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 흥해도 청춘 망해도 청춘 10


W. 스킨




수학시간이다. 요즘 다니엘이 좋아죽는 수학시간. 수학이라면 학을 떼던 지훈조차도 이젠 남몰래 수학시간을 기다리는 정도가 됐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책상 아래서 손장난을 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며 눈에 힘을 주던 것도 잠시, 지훈은 못이기는 척 손을 붙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저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빛 하나면 뭐든 허락하고 말 것 같았다.

"땅콩은 손도 땅콩 같네."
"조용히 해... 쌤한테 혼날라."
"나 걱정해주는 거야?"
"네 걱정 아니고 내 걱정이야."
"너무해."

말은 너무하다면서 얼굴엔 웃음기가 잔뜩 어려있다. 지훈도 웃음을 삼키며 책상 아래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기다렸다는 듯 다니엘은 깍지를 꼈다. 같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에겐 쏙 잡히는 손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뿌리치지 않는 건 상대가 다니엘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수학에 흥미가 없던 다니엘과 지훈은 연애를 시작하면서 수학과 더욱 멀어지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에 사귄 지 얼마 안 된 애인이 떡하니 앉아 있는데 수업에 집중이 될 리가 있을까. 오른손을 붙잡혀 졸지에 왼손으로 펜을 잡고 있던 지훈은 선생님의 눈치를 봐가며 깨작깨작 낙서를 했다. 다니엘을 닮은 강아지 그림이었다. 강아지인지 사자인지 모를 낙서가 완성되자 지훈은 그 옆에 조그만 하트 하나를 그려냈다.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칠판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수학 선생의 시선이 맨 뒷자리로 향했다.

"어쭈, 거기 맨 뒷자리. 아까부터 되게 신나 보인다."

지훈은 재빨리 붙잡힌 손을 털어댔다. 다행히 다니엘도 금방 손을 놔주었다. 앞에 앉아 있는 모든 학생들이 한꺼번에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 지훈은 멋쩍게 머리를 만졌다. 그 시선 중엔 유정의 것도 있었다. 당황하는 지훈과 달리 다니엘은 예의 그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수학 선생은 계속해서 장난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보니까 다니엘 원래 여학생이랑 같이 앉지 않았나? 요즘 계속 지훈이랑 앉네?"
"요즘 지훈이랑 더 친해져서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너네 둘이 잘 어울리긴 한다 야. 아 남자애들끼리 엮으면 기분 나쁜가?"

하하 웃는 소리와 함께 수업이 다시 진행됐다. 지훈은 뚱한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남자든 여자든 기분 나쁠 게 뭐 있어. 상대가 중요한 거지. 지훈은 괜히 마음이 모나져서 오른손에 펜을 쥐었다. 다시 슬금슬금 손 잡을 타이밍을 보고 있던 다니엘은 오른손으로 펜을 잡아버리는 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거두고 제 교과서 구석에 빠르게 글씨를 써내려간다. 다니엘과 지훈의 수학 교과서는 어느새 둘만의 낙서로 너덜너덜해져 가고 있었다.

[우리 둘이 잘 어울린대]
[쌤 보는 눈이 없으시다. 다니엘보다 내가 더 아까운데. 그치]

지훈은 괜히 장난을 쳤다. 만약 남자와 여자를 저렇게 엮었더라면 이미 다같이 몰아가고 난리가 났을 거였다. 하지만 남자 둘은 달랐다. 모두가 짠 듯이 웃으며 장난으로 넘겼다. 나 얘랑 장난 아닌데. 진짜 사귀는데 씨... 아무것도 모르고 했을 선생님의 장난에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다니엘은 지훈의 개발새발 글씨 해석을 마치곤 멍멍이처럼 웃었다. 옆으로 길쭉한 눈이 웃으니 도톰하고 예쁜 모양으로 접혔다.

