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손책조조 메인으로 왕윤 짝사랑하는 조조가 소량 나옵니다.

50화 이후에 다시 만난 둘에 대한 망상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레히삼 완결까지 보지 않으신 분들께선 네타 주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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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잘못된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를 멈출 수 없었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눴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 병실 밖이었고, 다시 눈을 뜨니 병원 앞이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더라. 그 날만큼은 집이 넓고 쓸쓸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



핸드폰은 어찌나 울려대는지.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핸드폰 번호까지 냉큼 넘겨준 자신이 멍청해서 견딜 수 없었다. 무음으로 바꿔둔 다음 빛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둔다. 멍청한 녀석이 연락하든 말든. 하긴 그렇게 펄펄 날아다니는 녀석을 병실에 처박아 뒀으니 좀이 보통 쑤시지 않겠지. 하지만 그런 징징거림을 자기가 받아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조조. 자? 번호 가짜로 알려준 거 아닌가 해서 연락했지」

「이러라고 번호 준거 아니니까 환자는 잠이나 자.」

「아직 열 시도 안 된 건 알아?」

「그러면 누워서 두 시간 정도 버티면 자정이겠네. 나 출근해야 해. 답 안 한다.」

「조조.」

「조조」

「야」

「진짜 안 볼 거야?」

「너무 한다 진짜」

「나 잔다?」

「진짜 자?」



조조는 정말 답을 하지 않았고 일어나서야 잔뜩 쌓인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답장도 안 했다. 꼭 새로 생긴 장난감을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태도를 보면서 내내 한숨만 쉬었다. 내가 미쳤지. 하지만 이렇게 후회해봤자 제 손으로 번호를 넘겨준 것은 사실이었다. 정말 저 녀석을 만나고 되는 일이 없네. 조조는 괜히 손바닥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손책은 그로부터 족히 일주일은 더 병원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그동안 어마어마한 연락을 했다. 잘나가는 도장 후계자라는 속 편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매일매일 조조한테 얼굴 좀 보러오라고 성화를 부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뭐 나름대로 고민이 있겠지만, 적어도 매일매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밥 굶을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관장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사실 조조도 일 따위 하지 않고 놀고먹어도 된다. 하지만 경찰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심장에 내려앉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 속 편한 녀석을 관찰하면서 꽉꽉 틀어막은 심장을 약간씩 풀어주곤 했다.



「나 멀쩡하다니까 걱정하지마」

「걱정 안 해.」

「며칠 못 볼 수 있는데 내 생각하고?」



이럴 땐 그냥 대답을 안 하면 된다. 이 녀석은 천천히 알아가자는 말이 무색하게 일직선으로 심장을 두드린다. 조조는 이런 상황이 영 껄끄러웠다. 이렇게 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가족조차 자신에게 이러지 않는데 저 바보 같은 녀석은 자신에게서 뭘 보고 저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모른 척 냉정하게 굴었으면 잠깐 다친 상처나 낫는 것처럼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손책은 문자 몇 통을 더 보냈다.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그랬다. 꼭 처음 대화를 할 사람이 생긴 것처럼 굴더니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훌쩍 사라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좀 섭섭하다고 해야 할지.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티가 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



경찰이란 직업상 전화를 못 받는 일이 잦았다. 큰일이 없을 땐 진동으로 두곤 했지만, 손책이 어찌나 전화를 걸어대는지 며칠 전부턴 아예 무음으로 바꿔버렸다. 부재중 전화가 쌓이는 것이 당연해진다. 조조의 핸드폰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낯선 경험이 계속되면 익숙해지곤 한다. 조조는 잔뜩 쌓인 부재중 전화를 지우면서 한숨을 쉬었다. 마친 그때 다시 전화가 온다.



“…….”



받을까. 말까. 솔직히 고만을 많이 했다. 그냥 모른 척하자. 그렇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던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와, 이제 받네. 잘 있었어?”

“…….”

“조조?”

“…….”



하필 이럴 때 손이 미끄러질 일이 있나. 예전 같았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누를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고민을 한다. 이대로 받아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핸드폰은 자꾸 시끄러워진다.



“왜 대답이 없어?”

“…….”

“조조?”

“왜?”

“아…난 안 들리는 줄 알았네.”

“이렇게 자꾸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같이 알아가자며.”

“그 말에 이렇게 시시때때로 귀찮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진 않아.”

“그래도. 궁금하잖아. 뭐 하고 사는지.”

“…….”

“잠깐 끊지 마. 끊으면 다시 전화…아니지. 찾아갈 거니까.”



