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수분클임 님 (@ultramoistspa) https://5dkdl.postype.com/post/544317

02. 18 님 (@18_18_) https://onenine18.postype.com/post/582145/


존잘님들과 함께 하는 본즈커크 릴레이!

어쩌다 보니 이번 화에는 본즈가 안 나오지만 본즈커크 맞습니다 ㅠ_ㅠ) 

즐겁게 읽으 실 수 있음 좋겠어요. 언제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임스는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레너드 맥코이가 잠든 동안 위조 신분증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끌어모은 지 오래였다. 빈센트 스티븐스. 뒷골목에 널리 퍼진 이름은 아니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긴 자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다친 적이 없거나, 목숨을 잃은 자들뿐이었다. 비합법적인 의료 행위를 닥치는 대로 해낸 남자. 살릴 수 있는 것은 무조건 살린다는 목적 의식은 이미 정평이 난 지 오래였다. 피와 화약으로 진창인 바닥에서 제대로 된 의사를 구하기 힘든 마당에 등장한 진짜 의사였다. 외곬 기질이 다분해 자잘하게 적을 만들고 살던 케이지마저도 그가 온 뒤로 평판이 올랐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관계는 아니지만, 케이지가 뒤를 봐 주는 것처럼 은근히 싸고 돌았다는 증언도 있다. 그렇게 은근히 기대 아닌 기대를 쏟았다가 배신당했으니 꼭지가 돌만도 하지. 한 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제임스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굳이 따지자면 레너드의 대처는 배신이 아니다. 살릴 수 있다면 전력으로 살리는 대신, 살릴 수 없다면 냉철하게 버린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따랐다. 그래도 케이지 일이라면 한 번이라도 망설였을 텐데……. 제임스는 깨끗하게 닦인 구두코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남자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스팍의 손이 천천히 만년필을 쥐었다. 스팍의 집무실이 생겼을 때 -그전까지는 초라하고, 언제 바뀔지 모르는 사무실에 불과했으므로- 제임스가 선물한 물건이었다. 적당히 도톰한 미색지 위로 검은 궤적이 그려졌다. 레너드 맥코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온 제임스의 시야에 날카롭고 깔끔한 필체가 담겼다.

“세탁시켜 줘야지.”

두 손으로 원목 탁상 위를 짚은 제임스가 고개를 들었다. 스팍의 눈동자는 언제나 덤덤하다 못해 매끄러웠다. 아무것도 침범할 수 없는 무결함. 견고한 눈빛은 제임스에게 바치는 충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알았습니다.”

명료한 대답을 마친 스팍은 시선을 내리 깔았다. 잠금이 걸린 서랍을 열자 두툼한 서류가 나타났다. 베이지색 표지에는 빈센트 스티븐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몇 장 더 종이가 넘어가며 팔락팔락 스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곧 환한 빛 아래에 레너드 맥코이라는 이름이 드러났다. 사실, 빈센트 스티븐스부터 레너드 맥코이까지, 이미 간단한 정보는 제임스에게 전달한 지 오래였다. 

스팍은 매끄러운 종잇장을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제임스가 세탁을 결정했다는 건, 그를 무리 안에 편입시킬 준비를 하겠다는 의미다. 동행한 자리에서 레너드가 진실을 고백했으니, 일단 기본적인 조건도 충족시킨 셈이었다. 번거롭게 속내를 파악하거나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주치의가 있기야 하지만, 하나 더 있어서 나쁠 것도 없을 테다. 레너드 맥코이. 스팍은 그의 이력을 천천히, 다시 눈에 담았다. 훌륭한 의사를 아버지로 두고 자라, 의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유명 대학 병원에, 꾸준한 논문 발표를 비롯한 많은 성공들. 심지어 거기에 걸맞는 겸손함과 따뜻한 심장을 겸비했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분명 순탄했을 삶이었다. 오점 하나 없이, 순수한 선의로 세상을 구하는 삶. 이 얼마나 이상적인 의사인가.

“차 한 잔 하시죠, 짐.”

“흐음, 알았어.”

풀썩, 제임스는 도로 의자에 파묻히듯 앉았다. 힐끔 눈을 들어 무심하게 하얀 찻잔을 든 제임스의 손을 바라본 스팍의 눈이 다시 지면을 향했다. 약간의 하자가 있기는 해도 레너드는 세탁해서 나쁠 게 없는 대상이다. 케이지는 필수적으로 제거해야 했고, 일단 거기까지 해결되면 제임스의 사업도 안정기에 돌입한다. 심지어 그들이 하는 일의 특성상 주치의라는 건 차라리 많을수록 좋았다. 시기상으로나, 정황으로나, 레너드 맥코이는 가장 적절한 트로피였다. 

“빈센트 스티븐스만 지우면 될까요?”

