내가 좋아하는 중환자실 레지 선배들을 물건 취급했기 때문이다. 망할 놈. 나중에 천벌이나 받아라.





*




응급실은 시장 바닥과 다를 게 없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부터 시작해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 왜 자신은 치료를 안 해 주나며 따지는 아줌마, 그리고 누울 침대가 없어 바닥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까지. 웬만한 선배들이 꼭 이곳만은 피해라! 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곳 중에 한 곳이 바로 응급실이다(물론 요즘은 응급의학과에서 일을 도맡아 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인턴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어쩌면 약간 동네 북과도 같은 역할이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치료가 늦어진다며 성화를 부렸고, 각 과 레지들은 자기 과가 맡을 환자가 아니라며 회피하는 일이 잦았다(매일 밤을 새는 레지던트의 입장에서는 새벽까지 응급 환자를 봐야 하는 것이 퍽 고달플 것이다. 백 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중간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인턴들도 이해해 줬음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12시 앞뒤로 사람들이 몰려 응급실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정국 선생님, 신환이요!"

"네."


벌써 밀린 신규 환자만 4명째다. 한 사람을 치료하고 있으면 또 한 사람이 들어오고, 다음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그래도 꼴랑 인턴 10개월 했다고 그새 일이 몸에 익은 듯했다.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몸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체력으로 어디 가서 밀린 적은 없었는데도 응급실 업무를 보다 보면 유독 피로가 더 일찍 몰려왔다. 어제도 밤새웠는데, 이러다 오늘도 당직을 서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 이게 다 그 망할 민윤기 과장 덕분이다.


"이 환자 심전도 검사 했나요?"

"네, 선생님. 그런데 김갑순 할머니 뇌 CT 촬영 및 엑스레이 검사는 어떻게 하죠?"

"보호자한테 동의서 구하고 하세요, 나중에 다른 말 나오면 곤란하니까."

"네."


이쪽 저쪽에서 서로 검사를 먼저 하겠다고 난리니 도저히 진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인턴은 만능 의사가 아니다. 그저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어느 과로 이동시킬지 결정할 뿐인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할 때가 잦아 곤혹스러웠다. 이해가 영 안 가는 것도 아니라 더더욱. 시계를 보니 이제 1시가 조금 넘은 것 같았다. 잠시 짬이 생겨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는데, 그때 바로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응급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환자는 숨을 급하게 몰아쉬고 있었으며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같이 온 환자의 부인은 환자가 노루 농장을 하는 사람으로, 잠시 우리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뿔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우리로 들어오던 다른 노루들에게 가슴 부위를 짓밟혔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빨리 그를 발견한 부인이 재빠르게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환자의 얼굴빛이나 상태로 봐서는 아무래도 흉강 쪽에 피가 고인 듯했다.


"전정국 선생님, 환자분 뇌 CT부터 찍어 볼까요?"


옆 침대에서 환부의 거즈를 갈던 간호사가 내 부름에 급하게 다가오며 물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흉강천자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흉강천자(胸腔穿刺)란 흉강에 피나 물 같은 체액이 고였을 때 이를 천자 침으로 빼내는 시술을 말하는데, 환자의 흉강 내로 바늘을 정확히 찔러 넣어야 하는 탓에 인턴에게는 꽤나 힘든 시술에 속했다.

물론 전혀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 1, 2학년 기초 의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한두 번 시도해 봤었지만, 너무 오래 전이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고 실제 시술이 처음이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또한 자칫 환자가 겁을 먹고 시술을 거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 같아도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늘을 몸에 찔러넣는 시술을,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초보 의사가 하겠다고 나서면 몹시 불안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환자의 상태는 바로 시술하지 않으면 급박할 정도로 위험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덜덜 떨어야 했다.


"의사 선생님! 저희 남편 좀 살려 주세요!"


환자의 보호자는 울음을 억누르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매우 불안했으나 지금은 나를 지켜볼 레지던트 선생님조차 없었다. 신경외과 선생님이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아무나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길 기도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신경외과는 내가 내려오기 전부터 이미 수술이 연이어 잡혀 있었던 것을 확인했으니까. 선배 레지가 있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랫입술을 깨물며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지금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정리한다 해도 결국 답은 하나였다. 내가 해야 한다.

간호사가 바늘을 건넸다. 손바닥에 땀이 미친 듯이 배어나왔다. 미세하게 손이 떨리는 탓에 자칫 바늘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러나 보호자 앞이었다. 더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의연한 척 환자 앞으로 다가서서 환자의 상의를 올렸다. 시술해야 할 부위를 손으로 체크한 뒤 정확한 위치를 찾아 바늘을 찔러 넣었다. 정말 순간이었다.