[응 그치. 우리 땅콩이 훨씬 아깝지]

다니엘은 그 아래 하트도 다섯 개나 그려넣었다. 지훈의 광대가 씰룩였다. 그 모습을 보던 다니엘은 손을 들어 슥 스치듯 볼을 쓸었다. 다니엘의 손이 스쳐간 지훈의 볼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강다니엘이 이렇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평범한 법이 없다. 그 하나하나에 과할 정도로 크게 반응하는 지훈은 오늘도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능숙한 강다니엘을 이기려면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박지훈."

수학시간이 끝나고 다니엘은 체육복을 갈아입기 위해 일찍 반으로 돌아갔다. 다니엘이 나갈 때까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정이 지훈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훈은 힐끔 쳐다보곤 왜 또, 하고 짧게 대꾸했다. 며칠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유정은 지훈에게 다니엘과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처음엔 당황했다. 당황할 때면 항상 그랬듯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것도 며칠 계속 되니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너 다니엘 오빠랑 진짜 뭐냐니까?"

한 가지 특이사항은 다니엘이 없을 때만 골라서 물어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존나 만만하고 다니엘은 무서운가 보지? 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곤 유정의 시선을 마주했다. 교실 어디에도 둘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우진은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쪽을 흘끔거리긴 했다. 지훈과 다니엘의 사이를 아는 유일한 친구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뭐긴 뭐야 자꾸.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데?"
"그냥 사실대로 말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너네 사겨? 미친, 진짜 그런 거야?"
"다니엘 형 너보다 두 살 많아. 호칭 똑바로 해."

서로를 향한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바뀐 지훈의 눈빛을 멀리서도 알아챈 우진이 아이고, 곡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판에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우진은 게임이 종료된 핸드폰을 책상에 버려두고 둘에게로 다가왔다. 박지후니 니 매점 간다매. 누가, 내가? 뚱하게 묻는 지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눈치가 없는 건지 유정과 담판을 짓겠다는 건지 지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정을 쳐다보는 눈에 더 날을 세울 뿐이었다. 둘의 엄청난 신경전은 체육복 차림의 다니엘이 뒷문에 빼꼼 나타나면서 종료되었다. 깜빡하고 체육복 상의를 가져오지 않았다더니 위에는 체육복 대신 까만 반팔티를 입고 있다. 땅콩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훈은 금방 눈빛을 지우곤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우진은 속편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유정만이 씩씩대다 교실을 나가버렸다. 다니엘은 다가온 지훈을 계단으로 데려갔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맘편히 대화하기엔 이곳 만한 데가 없었다.

"너 그러고 나가게? 쌤한테 혼날 텐데."
"아까부터 내 걱정해주네 우리 땅콩."
"이왕이면 안 혼나는 게 낫잖아... 다른 반 애들한테 빌려보라니까."
"몇 명 빌려봤는데 다 사이즈가 작아."
"아..."

반팔티를 입으니 더욱 잘 보이는 널찍한 어깨에 지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이 됐다. 다니엘은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지훈의 눈꼬리를 만지작거렸다. 긴 손가락 끝에 숱 많은 속눈썹이 간질거리며 닿았다.

"유정이랑은 왜."
"어?"
"아까 보니까 둘이 눈빛으로 찢어죽이고 있더만. 싸웠어?"

싸운...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싸운 건 아닌 것 같아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은 지훈의 눈꼬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받는 입장에선 너무 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해 말리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뭐든 다니엘이 하면 그대로 끌려가게 된다. 얌전한 지훈을 보고 픽 웃은 다니엘은 고개를 뒤로 쭉 내밀어 복도를 확인했다. 이쪽으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자 지훈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렀다. 이마 언저리에 닿는 다니엘의 숨이 따뜻했다.

"누가 뭐라하면 형아한테 다 얘기하고."
"내가 애냐고..."
"애 아니고 애기야. 우리 지훈이."
"아 장난 그만 쳐."
"키스 한 번만 해도 돼?"