“그래야지. 아예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는 아깝잖아. 이런 전적 갖고 있어 봐야 피곤할 테고.” 

스팍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평소에는 의견 교류가 필요 이상으로 활발한 관계인데, 이런 식으로 제임스가 정말로 원하는 게 생겼을 때에는 의사 결정이 아주 빨랐다. 남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스팍이 휘둘린다고 자주 오해했다. 물론, 스팍이 제임스에게 한수 접고 들어가는 경우가 전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경우에는 서로 양보한 만큼의 보상이 존재했다. 이렇게 결정이 쉽지도 않았다. 이건, 오히려 제임스의 철저한 준비에 의해 스팍이 동조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가까웠다. 원하는 게 생기면 기어코 손에 넣고야 마는 제임스 커크가,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원하게 되는 순간, 스팍은 거기에 깔린 적절함을 판단했다. 

“우후라에게 맡기겠습니다. 자료 선별 능력과 해킹 실력이 상당히 좋더군요.” 

그리고 보통, 제임스는 백이면 백 적절함을 만들어냈다. 흔히 말하는 운명과도 같이. 

“좋아. 정보 조작 외에 현장 일은 스코티에게 넘겨 줘, 저녁 즈음에. 어제 나랑 많이 마셨거든. 아직 자고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티포트를 기울여 찻잔을 가득 채웠다. 새하얀 몸체에 주둥이 부분과 뚜껑 끄트머리 부분에만 금테가 둘러진 티포트는 스팍의 애장품 중 하나였다. 티포트와 똑같이 입술이 닿는 부분에 금테를 두른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제임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팍.”

“네, 짐.”

“내 죽음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날 살리려고 할 거야?”

스팍의 짙은 눈썹이 까닥였다. 일자로 가지런히 늘어선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애초에 그럴 상황이 없을 겁니다.”

“본즈는 어떨 것 같아?”

입꼬리를 말아올린 제임스가 장난스레 물었다. 스팍의 눈빛이 단단하게 굳은 게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분주하게 굴러가고 있을 속내가 느껴졌다. 조금 팽팽하게 긴장한 공기가 제임스의 뺨을 간질였다. 문득 들여다 본 수색이 불그스름한 주홍빛을 띄고 있었다. 스팍의 책상과 비슷한 색이었다.

“무의미한 질문을 하는군요, 짐. 그런 상황이 오면 레너드 맥코이에게 당신을 맡길 생각이 없습니다. 마음가짐은 업무 능력에도 영향을 줍니다. 거기에서 그가 가지는 단점은 명백하죠. 앞으로 조직 내에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전담하고 있는 주치의가 당신에게 보이는 믿음과 기대가 훨씬 더 강합니다.”

“마음가짐으로는 스팍이 주치의를 해야겠군.”

실소를 흘린 제임스는 뭐가 좋은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화려한 외모에 산뜻한 걸음, 어린 나이, 명랑한 어조로 가벼운 인상을 남기는 제임스 커크. 보기 좋은 껍데기에 속아 실수를 저지르면, 그게 누구든 간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제임스는 순진해 보이는 외양과 다르게 굉장히 계산이 빨랐다. 마음 속에 함정도, 잠금 장치도 단계마다 다양하게 구축되어 있다. 스팍은 그렇기에 제임스를 선택했다. 그는 이상을 말하면서 현실을 보는 남자였다. 멍청하고 얼빠진 풋내기들과 엄격히 차별되는 일면이 있다. 예를 들면, 자기 수명을 깎아서라도 이루려고 하는 의지와 행동의 일치 같은 것들.

“재차 강조합니다. 짐, 그런 상황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제임스를 잃을 수는 없다. 스팍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면서도 평정을 유지했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심력을 낭비하는 머저리가 될 바에야 제임스의 안전 장치를 늘리는 계획을 설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서류를 밀봉한 스팍이 핸드폰을 열었다. [자정까지 집무실로.] 메시지 두 건 전송 완료가 화면에 떴다.

“레너드 맥코이가 마음에 안 들어?”

“주치의 후보가 생긴 점은 마음에 듭니다.”

“말하는 게 많이 늘었네.”

“당신 덕이죠, 짐.”

제임스는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는 스팍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이 전매 특허라는 제임스 커크는 그에 걸맞게 웃는 얼굴의 종류만 해도 셀 수 없게 많았다. 그 방대한 자료를 읽는 데에 어느 정도 도가 튼 스팍은 제 잔을 묵묵히 채웠다. 