눈치는 귀신같이 밝다. 조조가 통화 종료 버튼에 손을 댄 것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한숨을 푹 쉬고 다시 헛소리를 들었다. 뭐 이렇게 좋을 일이 많을까. 조조는 스스로가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늘 삶은 퍽퍽했고, 설계도가 그려진 것처럼 움직이는 쪽이 좋았다. 그런데 이 무술 바보는 이런 삶에서 뭐 그리 재밌는 것을 발견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궁금해한다.



“그래. 들어주지. 무슨 일이야.”

“오늘 도원관 올 거지?”

“…설마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지금까지 한 건가?”

“왜? 중요한 일이잖아.”

“…….”

“난 네가 마음에 들어. 분명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데, 그걸 알기 위해선 최대한 붙어 다니는 쪽이 맞는다고 보거든.”

“그러니까…….”

“초선이 데리고 올 거지? 그럼 나도 도원관에 가 있으마!”

“사람 말을 좀…….”

“유비가 안 그래도 꼭 밥을 먹여야 한다고 벼르고 있으니까 꼭 와.”

“…….”

“알겠다.”

“그래. 이따 봐?”

“그래. 거기서 만나도록 하지.”



누가 들으면 수사 상황을 보고받는 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약속 잡기는 처음이었다. 조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핸드폰은 넣었다. 손책이 워낙 활활 타올라서 그런지 그 옆에 있는 조조는 상대적으로 더 차갑게 느껴졌다.



“뭐하냐?”

“예?”

“오랜만에 통화하는 걸 봐서. 요새는 괜찮고?”

“예. 뭐. 늘 그렇습니다.”

“그렇게 고분고분 말하면 얼마나 좋냐.”

“지금은 선배랑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요. 안 그럽니까.”

“새끼…진짜.”



툭툭 걸리는 미운 소리만 골라 하지만, 죽은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왕윤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랬다. 조조가 특히 그와 가족에게 신경을 썼다는 것도 알았다. 다들 나름대로 애도를 표하고 있었고, 조조가 초선이를 잘 돌봐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도 일찍 들어가?”

“예. 초선이랑 약속해서요.”

“그래. 아직은 그럴 때지. 그래도 다행이야.”

“…….”

“네가 많이 신경 써줘서. 그거 반만 우리한테 해주면 안 되냐?”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새끼.”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 조조는 시계를 보면서 초선이가 하원 할 시간을 센다.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초선이 앞에 나타나길 원했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모두 지워야 했다. 경찰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 싶지만, 이상할 정도로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경찰이 게으르게 보여도 평화로운 쪽이 나았다. 악을 모두 멸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놈들이 꼬리를 말고 숨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만드는 쪽이 좋았다.



“도원관에 가면…….”



또 시끄러운 녀석들이 한가득 있겠지. 이런 소란스러움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강제로라도 몸이 먼저 반응할 것 같았다. 조조는 경찰서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초선이 유치원까지는 약간 거리가 있었지만, 시간이 남으니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혼자 걷는 것만큼 청승맞은 것이 없다고 누가 그랬는데. 누구였을까. 이젠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당연해졌다. 조조는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곱씹으면서 걸었다.




**




“어, 조조 왔네. 오랜만이야!”

“사부님 안녕하세요!”

“초선이도 안녕?”



조조의 손을 잡고 뛰어들어온 아이는 한없이 밝았다. 손책에게 그전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결과야 어찌 되었던지 아이가 행복하다면 그만이었다. 조조는 어느새 말을 놓아버린 유비를 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표정에 비교하면 지금은 한없이 풀어져 있었다. 유비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초선이와 인사하기에 바빴다.



“오늘은 공손찬 사범님이 비룡권 가르쳐 주실 거야.”

“정말요? 우와! 재밌겠다.”

“원래 굉장히 바쁘신데 오늘은 시간이 있대. 초선이도 신나지?”

“네!”

“그럼 가서 준비 운동해야지?”

“알겠습니다. 사부님!”



아이는 마냥 씩씩했다. 조조가 안 들어와서 한참 시무룩했던 아이는 꽃처럼 다시 피었다. 도원관에서 운동을 하는 것도 좋아하니 서로 다 잘된 일이 분명했다. 조조는 기둥에 기댄 채 초선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게 뭐가 어려워서 같이 못 왔을까. 머릿속에 답답하게 뭉쳐있던 것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조조. 왔냐!”

“…….”

“손책 왔어?”

“이 몸이 빠질 수 없지. 근데 왜 아직도 둘이 서먹해?”

“그럼 친할 거로 생각한…….”

“밥 먹을래?”

