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천성이란 무시할 것이 못되어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오비완은 아주 노력하여야만 태연을 가장할 수 있는 부류이다. 본성이 선하고 정이 많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제다이 오비완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괜찮은 척을 썩 잘할 수 있게 되었으나 다만 늘 능숙한 거짓말쟁이인 것은 아니고... 지금도, 자 보세요. 별로 안 괜찮아 보이죠?

 뭐? 반쪽 진실과 과장법의 대명사 마스터 케노비가 그럴 리 없다고? 글쎄, 이것 봐. 요즘 사람들은 남의 노력을 참 가볍게 여긴단 말이야. 우리 마스터 케노비가 얼마나 애를 쓰시는데. 매일같이 자기 마음을 목졸라 죽이느라 수고하신다 이거야.

 





 "... 전쟁이요?"


오비완은 열이 들끓어 달달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차게 식은 땀이 열을 내리기는커녕 기분만 불쾌하게 만들었다.
 지난번 실패한 탈출을 통해 오비완은 이곳의 구조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릿속 지도에 따르면 그들은 도킹 베이로 향하는 중인데, 무슨 조치를 취해놓은 것인지 가는 길은 수상쩍게도 조용했으나 오비완은 자신의 포스를 감추는 데에 급급하여 주변에 그리 많은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갑자기 업데이트되는 은하계 정세에 경황이 없기도 하고.


 "이미 공화국에 불만을 가진 권력자들은 많아. 구심점이 없을 뿐이지."

 "그래서 마스터 두쿠께서 그 구심점이 되신 겁니까?"


흥분한 기색을 감추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듯한 제자의 제자를 보며 두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젊은이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마스터 케노비가 그의 섹스 파트너(두쿠는 잠시간 고민하다 이 단어를 선택했다)에 의해 감금되어있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었다.

 학살이 벌어졌던 행성의 생존자들은 오비완과 두쿠가 악당이었음이 공표되자마자 의문이 들 정도로 잘 갈고닦은 분노의 칼을 공화국과 제다이 기사단에게 들이댔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가 반대했음에도 팰퍼틴 수상은 사람 좋게 웃으며 굳이 굳이 마스터 케노비를 그 임무의 적임자로 밀었으니. 결국 그와 시디어스는 언제든 서로를 저버릴 수 있는 얄팍한 동맹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두쿠가 오비완을 빼감으로써 둘의 겉으로나마 호의적인 관계는 완전히 파탄날 것이다.
 아미달라와 오르가나, 모스마 등의 의원들이 노력하고는 있지만 시디어스의 농간에 공화국은 군국주의적으로 변모해가고 있고 제다이 기사단은 혼란에 빠져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하긴, 언제 그 평화의 수호자 집단이 정치가들 손에서 제 역할을 하긴 했었냐마는. 덕분에 오비완의 제자였던, 더군다나 평소 평의회에서 말이 많이 오가던 나이트 스카이워커에게 불똥이 튀어 스승을 찾아 백방 헤매던 젊은 제다이 기사는 재판장이니 의회장이니 바쁘게 끌려다니며 여러모로 시달리게 되었다. 공식 석상에 선 나이트 스카이워커는 홀로그램을 통해서도 혼란과 피곤이 가득해 보였다.
 두쿠가 익명으로 손을 뻗쳤던 무역 연합 역시 반절은 시디어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원래의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으나 일말의 망설임 때문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입지를 다질 기회를 놓쳤으니 그나마 안전한 세레노로 늦지 않게 떠나야 할 테다.


 "그래도 구심점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

 "이미 시스로 몰린 마당에 어떻게 하시려고요."

 "몸이 아파 투정 부리고 싶은 건 알겠지만 순진한 척 굴진 말게나, 오비완. 세인들이야 시스니 제다이니 알지도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것 알지 않는가. 내가 악인 취급받는 것이야 그 행성에서의 일 뿐이고 그와 이익을 반하는 곳에서는 적당한 타협과 보상이 있다면 손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런 식으로 드로이드 군대를 만든 겁니까? 정말 전쟁을 하시려고요?"

 "이 은하에는 변화가 필요해."


