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당연하지. 거기선 내가 남편이고 당신이 아내였잖아.


그리고 남자는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손님, 한잔 더 드릴까요?”

“…네.”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묻는 바텐더의 목소리는 조용하다. 그녀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꼭 삼 년 전 그녀가 앉아있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까.


“그럼, 커피로.”


삼 년 전, 그는 여기에 앉아있었고 그녀는 저기에 앉아있었다. 익숙하지않던 커피의 맛은 그렇게나 쓰게 느껴졌는데, 마시다보니 익숙해져버렸다. 언제나처럼 설탕을 넣어서, 스푼을 앙 물자 단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리고 마시는 커피의 맛은 좋았다. 여기에 앉아 화려함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촌놈 여자를 쳐다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저를 따라 스푼을 물어버리는 여자를, 커피라고는 입에도 대본적 없었을 여자를 바라보며 남자는 어땠지. 그 사람이 웃었던가. 아니면 울었던가.


“어서오세요-.”


익숙한 중국어와 함께 울리는 종소리에 그녀는 슬쩍 몸을 돌려 입구를 곁눈질했다. 항상 문 가까이에 서서 변함없는 톤으로 어서오세요-하고 말하는 저 종업원은 도대체가 변하지를 않았다. 삼 년, 길다면 긴 시간인데. 그래서 심장이 뛰었다. 그때의 시간이 돌아올까봐. 확 잘라버리라고 말해버릴까. 하지만 그녀는 생각만 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저 목소리가 좋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때의 시간이 돌아올까봐, 좋은 변명이다.


“커피 나왔습니다.”


안 될게 뭐가있어. 상해에서 다시 만날텐데. 


“어서오세요-.”


미라보에서.


순간 그녀는 이상한 바람에 휩싸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런 말을 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로,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 하는 바람이었다. 그날 이후로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스카프가 춤을 췄다. 옛 주인이 돌아왔다고 알리는 걸까, 노란 빛이 눈을 스쳤다. 


“뭘로 드릴까요?”

“커피로.”


남자는 들고 온 짐을 바닥에 떨어뜨려놓고, 소파에 앉아 나오는 커피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 박 늦게 자신의 앞에 내려놓아진 커피를 바라본다. 검은 물 안으로 퐁당, 떨어질 것만 같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크리스탈 병을 열어 설탕을 탄다. 뒤를 돌아봐도 될까. 아니, 그러면 안되는 걸까. 그날, 당신은 여기에 앉아서 어떻게 했더라. 저기에 앉았던 나는 어떻게 했더라.


“어우, 조금 쓴데요?”

“설탕을 넣으시면 돼요.”


남자는 이내 종업원이 가져온 잔을 휘휘 저으며, 익숙한 손짓으로 옆 크리스탈 병을 열어 설탕을 두어 스푼 넣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려 노력한다. 남자는 작은 스푼을 입에 문다. 지금 그녀가 하고있는 것 처럼. 그리고, 그리고….


“검문이다! 신분증을 내놓아라.”

“어머, 검문?”

“무슨 일이라니….”


알지도 못하는 새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남자의 얼굴을 차마 응시하지 못하고, 옆의 의자를 돌려 남자의 옆에 두었다. 털썩 자리에 앉고보니 뭘 하는 짓인가, 싶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다. 그녀는 문득 묻고싶어진다.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어? 하지만 나는 당신보다 더 날카로웠고, 당신은 나보다 더 능글맞았지. 그러니까 지금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는 이유는, 서로의 성격 때문인거야. 절대로 커피가 맛있어서 이런게 아니야. 애써 자기합리화라 불러도 할 말은 없다. 


“이봐 거기! 신분증 내놔.”


조용하게, 오랫동안 갈고 닦아 온 마음으로, 또 그 마음을 숨기는 방법으로 그녀는 입을 연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여보, 우리 신분증은 방에 있지?”

“응? 아아, 그래. 아마 그 서랍에 넣어놨던 것 같은데….”


역시 나보다 연기가 낫구나, 그녀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는 대답하기 한참 걸렸는데.


“두 사람 부부인가?”

“네에.”

“예, 그렇습니다만.”


흥, 짜증나는 듯한 콧김을 내뿜고 남자는 철수하는 병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느새 어깨에 걸쳐진 손을 알아차린다. 크고, 단단한 손. 그녀와 같은 굳은살이 많이 박힌 손. 그녀는 익숙하게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두 번째다. 뒤, 누군가가 있어. 그녀는 작게 중얼거린다. 남자는 알아들었다는 양 그녀의 어깨에 힘을 한번 주었다가 놓았다. 별 말을 하지않아도 알아듣는 사이. 특별한 사이. 그녀는 일부러 밝은 미소를 그리며 남자에게 말했다.


“여보, 방으로 올라가자.”

“왜, 벌써 피곤해? 우리 아내 피곤하다는데 그럼 올라가야지.”


남자는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녀는 손을 뻗었고, 남자는 익숙하게 그 손을 잡아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사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체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벌판에서 뛰어다니는데 소모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나는 만주에서 났다, 라고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고향은 한반도, 내 조국이었다. 죽어도 잊을 수 없어서 죽고싶은 그 땅에서 그녀의 피가 났다. 이 남자의 피도, 같은 땅에서 났다. 우리는 그래서 부부의 연을 맺었던걸까.


“우리, 모처럼 상해에 왔는데 뭐 할까?”

“글쎄…. 나는 미라보에 있는게 좋아.”

“그것 말고는 없어?”

“음, 사실 다 이루었어.”


커피라는 것도 마셔보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고….


“당신이 있으니까 다 이룬거지.”

“후훗, 그래?”


평범한 부부처럼, 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묻는다. 커피 한잔 더 할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의 품에 머리를 기댄 채로. 옅은 커피향을 안은채로.

달칵- 방 문이 열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들고 온 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문을 쾅 닫은 그녀가 슬쩍 뒤를 곁눈질한다. 따라붙던 눈빛이 사라진다. 그녀는 방 안을 관찰했다. 녹회색의 벽지와, 너무 크지않은 침대. 오래된 짙은 색의 나무 가구들과 열린 창문. 남자는 창문 가까이로 다가가 밖을 살핀다. 옅은 오렌지색의 커튼이 펄럭이며 남자의 상반신을 가렸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본다.


“날씨가 좋네. 그래도 아직 추워.”

“…그러게.”

“목도리는 잘 하고 있어? 마누라.”

“응.”


가까이 다가가 창가에 서자 바람이 불었다. 잠기지 않은 그녀의 코트가 휘날리고,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누런, 이제 색이 바래버린 머플러. 남자는 웃는다.


“우리, 만났네.”

“그러게. 미라보에서.”


진짜로 당신인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 내가 미치코가 아니라 옥윤인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당신이 진짜가 아니어도 나는 알아채지 못할 거야. 왜냐면 여기는 미라보고,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당연하지, 거기선 내가 남편이고 당신이 아내였잖아.


미라보에서, 우리는 부부였잖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가까워지는 입술에, 그녀는 눈을 감는다. 씁쓸한 커피의 향내에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그녀는 애써 모른 척 한다. 창 밖 소리가 멀어진다. 시를 읊는 이의 목소리는 바이올린의 소리에 함께 묻어간다.


미라보 다리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나는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늘 괴로움 뒤에 온다는 것을


여기는 미라보, 사랑이 돌아오는 곳.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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