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성장통 (1)






난장판이 된 학교 정문.


혼잡한 상황 속에서 쓰러져 있는 김여주를 일으켜 세운 이제노가 나재민과 함께 학교를 빠져나갔다. 김여주는 자신의 시야에서 학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유서리와, 자신만만한 얼굴로 유서리를 데리고 사라지던 중년 남성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짙은 흉터가 박힌 험악한 얼굴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아빠. 아빠라고.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여주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그대로 주저앉은 김여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릿하게 올라오는 손목의 통증보다, 끝까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끌려가던 유서리가 더 신경 쓰인 탓이었다.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나재민이 뒤늦게 김여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새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과, 불안함으로 점철된 얼굴. 파리하게 질린 김여주의 안색을 눈치챈 나재민이 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 누나. 일단 병원부터 가요."

"… 서리. 서리는 어쩌고."

"지금 서리가 문제예요? 누나 손목 상태 좀 보고 얘기해요. 그거 그대로 방치했다간…."

"서리부터 찾아야 해."

"……."

"내가 아니라, 서리 걔부터…."

"제발, 누나!"




버럭 소리를 지른 나재민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김여주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똑같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입장으로서 이런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재민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유서리를 먼저 챙기는 김여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굴고 있어. 자기가, 김여주가, 유서리보다 뒷 순서로 밀리는 게… 너무 당연한 사람처럼 굴고 있다고. 나재민은 단순히 제 말을 듣지 않는 김여주에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었다. 유서리가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도 알고, 김여주가 유서리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만. 제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습관처럼 몸에 밴 다정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을 먼저 챙기는 김여주가 너무 안타까워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속상하고 비참해서….




"… 뭐가 됐든 누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

"알아요.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 하는지도 알고, 왜 유서리 먼저 챙기려고 하는지도 아는데…."

"……."

"… 그래도 제일 소중한 건 누나 자신이잖아요."

"……."

"왜 자꾸 자기 일은 별거 아닌 것처럼 구는 거예요."

"……."

"왜 안 좋은 습관들만 계속해서 좇으려고 하는 거예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목소리.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김여주의 시선이 나재민에게 꽂히고. 탁한 어둠이 자리 잡은 눈동자에 뒤늦게 생기가 돈 순간. 그제야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김여주가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 … 아. 손목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욱신거림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김여주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문 어느 공원.


…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나머지 한쪽 손으로 퉁퉁 부어오른 손목을 어루만진 김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만 달싹이고 있는 이제노와, 제가 다 아프다는 얼굴로 김여주의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재민. 짧게 한숨을 내쉰 김여주가 볼품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제자리에서 비틀대듯 일어난 김여주는 제일 먼저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 어디에 전화하는 거예요?"

"… 네 말대로 병원은 가야 할 거 아니야."

"……."

"방금 있었던 일도 전해줘야 하고."

"……."

"…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길어지는 통화 연결음에도 묵묵히 핸드폰을 들고 있던 김여주가 돌연 입을 뗐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연결음이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끊긴 순간이었다.




"… 여보세요."

-"… 여주? 여주니?"

"네. 저 맞아요."

-"… 아, 세상에… 미안하다. 엄마가 지금 야근 중이라서, 핸드폰을 미처… 아니, 아니지."

"……."

-"… 전화는 왜 하게 된 거니? 혹시, 지금이라도 집에…."

"아뇨. 그런 일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고요."

-"……."

"… 제가 좀 다쳐서. 병원에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때 입원했던 학교 근처 병원으로요."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억지로 티를 내는 것이 아닌. 정말 순수하게 어른의 도움이 필요해 건네는 담백한 사실. 줄곧 부모님의 사랑을 구걸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던 김여주는, 난생처음 다른 목적으로 제 부상 소식을 전했다. 현재의 김여주는 자신의 아픔을 팔아 관심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닌, 자신의 아픔을 낫게 해 줄 실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했기에.




-"뭐? 아니, 도대체 어쩌다… 어디가 다친 거야? 혹시 많이 다친 거니? 저번처럼 또…."

"입원할 만큼은 아니고요. 손목이 좀 많이 부어서요."

-"세상에. 너처럼 손목 많이 쓰는 애가 어딨다고… 왜 하필 이런 시기에… 많이 아픈 거야? 아빠도 같이 데리고 갈까?"

"두 분이 같이 오실 만큼 심각한 부상은 아니긴 한데. 되도록이면 아빠랑 같이 와 주세요."

-"……."

"… 진지하게 전해야 될 말이 있어서요."

-"……."

"들어야 할 말도 있고요."




자신이 할 말만 내뱉은 채 전화를 끊은 김여주가 바람에 흩날리는 제 머리를 정리했다. 아까부터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아이들의 겉옷을 짙게 물들인 뒤였다. 지독하리 만큼 시린 한기가 아이들의 몸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후드티 한 장만 덜렁 입고 있는 김여주가 신경 쓰인 건지. 제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김여주의 어깨에 걸친 나재민이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부축이라도 하듯 미세하게 떨리는 김여주의 몸을 끌어안은 나재민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 얼른 가요."

