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R LIVE - Kiss Me








집중호우

너 하나면 돼








부서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여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을 치지 않아 쏟아지는 햇빛에 옆에 누워있는 안 그래도 하얀 윤기의 피부가 더 하얗게 빛났다. 아무래도 저 햇빛이 윤기의 잠을 방해할 것 같아서 여주는 제 허리쯤에 걸쳐진 그 애의 팔을 살짝 들어 올리고 몸을 커튼 쪽으로 뒤챘다. 커튼으로 여주가 손을 뻗는 순간 뒤에서 윤기의 손이 여주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가면서 놀란 여주가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깼는지 눈을 반쯤 뜬 윤기가 여주를 보고 있었다.




"왜."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낮은 목소리에 괜히 여주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 맨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다시 눈을 감을락 말락 하는 윤기의 머리카락을 여주가 쓸어내렸다.




"눈부실까 봐 커튼 치려고 그랬지."




그런 여주의 손길에 가만히 제 머리를 내어주고 있던 윤기가 여주를 꽉 끌어안았다. 새벽 내내 윤기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잠든 사이 옆에 있는 한여주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이게 혹시 꿈일까 봐. 눈 뜨면 다시 침대 위에 혼자 깨어나 그 지독한 현실에 남겨질까 봐. 윤기는 설핏 잠이 들다가도 제 품속에 여주가 살짝 뒤채는 움직임에도 깨어나고 또 깨어났다. 몇 번이나 잠든 여주의 어깨를 쓸어내리고 얼굴에 입 맞추며 아직 여주가 옆에 있구나 확인해야했다.




"너 아침부터,"

"안아줘. 한여주."




답지 않게 어리광을 피우는 윤기의 머리통을 보던 여주가 웃음을 흘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들어 윤기의 등을 토닥였다. 




"사 년 사이에 애 다 됐네. 민윤기."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윤기의 눈가를 여주가 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너 눈 좀 부었다. 그런 여주의 손을 붙잡고 그 손에 윤기가 뺨을 부비며 몇 번이나 입 맞췄다. 너의 부재로 엉망이 되었던 일상이 너의 존재로 비로소 온전해졌다. 그야말로 너로 인해 완전한 아침이었다.











집중호우











여주가 씻고 나오니 그사이에 밖에 나가서 사 왔는지 윤기가 식탁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려놓고 있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밥도 안 챙겨 먹고 살았어?"

"보통 회사에서 먹으니까."




윤기가 까서 내어준 샌드위치를 베어 문 여주가 식탁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 눈이 머물렀다. 이게 뭐야? 테이블 한쪽 구석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있었다. 아... 그거 컵 깨져서. 여주의 시선을 따라 힐끗 옆을 본 윤기가 자연스레 그때 일을 다시 떠올리며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버리지 왜 저기에 위험하게... 저거 설마 옛날에 그 분홍 컵이야? 아직도 있어 저게?"




반가운지 깨진 조각으로 뻗는 여주의 손을 윤기가 잡아챘다. 위험해. 다쳐. 그걸 알면서도 너는 저걸 왜 안 버리고 있었는지. 여주는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다 망가져서 쓸 수도 없는 물건도 버리지 못하고 모셔두고 있는 게 부디 저 때문은 아니길 바랐다. 민윤기가 그렇게까지 미련하진 않았기를. 하지만 제 눈을 피하는 윤기를 보니 여주는 묻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았다. 누가 알았을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고 헤어지면 누구보다 매섭게 돌아설 것 같았던 민윤기가 이렇게 미련을 뚝뚝 흘리며 사 년을 견뎠을 줄. 여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키친 타올 위에 컵 조각들을 쓸어 모았다. 그런 여주를 보고 있던 윤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여주."




윤기가 말릴 틈도 없이 그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린 여주가 찡한 코끝을 훌쩍이곤 애써 웃어 보였다.




"이런 건 이제 버려. 내가 새로 사줄게. 더 예쁜 거로."




