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갓세븐




  "왜. 국밥 안 좋아해?"

  태형의 물음에 헛숟가락질만 하던 지민이 뭐라 말하려다 그냥 고개만 젓는다. 생각보다 표정 변화가 다양하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궁금증도 전혀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왜 임신이라는 있을 수도 없는 거짓말을 했는지. 장난을 걸고 싶었던 거라면 적어도 상대가 속아 넘어가 줄 정도의 현실감은 있어야 할 텐데 아예 말도 안 되는 얘길 했던 걸 보면 그냥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도 아닌 듯 했다. 술에 취해 밤을 보내긴 했지만 어쨌든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그런 장난을 칠만큼 사이가 가까워졌던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그냥 "낳자" 하고 나오면 그냥 "에이 안 속네. 낳긴 뭘 낳아." 정도의 반응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얼빠진 얼굴로 그냥 고개만 끄덕였던 것도 그렇다. 태형이 의외의 반응을 보여 당황한 거라면 적어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뭐라 해명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말없이 따라와서 앉았다. 장난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면 대체 얘 뭘까 싶었다. 때문에 아까 국밥 두 그릇을 주문하고 지민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후 태형은 핸드폰으로 [남자가 임신] 같은 키워드로 검색까지 해봤다. 정말 혹시나 해서. 하지만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했고 자궁이 그대로남아 있어서 임신을 못하는 아내를 위해 아이를 가진 사례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임신을 한 사례는 없었다. 

  "입맛 없냐?"
  "어. 별로 안 먹혀."
  "야. 그거 혹시... 입덧 뭐 그런 거 아냐?"

  아닌 줄 알면서도 이런 얘길 꺼내는 건 지민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여기까지 장단을 맞춰줬으면 이제 그만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의 이유가 뭔지 실토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깐 자신의 아랫배를 쳐다봤다가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지민 때문에 태형은 코로 밥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와 자연스럽게 배 쳐다보는 거 봐. 얘 혹시 진짜 임신한 거 아냐? 

  "너 근데. 그건 줄 어떻게 알았어?"
  "어?"
  "아니 임, 그러니까 그건 줄 어떻게 알았냐고. 병원 가봤어?"
  "......"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지민 때문에 괜히 덩달아 심란해져서 태형도 그 좋아하는 국밥을 반만 비우고 일어났다. 태형이 카드로 계산하려 카운터에 서자 지민이 죽어도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계산한다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는 것을 겨우 다시 쑤셔 넣었다. 니가 먹은 거 니가 계산하는 건 좋은데 너 거의 안 먹었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가 사는 거야.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아줌마가 태형의 카드를 가져가 시원하게 긁고 영수증과 카드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먼저 나서는 태형을 따라 지민도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 거냐 물었더니 지민이 자기는 이제 수업이 없어서 집에 가서 잘 거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 말에 '하긴 애 가지면 잠이 많아진다고 했던 것 같아.' 같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인간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태형이 데려다줄까? 하고 물으니 지민이 오히려 왜? 하고 묻는다. 왜는. 임신 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데 괜히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 말에 지민이 잠시 당황하는 얼굴을 한다. 태형이 저를 정말 제 아이를 가진 사람처럼 대할 때 저렇게 더 당황하면서도, 끝까지 아무 말 안하고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민을 데리고 후문까지 나오면서도 생각했고, 함께 국밥 두 그릇을 둔 채 마주앉아서도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의도가 뭐가 됐든 당분간은 지민이 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 줘보자 하는 게 태형의 결론이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하는 마음이 반. 오히려 정말 그걸 믿냐고 먼저 물어주길 듯한 지민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게 반. 이유가 뭐든 지민이 먼저 손을 들고 고해성사 하기 전까진 당분간 이대로 좀 더 놀아주지 뭐. 

  태형이 웃으며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자 잠시 그대로 태형을 보던 지민이 고개만 끄덕이고 몸을 돌린다. 얼굴은 귀엽게 생겨가지고 의외로 무뚝뚝하네. 잘 웃지도 않고. 돌아서 걷기 시작한 제 몸에 비해 큰 가방을 메고 있는 지민의 등이 왠지 어린이집 가는 아이의 것처럼 보였다. 박지민 닮은 애라. 잘 웃으면 좀 귀엽긴 하겠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태형이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며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


  "너 요즘 박지민이랑 잘 붙어 다니더라? 니들 원래 별로 안 친했잖아."

