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소설
* 영화 <스타트렉> AOS 스팍커크 커플링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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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커크) Stuck in the Snow




복도는 서늘했다.
일부는 잠자리에, 일부는 업무에 한창 집중하고 있을 고요한 밤. 적막이 흐르는 복도를 걷던 커크는 자신 앞에 놓인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빠른 속도로 우주를 유영하는 엔터프라이즈호의 창밖으로 별들이 흐르듯 스쳐지나갔다. 무수한 빛의 띠들과 한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를 보던 커크는 쓸쓸함을 느끼고는 차가운 창가에 이마를 기대었다.
 
“무슨 생각중이십니까?”
 
등 뒤로 들리는 낯익은,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커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앞머리에 하얀 얼굴을 한 스팍이 적갈색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아, 스팍이구나. 그냥...”
 
상대를 향해 힘없이 픽 웃어보인 그는 다시 멍하니 창을 내다보기 시작하였다. 이따금 평소보다 힘이 없거나 조용하거나 사색에 잠기는 모습으로, 알려진 것보다 제 함장이 내면적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는 스팍은 말을 아끼고 그의 곁에 잠자코 서있었다.
얼마간 침묵 속에서 아득한 우주의 밤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시야에 다시금 별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크의 새파란 눈동자와 스팍의 어두운 개암빛 눈동자 위로 점점이 빛나는 별들이 비치었다.
 
“별들이 지나가는 거 보여? 하얗고 조그만 게 꼭 눈 내리는 것 같아.”
 
커크가 드디어 입을 열고 작게 중얼거렸다. 스팍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계속 말을 하도록 두었다.
 
“이미 알지도 모르지만, 오늘 지구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일종의 기념일이거든. 그래선가, 오늘은 나답지 않게 감상에 젖었네...”
 
살짝 민망하다는 듯 말을 늘이며 웃는 커크를 응시하던 스팍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서는 저도 조금 압니다만, 짐이 기념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은 의외로군요.”
 
“음... 스팍 말대로, 원래는 별 관심이 없었거든. 그런데 엔티에 있다 보니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 같단 말이지. 재미있게도... 자의랑 타의는 다르다는 느낌?”
 
“어떤 부분이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특별히 불만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단지 크리스마스 같은 날 눈을 맞는다든가 하는 평범한 일상이랑은 무관하게 떨어진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은 것 뿐. 엔티 안의 삶이란 게 그런 거니까.”
 
묘하게 공허한 커크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던 스팍은 함장의 옆에 나란히 선 채 질문을 이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풀이 죽은 듯 스팍의 눈썹이 천천히 움직였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스팍의 물음에 커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전에... 내 일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거든. 그래도 아쉽거나 그리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 가끔 엔티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일상과 유리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
 
“우주에, 엔터프라이즈호에 감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으시는 거군요...”
 
사뭇 진지해진 스팍의 표정을 알아차린 커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스팍, 스팍. 큭큭... 무슨 감금이야? 넌 너무 진지해서 문제라니까. 자, 들어가자. 함교로.”
 
커크가 스팍의 등을 손으로 토닥이며 앞으로 밀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함교로 향했다. 하지만 스팍의 얼굴에는 아직 고민스러운 기색이 남아있었다.
 
 
 
 
_
 
밤이 지나고 또다시 같은 일과가 반복되는 아침.
평소보다 멍한 표정의 커크를 눈치 챈 몇몇 크루가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항상 유쾌한 사람이 조용할 때 오히려 대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함장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 중 하나인 레너드 맥코이는 마침 감기 걸린 크루가 많아지면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주선의 의사에게 휴일이 있을 리 만무했고, 울적한 제 친구에게 농담하러 올 시간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함장이 조용하니 크루들 사이를 흐르는 공기 역시 묵직하게 변한 것 같았다. 말없이 주어진 업무에 시선을 박아둔 채 각자의 사색으로 빠져들었다. 발을 까딱거리며 스크린을 바라보는 더티블론드 머리칼 뒤로, 깊이를 알기 힘든 적갈색의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_
 
어느덧 교대시간이 되었고 커크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때보다 지친 듯한 어깨를 몇 번 흔들어 피로를 털어낸 그는 천천히 복도를 걷다 멈추어 섰다. 휴게실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에도 왁자지껄한 곳이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밝고 명랑하고 흥겨운 목소리들이었다.
 
“...뭐지?”
 