저런 뾰족한 것까지 끌어안고 아파하지 마 이젠. 그 말에 윤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밖에 나가고 싶으면 집 비밀번호는,"

"나 계속 네 집에 있으라고?"




스툴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출근 준비를 하는 윤기를 구경하던 여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생각도 못 했던 여주의 질문에 윤기가 그런 여주를 쳐다봤다. 집에 가게? 갤러리 휴관 일이라 당연히 자기 집에 있을 줄 알았던 윤기도, 그런 윤기를 보던 여주도 당황했다. 




"너 출근할 때 나도 집에 가려고 했지...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괜히 윤기의 눈치를 살피는 여주의 말에 윤기는 못마땅한 듯 불만 어린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말자고 매번 생각했으면서도 한번 한여주가 받아주니 그동안 눌러왔던 욕심이 이렇게 정도를 모르고 흘러넘친다. 마음 같아선 회사고 뭐고 한여주만 끌어안고 집에 며칠은 박혀있고 싶었다. 둘 사이에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도, 감정들도 너무 많았다. 이젠 초조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말은 안 해도 표정으로 다 티가 나는 윤기를 보고 있던 여주가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너 삐졌어? 물어보려다가 그랬다간 정말 삐질까 봐 여주가 도리질을 쳤다. 




"일 끝나고 저녁 같이 먹을까?"




그 말에 금세 얼굴이 풀려 고개를 끄덕이는 민윤기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집중호우











"나한테 사랑하라고 해. 그럼 나는 그렇게 해."




가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렇게 절절하게 제 마음을 고하는 윤기를 어떻게 밀어내고 외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저 애한테 더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여주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흐느꼈다.




"...... 사랑해."

"......"

"내 옆에 있어 줘."




여주를 안고 있던 윤기는 울음소리와 뒤섞여 알아듣기도 힘든 여주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막무가내로 한여주를 붙잡고 제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이런 내가 무서워 한여주가 도망이라도 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멋대로 어린애처럼 구는 저를 징글징글하다고 생각하겠지 하면서도 한번 터져 나온 진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나 이렇게 아팠다고, 그러니까 이제 나 좀 봐달라고. 사 년을 넘게 제 안에 갇혀 갈 곳을 잃은 마음들이 주인을 만나니 말릴 틈도 없이 새어나간다. 그런 제게 한여주가 사랑한다고 했다.


이게 나를 사랑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너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윤기는 벅차오르는 제 감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주의 고개를 들어 올려 입 맞췄다. 누구 것인지도 모를 눈물에 축축이 젖은 입술이 맞닿은 순간 윤기는 그대로 무너지고 싶었다. 한여주 없이 그간 버텨왔던 시간을 이젠 한여주 품 안에서 위로받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조차도 돌보지 못했던 그 마음들이 마치 다 안다는 듯 제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한여주 손길에 하나둘 씩 쓸려나갔다. 











집중호우











"저 형 무슨 일 있나? 나 좀 무서운데."

"웃는 거야? 왜 저런대? 로또 맞았나?"

"피디님 일이 너무 많아서 약간... 미쳤나?"




온종일 회사가 술렁였다. 그 이유는 내내 웃음을 흘리며 돌아다니는 민윤기 때문이었다. 늘 기본이 무표정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불만스러워 하는 표정이나 봐왔지 저런 얼굴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괜히 소름 돋은 팔을 문질렀다. 웃는 게 더 무섭지 않냐? 뒤에서 저를 두고 사람들이 떠들어 대든 말든 윤기는 하루종일 여주의 카톡만 보며 실실대기 바빴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점심을 같이 먹겠다고 하더니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인증샷까지 찍는 걸 보며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민윤기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여주


짠 이거 내 점심

(사진)

또 밀가루 먹네

아침에도 샌드위치 먹었잖아

어우 잔소리 😒

나 미국 살다 와서 그래

아메리칸 스타일이야

ㅋㅋㅋㅋㅋㅋㅋ

넌 점심 먹었어?

