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 오타쿠 하면서 (어쩌면) 처음으로 연성교환이라는 걸 해보았고, 덕분에 갓컾 집어먹음. 짤 4장으로 퉁치기는 길어서 짤은 일부 내용 가지고만 만들고, 전문은 따로 긁어옴.

기반 썰 출처 : 샂계절님(@SS_Leowo)



사람이 없어 차게 식은 밤길은 이미 익숙한지라 구둣발을 내딛는 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마지막 정시퇴근은 이미 어렴풋이 더듬기에도 너무 먼 어느 날이 되었기에, 흑진아는 매일 걸음을 옮겨 제 집에 도달해 문을 여는 그 순간만을 집념했다.

‘피곤하다.’

여느 때처럼, 지치는 밤이다. 안경 너머로 뻐근한 눈을 조금 비빈다. 따끈따끈하게 퍼지는 뭉근한 김의 온기와 물 내음이 간절한 만큼 굳은 땅을 밟는 굽 소리도, 징징 울리는 가로등 빛 아래로 매끄럽게 떨어지는 흰 얼굴도 오직 앞만을 향했다. 저 멀리, 새까만 덩어리가 빛조차 닿지 않는 음영 아래에서 구물거리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저게 뭐지?’

흑진아가 제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가타부타 제 피곤과 호기심을 저울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었으니, 구태여 억지로 관심을 두지 않아도 정체 모를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고양이네.”

입술 새로 혼잣말이 나온다. 등골을 쫙 들어 올린 채 어슬렁대며 거리를 활보하는 길고양이조차 극히 드문 동네에서 야심한 새벽에 홀로 쓰러져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얘, 살아 있기는 한 건가. 흑진아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미약하게나마 색색거리는 작은 숨, 눈두덩이를 쭉 가로 지른 상처. 아물어지지 않았는지 핏물이 군데군데 배었다. 살짝 대본 손 아래로 쓸어 담아지는 털의 결은 의외로 곱다. 다만,

“기절한 건가?”

몸을 들어 올려도 기력 없이 하느작거리기만 하는 것이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기에 흑진아는 굽힌 허벅지 위에 고양이를 눕혀두고, 핸드폰을 켰다. 동물병원, 보호소, 애견용품 상점까지, 치료를 맡길만한 곳을 찾아보아도 전부 영업종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풀 꺾인 한숨이 푹 내쉬어지는 중 문득, 손바닥에 닿은 고양이의 말랑한 배가 찬찬히 오르내린다.

‘어렸을 때, 딱 이렇게 생긴 인형을 가지고 놀았었는데.’

물론 모습을 본 딴 가짜 솜인형과 진짜 동물 사이에는 너무도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결국, 흑진아는 몸을 펴고, 축 늘어진 고양이를 품에 제법 소중하게 안아들었다. 기실, 모른 척 하고 지나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으니까.

형광등 밑, 붉은 자수 방석 위에 눕혀진 고양이를 보며 흑진아는 잠시 생각했다. 세간 사람들이 미묘美貓라고 부르는 고양이들은 죄다 이런 느낌으로 생겼을 거라고. 흉터가 남을 것이 뻔한 생채기 위로 솜이 집힌 핀셋이 다가간다. 예상치 못 한 객식구 덕에 느긋한 목욕은 가늠하기 힘든 미래로 미루어진지 오래. 하루종일 바깥에 있느라 묻혀왔을 흙먼지나 간신히 털어낼 정도로 빠르게 씻고 나온 이유는 오로지 이 고양이 한 마리 때문.

“오늘은 아무리 늦게 집에 와도 천천히 씻으려고 했는데….”

아쉬운 푸념도 잠시, 눈가 상처에 식염수로 절여진 솜뭉치가 눌린다. 냥. 잠꼬대인지, 아니면 늘어진 중에도 쓰라린 건 느껴져서 그런 건지.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바짝 뻗은 콧잔등의 수염이 씰룩거렸다. 그 덕에 솜을 가져다 대는 움직임이 한층 조심스럽다. 하얗던 것이 빠져나온 핏물로 벌개질 때마다 솜을 가는 것만 여러 번. 혹시 몰라 꺼내둔 마데카솔과 바세린, 후시딘은 전부 기각당한 만큼 할 수 있는 치료라고는 덧나지 않도록 소독을 하는 것뿐이었기에 흑진아는 제 앞에 너부러진 고양이에게 집중했다. 작은 동물을 돌보는 세심한 일에는 썩 익숙한 편은 아닌 지라,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손길에는 영 거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됐겠지.”

더 이상 무언가 묻어나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어정쩡 굽혀진 허리가 쭉 세워진다. 치료의 흔적을 대충 손으로 휘적휘적 주워서 버리고, 미리 꺼내둔 담요를 고양이의 목 아래까지 푹 덮어주고 나니 뒤늦게 눈이 살금살금 감겨오는 통에, 흑진아는 스러지듯 침대에 제 몸을 눕혔다. 깜빡깜빡. 피로감에 묵직해진 눈꺼풀 새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작은 고양이를 담으며. 눈을 제외하고 크게 다친 곳은 없었으니 아침이면 쟤도 깨어나 있겠지.

