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운수좋은 날이랄까. 잠이 많은데다 저혈압까지 있어 잔뜩 가라앉은 통에 아침은 늘 힘들었다. 매니저의 잔소리에 짜증이 쌓여있거나 나가기 싫어 꾸물거리며 한동안 정신 못 차린 채 일어나지도 못하는 제가 단번에 일어나 상쾌하게 시작한 아침이 얼마만이던가.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샵에 나가서도 백현은 연신 싱글벙글 들떠있는 상태였다. 제대 후 돈독이 올랐냐는 소문에 휩싸일 만큼 -이에 관해서는 백현도 할 말이 참 많았다. 도대체 대표가 잡는 스케줄을 왜 돈도 많아 넘치는 제가 돈 못 벌어 환장했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따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매니저가 겨우 눌러놓았다.- 과도하게 쌓인 스케줄의 여파로 한동안 스타일리스트의 골머리를 썩이던 볼의 뾰루지도 멀끔히 가라앉아 온데간데없었다. 여러 겹 두드려야 하는 메이크업도 뜨지 않아 적당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오늘의 평온함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쉬면 안 될까? 아 진짜 피곤한데.’

‘진짜 중요하거든요, 이거는 꼭 하셔야 해요.’

‘내가 진짜로 잠수타면 어쩌려고 그래?’

‘저 좀 살려주세요.’



언제나 모든 스케줄은 백현의 칭얼거림으로 시작해 온 지가 수년 째.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릴 적부터 조금이라도 쉬고 싶다는 당사자의 의견은 묵살당한 채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의 스케줄을 오롯이 홀로 견뎌 온 백현이었다. 그 고단함을 알기에 함께하는 스태프들 모두 오늘은 또 어떻게 달래야 하나 마음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렸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해가 서쪽에서 떴나보다. 헤어실장이 중얼거렸다.



하루 두 시간도 채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스케줄은 심적으로 백현을 괴롭혔지만, 그는 벌써 햇수로 데뷔 12년 차 프로였다. 피곤해도 말끔한 척 괜찮은 척. 가면으로 살아남는 삭막한 이곳에선 사생활도 연기가 필요했다. 숨 막히는 연예계란 곳에서 늘 있는 스케줄을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손톱만큼의 연기 없이 하러 간다는 기분은 백현에게 있어 참으로 가볍고, 좋았다. 설레고 또 설레는 그런 봄날의 소풍처럼, 선선한 가을의 한 낮처럼 두근거리는 그런 날이라고 생각했다.



ON AIR 

[ 재회 . B ]



방송국 로비를 따라 걷다 제 옆을 지키며 따라 올 익숙한 인영이 눈에 보이지 않자 허전함을 느낀 백현이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사라 진 거야? 소리도 없이. ‘오늘 컨셉은 내츄럴이야.’ 라며 헤어 왁스 한 번 쓰지 않고 차분히 내린 앞머리를 흔들어 넘긴 백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야.”

-차 점검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서. 금방 올게. 잠깐 카페에 좀 앉아 있어.]

“나 혼자? 형 진짜.”

-너 커피 좋아하잖아. 혼자 잘 다니면서 왜 그래 변 슈스. 하찮은 이 매니저는 스타님 탈 벤 점검 좀 받고 오겠다.]

"빨리 와야 해. 알겠지이."

-뭐야 애교는. 잠 못 잤어?]


통화를 마친 후에도 백현의 입술 물어뜯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제 옆을 지켜주는 이 하나 없을 때 나오는 버릇 아닌 버릇. 불안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방송국 로비를 통과하기도 전에 제게로 집중된 수많은 시선들이 백현을 붙잡았다. 힐끔거리는 방송국 직원들과 고작 몇 번 안면 있을 뿐인 후배 아이돌들, 멀리서 수군거리는 사람들.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만 덜렁 남겨두다니. 백현은 구겨진 제 미간을 꾹꾹 누르며 표정관리를 하려 애썼다. 모두에게 주목받는 것이 생업이며 본투비 연예인 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그였으나 백현은 이따금 이런 관심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더구나 그런 저를 가장 잘 아는 매니저의 부재는 백현의 불안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오기만 해봐 어디.”