  원래 잘 어울려 다니던 무리 중 하나가 묻길래 "아닌데? 지민이랑 너보다 더 친했는데?" 하고 짓궂게 대답하자 못돼 처먹은 새끼라며 단숨에 욕이 날아온다. 그래. 남자들의 우정이란 이런 식이지. 오고가는 쌍욕 속에 싹트는. 그러니 지민과의 관계는 그저 우정이라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아 물론 취해서 맨 몸으로 한 침대에 굴렀을 때부터 이미 친구니 우정이니 하는 건 글렀긴 했지. 그래도 요즘 문득문득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잘 풀다보면 제법 괜찮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나서부턴 자연스럽게 (사실 자연스럽다기보단 태형의 일방적인 들이댐으로 인해) 함께 점심을 먹게 됐고 지민의 자취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많아졌다. 태형으로선 버스타고 40분은 가야되는 자신의 집보단 후문 바로 앞에 있는 지민의 원룸이 더 편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의외로 지민과 여러 가지 것들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입맛,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최근 열을 올리고 있는 게임도 같았다. 게임 같은 거엔 별로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지민이, 까만 뿔테에 안 그래도 작은 코가 더 눌려져선 미간에 주름을 딱 잡고 진지하게 게임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땐 엄청 웃었지. 아 좀 귀엽다고 생각도 했었다.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린 태형을 보고선 왜 웃냐며 눈썹을 찡긋거리는데, 작은 귀도 같이 따라 찡긋거리는 게 이름은 모르지만 하여튼 뭔가 작은 동물 같아보였다.

  어설픈 데가 많다는 것도 의외였다. 표정 변화가 많이 없고, 툭 튀어나온 입술과 쌍꺼풀 없는 눈매 때문에 약간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왠지 모르게 시크하고 칼 같아 보였는데 의외로 애가 되게 바보 같은 데가 있었다. 컵라면에 찬물을 부어놓고 세상을 잃은 얼굴을 한다거나, 삼각 김밥을 김까지 같이 까서 버리는 건 예삿일이고 심지어 커피숍에서 목마르다며 물을 떠온다더니 종이컵에 시럽을 한가득 담아온 적도 있었다. 태형이 어떻게 그걸 헷갈리냐고 엄청 놀렸더니, 사실은 당 떨어져서 그런 거라면서 귀까지 빨개진 건 진짜 좀 귀여웠다. 

  늘 무표정해서 뚱해 보이는 지민이 웃을 때는 눈이 선처럼 보일정도로 가늘어져서 웃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제때 밥을 잘 챙겨먹지 않는 것 같아서 언젠가 떡볶이랑 순대랑 여러 분식을 좀 사서 원룸에 찾아갔더니, 여기서 이런 거 먹음 냄새 잘 안 빠진다면서 꿍얼대놓고 뒤돌아서는 입술 쭉 내밀면서 슬그머니 웃어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지민을 돌려세워 입술에 쪽 뽀뽀를 했었다. 물론 그보다 한 열 배는 더 야한 일을 한 사이이긴 했지만 그날 이후는 딱히 그날 밤 일이라든지 임신 같은 말을 서로 입 밖에 내지는 않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그저 정말 친한 친구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특히 늦게까지 놀다가 버스가 끊겨 태형이 지민의 집에서 자고 가던 날은 괜히 그날의 뜨거운 온도가 생각나 두 사람 모두 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어쨌든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실제로 티를 내진 않았고, 나름은 그게 암묵적인 룰이라 생각했으니 그걸 먼저 깬 건 태형이었다. 왜 갑자기 뽀뽀를 한 거냐고 묻든지 아니면 창피해하든지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지민은 덤덤했다. 마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얼굴 색 하나 안 바뀌고 "마실 건 뭐 줄까, 콜라? 사이다?" 하고 물었다. 얼떨결에 콜라 하고 대답했고 그냥 그렇게 분위기는 무마되었다. 