"……."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시간 낭비밖에 안 되잖아요."

"… 응."

"……."

"혹시 가는 길에 애들한테 연락 남겨줄 수 있어?"

"애들이라면… 이동혁이랑 마크 형이요?"

"응. 어차피 학교 난리 나서 걔네도 곧 다 알게 될 텐데."

"……."

"기왕이면 같이 있는 편이 더 나을 거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방치되는 것보단."




김여주의 말에 수긍한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나재민이 나머지 한쪽 손으로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벌써 소문이 퍼진 건지 나재민의 핸드폰엔 이동혁과 이마크의 연락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마침 걸려오는 이마크의 전화를 주저 없이 받은 나재민이 무거운 입을 달싹였다.




-"나재민. 너 지금 어디야."

"… 저 지금 여주 누나 데리고 병원 가는 길이에요."

-"… 병원? 저번에 갔던 거기?"

"네. 오실 거면 동혁이도 같이 데리고 와 주세요."

-"갑자기 병원은 왜…."

"얘기 들으셨을 거 아니에요. 아까 무슨 일 있었는지."

-"… 여주 많이 다쳤어?"

"아뇨,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닌데. 손목이 좀 많이 부어서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이마크가 제 쪽으로 급하게 뛰어오는 이동혁을 바라봤다. 워낙 스케일 크게 사고가 일어나서 그런가. 이동혁도 어느 정도 상황을 전해 들은 듯싶었다. 깡패 같은 남자가 같은 학교 동문을 끌고 갔다는 사실 자체도 큰 이슈 거리인데. 그런 남자가 끌고 간 사람이 하필 유서리인 데다, 김여주와 유서리가 친자매가 아니라는 게 공공연하게 밝혀진 지금. 유서리가 해당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어지간해선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남의 가정사가 이렇게까지 파급력이 셀 일인가. 거친 숨을 몰아쉰 이동혁이 이마크와 눈을 맞췄다. 이마크는 자세한 설명 따위 필요 없을 테니 우선 애들 있는 쪽으로 움직이자는 듯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어디 가는 건데요."

"여주 있는 병원."

"… 병원이요? 설마 여주 누나 다쳤어요?"

"어. 아까 일어났던 일에 안 좋게 휘말렸나 봐."

"아, 진짜 미치겠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턴 이동혁이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떨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보기 드물게 웃는 얼굴의 김여주도 보고, 서로 시답지 않은 얘기도 주고받으면서 잠시나마 평화로웠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이동혁은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스스로를 자책하게 됐다. 자기 수업이 조금만 더 일찍 끝났더라면. 자기가 김여주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

"네가 그때 같이 있었더라도 상황은 똑같이 흘러갔을 거야."

"……."

"그 자리에 여주 말고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제노랑 나재민이 같이 있었는데도 그 사달이 난 거 보면… 아마 네가 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은 아니었을 거야."

"……."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자책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지금은 김여주 챙기는 게 우선이니까."




이마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동혁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갔다는 말 빼곤 당사자에게 전해 들은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김여주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안 좋은 기억으로만 범벅돼 있는 그 병원에 갔을 것 같아서.


병원에 들어선 이마크가 평소보다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김여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노와 나재민을 발견한 이마크가 이동혁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단숨에 아이들이 있는 곳까지 당도한 이마크가 나재민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김여주 지금 어디 있냐고.




"… 여주 누나 지금 검사받으러 갔어요. 육안으로는 자세하게 확인이 안 된다고."

"아…."

"이제 곧 여주 누나 부모님도 오실 거예요. 여주 누나가 오는 길에 불러서."

"… 김여주 부모님이?"

"네. 병원비도 처리해야 하고, 오늘 있었던 일로 물어볼 게 좀 있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병원 문이 열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온 모양인지 머리며 옷이며 죄다 엉망이 된 몰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온 김여주의 부모님이 떨리는 눈으로 김여주의 행방을 물었다.




"… 여주는? 여주는 어디 있어?"

"지금 검사받으러 갔어요. 곧 나올 거예요."

"하, 이게 무슨 일이니 대체…."

"……."

"왜 자꾸 우리 애들한테만 이런 일이…."