후. 앞머리에 바람을 양껏 불어 댄 백현이 허리에 양 손을 올리고 몸을 돌렸다.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 잠 좀 자고 싶다. 하는 투정은 부릴지언정 애초에 신경질적인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매니저의 말대로 얌전히 로비에 자리한 카페로 향했다. 체중관리? 개나 줘. 엄청 달고 비싼 걸로 먹고 매니저 형 카드로 긁을 거야. 제법 비장한 얼굴로 주문을 읊었다.



“모카 프라푸치노에 샷 추가, 휘핑은 빼고 초코 드리즐, 카라멜 시럽 뿌려주세요.”



박PD는 이렇게 먹던데. 그가 주문하던 것을 곱씹으며 음료를 주문한 백현이 자리를 잡고 앉아 로비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백주 대낮에도 방송국은 참 바빠. 사람도 많고. 그런 백현의 눈에 조그만 인영 하나가 콕 걸려왔다. 제가 잘 못 본 것일까. 혹시나 싶어 카페에 들어가기 전 잠시 콧잔등에 걸쳐두었던 선그라스도 벗어 던지고 그 움직임을 쫓았다. 어쩐지. 오늘 변백현 인생 치고 운이 너무 좋았어. 아마, 그 운이 명을 다했다면 지금 이 순간이리라. 음료가 나왔다는 진동 벨의 울림과 함께 백현의 가슴에 작은 울렁임이 비춘다.


“도경수.”


이렇게 많은 사람 속에서 널 다시 만날 줄이야.

그 수많은 지나침 사이로 작은 인영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음에 백현은 새삼 제 시력을 칭찬했다. 아니, 오히려 백현의 눈에 오롯이 경수만 보였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었다. 백현에게 제 생업이란 한창 사춘기 시절엔 그저 저주처럼 자유를 없앤 족쇄에 불과했다. 가깝지만 먼 그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일 정도로 바빴던 생활을, 직업을 그만두고 싶다 저주하며 평범하지 못했던 저를 탓하길 반복했는데, 오늘 만큼은 너무도 감사하고 대견했다. 지금 이 순간 저주하던 나의 직업 덕분에 도경수를 볼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변백현 나이스.”


백현아, 잘했어.

제 어깨를 셀프 토닥거리며 찾아 온 음료에 빨대를 꽂아 쪼록 하고 한 모금 들이킨 백현의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와. 내 직업을 사랑하게 될 날이 오다니. 경수야 네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제가 음료를 주문했던 그 자리에 서서 방싯방싯 웃으며 주문을 마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병아리였다. 쪼르르 자리를 찾아 앉는 뒷모습까지 턱을 괴고 감상하던 백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음료를 주문한건지 금세 양손 가득 커피를 들고 카페를 벗어난다. 아쉬운 마음에 급한 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백현이 눈을 굴려가며 경수의 뒤를 따라나섰다. 보안직원에게 눈인사를 해보이며 여유롭게 출입증을 갖다 댄 - 보통의 경우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가 상시 출입증을 받아 움직이는데, 백현은 드라마 국 문 국장을 통해 개별적으로 하나 받을 수 있었다. - 백현이 살금살금 경수를 따라 올라간 곳은 교양국 편집실 앞이었다.


“교양국? 어울리네.”


단정하고 다정하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그저 살풋 미소 지었다. 가만, 그런데 왜? 아나운서 하는 건가. 작가? PD? 머리를 굴려가며 추리하던 백현은 저를 찾는 매니저의 전화 수십 통에 겨우 상념에서 벗어났다. ‘야, 너 어디야. 카페에 있으랬더니!’ 그 자리에 얼마나 서 있었던지. 없어진 저를 찾느라 애먹은 매니저의 불호령에 백현은 터덜터덜 라디오 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라디오 펑크 낼 뻔 했잖아. 생방송인데 실시간 검색어 변백현 지각, 변백현 펑크 도배 시킬 일 있어?”

“인생의 중대사였어.”

“뭠마? 정신 안 차리지?”

“형.”