"전 선생님, 처음인 것 치시고는 잘하시네요?"

"네, 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흉강천자는 자칫 잘못하면 기흉이나 장기 손상 및 출혈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완전히 안도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을 하며 환부를 다시 살피려는 찰나, 환자가 갑자기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 황급히 바늘을 뺐고, 보호자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확실히 조금 전 간호사가 꺼낸 처음이라는 단어에 신뢰도가 확 떨어진 눈치였다.


"아니! 남편을 살려 달랬더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보호자 분, 그런 게 아니라 이 시술은…."

"엑스레이나 다른 검사 없이 갑자기 바늘을 옆구리에 찔러 넣다니! 뭐? 그것도 처음이라고?"

"보호자 분 진정하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가끔 환자들 중에는 이렇듯 옳은 방식의 치료를 해도 의심하는 경우가 있었다.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정말 의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니까. 환자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으며, 바늘은 정확한 위치를 찌르고 들어간 게 분명했다. 환자는 내가 시술 위치를 잘못 짚은 것 때문이 아닌, 단지 시술 과정에서 동반되는 통증 때문에 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그러나 보호자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으려 했고, 초보 의사 주제에 자기 남편을 죽이려 했다며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여기 담당 의사 누구야! 이런 초보 의사를 제대로 교육도 안 시키면서 응급실에 둬?"


여기는 음식점이 아닌데. 이렇게 난동을 피우시면 옆 환자들에게 피해가 갑니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단단히 화가 난 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려 빨리 담당 의사를 데려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런 보호자를 달래다 지쳐 머리가 아파 이마에 손을 올렸다. 골이 다 지끈거렸다.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벌써 수면실의 시옷도 못 본 지 24 시간이 넘었는데. 그때였다.


"제가 담당 의삽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졸려서 이제 환영이 보이는 건가?


"그래, 마침 잘 왔네요, 이 초보 의사가 내 남편을 이렇게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어떡할 거예요?"

"이미 댁 남편은 죽을 지경의 상태셨습니다."

"뭐, 뭐라고요?"

"노루 발에 가슴을 밟혔다고요?"


아니, 흉부외과에서 응급실까지는 거리도 꽤 먼데 대체 왜 민윤기 과장이 여기까지 왔을까. 하필 민윤기, 왜 민윤기. 민윤기 과장은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환자의 앞으로 가 가슴 부근에 청진을 했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계속해서 청진기로 가슴 쪽을 청진하는 민윤기 과장과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보는 보호자 분. 아니, 저에게는 잘못이 없다니까요. 타이레놀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중환자실로 가서 가슴 사진을 찍어 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주, 중환자실? 거봐! 이 초보 의사가 우리 남편을!"


보호자가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짓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내 나를 밀칠 듯 손을 내질렀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다시 뱉으며 고개를 숙인 순간, 별안간 내 앞을 민윤기 과장이 가로막고 섰다. 표정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남편 분은 사진을 찍어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아마도 왼쪽 허파가 터진 것 같습니다. 거기에 고름이 가득 찼겠지요. 그리고 안 좋을 경우 식도도 터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 그러면 이제 우리 남편은 죽는 건가요?"

"아닙니다. 지금 수술 들어가서 튜브를 넣어 고름을 빼내고 터진 식도를 봉합하면 됩니다. 큰 수술이겠지만 서두른다면 남편 분 생명엔 지장이 없을 거구요."

"가, 감사해요, 선생님!"

"아뇨. 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이 친구한테 감사해 하시죠."

"네?"


민윤기 과장은 옆으로 다시 물러나 한결 진정된 모습의 보호자에게 나를 가리켰다. 보호자와 나는 동시에 당황했다. 멍청하게 민윤기 과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나는 약간 더 놀라야 했지만.


"이 인턴이 흉강천자를 제때 시술했기 때문에 남편 분이 그나마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겁니다."

"그게 무슨…."

"방금 전 환자가 아파한 건 주사 바늘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혈색은 분명 실려 올 때보다 좋아졌을 겁니다."