“…….”

“역시 여기 와선 밥을 먹어야지. 내가 오늘은 특별히 조조도 불렀어.”

“아니…그러니까 난.”

“애들 수업하는데 조용히 하고 어서 들어와. 어서.”

“손책…너.”



손책이 조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쭉 끌어당긴다. 아프다고 누워있던 힘도 못 이겼는데, 지금은 버틸 수도 없이 끌려갔다. 둘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사람은 비슷한 성품끼리 친구가 된다고 하는데, 손책은 자신에게서 어떤 점을 발견했는지. 정말 궁금했다.



“상향이가 고기를 보내줘서 오늘은 고기 요리를 할 거야.”

“상향이가 그런 걸 보냈어?”

“난 괜찮다는데, 자꾸 오빠가 밥 축내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잘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빨리 반찬 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조조는 식탁에 앉아서도 별말 하지 않았다. 손책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눈을 크게 뜨면서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어지간했다. 친구 간의 우정인가. 아니면 다른 감정인가. 조조는 이럴 때마다 가슴이 뿌듯하게 조여왔다. 이런 감정은 예전에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눈치 없는 심장이 쿵쿵 뛰기 바빴다. 심장 소리가 손을 타고 손책에게 들릴 거 같았다.



“조조는 밥 먹었어?”

“우리가 언제부터…그렇게.”

“손책 친구면 내 친구지 뭐. 하긴 여기서는 보호자님이라고 불러야 하긴 하지만…….”

“상관없다. 호칭 따위.”

“그치? 그럼 조조라고 부를게.”



헤헤. 유비는 늘 한결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조조는 그런 얼굴과 손책을 번갈아 보다 밥그릇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라리 이쪽이 덜 어지러웠다. 방금 담은 밥에선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처음 이곳에서 밥을 먹을 땐 어땠더라.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뭘 어떻게 먹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아닌 사람과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얼마 만인지. 조조는 자꾸 젓가락이 헛나갈 것 같아서 속으로 땀을 흘렸다. 겨우겨우 밥을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유비가 청경채와 같이 먹으라며 앞으로 밀어준 고기를 집어 든다. 손님 대접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며 자기는 콩나물만 집어 먹는다.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고기를 좋아할 녀석이 말이다.



‘…응?’



조조는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까먹었다. 유비가 고기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이 생각이 든 순간 고기를 집어 든 젓가락이 공중에 우뚝 멈췄다. 맨밥이 꿀꺽 넘어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조조는 자신이 멀티태스킹이 잘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요새 들어선 그런 자신감이 점점 사라졌다.



“조조?”

“쟤 또 왜 저래.”

“…….”

“이봐.”

“어…아니다. 잠시.”



허겁지겁 고기를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 무슨 맛으로 반찬을 씹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을 퍼먹는다. 그러다 목 막힌다며 누군가 건네준 물을 받아들고 나서야 진정했다.



“저 녀석이 요새 좀 이상하다니까.”

“정말?”

“그래.”

“너…유비.”

“응?”

“아니다. 내가 어딘가에서 들었겠지.”

“이상하지?”



둘은 친한 친구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조차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조조는 이렇게 혼자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저놈은 팔자가 편해도 너무 편했다. 어색하지만 조금은 나아진 식사 시간이 끝났다. 조조는 유비가 따라주는 차를 잠자코 받아마셨다.



“애들이…몇 명이지?”

“응?”

“밥을 얻어먹었으니 밥값을 해야지.”

“아니야. 그저 내가 좋아서…….”

“열다섯 명일걸?”

“그래?”

“아이참. 손책. 그런 걸 왜.”

“알았다.”



조조는 슬쩍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비는 발을 동동 구르다 그릇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펄쩍 뛰었다. 그러다 거품이 잔뜩 묻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러 들어갔고, 손책은 조조 뒤를 따라붙었다. 조조는 꼭 경찰 업무를 보는 것처럼 밖으로 나왔다.



“조조.”

“…말 걸지 마.”

“좋았으면서. 가끔 여기 와서 밥 먹어.”

“내가 밥 못 먹고 다니는 줄 아는 건가?”

“아니. 같이 먹으면 좋잖아.”

“…….”

“안 그래?”

“그렇게 사람 떠보는 말은 그만둬줬으면 좋겠군.”

“흐음.”

“네 녀석 때문에 내 생활이 아주 엉망이다. 언젠간 이 상황에 대한 보상을 받아낼 거다.”

“언제든지.”

“…….”