이러려고 복도를 살폈나 보다.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다니엘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여긴 학교고 심지어 누구든 언제나 올 수 있는 계단인데, 안 되는데... 머리로는 삐용삐용 비상등을 울리며 말렸지만 지훈은 끝내 다니엘을 밀어내지 못했다. 금방 수업종이 치는 바람에 키스는 짧게 끝이 났다. 오늘도 키스 더럽게 잘하는 다니엘에게 홀려버린 지훈은 멍하니 입술을 가렸다. 다니엘은 그 손 위로 쪽 마무리 뽀뽀를 하고 웃었다. 방금 잡아먹을 듯이 키스하던 사람은 어디가고 금세 또 멍멍이 한 마리가 왔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데, 그게 또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들어가. 수업 늦겠다."
"형도 빨리 운동장 나가. 혼나지 말구."
"아... 땅콩 나는 네가 가끔 형이라고 불러줄 때 미치겠어."
"왜. 그럼 안 부를래."
"아 왜. 많이 불러줘."
"빨리 가기나 해!"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다니엘을 겨우 떼어놓았다. 처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다니엘을 외면하며 지훈은 걸음을 옮겼다. 정말 갈 것처럼 코너를 돌았다가, 도로 얼굴만 삐죽 내밀었다. 지훈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이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반짝였다. 내 생각하다가 다치지 말고 체육 잘 하구 와. 다니엘 형아. 멍해진 다니엘이 천천히 심장을 부여잡을 때 지훈은 후다닥 교실로 튀었다. 아 박지훈 진짜...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다니엘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 땅콩은 행동 하나하나가 평범한 법이 없고 그때문에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고.




"지훈 군! 지훈 군!"

지훈은 오랜만에 듣는 하이톤 음성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청소시간에 선생님이 시킨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또 무슨 일로 1학년 층에 내려왔는지 여전히 붉은 입술을 한 세미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지훈을 불렀다. 이미 눈이 마주쳐버려 피할 수도 없었기에 지훈은 엉거주춤 인사를 건넸다. 한달음에 달려온 세미는 언제나 그랬듯 지훈의 얼굴을 감상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다니엘과 사귀게 된 이후로도 종종 세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훈에겐 그저 재밌는 누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할지라도 다니엘의 입장에선 신경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때문에 답장 텀도 느리게 하고 내용도 되게 재미없게 보내곤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세미는 여전히 밝고 기분이 좋아보였다.

"얼굴 오랜만에 본다, 그치!"
"네..."
"세상에... 오랜만에 봐도 존잘이네."

거침없는 화법 또한 여전했다. 친한 사이로 지내면 참 좋을 것 같은 누난데. 지훈은 어김없이 시작된 세미의 외모 찬양에 몸둘 바를 모르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아 지훈이 아버님 오셨다, 라는 세미의 말이 있기 전에는.

"야 땅콩 괴롭히지 말라 했지."
"내가 뭘 괴롭혀. 그냥 얼굴 구경 중이었구만."
"그게 괴롭히는 거야."

교무실에 다녀온 다니엘이 지훈의 옆에 섰다. 긴 팔은 자연스레 지훈의 어깨 위에 둘렀다. 평소보다 좀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지훈의 몸이 다니엘에게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팔에 닿은 다니엘의 가슴팍이 단단했다. 별거 아닌 스킨십이지만 지훈은 좀 부끄러워져서 작게 바르작거렸다. 가만 있으라는 듯 더 단단하게 고쳐안는 팔은 꿈쩍도 않았다. 이럴 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지훈이 몸을 얌전히 두자 그제서야 다니엘도 지훈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풀었다. 다니엘이 지금 알게모르게 질투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귀엽기도 했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지훈 군 싸고돌래? 네가 진짜 아버지라도 되는 줄 알어?"
"아버지는 좀 그렇고, 지훈이 남편할 거야."

그 말에 굳어버린 건 지훈뿐이었다. 다니엘이야 워낙 뻔뻔하게 장난을 잘 치니 세미도 그저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호탕하게 웃었다. 지훈이 팔꿈치로 복부를 쿡쿡 찌르든 말든 다니엘은 그저 좋다고 히죽거렸다. 어쩜 그런 말을 저리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잘 할까 싶다. 저 정도면 타고난 거겠지. 언제쯤이면 다니엘의 이런 장난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칠 수 있을까 따위의 걱정을 하고 있던 지훈은 뒤이은 다니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얼굴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지훈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백 퍼센트 진심이라는 것을.