  그 후로 태형은 몇 번 더 스킨십을 했다. 지민의 원룸에서 같이 다운받은 영화를 보다가 은근슬쩍 손을 잡는다거나, 눈이 마주치면 뽀뽀를 한다거나. 그러다가 그게 좀 짙어져 키스를 한 적도 있었다. 오히려 이러다 큰일 나겠다 하고 위기감을 느낀 건 태형이었고, 지민의 태도는 늘 태연해 보였다. 싫다고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밀쳐 내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팔을 두른다거나 껴안아 오지도 않는다. 이유가 뭐가 됐든 그냥 좀 놀아주자 했던 태형이 오히려 조바심을 느끼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날 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취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함께 밤을 보냈던 이유는 뭐고, 한 달이 지나서 왜 임신이라는 당치도 않는 카드를 꺼내들었는지. 왜 장난이었다 말하지 않는지. 그리고 지금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하고 있는지. 그냥 묻지 않았던 것들은 왠지 시간이 지나자 물을 수 없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날 밤 마찬가지로 꽐라가 되지 않았으면서도 지민의 맨몸과 닿으며 느꼈던 열기는 왜인지, 임신이라니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기지 않고 낳자며 맞장구 쳐준 이유는 뭔지, 그리고 지금도 왜 지민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는지.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모두 묻어두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는 물음에 "그러면 너는 왜." 하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어서. 


***


  수업이 마치자마자 지민에게 어디냐고 카톡을 보냈더니 한참 후에야 집이라는 답이 왔다. 아직 교양관에서 수업 하나가 남았을 시간이라 왜 거기 있냐고 했더니 그 후로는 답이 없다. 태형은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안 좋으면 안 좋다고 수업을 째기도 했지만 저와는 달리 지민은 꽤 성실하게 수업에 들어오는 편이었다. 그러니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땡땡이를 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 아픈 건가해서 태형이 후문 약국에서 감기약과 진통제를 하나 샀다. 꼭 아픈 게 아니라도 이런 건 보통 집에 하나씩은 상비해두는 건데 지민의 성격상 이런 걸 두고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편의점에 들러 레토르트 죽과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지민의 집에 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감기 때문에 열이 올라 침대에 눌러붙어 있었다. 야 아프면 말을 하지, 하며 좀 채근하는 듯 얘길 했더니 누워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지민이 왜? 하고 반문했다. 그게 꼭 "얘기하면 니가 뭘 어쩔 건데." 라든지 "그걸 너한테 왜 얘기해야 되는데?" 같은 질문처럼 느껴져 괜히 좀 울컥했다. 왜라니. 그야, 

  "...너도 너지만 애한테 안 좋잖아."

  태형의 말에 지민은 대답 없이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왠지 모르지만 그냥 말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는 캐치가 되지 않는다. 너도 너지만, 하고 마치 니 몸이 아픈 것보다는 뱃속에 애가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투? 아니면 애초에 있지도 않은 애를 이유로 대는 게 빈정대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오늘에야 말로 지민이 "애는 무슨 애야. 넌 그 말을 믿었어?" 하며 얽혀있던 실타래를 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민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다. 정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왜 아직도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지. 그래 고집이다. 그리고 그건 이제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장단 맞춰주며 놀아주려던 거라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먼저 아는 척 하고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에 종지부를 찍어야 겠다고 생각하는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고 태형이 조심스럽게 지민에게 다가갔다가 이불 속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서야 지민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깨달은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아 박지민 나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냐고 물으면 딱히 뭐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냥 훌쩍이는 그 소리에서 단번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야. 미안해. 울지 마."
  "...안 울어."
  "금방은 내가 말이 좀 그랬어. 그렇다고 우냐."
  "우는 거 아니고 콧물이야."
  "......"
  "감기 때문에 콧물 나서 그래. 휴지나 좀 뜯어줘 봐."