우리. 우리라고.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마크가 픽 웃었다. 아무리 우습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참아야 하는 게 맞다지만. 김여주 부모님이 해왔던 그동안의 행적을 알고 있는 이마크 입장에선 그 말이 참 웃지 않고선 못 배길 말이라고 생각했다. 김여주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지난 가정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마크가 여태껏 목격한 단편적인 사실들조차 '우리'라는 단어에 괴리감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김여주의 졸업식 날엔 모습조차 비치지 않던 사람이 유서리의 졸업식 날엔 누구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채로 등장하고. 김여주가 어떤 표정으로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김여주가 병원에 입원한 순간에도 병문안 한 번 제대로 와 준 적이 없고. 유서리 일이 터졌을 땐 기다렸다는 듯 김여주를 책망하고. 모든 상황이 어그러지고 나서야 번듯한 부모 행세를 하려는 주제에. 이 와중에도 김여주 혼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유서리까지 포함시켜 '우리' 애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없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김여주와 유서리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고 싶은 건지. 현재 다친 건 김여주고, 병원에 달려온 것도 김여주의 부상 때문인데. 이마크는 이 자리에 와서조차 김여주와 유서리를 함께 언급하는 김여주의 부모님이 상상 이상으로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우리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그 단어를 꺼내는구나. 그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우리 앞에서도.




"이 자리에 김여주가 없어서 다행이다."

"……."

"저런 반응 볼 바엔 없는 게 백 번 나아."




나지막이 울리는 이마크의 말에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나재민이 힘겹게 표정 관리를 했다. 와락 구겨지는 인상을 최대한 펴고,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면서. 하지만 이동혁은 이마크, 나재민처럼 끓어오르는 속내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대놓고 헛웃음을 내뱉은 이동혁이 김여주 부모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뒤늦게 이동혁의 상태를 인지한 이제노가 황급히 이동혁의 팔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여기까지 오셔서 꼭 그런 말을 하셔야겠어요?"

"… 동혁아."

"지금 아파서 병원 온 건 여주 누나잖아요. 와달라고 연락한 것도,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전부 여주 누나잖아요."

"……."

"온전히 여주 누나 하나만 걱정하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우리라는 말로 서리까지 엮어서 말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버틸 만큼?"




이제노에게 붙잡힌 팔을 거칠게 빼낸 이동혁이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검사를 막 끝마치고 나오는 김여주가 있었다.




"여주 누나 걱정돼서 오신 거면 여주 누나 걱정만 하세요."

"……."

"여기에 있지도 않은 서리까지 들먹이면서 좋은 부모 행세하지 마시고요."

"……."

"적어도 어머님은 여주 누나 앞에서 먼저 서리 이름 꺼낼 만큼 자격 있는 사람 아니니까."




가까이 다가온 김여주를 눈치채자마자 목소리 데시벨을 낮춘 이동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말을 끝마친 이동혁은 미련 없이 김여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여주 앞에서까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저… 여주 누나 상태는 좀 어떤가요?"

"전형적인 손목 염좌 증상입니다. 파열까지 가지 않은 게 다행이긴 하다만, 아무래도 2도 염좌다 보니 주기적인 관리와 치료가 필요합니다."

"아…."

"상처 부위는 최대한 움직이지 마시고, 집에서도 얼음으로 상처 부위를 찜질해 주셔야 합니다. 빠른 치유를 바라신다면 압박 붕대나 보호대로 손목을 아예 고정시켜서 무리가 가지 않도록 활동을 제한하시는 편이 좋구요."

"……."

"좀 귀찮으시더라도 앞으로 1~ 2주 간은 통원 치료받으시면서 주사 맞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약도 꼬박꼬박 바르시고요. 보아하니 대학생이신 것 같은데. 이 상태론 손목 거의 못 쓰실 거거든요."




의사의 소견을 듣던 김여주의 안색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와 시험 일정, 유서리에 대한 현실적인 걱정들로 눈앞이 캄캄해진 탓이었다. 말없이 손을 뻗은 이제노가 축 늘어진 김여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같은 과인 만큼 김여주가 지금 어떤 걱정을 하는지도 알고, 김여주 성격 상 무리를 해서라도 주어진 일을 끝마쳐야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알아서.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최대한 곁에 남아 도와주겠다는 의미로.




"… 많이 아프진 않니?"

"괜찮아요. 나름 버틸 만한 정도라. 치료받으면 금방 나아지겠죠."

"… 그래. 병원비는 엄마 아빠 이름으로 다 처리해 놓을 테니까,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당분간은 치료에만 집중하렴. 학업에 전념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네 몸 상태가 우선이니까…."

"… 네. 감사해요."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한 김여주가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망설이는 모양새. 푹 젖은 제 어머니의 외투를 바라보던 김여주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 오늘 학교에 서리 친아빠가 찾아왔어요."

"…… 뭐?"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굳어지는 얼굴. 두 눈을 크게 뜬 김여주의 어머니가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 학교 끝나고 애들이랑 같이 정문 쪽으로 나가던 길에 서리를 봤어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위협적이게 생긴 중년 남자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더라고요."

"……."

"손목 다친 것도 그거 때문이에요. 남자가 서리를 억지로 끌고 가려 하길래, 무작정 끼어들어서 말리다가 넘어졌거든요."

"……."