조조가 도착한 곳은 마트였다. 아이 수만큼 아이스크림을 담고 과자도 넉넉하게 고른다. 아니지 어른들 먹을 것도 골랐다. 손책은 잽싸게 결제된 간식을 비닐에 집어넣으면서 조조 옆에 바짝 붙었다. 덩치 큰 어른 둘이서 바짝 붙어서 하는 일이 아이스크림 봉지에 집어넣는 거였다.



“내가 샀으니 그건 네 놈이 들어.”

“이정도야. 무술인에게는 식은 죽 먹기지.”

“그래. 힘세니까 좋은 점이 있네.”

“지금 웃었지?”

“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내가 봤는데.”

“…….”

“에이.”



손책의 한마디에 억지로 입매를 정리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다가와 입꼬리를 죽 올려버린다. 뭐. 하는. 거야. 조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웃고 다녀. 그게 훨씬 보기 좋네.”

“네 녀석이 이러지만 않으면 웃을 날이 생기겠지.”



사람끼리 유대감이 생긴다는 것은 이런 걸까. 내내 외로웠던 조조는 사실 사람 간의 거리를 재는 것을 힘들어했다. 어릴 적 충격으로 마음을 열기 꺼렸고, 자신의 겉모습과 배경을 보고 달려드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손책은 조금 달랐다. 아무리 꽁꽁 닫고 웅크려도 너무 쉽게 모든 것을 해체해버린다. 꼭 태양 같아서 마음이 저절로 풀어진다. 춥지만 혼자 웅크리고 있으면 버틸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손책을 만나고 나니 그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네 녀석 몫은 없다.”

“뭐? 이 몸이 이렇게 들어다 주는데.”

“없어.”

“조조. 너무하네.”



농담을 주고받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조조는 자꾸 스며드는 따뜻한 기운을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못한 애매한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면 변화가 두려웠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엔 부담스러웠지만, 이것이 사라지면 더 추워진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런 조조 옆에 서 있는 손책은 한결같았다. 한눈에 조조의 깊은 골짜기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며 사람을 사귀지 않았다. 상처가 많으면 보듬어주면 되고, 추우면 서로 체온을 나누면 된다. 손책은 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할 일이 없는 녀석이 맞다.


조조는 자신의 눈썰미에 약간 감탄했다. 사실 척 봐서 모를 리 없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생각보다는 똑똑할 거라는 믿음 정도? 물론 손책을 만난 것이 병원이었고, 그다음은 도원 관에서 밥을 얻어먹을 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그간 고민이 우스울 정도로 쓸데없는 것으로 변했다. 손책은 한결같은데, 오히려 그놈에게 휘둘리는 쪽은 자신이었다.



“…….”



그렇게 생각할수록 조조는 자신이 많이 물러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따뜻함에 이끌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강렬한 태양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곧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왕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런 것일까. 조조의 눈에 가득 쌓인 만년설이 조금씩 녹아서 흘러내렸다. 차가운 물이 가끔 눈을 통해 흘러내려서 심장을 적신다. 이렇게 단단한 얼음이 다 녹아내리면 봄이 올까 싶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순간 볼에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동시에 닿았다. 멍하니 시선이 풀어져 있던 눈에 또렷하게 빛이 생겼다.



“…뭐야.”

“커피.”

“…….”

“뜨거운 거 마실래. 아니면 찬 거?”

“…….”

“어느 쪽?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하나씩 사 왔는데.”

“뜨거운 거.”

“그래? 내가 그럼 찬 거 먹지 뭐.”



손책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내민다. 자. 코앞까지 들이민 캔을 거절하지 못하고 잠자코 받아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손바닥에 뜨끈한 열기가 올라온다. 자기도 모르게 캔을 만지작거린다. 손책은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캔을 땄다.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벌컥벌컥 마시면서 눈짓으로 어서 마시라고 재촉한다. 캔 커피 사주면서 참 유난도 유난이었다.



“이런 거 싫어하진 않지?”

“왜 그렇게 생각해.”

“아니. 뭐 그냥.”

“익숙하니까 괜찮아.”



둘은 한참 말없이 커피만 홀짝인다. 보통 때라면 질색하면서 멀어질 텐데, 어느샌가 이렇게 둘이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조조는 그저 이 녀석이 더 귀찮게 할까 봐 미리 어울려주는 거다. 이렇게 말하곤 했지만, 누가 봐도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둘은 조금 더 가까워졌고, 예전보다 쉽게 꿈 이야기가 할 수 있었다. 꿈이란 것은 허상이라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겨우 붙잡은 아주 작은 기억 하나씩을 들고 와서 맞춰보곤 했다.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었다.