너 이제 땅콩한테 연락하지 마.
왜. 네가 남편할 거라서?
엉. 그것도 그렇고 땅콩 이제 공부할 거래.
야 내가 언제,
씁. 가만 있어. 암튼 그렇게 알고 지훈이한테 연락하지 마.

세미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다니엘을 쏘아보다 지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는 지훈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홀린 듯이 짝짝 박수를 친다.

"내가 강다니엘 말은 들어주기 싫은데 우리 지훈 군 얼굴 보니까 들어줘야겠다. 지훈아 그래도 누나 번호는 삭제하면 안 돼."
"야, 지훈이가 왜 네 지훈이야."
"너는 가만 좀 있어봐. 지훈아 알았지? 근데 넌 이미 얼굴이 대박이라 굳이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을 텐데... 그래도 네가 하겠다니 말리진 않을게."
"네가 말린다고 퍽이나 듣겠다."
"닥쳐. 우리 지훈이 누나가 가끔 연락할게! 공부하다 힘들면 얘기해. 커피도 사다줄게!"

땅콩 커피 안 먹는데. 다니엘은 세미의 말이 끝나는 족족 시비를 걸었지만 세미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지훈 본인도 아닌 제 3자가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밝힌 건데도 세미는 마지막까지 쿨했다. 저 누나 진짜 머찌다... 지훈은 휘휘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세미에게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 지경이었다. 세미가 사라진 계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훈 앞으로 다니엘의 큰 손이 드리웠다.

"그만 보고 가자 이제."
"세미 누나 성격 진짜 좋은 거 같아."
"땅콩 지금 애인 앞에서 다른 여자 칭찬하는 거야?"
"야 여기 학교다?”
"땅콩이 질투나게 하잖아."
"아이 진짜... 애도 아니고."
"진짜 애 같이 해줘?"

다니엘은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이대로 가만 두면 복도 한복판에서 끌어안고 뽀뽀라도 할 것 같아 지훈은 식겁하며 달아났다. 저 불도저 같은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

이번 주말엔 하루종일 다니엘네서 게임을 하기로 했다. 오전 일찍 눈이 떠진 지훈은 아침도 먹지 않고 양치와 세수만 하고서 다니엘네로 넘어갔다. 아, 가기 전에 분홍색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건 잊지 않았다. 티비를 보던 엄마가 왜 굳이 잠옷에서 잠옷으로 갈아입냐며 별스럽게 쳐다봤지만 지훈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처음엔 정말 편해서 즐겨입는 거였다. 절대 귀여워 보일 심산으로 입은 게 아니었는데 볼 때마다 다니엘이 귀여워 죽으려고 하니 이젠 굳이 그 옷을 찾아입게 됐다. 물론 다니엘이 알게 되면 몇 날 며칠 놀려댈 게 뻔하니까 곧이곧대로 말하진 않을 지훈 혼자만의 비밀이다.

"다니엘, 자?"
"......"
"다니에엘."

역시나 다니엘의 방은 여지껏 한밤중이었다. 방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누가 봐도 일어날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방의 주인만 그걸 모르고 있다. 길쭉한 쿠션을 다리 사이에 끼워넣은 채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얼굴이 순했다. 지훈은 자석에 이끌리듯 침대 옆으로 다가가 털썩 몸을 앉혔다. 매끈하고 말랑한 볼을 몇 번 쿡쿡 찌르니 안고 있는 쿠션에 얼굴을 부비면서 지훈쪽으로 몸을 틀어 눕는다. 자고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라 지훈의 심장이 얕게 두근거렸다. 이 와중에 순한 얼굴이랑 벗고 있는 상체의 갭이 너무 커서 더 그렇기도 했고.

"강다니엘 일어나."
"응..."
"대답만 하지 말구 일어나. 눈 떠봐."
"응......"