"… 처음엔 서리도 가기 싫은 것처럼 보였는데… 제가 다치고, 같이 있던 재민이까지 일에 휘말릴 때가 되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남자를 말렸어요. 가겠다고. 자기가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어요. 끌려가는 서리도, 끌고 가는 남자도…."




휘청거리는 어머니를 봤음에도 말을 멈추지 않은 김여주가 분명하게 물었다.




"근데 전 부모님이 이 사태에 관해서 아는 게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

"유서리를 직접 데려온 게 부모님이니까. 적어도 저희보단 많은 걸 알고 계실 거 아니에요."

"……."

"오늘 두 분 다 오시라고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에요. 적어도 전 알아야 할 거 같아서."

"……."

"… 김서리 대타로 세우고자 했던 애가 어떤 애였는지 정도는."




가차 없이 쏟아지는 말에 멀쩡하던 안색이 시체처럼 파리해진다.




"… 김서리 대타라니. 그게 무슨…."

"아닌 척하지 마세요. 저라고 모르는 거 아니니까."

"……."

"… 서리를 대신할 애가 필요하셨잖아요. 옆에서 죽을 둥 살 둥 노력하는 제가 있는데도. 그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서리를 대체할 누군가를 찾고 계셨잖아요. 그러니 제 동의도 없이 유서리를 데려오신 거고요."

"……."

"유서리가 콩이나 나물 반찬 안 먹는 것도. 엄마가 선물해 주는 옷들 내심 불편해하는 것도. 오른손잡이인 애한테 왼손도 써 버릇 해라 강요하듯 말한 것도. 유서리 생일을 김서리 생일로 바꾼 것도."

"……."

"… 다 유서리가 김서리처럼 되길 바라서 그러신 거잖아요."

"……."

"유서리가 죽은 김서리의 자리를 대신해 주길 바라서 그런 거잖아요."




어떠한 부정의 말도 내뱉지 못한 김여주의 어머니가 주름 진 손을 뻗었다. 목적지는 제 딸의 어깨. 자세하게 보지 않아 이토록 말랐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앙상한 어깨가 기어이 부정하던 현실을 끌고 온다. 누군가의 생명은 단순한 욕심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거양득 하지 못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있는 거라는. 자신의 오만하고 헛된 확신이 유일하게 남은 친딸마저 죽어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더 나은 미래를 그리고자 했던 그녀는 과거에 잔류된 미련만을 갖고 살아왔다.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복구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은 내 딸의 분신 같은 아이만 존재한다면, 그때보다 더 나아진 모습으로 아이를 대한다면. 제 가족은 김서리라는 죽음을 모두 잊은 채 완벽하고 단란한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그리 생각했다.


이제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도 달라질 건 없었다. 발악과도 같은 울부짖음을 듣고 나서야. 제 딸의 입에서 죽은 동생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야. 모든 게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라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강을 건넌 거나 다름없으니까.




"알려주세요."

"……."

"유서리가 어떤 애였는지."

"……."

"어쩌다 유서리를 입양하게 된 건지."

"……."

"전부 다."




김여주는 이제 더 이상 부모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지 않았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눈치 보고,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발악하던 과거는 처참하게 흩어지던 한밤중의 병실에 모두 내다 버렸으므로.


똑바로 어머니의 눈을 마주한 김여주가 대답을 채근했다. 선택권을 모두 잃은 그녀에겐 거부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 따위 없었다. 그저 제 딸의 요구에 힘없이 고개만 끄덕거릴 뿐. 보는 눈이 많다며 병원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아이들이 차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김여주의 부모님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어렵사리 입을 뗐다.




"… 처음부터 누군가를 입양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냥, 서리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그 사실이 체감될 때마다 미칠 것 같은 마음에. 기회만 온다면 어떻게든 텅 빈 그 자리를 메꾸고 싶었어. 그게 입양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엄마 아빠 둘 다 예상하지 못했고."

"……."

"… 여주 너도 알다시피 서리 장례식 이후로 엄마 아빠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잖니. 어쩌면 그땐… 그 누가 왔어도 우리를 말리지 못했을 거야. 현재의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

"계기는 사소했어. 어쩌다 비즈니스 차원으로 우리랑 똑같은 사연을 가진 한 가족을 만나게 됐는데… 거긴 하나뿐인 외동딸을 잃은 처지더라고. 거기도 딸을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돼서 굉장히 침울해 보였는데… 얼마 안 가서 얼굴이 핀 거야. 정말, 몇 달 전에 봤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

"그래서 실례인 걸 알면서도 물었어. 요즘 집에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 그럼, 그때 그 사람들이 해준 말이 혹시…."

"… 응. 맞아."




비슷한 사연을 가진 가족과 만나 우연히 듣게 된 계기. 김여주의 부모님은 보육원을 뒤지다 자신의 죽은 딸과 비슷하게 생긴 딸을 입양하게 됐다는 그들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그날부로 일이 일찍 끝나는 날마다 좁게는 동네 근처, 넓게는 타 지역까지 넘나들며 보육원을 전전했다고 했다.