  그러더니 꿈틀거리며 이불 속에서 나온다. 그냥 창피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눈가가 열 때문에 좀 촉촉해져 있긴 해도 정말 울고 있지 않았다. 괜히 머쓱해진 태형이 티슈를 몇 개 뽑아서 건네자 야무지게 팽 하고 코를 푼다. 안 그래도 작은 코가 빨개져서는 진짜 머핀 위에 얹어놓은 딸기 같았다. 태형이 다가가 지민의 이마 위에 손을 얹는다. 워낙에 손이 큰 편이라 그런지 이마부터 눈두덩이 위까지 덮였다. 아직도 열이 많이 나는 건가 싶어서 별 생각 없이 이마를 짚어보긴 했지만 왠지 지민이 당황하며 손을 쳐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면 그 찰나의 제스처 사이에서 감춰져 있던 무언가를 캐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민은 피하지도 않고 태형의 손에 몸을 늘어뜨린다. 완전 늘어져어... 하고 코맹맹이 소리가 늘어지는 게, 정말 열 때문에 온 몸이 나른해 죽겠다는 듯한 말투였는데 왠지 그 순간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워낙에 지민이 평소 말투 자체가 무심하고 뭔가 말라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던 터라, 이렇게 말투나 행동 같은 게 촉촉한 느낌이 무척 생소했다. 태형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지민이 이번에는 정말 태형의 손을 단칼에 쳐낸다. 이건 진짜 좀 오버였나 하는데 "나 오늘 머리 못 감았어." 하며 다시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채 다 들어가지 못한 채 삐죽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정수리 꼭지가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좀 귀여웠다. 


  태형이 가져온 죽을 먹고 약까지 다 먹은 지민이 땀을 흘려 찝찝하다며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오자, 태형이 편도가 부었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괜찮다며 아까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가져왔다. 열은 내렸다지만 아직도 귀랑 코가 먹먹하다며 좀 맹한 얼굴을 하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걸 보던 태형이, 그렇게 젖은 머리 하고 있음 다시 열 오른다며 드라이어로 머리도 살살 말려준다. 자신이 평소에 같은 남자는 물론이고 사귀던 여자에게도 이런 걸 해줄 정도로 다정한 성격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파서 평소보다 약해져있는 지민에겐 왠지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우습지만 그러는 동안 정말 얘가 내 아이를 가졌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임신이니 하는 말을 믿어본 적도 없고, 지금도 딱히 부부놀이나 하자고 이러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랄까. 이렇게 누군가를 돌봐주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게 우정이든, 애정이든, 한 번이지만 같이 밤을 보낸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든, 아니면 그냥 단순한 변덕이든 간에 지금 자신이 베푸는 친절에 지민이 무방비한 얼굴을 하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게 그냥 좀 기분이 좋았다. 먹이나 장난감으로 유인해도 곁을 주지 않던 고양이가 어느새 다가와 제 무릎에 올라앉는다면 이런 기분 아닐까. 

  저녁이 거의 다 돼서 태형이 돌아가려고 할 때쯤은 지민도 꽤 편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를 다시 짚어보니 저와 온도가 비슷했다. 태형이 냉장고 안에 죽 남아 있으니까 아침에 그거 먹고 약도 챙겨 먹으라고 말하며 가방을 메고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는데, 지민이 침대에 누운 채 "김태형" 하고 불렀다. 아직도 코가 막혀서인지 김태형이란 이름 세 글자가 더 혀끝에 들러붙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

  "왜."
  "......"
  "왜. 혼자 있기 싫어? 가지말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뭐?"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 근데...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건데?"

  현관에 앉아 신발 끈을 묶던 태형이 몸을 일으킨다. 왜 잘해주냐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왜 그렇게 해주고 싶냐고 묻는다면 내놓을 대답은 없었다. 딱히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머리로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내켜서 그런 것뿐이니까. 보통 친구가 다 아프다고 해도 잘 해주는 게 당연하잖아, 라고 생각해보지만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면 분명 이게 보통이라 하긴 힘들었다. 아픈 친구에게 죽이나 약을 사다 주는 정도야 하겠지만, 큰 병도 아니었다. 그냥 감기 걸린 걸로 직접 죽을 데워서 침대로 갖다 주거나, 씻고 나오길 기다렸다가 아이스크림을 꺼내준다거나, 젖은 머리를 직접 말려주는 일 같은 걸 할 것 같진 않았다. 지민이 자신보다 키나 덩치 같은 게 작고, 또 아파서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편이었긴 하지만 그 정도로 보호본능 같은 걸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었고. 