통상, 변화라는 놈은 폭풍과 많이 닮았다. 서서히 진행되어 어느날 모든 게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정신없이 들이닥쳐 사람의 혼을 빼놓기 일쑤다. 핵심은 어떻게 흐름을 타느냐에 달려있다. 고삐를 잡을 것인가, 자신을 내맡길 것인가. 제임스는 유연하게 두 가지 방식을 혼용했다. 그렇다면 레너드 맥코이는? 스팍은 찻잔을 매만졌다. 그는 이제 막 추가된 변수였다. 처음부터 차지하는 비중이 큰 까닭에 계속 곱씹고, 계산하게 되기는 해도 저열한 구석은 -최소한 아직까지- 찾기 어려운 인물이고, 나름의 긍지가 있다. 어떤 의미로는 가여운 남자였다. 허나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뭐가 어쨌든 간에 제임스 커크의 날개 아래에 모인 게 중요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가능성을 판별하는 레너드의 능력은 썩 괜찮았다. 그만큼 절박한 것일 테니까. 이길 수 없는 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는 게 하나의 방법이다. 죽음과 게임한다는 게 성립 가능한지부터 따져야겠지만,  레너드가 가진 상처를 극단적으로 봉쇄하고 있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레너드 맥코이는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본즈는 말이야.”

물끄러미 스팍의 옆얼굴을 탐색하던 제임스가 말문을 텄다. 의아함이 서린 홍채는 어둑하고 깊다. 

“......?”

"날 구하게 될 거야.”

속삭이는 제임스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실내에 흐르는 은은한 차 향기가 그의 음성같았다. 스팍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대꾸했다. 

“그렇겠죠.”

“절대로 포기 못할걸, 죽어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선택한 사람들은,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일부를 내놓게 되니까요. 스팍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스팍은 제임스를 지독히 싫어했던 첫만남을 상기했다. 욕구에 충실하기만 하고, 책임은 모르고, 운에 기대 천재적인 두뇌를 낭비하기 바쁘던 철부지였다. 그런 어린 애가 멋대로 주변을 휘두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엮였다. 끊임없이 부딪히다가 정신 차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다. 제임스의 정체를 모른 채 술 친구로 지내다가 갑자기 스카웃된 스코티나, 천재성에 의해 격리되어 있던 체콥과는 달랐다. 그리고 늘 그러하듯이, 마찰이 결속으로 변하기 전에, 제임스는 선택권을 줬다. 네 의지로 나를 따라와. 그때만큼은 제임스도 유달리 빡빡하게 굴었다. 거절이라는 선택지 없이, 명령을 제안처럼 말하는 게 거슬리지 않다고 느낀 이상 제임스를 뿌리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모든 건 시간 문제였다. 레너드가 제임스에게 빠지는 일, 케이지가 무너지는 일, 일대를 제임스의 작은 왕국으로 만드는 일. 시간 순서를 고려하는 스팍의 가슴 아래 부근에서 진동이 왔다. 

[수신이 확인 되었습니다.] 작은 화면을 들여다 보는 스팍에게 제임스가 손을 흔들었다.

“난 이만 갈게. 본즈는 당분간 건물 밖으로 못 나가게 해.”

“술루와 제가 교대로 머물 겁니다.”

“음, 나만 빼놓고 너무 친해지지 마. 알았지?”

문 앞에 마주 보고 선 제임스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제법 가까운 두 사람 사이에서는 평온한 기류가 흘렀다. 어차피 몇 시간만 지나면 피나 술, 또는 피와 술을 기본으로 달고 나타날 제임스다. 스팍은 현재를 한껏 들이켰다. 스팍의 재킷 카라 부분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느리게 쓸어내리는 제임스 탓이었다. 

“태연하네, 스팍.”

“햇병아리 닥터에게는 효과적일지도 모르죠.”

재미없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제임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조직 내에서 스팍의 절제가 천성이라는 의견은 맞는 말이었지만, 나날이 강해지는 비결은 냉혈한이어서가 아니라 제임스의 영향이었다. 저를 감추지 않는 반짝임. 모두가 현혹당하고 마는 힘 때문이라고. 심지어 그는 제 손에 들어온 것이라면 절대 놔 주지 않는 상냥함마저 갖췄다. 질려도 버리지 않는다. 제 장난감 상자에 고이 넣어 두고, 언젠가 다시 꺼내 보겠지. 

“해 볼까?”

“일단 오늘 거래까지 마치고 와서 시도하세요, 짐.”

스팍의 검지 손가락이 제임스의 이마를 슬쩍 눌렀다 뗐다. 호기롭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유월의 하늘보다 청명하게 반짝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이 눈동자를 보고 어떤 맹세를 하게 될까. 눈꺼풀이 빠르게 몇 번 깜박였다. 제임스는 가볍게 스팍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뭐, 좋아. 이따 괜찮은 사진 건지면 한 장 보내 줘. 본즈 얼굴은 내 취향이거든.”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뒤로 문이 닫혔다. 복도에는 제임스와 고요가, 집무실에는 스팍과 찻잔이 남았다. 등을 맞대고 나아가는 두 사람의 발밑에서 묵직한 약동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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