오비완은 머리끝까지 뻗쳐오른 날카로운 신경을 억누를 생각도 안 하며 신랄하게 대꾸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오직 시스만이 극단적인 길을 택하지요. 모른 척하시려는 겁니까? 때를 놓친 것을 알면서도 제다이 기사단을 떠나지 않았잖습니까. 마스터 콰이곤은 제게 방향 잃은 죄책감이 어떤 비극을 부르는지 많이 일러주셨습니다. 그것도 분명 당신께 배운 것 아닌가요, 마스터 두쿠? 세레노의 일 때문에 제 마스터가 사원을 떠나긴 했지만 제다이 기사단을 떠난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 "

 "오비완. 순서를 잘못 생각하고 있군. 내가 그 아이 일에 책임을 느끼는 것은 맞지만 체제를 바꾸겠다는 건 나 자신의 신념이야. 콰이곤의 일은 그나마 평의회와 내 마스터에게 남아있던 존경에 회의를 덧씌울 뿐이었네. 그래, 자네 말대로 기사단에 남아있던 건 마찬가지로 제다이로서 남길 택했던 콰이곤 때문이네. 하지만 자네 입으로 또한 말하지 않았나? 내 마음을 돌릴만한 제물이 바로 오비완 케노비라고."

 "그건... "

 "제자가 남기고 간 제자가 시스와 놀아나는 꼴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 내 지시를 기다렸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게. 부러 다른 이에게는 알리지 않고 홀로 모른 척하며 즐겁게 지냈던 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테니. 그럼에도 자네를 이렇게 챙기고 나서는 건 자네 말대로 내 파다완 콰이곤을 위해서야. 그리고, 그 아이가 구해낸 내 혈육과 세레노의 행성민들, 자네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내가 진솔히 말했으니 자네도 털어놓는 것이 어떤가? 믿는다는 핑계로 자네 파다완을 얼마나 방치해뒀는지, 시스에게 얼마나 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같은 것 말이네."


물론 전부 진실은 아니었다. 두쿠 자신도 그가 제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스스로 확인받고 꽤나 놀라야 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 그랜드 마스터 요다조차 그런 면이 있었으니, 역시 제다이에게 애착이란 큰 짐이며 또한 죄라고 할 수도 있겠다. 힘을 가진 자들이 감정에 휘둘릴 때 얼마나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되는지... 두쿠의 눈에 그 자신은 물론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 사제와 다른 제다이 기사 전부 규율을 어기는 이단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고매한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낡아빠진 강령과 부패한 의회로 화살을 돌리게 된 것이다.
 스승으로서 그는 제법 무른 면이 있었으나 노련한 정치가 두쿠는 항상 단호하게 필요한 행동을 취했기에(콰이곤에게는 잘 먹히지 않았다) 젊은 고집쟁이 제다이 마스터를 흔들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대로 오비완을 몰아세웠다. 말을 할수록 제 자신에게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분이 든다면 이 늙은이를 비웃겠는가?


 "저는... 다스 몰은, "

 "지금도, 그 이름을 먼저 꺼내는군. 제자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마스터 케노비? 지금 다스 시디어스가 나이트 스카이워커를 불러들여 평의회에서 그 아이의 두 번째 임무에 대해 은밀히 재논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걸세. 자네가 다스 몰과 조난당했을 적 그 시스가 마을 하나를 전부 도륙 낸 것은 모를 테지. 그저 고결한 제다이 기사가 시스와 함께 있었다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학살한 건을 말이야."

 "......"

"조사관으로 차출된 자네 제자가 그곳에서 스승의 포스를 느끼고도 모른 척 한 건 알고 있나? 당연히 모르겠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스카이워커가 뭘 하고 다니는지도 몰랐으니. 사제간이라 해도 한 명의 기사로서 독립한다면 제자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 굳이 말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네만 원래의 오비완 케노비라면 갓 나이트가 된 파다완을 홀로 두진 않았을 거야. 어쨌든 그 사건이 물 위로 오른다면 선택받은 자의 위치도 흔들릴 테지. 그보다 스카이워커가 시디어스에게 붙들려있는 동안 아미달라 의원이 다스 몰의 손에서 살아남을지 말지는? 그건 궁금하지 않나?"