아직

너 너무 말랐더라

거르기만 해 😠

밥 먹을 때 너도 사진 찍어 보내

ㅋㅋㅋㅋ

알겠어

점심

(사진)

착하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돼

❤️

아 맞다

너 담배도 금지야 😠

그새 안 좋은 것만 배웠어

되게 쉽게 대답하네 

나 원래 너한테는 쉽잖아

야... 넌 또 무슨 

밥 먹다가 그런 말을 해...

ㅋㅋㅋㅋㅋㅋ

감동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서 밥은 더 못 먹겠다

많이 먹어

저녁에 너랑 많이 먹을래

맛있는 거 사줄게

❤️










"저 피디님."




밥상을 앞에 두고 여주와 카톡에 또 혼자 웃음을 삼키던 윤기가 고개를 들자 사람들이 죄다 밥 먹다 말고 저만 쳐다보고 있는게 보였다. 




"네?"

"혹시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 되게 기분 좋아 보이셔서."

"네."




벌써 알고 지낸 지 사 년이나 지났는데도 절대 사적인 얘기는 안 하는 윤기에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따라 꽤나 물렁해진 윤기의 네라는 대답에 사람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나마 윤기와 자주 작업을 같이해 조금 친분이 있는 엔지니어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더 캐보라는 사람들의 성화에 그가 어쩔 수 없이 쭈뼛대며 여전히 핸드폰을 보고 있는 윤기에게 재차 물었다.




"여자친구라도 생기셨어요?"

"네."




헉. 그런 윤기의 대답에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주은이 떨어뜨린 숟가락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제야 주은과 윤기의 눈치를 살핀 사람들이 더 묻지도 못하고 급하게 대화 주제를 바꿨고 윤기는 사람들이 그러든가 말든가 여주의 카톡에 연신 답장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중호우











"형!!!"




윤기의 작업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불청객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윤기가 벌써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뒤돌았다. 씩씩거리며 윤기 앞에 선 지민이 허리에 손까지 얹고는 어떻게 형이 그럴 수 있느냐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벌써 저기까지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하여튼 인간들 입이 이렇게 가벼워서야. 도대체 연예인도 아니고 고작 자신의 연애 따위가 무슨 그런 대단한 이슈라고 저 난리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여자친구 생겼다면서요!!!!"




아니 회사에서 나랑 젤 친한 거 아니었어?! 아 알엠 형 다음인가. 아무튼!! 왜 나만 몰라 나만!! 지민은 종일 삼삼오오 모여 윤기의 연애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람들 덕에 알고 싶지 않아도 윤기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저 형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애 할 만한 그런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윤기의 생일 날을 떠올리던 지민이 저를 두고 작업을 마무리 하고있는 윤기를 째려봤다. 형님 오늘 나랑 술 먹어요!! 내가 들을 말이 아주 많아! 윤기가 그런 지민을 비웃었다. 나 오늘 약속 있어. 여주를 데리러 가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윤기가 서두르자 지민이 넋이 나간 얼굴로 윤기를 쳐다봤다. 나 저 형 저런 표정 처음 봐. 어쩐지 사람들이 민윤기 미친것 같다더니... 아니 근데 저 형 그렇게 금사빤가...? 요즘 엄청 바빴는데 대체 어느 틈에 여자를 만난 거야? 


결국 내일은 저와 만나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의지의 한국인인 지민이 윤기의 작업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던 호석의 팔을 붙들고 같이 저녁을 먹자며 졸랐다. 다른 애들은 지금 녹음 마무리 중이라 저 혼자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불쌍한 척을 하는 지민을 보고 귀엽다는 듯 웃은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갑만 챙겨서 건물 밖으로 내려오던 호석이 그대로 걸음을 멈추자 뒤따라오던 지민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나?"

"어? 햇살아!"

"한여주?"

"어? 호석이 형 여자친구??"




