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실 안의 모든 것은 표백한 것처럼 희었다.

그는 새하얀 카우치에 앉아 불편한 기색으로 목깃을 추스른다. 분기마다 한 차례씩 돌아오는 건강검진을 제외하면 그가 의학연구소에 찾아올 일은 드물었다. 일반적인 병원이라면 으레 맡을 수 있는 소독약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무색무취의 공간은 자연과 거리가 먼 캐러밴 안에서도 가장 부자연스러운 곳이었다. 여간해서는 익숙해질 수 없는 공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린다.


“들어오세요.”


진료실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상사가 그에게 눈짓했다. 제복 위에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은 자리에 앉아 노트패드에 무언가 휘갈기고 있었다. 그는 상사가 내어준 의자에 뻣뻣한 자세로 앉았다.


“음……진단 결과 말씀드릴게요. 일단 체온은 정상으로 내려왔고. 앞으로 하루에서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보고 업무 복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작은 울혈이나 국부의 찰과상 같은 경우는…….”


억양 없는 목소리의 연구원은 그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차트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자신의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연구원은 무심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통원치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닙니다만……마찰로 인해 자극이 될 수 있으니 한동안 관계는 피하시기 바랍니다. 연고를 드렸으니 사흘 정도 꾸준히 사용하시면 깨끗하게 가라앉을 겁니다. 용법은 아까 본인에게 설명드렸구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가벼운 몸살 기운이 있을 수가 있는데, 만약 체온이 정상 범위 이상으로 올라가면 바로 연락주세요.”


그는 대답 대신 오래 참아온 질문을 던졌다.


“그녀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흐린 인상의 연구원이 차트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감정한 눈에 담긴 약간의 의문. 그의 상사가 눈짓을 보냈다. 연구원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일라나이에게 계절 변화에 따르는 번식 사이클이 있는 것은 아시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해당 기간에 특수한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이른바 ‘짝짓기 환경’ 을 조성하는 호르몬인데요. 이게 일라나의 배란을 유도합니다. 그런데 엘라이콘에는 이 호르몬과 거의 유사한 화합물을 분비하는 꽃이 여러 종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직접 보셨을 겁니다.”


그는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그들의 밀월 휴가는 지쳐 쓰러질 만큼 사랑을 나누다 뒤엉켜 잠들었던 사흘째의 밤에 끝이 났다. 오한이 난다며 품 속으로 파고들던 그녀의 몸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다. 이번에는 누구를 불러야 할지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긴급 호출을 받은 의무반이 그녀를 데려갔다.

그 날부터 며칠동안 그는 생물학 연구소와 의학 연구소를 비롯한 온갖 연구부서에서 나온 수십 명의 연구원들에게 번갈아 취조에 가까운 조사와 검사, 수십 가지 샘플 채취를 당해야 했다. 그녀가 무사한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애타게 묻는 그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한다는 소리가 이 모양이다. 연구원은 그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잠시 주저한다.


“……계속 말씀하시죠.”

“……짝짓기 환경의 영향을 받은 일라나는 다른 일라나이와의 성적 접촉을 통해 호르몬 분비를 안정시킵니다. 그런데 적절한 기온이나 동일 종족과의 성적인 접촉을 포함한, 이런 환경적 요소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 호르몬 균형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번식을 원하지 않는 일부는 종족의 치료사들이 만든 생약을 복용하는데……그 생약의 성분을 현재 약학연구소에서 연구중입니다.”

“결국 그녀와 저를 가지고 실험을 한 거군요.”


그의 어금니 틈에서 뿌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연구원은 입을 다물었다. 상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마르 군. 나머지 이야기는 군의 연구실에서 나누지.”



*



“대체 어디서부터…….”

“이번 휴가는 유급휴가로 처리했어. 레마르 군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녀의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 해 주길 바라. 업무 복귀 전까지 영양보충에 신경쓰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통로에서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가 인내심을 잃고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 상사는 산뜻한 목소리로 그의 말 허리를 잘랐다. 그는 짜증스런 눈으로 상사의 얼굴을 노려보았으나 상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깜짝 선물에 이어진 약간의 해프닝일 뿐이야. 아니더라도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상사의 웃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직 궁금한 게 남아있어?”