오비완은 망연한 낯으로 가만히 얼어붙었다. 아나킨이 파드메 곁에 있을 거라 믿어 애써 그 일을 한 구석에 밀어 두고 있었다.  도대체 이 비극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단 한순간도 모른 척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증명의 기회를 전부 걷어차버린 고결한 제다이 마스터는 온몸의 피를 싹 빼낸 듯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나킨을 무슨 낯으로 보겠는가? 아니, 어린 제자를 다시 볼 순간이 오기는 할까? 분명 다스 몰은 명대로 파드메를 살해할 것이다. 시디어스의 명에 오비완 마저 거의 숨을 끊어놓을 때까지 물어뜯었으니. 
 하지만 그 애는 그저... 그 애가 원하는 것은 피와 살육이 분명 아닐 텐데, 그저 가르침 받은 대로 움직인 것일 테지. 하지만 그것이 용서의 이유가 되는가? 그 많은 생명을 꺼트린 것에 변명이 되는가?




아니요, 마스터 케노비. 그럴 리가요.
 그러게 그렇게 말했는데... 기회를 미룰수록 끝은 좋지 않을 거라고. 이제야 후회하나요? 즐길건 다 즐겨놓고선. 원래 세상은 행복한 만큼 불행해야 하는 법이야. 요즘은 어린애들도 아는 것을 마스터 케노비는 왜 모르시나요. 역시 모른 척한 거지?

 나쁜 제다이는 벌을 받아야 해.




붉은 경보와 함께 서늘한 공기가 오비완을 일깨웠다. 그 주인도 감당하지 못하는 듯한 폭발적인 혼돈의 힘이 느껴졌다. 다스 몰의 것이 분명한 포스의 어두운 면이 멀지 않은 곳에서 미쳐 날뛰고 있다.
 오비완은 제자리에 멈춰 선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감추려 노력하고 있던 포스가, 잘려나간 본딩의 단면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것은 그저 공명 반응에 의한 생리적 현상인가? 홧홧한 열기가 제다이의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며 나약한 육신을 비웃는 듯했다.


 "더 이상의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 오비완. 나이트 스카이워커도 같이 있는 듯하군. 과연 다스 몰의 임무가 성공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에 나서면 누구 편을 들 생각인가? 이미 마음먹었다 한들 생각대로 될 것 같기는 한가? 얌전히 따라오도록 하게."

 "... 압니다."


오비완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두쿠는 그를 살피는 듯하더니 다시 앞으로 향했다. 변절자의 손에는 오비완의 라이트 세이버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두쿠를 때려눕히고 달려갈 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무기 없이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으니 이대로 얌전히 반쪽짜리 구조원 뒤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두쿠는 저만치 멀어지는 달음질 소리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뒤를 돌았다. 오비완의 라이트 세이버는 여전히 그의 손안에 있다. 그 정도로 멍청하다고 보아오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제 잘못을 일렀음에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라곤 없는 것이 딱 그가 보아온 오비완 케노비이기는 했다. 그래,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을 하면 꼭 자기 손으로 해결을 보려 해.
 한숨을 쉬던 그는 문득 허리춤에 있던 자신의 라이트 세이버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오비완 케노비! 네 마스터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스승의 스승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니. 고얀 놈. 두쿠는 황급히 젊은 소매치기 마스터의 뒤를 쫓으며 과연 뭘 위해 이 모든 짓거리들을 참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삼켰다. 그냥 두고 가 버릴까? 젊은이들이란 참 무모하단 말이야.




















온통 붉은 공간 속에 짐승의 불꽃이 일렁거린다. 검은 동공은 한계까지 수축하여 노란 태양의 흑점이 되었다. 

 주인님. 누구를 물면 될까요? 저는 착한 개에요. 말 잘 들을 테니 상을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에요, 주인님.
 주인님.





 "이거 완전 미친개잖아! 정신 차려!"


아나킨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붉은 빛줄기를 피해 몸을 숙이며 아연하게 외쳤다. 멀쩡하던, 아니 원래도 멀쩡하지는 않지만, 하여튼 시스는 회로가 나간 드로이드처럼 덜그덕 거리더니 갑자기 제다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이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적극 협력할 것처럼 굴다가 이제는 앞뒤 생각도 안 하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만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다스 몰은 그가 한가하게 머리나 굴리고 있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나킨은 은근 그를 얕잡아 보고 있던 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 물론 제대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으리라 당연히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팔아도 괜찮다는 건 아니니까.