  태형이 미등 아래서 지민을 쳐다본다. 자신도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면 너는 왜 내가 이마를 짚어도 가만히 있는지. 왜 젖은 머리를 말려줄 때 언뜻 기분 좋은 얼굴을 했었는지. 그리고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해도 왜 거부하지 않는지. 아니 애초에 왜 임신이라는 거짓말로 뜬금없이 다가왔던 건지. 그리고 그날 밤 침대 위에서 너는 왜 내 어깨 위에 팔을 둘렀던 건지. 결국 묻고 싶은 건 하나였다. 박지민, 너 실은 나 좋아하지. 하지만 끝내 그 물음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제껏 자신의 생각이 그저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겠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지민은 자신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물어볼 수 없었던 것은 정작 자신은 그런 지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입학한 후 강의실에서 마주칠 땐 그냥 평범한 남자애라 생각했었고, 그날 밤 취한 채 앉아 상모를 돌리고 있을 땐 웃기다 생각했고, 결국 원룸 침대에서 뒹굴 땐 야하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니 애를 가졌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땐 의외로 특이하고 똘끼 있는 애구나 생각을 했지.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지면서는 잘 맞고 편한 애라 느꼈고, 또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좁혀지는 거리감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니가."
  "......"
  "재밌어. 좀 귀엽기도 하고."
  
  그 말에 지민이 멍한 얼굴을 한다. 그저 감기로 인해 남은 미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쩝 입맛을 다셨다가 콜록 하고 기침을 한 지민이 미간을 접으며 태형을 쳐다본다. 

  "푹 자고 내일은 학교 나와. 같이 점심 먹자. 나 간다."

  태형이 문을 닫고 나가자 지민이 따끔거리는 목으로 겨우 침을 삼킨다. 재밌어? 귀엽다고? 내가? 짧은 한숨을 내쉰 지민이 다시 꼬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이마 위에 태형의 손이 얹혀있는 것만 같다. 크고 커다란 손은 적당히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열을 확인한 태형의 손이 떨어져 나갈 때면 다시 붙잡아  제 이마 위에 얹게 하고 싶었다. 한숨을 푸욱 내쉬자 그 끝에 기침이 딸려온다. 컹컹 거리고 물개 소리를 내며 매운 기침을 한 지민이 몸을 둥글게 말며 이불을 끌어당긴다. 내일도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어서 나아서 학교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괜찮아?"
  "괜찮아. 감기로 안 죽어."
  "그래도 한 2킬로는 빠졌겠다. 그러니까 아프다 그러고 그냥 오지 말라니까. 너 술은 마시지 마."

  태형이 지민의 잔에 생수를 부어주며 안색을 살핀다. 독했던 감기가 더 이상 뽑아먹을 것이 없고 나서야 물러나고, 이제 좀 살 것 같다던 지민이었다. 겨우 밥을 먹기 시작한 것도 오늘 아침이라더니, 하필 과모임이 잡혀 술자리까지 끌려나왔다. 오는 내내 태형은 지민에게 아프다고 하고선 집에 가라고 했지만 지민은 괜찮다며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야, 말 좀 들어라. 너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 
  내가 왜 니 말을 들어야 하는데?
  
  오면서도 둘은 뒤에 멀찌감치 떨어져 조금 투닥거렸다. 태형은 아직도 완전히 다 낫지도 않은 지민이 덜컥 술자리에 끼겠다고 따라나선 것이 못마땅해서였고, 지민은 태형이 굳이 저를 돌려보내려는 이유가 다른 여자 동기들 때문이라 생각해서였다. 원래도 태형은 과에서 뿐만 아니라 대학 내에서 인기가 많았고, 끊임없이 소개팅 권유가 들어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태형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함께 어울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거짓말은 큰 힘이 없었다. 어차피 너도 나도 그게 장난이고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태형이 "나 여자 친구 생겼어."라고 말해도 왜 라든지 어째서 같은 질문을 할 자격을 주진 못한다. 그래도 저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굳이 보라고 여자 동기들과 어울리진 않겠지 싶어서 같이 가겠다는 것을, 태형은 계속 반대했다. 아직 지민의 몸이 낫지 않아서 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그게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야 박지민 아까부터 깡생수만 마시는데?"