잠꼬대에 더 가까운 대답이었다. 지훈은 몇 번 더 볼을 콕콕 찔러보다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방 구경이나 할까 싶었는데 바로 어제까지도 같이 있었던 곳에 새삼스레 구경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책상 앞에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강다니엘의 책상답게 만화책이며 게임기며 젤리 봉지며 온갖 잡다한 것들이 늘어져 있다. 그래도 집안일은 깔끔히 잘 하더만, 본인만의 영역에선 아직 원래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나 보다. 지훈은 만화책을 읽다 다니엘을 깨우고, 포기하고 게임을 하다 다니엘을 깨우고, 또 포기하고 중학교 앨범을 구경하다 다니엘을 깨우길 반복했다. 이 정도면 깰 법도 한데 잠탱이 다니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진짜. 강다니엘 일어나라고오."
"......"
"너 어제 뭐하고 잤어. 나 가고 야동이라도 봤냐?"
"......"
"야 나 심심해. 다니엘 눈 좀 떠봐."

다니엘의 집에 들어온 지도 벌써 한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훈은 서서히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침대 맡에 자리했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말간 얼굴이 이젠 얄미워 보이기까지 한다. 지훈은 손을 들어 다니엘의 말랑한 볼을 꼬집었다. 세상 모르고 자면서도 아프긴 한지 다니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헤헤, 재밌다. 다니엘의 반응에 재미가 들린 지훈은 아예 두 손으로 다니엘의 얼굴을 마구 괴롭혔다. 맨날 다니엘만 제 얼굴을 만졌지 이렇게 지훈이 먼저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손 안에서 이리저리 만져지는 말랑한 느낌이 좋았다. 이래서 강다니엘이 맨날 내 얼굴 만졌나? 제 얼굴에서 손을 못 떼던 다니엘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으음......"
"일어나. 일어나라 강다니엘."
"아 쫌. 제발..."
"......"

조금씩 반응을 보이던 다니엘이 지훈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여전히 눈은 감겨 있었지만 다니엘의 찌푸려진 눈썹과 미간과 눈은 '나 지금 짜증났다' 를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다. 지훈은 허공에 손을 든 채 행동을 멈췄다. 얘 지금... 나한테 짜증낸 거야? 당황하던 것도 잠시 지훈의 눈 또한 팍 찌푸려졌다.

"야, 일어나라니까? 진짜 안 일어날 거야?"
"어..."
"씨... 나 갈 거야."
"응..."
"진짜 간다. 장난 아니야."
"응......"

이미 잠에 만취해버린 다니엘은 지훈이 지금 뭐라는지도, 또 본인이 뭐라는지도 몰랐다. 지훈은 다니엘을 삐죽삐죽 노려보다 그대로 집을 나와버렸다. 잠이 그렇게 좋으면 잠이랑 사귀시지. 저 덩치만 큰 개새끼. 웅얼웅얼 다니엘을 씹으며 제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꾸만 유치한 욕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저 개새끼 나밖에 없다고 나 없으면 죽는다고 지랄 염병을 할 땐 언제고 -그런 적 없음- 이제 난 다 잡은 물고기다 이거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여념이 없다. 별거 아닌 일에도 서운함이 퐁퐁 솟구치는 첫사랑에 빠진 지훈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니엘은 완전히 잠에서 깼다. 어제 지훈이 돌아간 뒤 만화책을 끝까지 다 읽느라 해 뜰 때쯤에 잠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말끔히 샤워를 하고 천하태평하게 식빵 하나를 꺼내물던 다니엘은 문득 지훈이 떠올랐다. 잠결에 어렴풋이 보이던 지훈의 동글동글한 얼굴과 지훈에게 짜증을 내던 자신, 그리고 역시나 잠결에 어렴풋이 보였던 지훈의 충격받은 얼굴까지. 다니엘은 곧장 일어나 집을 나섰다. 손에는 지훈이가 좋아하는 지훈이처럼 보들보들한 우유식빵 한 봉지와 대용량 딸기잼이 통째로 들려 있었다.

쾅쾅.