"아, 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방금 전까지 내 말은 죽어도 안 들으려고 했으면서. 이래서 대한민국 사회가 문제라는 거다. 무조건 초보면 무시하고 능숙한 사람만 믿다 보면 어느 세월에 인턴이 전문의가 되겠는가. 인턴에게 환자가 자신의 치료를 맡기지 않으면, 인턴 역시도 경험 없이 출중해지기 힘든 사람이기 때문에 실력이 늘 수가 없다. 환자들이 전부 전문 의사나 레지던트들만 찾다 보면 매년 부푼 꿈을 안고 병원에 발을 들이는 우리나라 의사들은 전부 인턴으로 남아야 할 지도 모른다. 지금의 훌륭한 의사들 역시 모두 인턴 시절을 거치며 얻은 풍부한 경험 덕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니까.

민윤기 과장의 말을 들은 보호자가 그제야 나에게 고맙다며 떨떠름하게 인사를 했고 나 역시 거북하게 인사를 받았다. 잠시 말이 없이 개운하지 않은 갈등 해소의 과정을 지켜보던 민윤기 과장은 보호자에게 목례를 건넸다. 그런 후 몸을 돌려 나를 보고 잠깐 따라오라고 웃으며 말을 건넸는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 것은 본능 아닌 본능이었다. 앞으로 저 인간 웃으면서 말하는 게 제일 무섭게 느껴질 것 같았다. 신이시여.



*



병원 D 병동 계단 통로. 엘리베이터 시설이 워낙 훌륭한 덕분에 사람들은 계단을 잘 사용하지 않았고, 이제는 결국 잠시 쉬러 온 의사들의 쉼터 비스무리한 것이 되어 버렸다. 몇 계단을 먼저 올라가던 민윤기 과장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고, 과장의 강아지마냥 쫄래쫄래 뒤를 따르던 나는 하얀 가운에 이마를 쿵 박을 뻔했다. 가까스로 발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어 섰다.


"아까 무슨 짓이죠?"

"네?"

"누가 마음대로 흉강천자를 시술하라고… 아니, 그전에 왜 처음이라는 말을 꺼낸 건지 말 좀 해 볼까요?"

"그건 제가 그런 게 아니라,"

"그쪽이 제멋대로 흉강천자를 시술한 덕에 터진 허파에서 고름이 더 나오겠더군요. 학생 시절 흉강 위치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겁니까?"

"아닙니다."


나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처음이라는 말은 간호사가 꺼낸 것이었고, 바늘을 찔러 넣은 위치 역시 분명 흉강이었다. 하지만 민윤기 과장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불안함에 손을 꼭 쥐었다. 짧게 깎은 손톱이 피부를 얕게 파고드는 느낌이 났다.


"초보 의사라는 말은 환자와 보호자 양쪽 모두에게 심한 불안감을 형성하죠."

"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대체 전정국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겁니까?"

"……. "

"자신이 뛰어난 수재라는 걸 자랑하기 위해?"

"아닙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말이죠, 전정국 선생님."


민윤기 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우나? 뜬금없는 생각이 구석을 비집고 나오는데 한숨을 크게 내쉰 하얀 얼굴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네가 한 그 행동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기나 해?"

"… 네?"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음이 틀림없었다. 병원 사람들 앞에서 늘상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민윤기 과장이 존댓말이 아닌 반말로 말하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민윤기 과장 표정이 지나치게 살벌하고 무서워서 그랬다. 얼굴에서 살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흉부외과 일도 제대로 못하길래 응급실로 보냈더니만."

"……."

"나가."

"네?"


오늘 이 사람 앞에서만 벌써 몇 번 멍청이 같은 대답을 했을까.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지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릴까? 나가? 비상 계단 쪽 문을 가리키며 말하는 걸로 봐선 그냥 지금 눈앞에서 꺼지라는 소릴까? 민윤기 과장은 다시 만면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저 말이 장난이 아님은 직감적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병원장 아들이라고 해도, 나는 인턴이고 그는 흉부외과 담당 과장이다. 인턴 신분으로 그의 과에서 수련 받는 입장인 나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인턴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웃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병원에서 당장 나가."


전정국, 인턴 생활 최고의 위기다.




















------------------

의과대 7년>의사 국가고시>인턴1년>레지던트4년>전문의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레지던트로 가기 전에 해당 과를 선택하기 때문에 인턴 11개월동안 여러 과를 거쳐 선택하게 됩니다. 과거 윤기는 심장내과 레지던트고 현재 정국과 지민은 인턴, 윤기와 태형은 흉부외과 소속입니다. 

과거시점과 현재시점이 스토리 중반부터 만나게되고 윤기가 왜 내과에서 외과로 옮기게 되었는지도 나옵니다. 보시다가 궁금하신 부분들은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세요~! 





VLU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