"그렇게 새화 보육원이라는 곳까지 가게 됐는데… 거기서 만나게 된 거야. 죽은 서리랑 똑같이 생긴 유서리를…."

"……."

"분명 나이도 적지 않아 보였고, 본인도 보육원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이상하게 보육원 원장이라는 사람들이 유서리에 대해선 말을 잘 안 하려고 하더라고.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는 아이들도 티 날 정도로 서리를 피하고…."

"……."

"우리가 서리에 대한 입양 의사를 표했을 땐 대놓고 꺼려하기도 했어. 입양 얘기가 오고 간 뒤에는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서리를 숨겨놓기도 했고."

"……."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만 계속해서 흘려보내다 12월이 됐을 때… 보육원 원장이라는 사람이 뜻밖의 말을 전하더라고. 우리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면서."




보육원 측에서도 처음엔 그럴듯한 이유로 입양을 거부했다고 했다. 우리 보육원은 애초에 연장아 입양이 불가능한 보육원이다, 법 때문에라도 지정 입양은 불가능하다, 이미 친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자아가 생성된 나이인 만큼 아무리 슬하에 아이를 두고 있다고 한들 추후 관리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울 것이다 등.


하지만 보육원 측에서도 반년 넘게 꾸준히 찾아오는 김여주네 부모님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었는지.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유서리를 입양해 가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물론 지금 하는 말은 여기서 듣고 잊어버려야 하며, 어떤 진실을 듣게 되든 조용히 묵인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조건 하에.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보육원에 들어올 때부터 상태가 안 좋았대. 조금이라도 손을 올리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지를 않나, 뭘 해주려고 하면 무작정 거부 반응부터 보이지를 않나…."

"……."

"서리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던 건 자기 친엄마가 죽었다는 사실 뿐이라. 보육원 측에서도 자세한 사정을 몰라서 함부로 위로하거나 나설 수 없었대."

"……."

"근데…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들이 있잖니."




그 뒤로 이어진 말들은 모두 충격적이었다. 유서리를 보육원에 던져놓고 홀연히 사라진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주기적으로 보육원에 찾아왔고. 자신의 이름이 유재필이며, 유서리를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유서리가 다른 가정으로 갈 수 없게끔 손을 써달라고 했다. 보육원장 권력은 그렇게 쓰는 것 아니냐면서.


온몸을 뒤덮은 문신. 얼굴에 깊게 파인 흉터. 군기가 잔뜩 들어간 정장 입은 사내들. 아무리 모른 척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유재필은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정체를 깨달은 타인이 알아서 두려움에 떨길 바라는 사람처럼. 유재필은 주기적으로 보육원에 돈을 갖다 바치며 유서리가 위탁 가정 등의 시스템에 보내지지 않도록 힘을 썼고, 항상 마지막엔 나중에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가뜩이나 낯을 가리는 보육원 아이들 사이에서 조폭 친아빠를 둔 유서리는 자연스럽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유재필이 보육원을 왔다 갈 때마다 귀신 같이 찾아오는 한 여자는 더더욱 유서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유재필의 본처이자, 유서리를 매 순간 증오하고 죽이려 들던 여자였다.




"알고 보니 그 남자한텐 본래 가정이 있었더라고. 이미 부인도 있고, 아들도 있는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바람을 피우게 되면서 낳게 된 딸이 유서리였대."

"… 그건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본래 부인이 어지간히 행패를 부렸어야지. 그 남자가 보육원을 들렀다 가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와서 폭언을 퍼붓고, 손을 올려대니… 아마 원장들도 모를 수가 없었을 거야."

"……."

"그렇게 서리한테 관심을 갖던 사람들도 하나둘 끊기고, 완벽하게 그 남자가 원하던 대로 흘러가던 때에… 엄마랑 아빠가 서리를 발견하게 된 거야."

"……."

"하필 그 시기가 남자 쪽에서 보육원에 보내던 돈을 끊은 시기랑 맞물리기도 하고. 더 이상 남자가 보육원에 찾아오지 않은 지도 1년이 넘어가던 때라… 보육원 측에서도 이때다 싶어 먼저 말을 꺼냈던 것 같아. 지금이 유서리를 밖으로 내보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

"… 솔직히 들어오던 돈도 끊기고, 강제 퇴소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나이에, 있어 봤자 험악한 분위기 조성밖에 안 하는 애를 누가 맡고 싶겠어. 아마 보육원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유서리를 내보내고 싶었을 거야."




미동도 없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던 김여주가 올라오는 토기를 감추지 못한 채 몸을 수그렸다. 이제야 유서리의 행동이 이해가 된 것이다. 왜 자신을 죽은 김서리의 대타로 살게 하는 집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며 버텼는지. 왜 자신이 베풀었던 사소한 다정을 구원처럼 받아들였는지. 왜 친아빠라는 존재 앞에서 그토록 작아질 수밖에 없었는지. 도망치듯 보육원을 빠져나온 유서리에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유서리에겐 최악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므로.