“…누가 자꾸 보인다고?”

“그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날 원망하더군.”

“경찰 쪽 관련된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해?”

“그렇겠지. 그 녀석들이라면 꿈까지 찾아와서 소리를 지를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니까.”

“난 원망하는 건 아니고, 자꾸 걱정하는 것 같던데…….”

“걱정?”

“그래. 뭘 어떻게 하라고…아. 또 기억이 안 나.”

“나도 그렇다. 가끔 선배가 보이고, 모르는 사람이 있고. 그뿐이야. 일어나면 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지.”

“…….”

“선배는 날 원망하는 걸까.”

“누구…….”

“있어. 내가 평생 벗지 못할 잘못을 한 사람.”

“…….”



유난히 조조가 안쓰러워 보인다. 한 번도 이렇게 힘들단 소리를 하지 않았던 녀석이라서 더 걱정된다. 손책은 스스로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조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올 수 있다. 걱정되어서 한마디씩 얹는 것은 당사자에겐 이기기 힘든 짐일 수 있었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아무도 몰랐다.


결국, 손책이 가장 잘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비어있는 손을 들어서 어깨를 감싸면서 품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몇 번 두드려 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사람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조조의 표정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넌 생각보다 좋은 놈이야.”

“…….”

“유비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그 녀석 눈에 들었으면 틀림없어.”

“입바른 소리는 안 해도 괜찮아.”

“늘 그렇지.”

“…….”



생각보다 손책의 품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 편하게 기대있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캔을 툭툭 쳤다. 손책은 이제 조조의 성격을 잘 안다.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종류가 있었다. 지금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으니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뭐야. 치워.”

“왜?”

“…….”

“아까랑 별로 다를 거 없잖아.”

“받아들인 내가 잘못이군.”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유비랑 친구라며.”

“…….”

“그럼 나랑도 친구지.”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손책은 완전히 조조를 끌어안은 채 쭉 잡아당겼다. 힘만 세서. 조조의 입에선 끊임없이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굴러 나왔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손책은 꼭 뒤에서 끌어안아서 목덜미에 코를 묻는 것을 좋아했다. 개새끼도 아니고. 조조는 이럴 때마다 한마디씩 얹었다. 코끝이 목덜미에 닿으면 그 밑으로 숨결이 느껴졌다. 손책은 숨소리도 뜨거웠다. 이렇게 안겨있으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찌르르한 감각이 뭔지도 모를 만큼 온몸의 신경이 목덜미로 향했다.



“귀찮게…….”

“그러면서도 가만히 있더라.”

“…….”

“어…야!”



경찰이 그냥 된 것은 아닌지 품 안에서 휙 빠져나와서 팔을 잡는다. 꼭 수갑을 채울 것처럼 팔을 꺾으려는 순간 손책이 반격하며 두 손을 꾹 잡아 눌렀다. 아. 조조는 눈을 찌푸렸다. 힘만 세 가지고. 뭐. 조조가 정말 화가 났다면 이런 장난조차 받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 팔을 뒤로 꺾어서 수갑을 채웠겠지. 손책은 조조의 얼굴을 보면서 마냥 웃었다.



“정말 귀찮은 녀석이야.”

“그래도 심심하진 않지?”

“…….”

“나중에 강동관 놀러 와서 무술이나 배워라. 경찰이 그게 뭐냐.”

“내가 뭘.”

“나랑 대결하면 내가 이길 자신이 있다.”

“꿈도 크군.”

“그럴까?”

“그래. 나 들어가 봐야 해. 그만 놔.”

“…….”



생각보다 순순히 손을 놔준다. 이러면 꼭 뒤에 따라붙는 말이 있겠지만 이젠 그것마저 익숙했다. 다들 아는데 손책과 조조만 모른다.



“오늘은 일이 있으니까 기다리지 마. 괜히 경찰서 앞에서 얼쩡거리면 그대로 잡아 가둘 거니까.”

“…….”

“간다.”

“그래. 다음에 또 봐.”

“커피 잘 마셨어.”

“그래!”



일부러 손을 붕붕 흔들지만, 자리를 떠난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조조 성격을 아니까 이런 거로 상처를 받지 않는다. 서로 의지가 되면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운동하면 강제로 긍정 에너지가 주입되는 모양이다. 손책은 빈 캔을 구기면서 조조가 사라진 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동생이 많아서일까. 이리저리 치대는 것이 익숙하다. 그게 조조와 다른 점이었다. 닮은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어 보이는 둘은 서로 섞이면서 묘한 색깔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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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오 연성 창고 트위터 : @hwanwol_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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