여주는 조금은 들뜬 얼굴로 출입구를 힐끗거리는 중이었다. 데리러 오겠다는 윤기의 말에 몰래 윤기가 일이 끝난다는 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온 여주였다. 너무 옷을 신경 써서 입었나. 여주가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비춰보다가 곧 놀랄 윤기 얼굴을 상상하며 웃고 있는데 건물에서 내려온 호석이 여주의 이름을 불렀다. 아 맞다... 햇살이랑 윤기랑 같은 회사였지. 바보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어쩐지 조금 민망해진 여주가 웃으며 호석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뒤에서 연달아 윤기와 처음 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호우











"아니 그러니까, 잠깐만..."




지민은 연신 제 앞에 앉아있는 여주와 윤기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닫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저 호석이 형의 여자친구가 윤기 형의 여자친구라고? 근데 이름이 한여주면... 설마 그 여주?!




"고작 컵 좀 깬 게 그렇게까지 사람 망신 줄 일이에요? 저 사람 형한테 관심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그게 여주 누나 거라서?"

"김남준 적당히 해."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분명히 그날 화가 잔뜩 난 남준이 형이 실수로 흘렸던 이름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저분이 그 대단한 윤기형 전 여자친구라는 거지. 근데 호석이 형이랑은 어떻게 아는 거지? 지민이 작은 머리통 속 한가득 궁금증을 가지고 있든 말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윤기가 나 짜증 났다는 티를 팍팍 내며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여주와 단둘이 제대로 식사라도 하려던 계획도 망가진 데다가 불청객이 둘이나 끼었다. 특히나 저 정호석. 여주가 정호석을 보며 햇살이라 부른 것도, 박지민이 그런 여주를 보며 호석의 여자친구냐고 물은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가 불편한 건 여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히 윤기가 일하는 곳을 멋대로 찾아가서 혹시나 윤기가 곤란해진 건 아닐까 걱정도 됐고, 얼마 전까지 호석이 앞에서 별꼴 다 보여줘 놓고 벌써 윤기와 이렇게 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민망했다. 게다가 제 앞에 눈을 빛내며 궁금해 죽겠다는 티를 내고있는 누가 봐도 연예인처럼 생긴 저 애의 시선도 부담스러웠고.




"누나 손."




습관이었다. 삼 년 넘게 여주를 봐오며 둘다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여주의 손바닥이 다칠까 봐 해왔던 응당 그런 습관. 긴장되는 자리에 자기도 모르게 꽉 쥐어지는 주먹을 자연스럽게 펴고 손을 토닥이는 호석의 손길에 여주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런 둘의 손을 황당하다는 듯 보고 있는 윤기와, 놀란 지민의 시선에 화들짝 놀란 여주가 손을 빼냈고 호석도 조금 당황한 얼굴로 웃었다. 




"아... 이게 습관이 돼서."




윤기는 호석의 변명 하듯 내뱉는 저 말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자주 저랬으면 습관이 됐지? 점점 위로 치솟는 윤기의 눈썹을 본 여주가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윤기의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지만 그런 손을 빼내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 윤기를 보며 여주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누나가 윤기 형님의 여자친구인 거죠?"

"언제 봤다고 누나래."

"윤기야."




아직 지민에게 앙금이 남아있어 톡 쏘아붙이는 윤기를 여주가 말리자 금세 말 잘듣는 강아지마냥 입을 닫고 꼬리를 내리는 윤기를 보며 지민의 턱이 다시 빠질 듯 아래로 떨어졌다. 와 미쳤다 대박. 지금 윤기의 모습을 사진 찍어서 사람들한테 다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맞다. 누나 저번에 그 먹으러 가자던 그 집 예약했더니 다음 주 목요일에나 빈다던데 그때 시간 돼요?"

"목요일? 응. 될 것 같은데?"