“있어봤자 대답해주지도 않으실 거 아닙니까.”

“잘 알고 있네. 자, 그럼 쉬어.”


상사는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문 앞에 홀로 남겨졌고, 잠시 망연한 모습으로 그 곳에 서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당신 손이 더 따뜻해요.”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어 본다.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 이마를 부비댄다. 그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지다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일과를 마친 늦은 오후, 연구실의 간이 침대 위에서 연인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일몽 같은 밀월의 시간은 지나갔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나른한 여운이 남았다. 사랑에 목마른 몸짓에는 여유가 생겼다. 그는 종종 자신이 긴 꿈을 꾼 것은 아닌지 궁금했으나……조금 더 깊숙히 알게 된 그녀의 몸을 품에 안을 때만은 한 줌의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품 안의 연인은 머리채를 살살 쓸어내리는 섬세한 손길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일하니까 힘들지 않아요?”

“조금은요. 하지만 돌아와서 기뻐요.”

“설마 일이 그리웠던 건 아니겠죠.”

“어머. 그럴 수도 있지.”


그녀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사실은 조금 걱정했어요. ‘무사히’ 지나가서 다행이지만요…….”

“……당신의 봄맞이가?”

“여기는 ‘자흐덴’이 아닌걸요…….”


맞아, 그녀의 정원은 이 곳이 아니지. 여기는 아득한 별들 사이의 어둠을 헤매는 거대한 금속 상자 안이니까. 꽃으로 살아온 당신은 단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흰 가운의 연구원을 떠올리며 그는 의지가 되어주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력함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조금……궁금하기도 했어요.”


무슨 생각인가에 잠겨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던 그녀는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속살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그의 질문에 그녀는 꽃망울이 벙글어지는것처럼 웃었다.


“……나는요. 어쩌면……내가 ‘씨앗’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떼었으나 목이 메어 그만두고 말았다. 그녀와 나의……아이. 감히 상상해본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감히 지나가는 말로라도 물어볼 수 없었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은 과분한 호사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고개를 내미는 어떤 행복에 대한 기대가……그에게는 일종의 사치였다. 그는 항상 겁이 났고,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한 계절의 봄 뿐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되새김질해야만 했다. 한해살이 식물과 같을 그녀의 사랑 앞에서 그는 행복을 꿈꾸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 그녀는 가슴에 품었던 조그만 희망을 말하고 있지만……그녀의 자그마한 기대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일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사랑의 결실로서 아이를 가지고,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은 제레미아 레마르와 그가 살아온 세계의 방식일 뿐이다.

봄맞이가 끝나고 초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에, 일라나는 식물성 외피로 감싸인 ‘씨앗’을 낳아 부드러운 흙 속에 묻는다. 씨앗을 묻은 일라나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킨다. 일라나가 자신의 피로 새싹을 기르는 동안 봄맞이를 함께 나눈 모든 일란이 그녀들을 돌본다. 돌볼 어미가 없는 새싹은 다른 일라나이가 번갈아 키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흙 속에서 성장한 아기는 식물성 외피를 찢고 흙 바깥으로 나온다. ‘씨앗 품기’는 일라나이 공동체의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의식이었으며,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것 역시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었다. 진정으로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일라나이에게, 아이를 만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한 봄은 처음이라……혹시나 하고.”


그녀는 눈을 빛내며 웃었다. 푸른 눈동자에서 넘실거리는 것은 순수한 호기심일까.


“제레미아. 궁금하지 않아요? 작은 ‘아기’를 상상해봐요. 씨앗 속에 잠든……아주 조그만 아기.”


그는 용기를 내어 모자란 상상력으로나마 머릿속에 그 모습을 그려본다. 자신을 닮은 금색 눈의……아기. 머리색도 저를 닮아 금갈색일지 모른다. 자그마한 입술은 아마도 당신을 닮았으리라. 어쩌면 코도, 눈매도. 당신을 닮아 속눈썹이 길고 목이 가는……당신과 나를 닮은 아기.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걱정스레 묻는다. 그는 소리없이 오래 울었다.


“……제레미아. 왜…….”

“미안해요. 저는…….”


그는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간절한 이기심을 삼킨다. 대신 그는 말했다.


“사랑합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맞춘다. 입맞춤에서는 짠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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