  지민이 소주대신 컵에 생수를 따라 마시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동기 정환이 그제야 부릉부릉 시동을 걸어왔다. 말이 시동이지 사실 시비에 가까웠다. 생수를 먹을 거면 정수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야 된다는 둥, 그냥 생수병에 빨대 하나 꽂아 주라는 둥 취기어린 시비가 이어졌다. 지미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에 있던 소주병을 집어 드는데, 태형이 바로 병을 낚아챈다. 

  "얘 지금 상태 안 좋아. 걍 내가 마실게."
  "뭐야. 남자끼리 막 흑기사 하고 그러기 있냐?"
  "좀 봐줘라. 얘 진짜 아프다니까?"
  "근데 김태형 요새 이-상하게 박지민 싸고돈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네. 니네 진짜 사귀냐?"

  정환의 말에 테이블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만약 정말 둘 사이를 의심하는 거라면 대놓고 저런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 사회화 교육을 받은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타인의 성적 취향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비아냥대서는 안 된다는 건 알 테니까. 게다가 정환도 애초에 그 정도로 질이 나쁜 놈은 아닐 뿐더러, 상대가 김태형이라면 다들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다. 대놓고 차별은 하지 않는다 해도 편견은 있다는 증거였다. 김태형이 뭐가 모자라서 남자랑?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그랬다. 어쨌든 진짜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 생각해서 한 말도 아니었고, 그냥 술자리의 가벼운 농담 정도였으니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거기 모인 어느 누구도 그 농담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민을 제외하고선. 

  까만 뿔테 속의 눈이 날카로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민이 태형의 손에서 소주병을 낚아채선 옆에 있던 물 컵에 콸콸 소주를 들이붓는다. 그리고 태형이 말릴 새도 없이 그걸 원샷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지민이 마지막까지 마시고 잔을 탕 하고 내려놓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나 그런 농담 진짜 싫어해."

  그러더니 지민이 옆에 있던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두어 장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나 나가버린다.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분위기를 수습해야할지 몰라서 다들 얼어있었다. 태형이 지민이 마시고 남은 컵과 만 원짜리 두 장을 보다가 정환에게 시선을 돌린다.

  "정환아."
  "왜. 뭐... 저렇게 오버할 일이냐?"
  "너 나랑 사귈래?"
  "뭐???"
  "왜. 나랑 돌이킬 수 없는 찐한 사랑 한 번 하자. 내가 진짜 잘 해줄게."
  "아 뭐래 미친놈이."
  "거 봐. 너도 질색하면서. 쟤도 그런 거 싫다잖아."
  "아... 뭐. 장난이었는데 저렇게 싫어할 줄 몰랐지."
  "그래서 나랑 사귈 거야? 우리 오늘부터 1일 해? 나 페북에 너랑 연애중이라고 올려도 되는 거야?"

  태형이 너스레를 떨자 정환이 더 질색하는 얼굴을 하며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하나 둘 씩 다시 웃으며 술잔이 오가고 태형도 두어 잔을 더 받아마셨다. 지민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언젠가 편의점 앞에 앉아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던 걸로 봐서도 그리 센 편은 아닐 것이다. 그런 지민이 몸도 안 좋은데 소주를 물 컵으로 원샷을 하고 나간 게 걱정이 돼 죽을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대로 지민을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분위기가 다시 이상해 질 게 뻔했다. 하여튼 박지민 융통성 없기는. 적당히 웃어넘기는 것도 못하면서. 장난 같은 말에도 저렇게 발끈하면서 애초에 나한테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거냐고 도대체. 


  태형이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며 술집을 나온 것은 지민이 나가고 난 후 10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마음이 급했다. 나오자마자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긴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끊어질 때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젖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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