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년 간의 대장정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구매한 후 이년 간 미루어왔던 <미루기의 천재들>을 완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미뤄온 것은 비단 독서뿐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쓴다. 


찰스 다윈이 정립한 진화론은 지성사상 가장 위대한 진전 중 하나로 불린다. 그런데 그는 "모든 종은 변화한다."라는 세기의 발견을 애진작에 이룩해놓고서는, 장장 20년 동안 출간하지 않고 묵혀두었다. 대체 왜 다윈은 진화론을 발표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그동안 다윈은 무엇을 했을까? 그의 기이한 행동을 놓고 학자들의 다양한 추측이 난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윈은 바빴다. 그는 진화론을 발표하는 대신 따개비를 연구했다. 

세상은 그의 따개비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다윈은 진화론은 일단 서랍 안에 넣어둔 채 따개비에 몰두했다. 후에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따개비 연구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을 만한 일이었는지 의문이다"라고 고백했을 만큼, 다윈의 자녀들이 어렸을 적 친구 집에 놀러가서 이렇게 물었을 만큼, 온 열정을 바쳐서. 

"너희 아빠의 따개비는 어디 있어?"




나는 한때 나의 진로를 아는 동기들에게, '언젠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단편들을 엮어 제법 만족스러우면서도 세간이 주목할 만한 단편소설집을 선보이리라 호기롭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친구들은 묵묵히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가끔 나에게 "책 나오면 나 한 권 주는 거야?"라고 물어왔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나를 재촉한 적이 없건만, 그 질문들에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음같은 침묵뿐이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포타를 업로드한지 80일이 지났다. 150여년 전 필리어스 포그가 세계일주를 끝내고 당당히 돌아왔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쓸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나의 임시저장함에는 셰에라자드의 천일야화와 비견할 재미나고 유익하며 빛나는 무한한 이야기들이 넘실거린다. 다만 진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글을 쓰는 일이 싫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를 제외한 모든 일에, 그러니까 연애사업이나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기, 시트콤 '미란다'와 각종 베이킹 프로그램을 섭렵하는 등 소설을 제외한 모든 것에 몰두했을 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기 행위는 게으름, 나태함과 구별되어야 한다. 미루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므로. 이 유형의 사람들은 정말로 집중해야 할 일(대개 사회적 명예와 돈이 걸려있음)이 코앞까지 닥쳐와도 미루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일부러 일을 극한까지 미뤄야 질적, 양적 측면 모두에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나, 그리고 사랑하는 미나리가 이를 증명한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그 시절의 우리는 과제 전날 재미있어 보이는 술자리에 나가거나 트위터를 그만 너무 오래 해버렸다는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공부와 과제를 하루 전에 시작하곤 했다(가장 심한 날에는 과제 제출 5시간 전에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학점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간 나를 속박하던 모든 시간적 제한이 사라지고 자유의 몸이 된다면, 이제는 내가 찜해 놓은 넷플릭스 콘텐츠나 유튜브의 구독 알람, 너무나도 밀려있는 트윗이 징그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애정하는 지인들의 연락으로부터 돌연 벗어나 잠적한 연유가 이러하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한다. 다만 아직은, 전화 버튼을 누르거나 양말을 신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요즘 나의 미루기 루틴은 대개 이러하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우선,
- A의 경우: 해야 할 일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넣어 애인의 집으로 향한다. 표를 끊어 버스를 세 번 타고 편도 한 시간 반만에 그의 집에 도착하기. 마중나온 애인의 손을 잡고 먹을거리를 사서 집에 틀어박히기. 50퍼센트의 확률로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은 그를 관찰하며 담배를 피우기. 더럽지 않으나 딱히 정돈되었다고 하기도 애매한 그의 집을 보며 어디를 어떻게 치운 것일까 궁금해하기. 자연스레 그의 옷을 훔쳐입기. 함께 누워서 속절없이 알찬 시간을 보내기. 오늘은 넷플릭스인지 왓챠인지를 놓고 열띤 토론하기. 거의 대부분 나를 데려다주는 그의 차 안에서 열심히 선곡하기. 열지도 않은 가방을 안고 돌아오기. 

- B의 경우: 커튼과 블라인드가 포획한 어둠을 창공으로 풀어준 후 아무렇게나 널린 옷가지들을 참회의 심정으로 천천히, 차곡차곡 개킨다. 목과 어깨죽지 부분을 살며시 잡아 세로로 반 접은 후, 팔을 몸통 방향으로 접어 밀어넣고 가로로 두 번 접기. 그 후 역시 방바닥을 잠식한 인쇄물과 책, 정기간행물을 정리하기. 아직 안 읽은 것들은 머리맡 옆 베드테이블 옆에 뉘여서 쌓아놓기, 잘 읽지 않거나 그만한 공간을 차지할 가치가 없는 일명 '나무야 미안해' 후보들은 냉정히 솎아내어 중고딘 알라서점 매입가 검색하기. 뒤죽박죽 돌아간 책을 제자리에 밀어넣다가 한 번씩 후루룩 들춰읽기. 어느새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활자와 그림을 더듬기. 헤헤 재밌다. 중간중간 핸드폰을 켜서 같은 색의 구슬을 터뜨리는 단순 작업으로 지친 뇌를 달래거나 무언가 배에 집어넣기. 

어느 쪽을 택해도 저 과정을 완수하면 해가 뉘엿뉘엿 진 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석양을 바라본 채, 꾸러기미소를 지으며 이마를 탁 칠 뿐이다. 

    이런이런. 오늘은 정말로 뭔가 기똥찬 글의 포문을 열어줄 위대한 첫 문장을 작성할 펜을 들기 위한 필통을 찾기 위한 방 청소를 하기 위한 동력이 되어줄 환기 차원의 샤워가 필요했는데!
    포타를 작성하기 위해 필요한 노트북을 고치기 위한 가장 가까운 as서비스센터로 외출하기 전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한 후불카드기능을 겸한 체크카드를 찾기 위한 방 청소를 하기 위한 환기 차원의......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밌을 법한 글감이 되어줄 동일 대상의 관찰을 위해 필요한 내 애인을 만나기 위한 고속버스를 예매하기 위한 후불카드기능을 겸한 체크카드를......

    세상에맙소사 벌써 시간이! 하루는 정말이지 너무 짧다니까! 내일은 반드시 헤드셋과 노트북을 수리하고, 학원에 연락해서 수료증을 전달받고, 전 근무처 사장에게 연락해서 여분의 열쇠를 돌려주어야지. 

    그렇게 80일이 흘렀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일을 미루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회피하는 와중에도 감탄스러울 만큼 바쁘게 지낼 수 있다. 정신승리이자 변명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허나 이 회피현상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 아닌가. <미루기의 천재들>의 저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일을 미루는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기뻐한다. 다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미루기 기술을 빨리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다. 모두들 해야 할 일을 미룬다. 


......이 책을 쓸(사실대로 말하자면 안 쓸) 준비를 하면서 나는 미루기를 주제로 한 여러 문헌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그건 내가 부지런한 연구자여서라기보다는, 자료 조사야말로 글쓰기에 있어 우리 모두가 가장 선호하는 미루기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자료 조사에 통달한,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영민한 친구들을 여럿 알고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언제나 약속으로 넘쳐흐른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따개비가 있다. 



여러분의 미루기 기술을 알려주세요. 당신의 따개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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