"… 그래서.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유서리를 데려오셨다고요."

"… 응."

"……."

"보육원 측에서도 서리 친아빠 쪽에서 먼저 관심을 끊었다는 식으로 얘기했었고. 여태 별다른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나 봐."

"……."

"… 정말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착잡한 듯 고개를 숙인 어머니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김여주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 따위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김여주를 따라 카페를 빠져나온 아이들이 말없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먼저 밖으로 나간 김여주가 갈 곳 잃은 사람처럼 길 한복판에 서 있던 탓이었다.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분명, 부모님이 원망스러운 것도 맞고… 용서하고 싶지 않을 만큼 유서리가 미운 것도 맞는데."

"……."

"… 이런 건… 내가 바란 게 아니야."

"……."

"이렇게까지, 모두가 상처받길 원한 건 아닌데…."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말에 자연스럽게 숙여지는 고개. 무거워진 마음을 뒤로하고 김여주의 옆에 선 이마크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 우선 남자도 함부로 서리를 대하진 못할 거야.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법적 다툼으로 번질 거라는 걸 모르진 않을 테니까."

"……."

"일단 서리한테 연락 보내 보고, 오늘 서리가 집으로 돌아오는지도 한 번 지켜보자."

"……."

"아무리 제 발로 가겠다고 해서 간 거라지만, 반 강제적인 절차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 내일까지 해결이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이마크의 말에 무언가 생각난 듯 퍼뜩 정신을 차린 나재민이 입을 달싹였다. 유서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김여주에게 사과를 건네던 때.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김여주를 훑던 유재필의 시선이 떠올라서였다.


조용히 머리를 굴리던 나재민이 손톱 옆 거스러미를 건드렸다. 마음 같아선 제가 본 장면들을 토대로 김여주에게 조심하라 일러 주고 싶었지만. 혹여라도 제가 과민 반응을 하는 거라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넘겨짚어 쓸데없는 불안감만 조성하는 거라면. 자신의 발언이 안 그래도 힘들 김여주에게 더한 시련을 주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 지금 말하는 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몰라. 애들도 심적으로 지친 상태고, 다들 개인적인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생각 정리를 끝마친 나재민이 아이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이동혁의 자취방. 평소와 달리 주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근처 지리를 파악한 나재민이 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설령 자신이 감지한 불길한 기운이 단순한 기우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이 정도 대비는 해 두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아서.


얇게 흩날리던 비가 그쳤다. 눅눅하게 젖은 흙 내음 사이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





모두의 예상과 달리 유서리는 그날 멀쩡하게 집에 돌아왔다.


걱정할 필요 없으니 앞으로 이런 식의 연락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는 대답과, 정말 괜찮은 거 맞냐는 질문에 따라오는 희미한 웃음. 실제로 유서리는 어딘가에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온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차림을 한 채 돌아왔다. 상처는커녕 미세한 생채기조차 나지 않은 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르고 나타난 기괴한 모습.


김여주 부모님은 유서리의 친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만큼, 집으로 돌아온 유서리에게 곧장 경찰에 신고하자 말했지만. 유서리는 그런 부모님의 제안을 극구 거절했고, 나중 가선 해당 주제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마치 그 일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이.


당사자도 신고를 원치 않고, 겉으로 드러난 피해 정황 또한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이 이상의 조치를 취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학교에 등교하는 유서리와, 이도저도 못한 채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아이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김여주는 아이들을 향해 당분간 제가 아닌 유서리에게 신경을 써달라 부탁했다. 저번처럼 유서리의 친아빠가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도 있고, 제가 없는 집안에 홀로 남게 된 유서리의 심리 상태가 내심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누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두울 땐 집 혼자 가면 안 돼요."

"그래, 그래. 알겠다고."

"제가 누나한테 했던 말 다시 해보세요."

"야작 시즌 되면 무조건 이제노랑 같이 있기. 새벽에 배고프다고 혼자 편의점 가지 않기. 이동혁이랑 시간표 안 맞아서 혼자 집 가야 되면 너나 마크 오빠 부르기. 누가 따라오는 거 같으면 다짜고짜 소리 지르면서 도망가기."

"아직도 좀 부족한 거 같은데…."

"미친. 내가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알아서 하거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가뜩이나 요즘 날씨도 을씨년스러운데."

"아주 저주를 해라, 저주를."




김여주 등쌀에 떠밀려 유서리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 나재민이 한참을 제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유서리의 친아빠가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운 시기에 사고가 날 확률은 극히 낮다는 걸 알면서도. 나재민은 현시점에서 가장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김여주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누나. 진짜 제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요."

"또 뭐."