백현을 혼내고 있던 것은 매니저 본인이면서, 낮게 깐 목소리와 정색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뭐, 뭐!’ 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짐짓 심각한 얘기라도 할 기세로 두 눈을 깜박인 백현이 뜸들이자 매니저의 등골에 서늘하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스케줄 안 하고 집에 가겠다 그러는 거 아니겠지. 매니저의 동공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를 반복할 즈음 굳게 다문 백현의 입이 열린다.


“오늘 내가 운이 엄청 좋았다?”

“운?”

“그래서 말인데, 나 할래. 해야겠어.”

“뭐든 해. 다 해. 그래, 다 하자. 근데 뭐..뭘 해?”


비장한 표정과 함께 무엇인가 계속해서 하겠다는 의견을 어필한 백현의 눈이 반짝였다. 매니저의 두 어깨를 가볍게 그러쥔 백현이 멱살을 잡고 흔들 듯 짤짤 흔들며 말하자 매니저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들어찬다. ‘네 밥줄 잡아주는 게 내 일이긴 한데 그래도..’ 반색을 표했으나 백현의 고집은 쇠심줄처럼 단단했다.


“박PD 드라마. 나 그거 할 거야. 넣어 줘.”

“지금 스케줄도 피곤하잖아. 너 이거 끝나면 화보도 찍으러 출발할거고. 몸 챙겨가면서 일 하자. 드라마는 무슨.”

“아 일 많다고 짜증 안 낼게. 한 달간 짜증 안 낼게. 콜?”

“...너 약속했다? 아침에 깨워도 군말 없이 스케줄 가고 그러기다?”


제 새끼손가락을 유유히 흔들며 매니저에게 약속한 백현이 ‘대신’ 하고 조건을 내걸었다. 말을 하면서도 입이 바짝 마르는지 연신 침을 삼켜내는 모습에 역력히 긴장한 태가 났다. 될까? 될 거야. 너 하나쯤 내 곁에 둘 수 있는 힘이 있긴 하겠지? 그러라고 소처럼 일 한거 아냐. 거품마냥 헛살던 인생은 아닌데 그럴 만한 힘 분명히 있어. 생각을 정리한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하는 매니저와 시선을 맞추곤 말을 뱉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제작진이 하나 있어. 신입인지 잔뼈가 굵은지 그건 모르겠고, 교양국 소속 도경수. 드라마 라인업에 넣어줘.”

“미친놈아 소속사 직원도 아니고 방송국 직원을 내가 무슨 힘으로 껴 넣어. 드라마국하고 소속도 다른 직원을.”

“해 줘. 할 수 있잖아. 박PD, 김작가 나 아니면 드라마 안 한다고 으르렁 했다며. 대표 설득해서 도경수 넣어줘.”

“짜증 안 낸다더니 이게 입만 살아가지고. 일단 기다려. 알아볼게.”


고마워 형! 미간을 찌푸리던 표정을 고쳐먹고 매니저에게 온갖 아양을 떠는 백현에 매니저는 금세 치를 떨었다. ‘징한 놈 이럴 때만 꼬박꼬박 형이라고 하지.’ 매니저가 뭐라고 중얼거리던 한껏 입 꼬리가 광대까지 도달한 백현은 휘파람을 불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널, 다시 만났어. 우린 만나게 될 거야. 이제 다시는 안 놓쳐. 기필코 재회에 성공하고야 말겠다며 지난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백현의 눈이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빛이 났다. 숨기지 못한 웃음기까지 표정을 모조리 드러낸 백현은 그날따라 운도 기분도 모두 만족 할 만큼 좋았다.



*



“너의 미소에 내 마음이 녹아내려, 눈이 마주쳤을 땐 두근거려.”