……그래. 흑진아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야옹’이라던가, 치료 중 잇새로 딱 한 번 새어나오던 ‘냥’이라던가, 하다못해 ‘옭앩옭’ 과 같은, 그런 고양이가 낼 법한 소리로 울며 밤새 저를 돌봐준 은인조차 기상하지 않은 집 안을 활보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낯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라면 누워있는 제 곁에 와 몸을 부비거나 꾹꾹이라도 해줄지 모를 테고, 잠이 많으면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 않은 채 방석 위를 뒹굴 거리면서 포근한 숙면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예상 어디에도,

“멋쟁이 집사님.”

남자 목소리라던가,

“드디어 일어났네?”

뺨에 닿아오는 다른 이의 손가락, 온기,

“하하, 뭐야. 놀랐어요?”

나직한 웃음소리 따위는 없었다. 이게, 뭐지. 안경 없이 흐린 시야에도 눈앞의 가슴팍이 구릿빛으로 판판하다는 것 하나는 선명하다. 알람소리가 갓 꺼진 핸드폰 위에는 제 것이 아닌 게 분명한 손이 더 얹어져 있다. 마디가 전부 저보다 확연히 굵고, 손등뼈는 도드라진. 베개에 눌려 뜬 머리칼을 정리할 새도 없이, 흑진아는 늘상 머리맡에 놓아두는 제 시력의 원천을 집어 들었다. 깔끔하게 닦인 렌즈 앞에 너무도 낯선 것이 비추어진다. 신원 미상의, 반 정도 헐벗은 것이 분명한,

‘…남자.’

………112를 누르려는 손은 꽤 재빨랐으나, 이를 저지하는 이가 한 발 앞섰다. 한껏 얼타는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지, 제법 호쾌한 낯으로 웃고 있는 남자는 여유롭기 그지없다. 허리 언저리까지 늘어뜨린 검은 장발, 얄팍한 선을 그린 채 올라간 눈매, 노랗고, 파란 눈, 눈썹부터 뺨까지 새살이 돋지 않은 상처. 환히 벌어진 입가로는 뾰족 날 선 치아가 얼핏 보인다.

“…누구세요.”

그리 물으며, 흑진아의 눈이 도르륵 굴렀다. 고양이가 누워있던 방석이 텅 비어있다. 창문도, 문도, 어제와 똑같이 잠겨 있는 상황. 그리고 대체 어떻게 들어왔을지 모를 낯선 사람. …몇 번인가 보았던 시사 프로그램의 내용들이 스친다. 처신을 잘못한다면 제 생은 아마 ‘꺼지지 않는 의혹의 불씨 – 흑진아와 검은 고양이 사망 사건의 진실’ 같은 제목으로 전파를 탈지도 모르는 일이 분명했다. 여차하면 손에 쥔 핸드폰으로 이름 모를 반나체의 남자를 한 대 후려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무렵, 남자가 재차 웃었다. 목울대를 차분히, 낮게 울리며.

“어제 구해준 고양이, 기억 안 나요?”

“…고양이는 갑자기 왜….”

“그거, 난데.”

……이 모든 게 꿈일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이 이상한 남자가 정말로 내 집에 쳐들어와서 본인이 새벽의 그 고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확률이 높을까. 흑진아는 단연코, 전자에 제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꿈 아니거든요? 얼른 준비나 해요. 일 나가야 하잖아요.”

그러나, 허탈한 중얼거림에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저를 일으켜 세워 등 떠미는 남자의 감촉 따위가 심히 선연했다. 정말, 불필요할 정도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침 출근에 성실하게 길들여진 몸이 다려진 정장 바지와 셔츠를 꿰어 입고, 핸드백을 챙긴다. 와중에도 남자의 눈길이 뒤통수에 꽂혀오는 것이 흑진아는 무척이나 달갑지 않았다. 달갑지 않고, 그 존재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렇기에 나갈 때 나가더라도 답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당신, 정말 누구냐니까요?”

“말했잖아요. 고양이라고.”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

“자자, 일단 출근부터 해요. 설명은 이따가 다 해줄 테니까.”

“뭐라고요?”

“점심시간, 회사 아래로 갈 테니 그 때 봐요.”

“내가 다니는 곳은 어떻게 알고,”

“그럼 다녀와, 주인님.”

안녕. 쪽. 휘몰아치듯 쏟아져 오는 남자의 말, 손가락과 맞붙은 입술이 달콤하게 붙었다 떼어지는 소리와 함께 제 집에서 쫓겨난 통에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 했지만. 하. 헛웃음과 함께 어쩔 도리 없다는 듯 출근길에 오른 흑진아의 뒤로 남자, 이흑영은 나른히 기지개를 펴며 제 눈가의 상처를 곱씹었다. 핏물이 힘겹게 마른 상흔에도 그저 기껍다. 몇 번을 더듬다가 이내 지갑에서 몰래 빼낸 명함을 보고 있자면 얼빠져 있던 낯이 생각난다.

‘흑진아, 라….’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제 것보다 짙은 흑발, 무표정이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다정한 선심이 어울리는 여자. 매끈한 얼굴 위로 옅은 소태가 스민다. 역시나, 흥미롭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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