"만약에라도 유서리 친아빠라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들 불러낸다거나, 우르르 깡패처럼 몰려와서 위압감 조성하면… 최대한 도발하거나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빠져나갈 타이밍 잡으셔야 해요."

"……."

"알잖아요. 원래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무서울 것도 없다는 거. 피해자 입장인 사람이 수그리고 들어가야 된다는 현실이 짜증 나고 좆같을 순 있어도, 절대 그 사람들 앞에서 성질 드러내거나 괜한 말로 자극하지 마세요."

"지금 나더러 그 깡패 새끼들 앞에서 빌빌대란 소리야?"

"아뇨, 그… 무작정 참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뭐가 됐든 제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건 본인 몸이잖아요. 일단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야 복수를 하든 뭘 하든 하죠."

"……."

"진심으로 누나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괜한 기우일 수도 있지만, 요즘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말끝을 흐린 나재민이 김여주의 옷소매를 쥐어잡았다. 미세하게 퍼져나가는 온기엔 명백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김여주가 나재민의 손끝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또래보다 성숙해 보여도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다치는 걸 목격했는데, 하물며 그 일이 조폭과도 연관된 일이니 겁을 안 먹을 리가. 김여주는 해당 일에 유독 예민하게 구는 나재민을 이해했다. 자기라도 그랬을 것 같아서.




"알았어. 웬만하면 일 크게 안 만들고 넘겨 볼게."

"네. 다치지도 말고요."

"여기서 더 다치면 그냥 이번 학기 시원하게 휴학하지 뭐."

"제발요, 누나."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김여주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유서리에게 가보라는 뜻이었다. 마지막까지 미련이 남은 듯 여러 번 뒤를 돌아본 나재민이 점처럼 작게 보일 즈음. 뻐근한 목을 풀며 스트레칭을 한 김여주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집에 두고 온 약이 생각 나서였다.




"아, 오늘은 그냥 바르지 말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여주가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사고가 난 직후에 비하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모양새긴 하지만, 여전히 정상 범주에 들어갈 정도는 아닌 상태. 안 그래도 해치워야 할 과제가 한 트럭인데. 주사 맞고 있다고 약 바르는 것까지 스킵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지. 빠르게 머리를 굴린 김여주가 무언갈 결심한 표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동혁 자취방에서 약만 얼른 들고 나오자는 결론을 내린 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여주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인근 자취촌에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니고, 시간이 초저녁인 만큼 날이 그렇게 어두운 편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정말 딱 그렇게 생각했다.




"얼굴 보기 참 힘들어, 그치?"

"……."

"요즘 대학생들은 뭘 그렇게 몰려다니는지…."




이동혁 자취방 골목에서 유재필을 마주치기 전까지.


대놓고 표정을 구긴 김여주가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골목길에 서 있는 사람은 유재필뿐이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딱히 뭐 맞은 것도 아닌데. 나재민 말처럼 소리라도 지르면서 도망가야 하나.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던 김여주가 차게 식은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렇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김여주의 몸이 유재필과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한 순간.




"궁금하지 않아?"

"……."

"그날 내가 서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숨소리가 멎었다.




"… 뭐?"

"존댓말 할 생각도 없어 뵈네. 이래서 요즘 애들은…."

"뭔 짓 했어?"

"얼레."

"묻잖아 지금. 애한테 뭔 짓 했냐고."

"이거 봐라…."




흥미롭다는 티를 감추지 못한 유재필이 적나라한 시선으로 김여주를 훑었다. 아예 제 쪽으로 붙을 듯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와, 대답을 채근하는 분노 섞인 눈동자. 나지막이 내뱉어지는 말엔 형용할 수 없는 역겨움 또한 섞여 있었다.




"나 참. 난 오늘 학생한테 병원비 주려고 온 건데. 대우가 좀 아쉽네."

"남의 동생 언급하면서 먼저 지랄 떤 게 누군데. 배운 게 없어서 그런가 하는 말마다 죄다 골이 비었네."

"아니지, 아니지."

"……."

"네 동생이 아니라, 내 딸."

"……."

"정확히 말하면 서리 입장에선 네가 남이고 내가 친아빠인데. 그렇게 뭐라도 된 것마냥 얘기하면 아저씨 입장에서 꽤 서운하지 않겠어?"




김여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유재필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좀 조용한 곳 가서 얘기 나눌까?"

"……."

"너도 이런 길바닥에서 그날 서리가 어떤 취급받았는지 듣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

"듣자 하니 안 그래도 학교에서 잡음이 많은 모양이던데."

"……."

"누가 이 얘기 듣고 어디 떠벌리기라도 하면 상황이 많이 복잡해지지 않겠어?"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말들. 지하 밑에 더 깊은 지하가 있듯이, 유서리의 상황은 언제든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수 있었다. 말없이 이를 악 문 김여주가 주위를 둘러봤다.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타과생 무리와, 유재필의 얼굴을 보고 저들끼리 수군대고 있는 근처의 여학생 무리. 유재필의 말대로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간 언제 또 안 좋은 소문이 퍼질지 몰랐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김여주가 유재필의 뒤를 따라 장소를 옮겼다.