 "몰!"


아나킨은 맞은편에서 푸른빛과 함께 나타난 이를 보고 반가움과 당황 속에 갈팡질팡하며 순간 비틀거렸다. 균형을 잃은 짧은 시간 동안, 시스의 양날 라이트 세이버가 회전하며 그의 어깨를 향해 내리그어졌고 젊은 제다이 기사는 이를 악물며 손목을 최대한 꺾어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보려 했다.
 사실 그러면서도 제 실책을 탓하며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분노에 형형한 눈을 치켜떴지만.


 "오비완!"


그의 마스터는 훌쩍 날듯 달려와 빠르게 시스의 광검을 막아냈다. 아나킨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오비완의 팔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고 빠르게 찍어내리듯 붉은 빛기둥을 튕겨냈다. 그는 오비완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리려 했으나 옆에서 보이는 푸른 눈이 얼어붙은 것을 보곤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시스의 기척을 살폈다.
 미친개처럼 날뛰던 시스는 얌전해져 있었다. 아, 젠장. 미친 또라이 스토커 새끼!


다스 몰은 포스로 스카이워커를 저 멀리 밀쳐내고(작은 욕설이 들려왔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제다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아름다운 푸른 눈 속에서 그는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공포의 냄새. 다가올 죽음에 미리 차게 몸을 식힌 사냥감이 흘리는 공포의 냄새.

 개는 그 앞에 서서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는 라이트 세이버를 내려다보곤 그 반대편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펄펄 열이 끓는 인간의 체온은 그의 것과 얼추 비슷한 정도, 아니, 조금 더 따듯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누군가의 최악의 악몽이 되어 붉은 복도에 선 다스 몰은 손안에 살며시 뺨을 기댔다. 눈을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의 주인은 따라서 참고 있던 숨을 뱉으며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개의 붉은 살결 위를 쓸었다.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 것이 맞닿은 체온을 통해 느껴졌다.



 아, 오비완. 오비완 케노비... 당신은 항상 여지를 남기지. 웃으며 기만하고 무릎 꿇게 만들어.



눈을 뜬 짐승은 손을 뻗어 하얀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발버둥 치는 사냥감이 내뱉는 끊어지는 숨소리, 그리고 그것의 어린것이 내지르는 성난 고함, 머리를 시끄럽게 뒤흔드는 붉은 경보. 노란 눈 속에 붉은 섬광이 끊임없이 내리치고 단절의 순간이 되풀이되었다. 고통을 수반한 잠시간의 달콤함. 밀려드는 쾌락에 반하는 끔찍할 정도의 거부감. 무릎 꿇은 죄 많은 짐승의 앞에 선 고결한 세례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세례자는 푸른 호수에서 몇 방울 물을 그에게 내렸다. 둥그런 호수에서 퍼올린 물은 기이하게도 바다의 짠맛이 났다.

 용암 구렁텅이에서 고개를 내민 뿔 달린 짐승은 뺨 위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기꺼이 받아마셨다. 이제 모든 의문은 의미를 잃었다. 그는 또 다른 죄악의 길에 발을 들이며 손아귀에 쥔 것을 놓치지 않으려 힘을 주었다. 동시에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인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감히 누구에게 그 자격을 구한다는 말인가? 악몽은 표정 없이 웃으며 기약 없는 잠에 빠져드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떠나려 한다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주겠다. 나의 세례자, 나의 구원자, 나의 기만자. 당신의 모든 것을 원해. 당신의 불행도 눈물도 고통도 전부 내 걸로 할 거야.
 그래도 계속 여지를 줄 거야?



분노에 찬 선택받은 자가 푸른 빛의 검을 들고 뛰어오르자 동시에 폭발음이 적색 경보를 삼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과 부름이 뒤섞이며 선연한 혈향과 화약의 쓴내, 비릿한 쇳내음이 바다를 가르고 그 밑의 땅을 적셨다. 심연 속에 구원은 없으며 다만 그곳에는 짙게 여문 상처와 차마 그것을 핥을 생각도 못하는 어리석은 짐승이 몇 배회할 뿐이다.
 더러운, 죄 많은, 저 위에서 끌어져 내려진 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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