주말이면 부모님이 부부 동반 모임을 가셔 낮엔 지훈 혼자 집에 있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다니엘은 망설임없이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동시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만 부정적인 생각만 다 하고 있던 지훈은 경기를 일으켰다. 어떤 미친놈이 남의 집 대문을 저따구로 두드려?

쾅쾅쾅!

"아 누구세요!"

쾅쾅쾅!

가뜩이나 예민한데 더욱 짜증이 올라온 지훈은 이불을 박차고 현관을 나섰다. 어떤 미친놈인지 내가 아주 가만 안 둘 거야. 씩씩대며 대문으로 다가가던 지훈의 걸음이 뚝 멈췄다. 대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너무너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토끼 밥 주러 왔는데요."

저 낮으면서도 웃음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는 이리로 들으나 저리로 들으나 강다니엘이 확실했다. 까칠해진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을 땐 언제고 대문 안쪽이 조용해졌다. 다니엘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으며 지훈을 재촉했다.

"얼른 열어주세요. 토끼 배고프겠다."
"...잠은 다 깨셨구요?"
"네. 빨리 열어주세요. 얼굴 보고 싶다."
"......"

지훈은 난 네가 처잘 때 원없이 봤으니 꺼지라고 하려다 말았다. 왜냐면 지금 존나 심쿵했으니까.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급하게 정리했다. 그새 꼬물꼬물 올라오려는 광대를 내리누르고 대문을 열었다. 다니엘이 가장 좋아하는 위아래 분홍 트레이닝복을 입고 빼초롬히 서 있는 지훈의 모습에 다니엘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삐친 게 남아 있는 얼굴도 너무 귀여웠다. 다니엘은 들고 있던 우유식빵과 딸기잼을 내려놓고 지훈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고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둘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으 진짜 귀여워, 박지훈!"
"왜 이래!"
"내가 아까 좀 짜증냈지."
"알긴 아냐? 근데 좀 놔봐. 숨 막혀."
"잠에 취해가지고 정신이 없었어. 미안."

곧장 인정하고 사과하니 지훈은 또 할 말이 없어진다. 품에 안긴 채 입술만 오물거리자 다니엘은 또 소리 내서 웃었다. 어깨 근처에 입술이 오물거리는 게 다 느껴졌다. 다니엘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 지훈의 입술에 쪽쪽 뽀뽀했다. 야아, 대문, 대문 다, 안, 닫, 혔어...! 입술이 떼어질 때마다 지훈이 다급히 외치기에 다니엘은 손만 뒤로 뻗어 문을 닫았다.

"잠깐만! 들어가서 해, 들어가서."
"뭘 들어가서 해? 땅콩 진짜 응큼하다."
"...씨발, 너 집 가."
"나 가라고? 그래 그럼. 땅콩 이거 먹고."
"......"

가란다고 진짜 가면 분명 또 당황할 걸 알았기에 다니엘은 태연하게 우유식빵과 딸기잼을 건네주곤 등을 돌렸다. 반사적으로 올라온 지훈의 손이 차마 다니엘을 잡진 못하고 움찔거렸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지훈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다니엘은 대문 밖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인사했다. 그대로 맞은편 집으로 걸어가는데 뒤에 주춤주춤 지훈이 따라붙었다.

"왜 따라와."
"...뭐."
"땅콩이 나 집 가라며."
"아니... 너네 집 가자고, 같이..."

지훈은 홀랑 말을 바꾸곤 다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다니엘이야 뭐, 씰룩이는 입꼬리를 막아보려 했지만 대실패였다. 급하게 대문을 열고 지훈을 끌어당겼다. 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쉴 새 없이 쪽쪽 소리가 울려퍼졌다. 종국엔 그 쪽쪽 소리가 조금 질척거리게 바뀌기도 했다. 지훈에게 들려 있던 우유식빵과 딸기잼은 집에 들어가는 순간 아무데나 내팽개쳤다. 지금 그깟 우유식빵이 중요하랴. 눈앞에 우유식빵보다 더 보들보들한 지훈이 있는데. 주말의 늦은 오후는 둘의 쪽쪽이는 소리와 함께 느긋하게 흘러갔다.





녤윙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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