"뭘 그렇게 맨날 같이 먹으러 갑니까? 그쪽은 안 바쁩니까?"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저를 보는 윤기의 얼굴을 보며 호석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올라왔다. 저렇게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발끈하는 윤기를 보고 있으면 꽤 즐거웠다. 그런 윤기의 팔을 슬쩍 잡으며 미안해하는 여주의 얼굴을 보며 호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저 누나랑 맛집 도장 깨기 하러 다니는데."

"친구도 없습니까 한국에? 보니까 대학생 때까지 여기 있었다면서."

"아니 뭘 또 나에 대해 그렇게 조사를 열심히 하셨대."

"정호석씨."

"아아... 갑자기 입술이 아프네."




괜히 멀쩡한 입술을 더듬는 호석의 말에 발끈했던 윤기가 당황스러운 낯빛을 했다. 호석은 당장에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꼬리를 씰룩였다. 저 형 되게 투명하네. 이미 애저녁에 다 나은 입술을 가지고 아프다는 호석이 얄미웠으나 윤기는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괜히 여주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무는 윤기를 알기는 하는지 여주가 더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헐, 입술 아직도 아파? 보기엔 다 나은 것 같은데. 아니 글쎄 며칠 전에 햇살이가 어디서 맞고 입술이 다 터져서 온 거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씩씩거리는 여주를 보며 인상을 쓴 윤기가 대답 없이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햇살이는 무슨. 눈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정호석이 얄미웠다. 




"그럼 다음번에 누나랑 저녁 먹을 때 같이 가실래요?"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진짜 싫다 저 새끼...










집중호우










"민윤기."

"왜."

"윤기야."

"왜."

"화났어?"




여주는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윤기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던 윤기는 집에 가는 차 안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 제가 막무가내로 회사 앞으로 찾아간 것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호석과 친해 보여서 그런가 고민하던 여주가 기어 위에 올라가 있는 윤기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런 여주의 손을 힐끗 본 윤기가 설풋 웃음을 흘렸다. 웃는 걸 보니 화가 많이 난 건 아닌가 봐. 마음을 놓은 여주가 윤기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내가 혹시 말 안 하고 회사 찾아가서 화났어?"

"그런 걸로 화가 왜 나."

"그럼 혹시 햇살이 때문에?"




그 말에 순식간에 윤기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저번에도 자신과 호석의 사이를 오해하더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햇살이는 무슨."




지나가듯 툭 내뱉은 툴툴대는 말에 여주는 웃음이 나올 뻔 한 걸 꾹 눌러 참았다.




"호석이랑 저녁 먹지 말까? 그냥 아예 만나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까?"




그러지 않을 거면서 괜히 너스레를 떠는 여주를 쳐다본 윤기가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웃고 말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이길까. 제 마음 풀어주려고 그냥 하는 소리인 걸 알면서도 고작 그 한마디에도 순식간에 풀려버리는 마음은 정말이지 너무 쉬웠다. 윤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만나."

"진짜? 나 네가 싫다면 진짜로 안 만날 수 있어. 그리구 진짜 호석이는 동생이야. 완전 애기잖아."



그렇게 시커먼 애기가 어디 있느냐며 잠깐 발끈하려던 윤기는 다시 입을 닫았다. 제 손에 닿아있는 여주의 손을 고쳐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여주의 손바닥을 살살 쓸었다. 아까 나 있던 손톱 자국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지만 윤기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호석과 여주의 자연스러웠던 그 모습은 그간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줬고 그때마다 이 손바닥에 몇 번이고 상처가 났을 지 윤기는 그게 속이 상했다.




"괜찮아. 진짜 화 안 났어."




윤기는 여주가 힘들때 곁에 있어 준 이를 함부로 만나라 만나지 말라 하고 싶지 않았다. 정호석이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쨌든 여주와 다시 만나는 데에 중간에서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고. 여주가 그런 윤기의 어깨로 슬쩍 고개를 기댔다. 습관처럼 윤기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여주가 속삭였다.




"윤기야."

"응."

"... 사랑해."




여주의 말에 심장이 바짝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그 한 마디면 족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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