분명 가봤자 좋은 소리 따위 안 나올 걸 알면서도. 지금 이 판단이 제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줄지 다 알면서도. 김여주는 눈앞에서 직면한 유서리의 불행을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자취촌 근처에 있는 공터. 공사가 중단된 듯 보이는 현장엔 여러 건설 자재와 흙먼지가 가득했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매캐한 담배 냄새에 금이 가 있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불쾌하다는 티를 여실히 드러낸 김여주가 바쁘게 움직이는 발을 멈췄다. 굳이 더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유재필이 원하는 종착지라는 것을.




"… 그래서."

"……."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 해줄 건데."

"……."

"여기까지 왔으면 뭐라도 말은 해 줘야 계산에 맞지 않나."




신경질적인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유재필이 휙 뒤를 돌았다.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유재필은 김여주의 질문에도 허허실실 웃을 뿐이었다.




"무슨 말? 할 말 같은 거 없는데?"

"… 뭐?"

"아, 그날 서리한테 뭔 짓 했냐고?"

"……."

"아무 짓도 안 했어."

"……."

"너도 봤잖아, 서리 몸 멀쩡한 거."

"……."

"꼬질꼬질하던 애 씻기고 광 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 쫙 해놨는데. 이 정도면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새끼가…."




뻔뻔한 태도에 절로 튀어나오는 욕설.




"지금 나랑 말장난해? 여기까지 사람 끌고 와 놓고 무슨…."

"말은 제대로 하자. 따지고 보면 내가 끌고 온 게 아니라 네가 따라온 거잖아? 같잖은 도발 멘트에 홀라당 넘어가서."

"그딴 식으로 말하는데 누가 그냥 지나쳐? 살다 살다 이딴 데에 자기 친딸 얘기 이용하는 새끼를 다 보네."

"원래 이 바닥은 유니크해야 살아남아. 학생이 너무 어려서 잘 몰랐나 보다."

"그딴 깡패 새끼들 사는 시궁창 바닥이야 내 알 바 아니고. 할 말이 그게 끝이면 그냥 간다."

"……."

"별, 미친 새끼를 다…."




나지막이 욕을 읊조린 김여주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유재필의 수하들이 가로막고 있는, 공터의 입구 쪽으로.




"학생. 미안하지만 이대론 못 가."

"……."

"안타깝게도 내가 학생을 데리고 가야 될 일이 생겨서 말이야."

"……."

"좋게 좋게 말하면 안 올 것 같길래. 어쩌다 보니 이런 과격한 방식을 쓰게 됐네."

"……."

"내 말에 이렇게 고분고분 복종할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집으로 유인할걸. 괜히 여기까지 걸어왔네. 안 그래도 바쁜 애들 집합시키기까지 하고."

"……."

"하여튼 여러모로 손 많이 가, 우리 딸…."




유재필이 어떤 표정, 어떤 포즈로 말을 지껄이든. 뒤조차 돌아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굳은 김여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순식간에 조성된 위압감.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본 김여주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는 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도움을 받기는커녕 남자들의 강압적인 행동을 부추기기만 하겠지.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김여주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시체처럼 파리해진 안색이 눈에 띄었다.


… 그냥 지금이라도 저 남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까. 어차피 소리 지르는 것도, 무턱대고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한데. 일단은 좀 수그리고….


반쯤 체념한 태도를 보이던 김여주가 문득 유서리 이름 세 글자를 떠올렸다. 어쩌면 유서리도 이런 생각을 해왔을지 모른다고. 지금 당장 눈앞에 주어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핍박받고, 웅크리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고. 아직 채 성장하지 못한 유년 시절의 유서리에겐 유재필의 힘이 절대적이었을 테다. 감히 거부할 수조차 없고, 싫다는 티마저 낼 수 없는. 살아있는 감옥 그 자체.


이런 게 유재필이 바라는 거라면. 제 말에 순종적으로 반응하고, 자신의 힘에 당연하게 굴복당하는 모습을 바라는 거라면….


조용히 고개를 든 김여주가 나재민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 애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원래 잃을 게 없는 놈들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웬만하면 상대방 도발하지 말고 적당히 타이밍 봐서 빠져나오라고. 아무리 봐도 나재민의 말이 틀린 것 같진 않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괜히 객기 부렸다간 눈 깜짝할 사이 순간 요단강에서 수영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뭔가를 결심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쥔 김여주가 눈을 부릅 떴다. 결정했다.




"시간당 인건비 삼천 원도 안 되어 보이는 깡패 조무사들 데리고 한다는 짓이 고작 공갈 협박이니?"




그냥 깝치고 좆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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