커크가 마음에 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휴게실 천장 한 가운데에서 자그맣고 하얗고 반짝이는, 흡사 눈송이 같은 무언가가 잔뜩 만들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쉽게 녹지 않는 모양인지 휴게실 테이블은 물론이고 바닥과 크루들의 머리 위에도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지구 출신 크루들은 특히나 밝은 표정으로 쌓인 눈송이(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지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휴게실 테이블에는 또한 각종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커크가 눈을 휘둥그레진 채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눈송이를 손으로 살며시 받아냈다. 이 자그마한 눈송이는 놀랍게도 차갑지 않았다. 기분 좋은 정도의 촉촉함만 남기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촉감에 커크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기분이 이끄는 대로 휴게실 바닥을 따라 쌓인 눈을 뽀득뽀득 밟기도 하고, 테이블 위의 눈을 쓸어 모아 손으로 뭉쳐보기도 했다. 여느 크루들처럼 함장 역시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 뜻밖의 겨울을 즐기던 커크는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순간 번쩍 들고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기 시작했다. 방 한쪽 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팍이 눈에 들어왔다. 커크는 멋쩍은 듯 미소를 살짝 지어보이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설마 네 솜씨야? 스팍?”
 
커크가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향해 물었고, 스팍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움직였다.
 
“어제 얘기한 것 때문에 이렇게 만든 거야? 대단한걸... 힘들었겠다. 고마워, 스팍.”
 
커크가 감동했다는 눈으로 인사를 하자, 스팍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했다.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과학장교니까요.”
 
스팍의 예상치 못한 자기자랑에 커크가 참지 못하고 큭큭거렸고, 스팍은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는 말했다.
 
“그리고 짐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쁩니다. 준비한 보람이 있군요."
 
그의 대답에 커크는 기쁨과 고마움을 숨기지 못하고, 볼을 발갛게 달구며 웃었다. 그런 함장의 모습에 스팍 역시 잠시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함선에 마련된 작은 겨울을 즐기는 크루들을 바라보며 둘은 한동안 행복한 침묵을 즐겼다.
 
잠시 뒤 피곤에 잔뜩 쩔은 얼굴로 휴게실에 들어선 맥코이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떡 벌렸고, 커크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본즈, 얼굴 까먹을 뻔했다! 어서와!”
 
커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씨익 미소를 짓고는 성큼성큼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간 대화를 하고는 테이블에 쌓인 눈을 주물거리던 맥코이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차갑지는 않군. 누가 또 감기에 걸려오면... 이번엔 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은 까칠하게 했지만, 눈의 오묘한 촉감이 싫지 않은 모양인지 계속해서 눈을 주무르는 그였다. 앞에 놓인 음식과 잔을 끌어당긴 맥코이는 커크를 향해 소리쳤다.
 
“짐! 이런 분위기에 건배를 안 하면 섭하지. 스팍도 앉고.”
 
“저는 알콜을...”
 
맥코이의 권유에 기계처럼 스팍이 대답하려던 찰나에 커크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런 날에 빼기는? 오늘의 파티를 마련한 주인공인데 당연히 한잔 해야지. 취하지도 않잖아, 스팍.”
 
커크가 어두운 금빛 머리칼 위로 쌓인 눈을 천천히 털어내고는, 스팍의 팔을 잡아끌었다. 스팍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끌려갔다.
커크, 본즈, 스팍 세 사람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잔을 들고 즐겁게 건배했다. 다른 크루들 역시 삼삼오오 모여 크리스마스의 소박한 만찬을 즐겼다. 모두가 웃고 있었고, 음식은 맛이 있었으며, 잔이 부딪치는 유쾌한 소리에 귀도 즐거웠다.
 
오랜만에 본즈와 수다를 나누며 한껏 업된 커크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반짝였다. 그런 함장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스팍은 그의 소매를 살짝 끌어당겼다. 커크가 왜 그러냐는 듯 얼굴을 돌려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는 고개를 좀 더 숙인 뒤 커크에게 조그맣게 귓속말을 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짐. 당신을 위해 한 거니까요.”
 
스팍의 말에 커크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밝게 웃었다. 다만 아까와는 달리 묘한 부끄러움과 가슴 떨림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볼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커크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던 스팍은 놀라서 물었다.
 
“짐, 몸이 좋지 않습니까?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스팍의 물음에 커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이,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벌칸은, 이따금 자신을 너무 들었다 놓았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편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낀 맥코이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흩날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다시 잔을 높이 쳐들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어쨌든,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ND




* 츠바키님의 크리스마스 스팍커크 합작(http://spirkchristmas.tistory.com/)에 참여한 글입니다
* 스타트렉 전력 감금 키워드에 참여한 글입니다


글쓰기 연습하는 이너테일 입니다. 영화, 드라마, 만화 커플링 BL소설을 주로 적고 있습니다. 그림도 가끔 그려요.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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