무척 붕 뜬 마음은 라디오 생방을 하면서 여지없이 드러났는데, 속으로 연신 흥얼거리던 허밍이 새어나와 DJ에게 포착 된 후 대본에도 없던 노래를 청하는 터무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른 때 같으면 하하, 웃으며 없는 걸 시키고 그러냐 능구렁이마냥 넘어갈 백현이건만 어쩐 일인지 흔쾌히 즉흥적인 라이브를 수락하기도 해서 이를 지쳐보던 매니저만이 ‘저 새끼 저거, 사고 치겠는데.’ 고개를 도리 저으며 혀를 찼다.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자주 들어 볼 수 없었던 백현의 노래와 마냥 사랑에 빠진 것만 같은 달콤한 표정. 부스 밖에서 그런 백현을 너나 할 것 없이 구경 중이던 작가와 스태프들의 이름 모를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일단 기다려. 최대한 네 뜻 전달할게.’


한 시간 전 매니저의 말을 곱씹던 백현은 앞으로 경수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수많은 날들을 상상하며 김칫국을 들이켰다. ‘푸흐-’ 방송중임을 잊고 웃음을 터뜨리자 제게로 집중되는 모든 시선에 당황한 백현이 급히 헙, 하고 입을 막았으나 살살 짓던 눈웃음 까지는 감출 방도가 없었다. 그런 백현을 놓치지 않고 빤히 시선을 고정한 DJ가 능숙하게 기습적인 질문을 이어 나갔다. 노련한 DJ의 질문에 어떻게 피해갈까 눈을 굴리던 백현은 곧 매니저와 회사가 기함할 법한 대답을 내뱉었다.


“이놈 새끼가!”


부스 밖 매니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차게 식었다를 반복했다. 난 오늘 너 때문에 대표한테 뒤졌어. 앞으로 몇 시간은 울려 댈 전화에 신경이 곤두서겠구나. 이마를 짚은 매니저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와 별개로 백현의 대답은 실시간 검색어와 연예 뉴스란을 가득 채우며 가히 초특급 이슈를 날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절대, 조용히 넘어 갈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래, 그 날 백현의 대답이 담긴 보이는 라디오의 스트리밍 조회 수는 이제껏 라디오에 참석한 어느 게스트도 내지 못한 수치였다.



*



“백현씨, 오늘 기분이 좋은가 봐요. 좋은 날 청취자 여러분들도 궁금한지 문의가 빗발 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하하. 제가 진짜 기분이 너무 좋아서요.”

“그 기쁨 살짝 여쭤볼 수 있을까요. 즐거움 같이 나눠요.”

“제가 오늘 하루종일 운이 좋았거든요. 퇴근길에 복권 사야 하나 싶게.”

“운이요?”

“진짜 사소한 거긴 한데, 내내 괴롭히던 피부 트러블도 없어지고.”



‘그래서 행복하셨던 거에요?’

백현의 말을 경청하던 DJ의 이어진 질분에 백현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설마, 그것뿐일까요.’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친구에게 비밀을 말하든 조곤조곤 속삭이는 백현의 다음 말은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것 아세요? 제가 말이죠, 오늘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첫 사랑을 기적적인 확률로 마주쳤어요. 왜, 효과 중에 페이드인 이라고 있죠, 그것처럼 갑자기 까맣던 눈앞이 환해지고 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거에요.”

“첫 사랑이요?”

“네. 모두들 바쁘게 갈 길 가는 그 수많은 지나침 속에서 딱 한 사람만 보이더라고요. 언제나 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그 모습 그대로. 아! 물론 저는 오늘 뿐 아니라 언제나 여러분의 항행현 인거 아시죠? 언제나 항상 행복한 백현이. 하하.”



그래, 그 날 포털은 변백현 첫사랑, 첫사랑 재회, 변백현 라디오, 사랑고백 등으로 꽤나 뜨거웠다.



*



손에 쥐어 본 적 없이, 잡아보지도 못하고 가련하게 너를 놓친 나를 불쌍히 여기어 신께서 내게 다시금 기회를 준 것이라면 이번엔 결코 같은 실수 하지 않을 거야. 바보처럼 내민 손 잡아보지도 못하고 보내는 일 따위 두 번은 없어.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재회의 시작은 백현이 쏘아 올렸다. 마주 할 날이 고작 몇 주를 앞두었었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을까. 제대로 마주보게 될 때까지 한동안 백현의 시선은 먼 발치서 경수를 졸졸 따라다녔다.


도경수, 다시 만나서 반가워.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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