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죽을 것 같아요….”

“괜찮아. 마차를 오래 타서 죽은 사람은 없었어.”

“그래도요….”


제이드는 마차 안에서 꼬박 하루가 지나자 온몸이 배기는지 우는 소리를 했다. 사밀레이나 또한 허리가 욱신거리고 목이 뻐근한 건 매한가지였으나 최대한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차를 탄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중간에 잠시 내려 말에게 물과 여물을 먹이고, 식량을 꺼내 배를 조금씩 채운 것 외에 멈추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 좁은 마차 안에 있는 것이 지겹고 힘들 만도 했다. 베레디의 남쪽에서 북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축제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니 수도 성벽을 따라 돌아가게 되어서 예정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래도 아침나절에 마부가 말하기를 베레디는 벗어났다 하였으니, 해가 지기 전까지는 아몬디네 영지에 도착할 터였다. 수도 부근에는 그리 위험한 것들이 출몰하지는 않았으나, 마차 두 대와 용병 몇 명만으로는 걱정을 완전히 덜기 힘들었다.

아무리 괜찮은 마차를 공수했으며 수도 근처의 포장된 길을 골라 다녔다고 하더라도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서 온종일 버티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이드는 몸이 약하고, 특히 호흡기에 관련된 지병이 있어 주기적으로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신경 쓸 것이 늘어나니 자연히 몸도 빨리 지치게 되는 셈이었다.


“조금만 견디면 성에 도착할 거야.”

“네에…. 누님께서는 괜찮으세요?”

“글쎄. 그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을까?”


사밀레이나가 가볍게 웃자 제이드가 멋쩍은 듯 마주 웃었다.


“그런데 의외예요. 아몬디네 후작가에서 사람을 불러 저희를 일찍 초청할 줄은 몰랐거든요. 후작 부부의 장례식으로 어수선할 텐데요.”

“아무래도 그렇지. 사실 약혼 이야기가 오간 것도…아버지와 후작의 뜻이었으니, 마음이 변하면 얼마든지 없던 일로 할 수도 있었어. 그런데 굳이 불렀다는 건….”

“뭔지 모르겠지만요, 누님. 아몬디네 성에 가서 제가 정말 잘해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혹 저희를 시험하기 위한 건 아닐까요? 절 혼자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너무 이기적일까요.”


소심하게 불평하던 제이드가 갑자기 사밀레이나를 따라 허리를 꼿꼿하게 펴자 그녀는 씩 웃었다.


“그렇게까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나도 함께 가니까. 다만, 뭔가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은 되네. 후작 자리를 물려받는 사람이 사샤 아몬디네라던데….”

“저번에 베레디를 혼자 돌아다닐 때 소문을 좀 들었어요. 굉장한 미인이라지요? 구혼자들이 바치는 선물이 어찌나 쌓이는지, 성문을 열 때마다 걸리적거릴 정도래요.”

“그래?”


사밀레이나는 약혼 제안서를 가져왔던 사라의 얼굴을 상기하고는 모호한 표정이 되었다. 사라 또한 예쁘장한 편이기는 했으나, 깡마르고 무표정해서 구혼자가 줄을 이을 만큼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자매가 닮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밀레이나와 제이드도, 밖에서 뚝 떨어뜨려 놓고 보면 남매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요, 누님.”

“그래, 제이드. 왜 부르니?”

“이렇게 갑자기 아몬디네 후작 부부가 돌아가신 건…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채비하기에 바빴던 제이드가 뭉쳐 놓았던 궁금증을 털어놓자 그녀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였어. 타고 있던 마차가 산 비탈길에서 쓰러져서 그대로.”

“아….”

“괴물을 만난 건지, 마차를 다 점검하지 못한 건지, 마부의 실수인지, 그런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어. 후작 부부는 즉사했고, 기사와 마부는 지하 감옥에서 조사받고 있겠지. 사고로 여럿이 죽었다는 모양이야.”

“그렇군요…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네요.”

“그렇지. 고운 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쉽게 사고가 날 만한 구간은 아니었다나 봐. 그래서 이래저래 말이 많지. 황실에서도 이번 일에 신경을 좀 쓰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의외였어. 아몬디네 가문에서 우리를 부를 줄이야.”

“그러게요. 뭔가…정말 여러 의미로 걱정이 돼요.”

“괜찮을 거야. 긴장은 좀 해야겠지만, 혼자 그러도록 두지는 않을 테니까.”

“네.”


작은 창으로 머리를 내민 제이드는 먼발치에 보이는 성의 모습에 환하게 웃었다. 뭐가 됐든 사정없이 흔들리는 마차에 앉는 것보다는 성의 손님으로 있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누님. 차녀 사라 아몬디네가 직접 서신을 가지고 왔다고 하셨지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너보다 어렸지. 그리고 작았단다.”

“작아요?”

“그래. 몸집이 무척 작고 깡말랐어. 이렇게 말하는 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어. 나쁜 인상은 아니었지만.”

“신기하네요. 아몬디네 후작가의 자매는 저희만큼이나 사이가 좋다고 하였잖아요? 부유하기도 부유할 테니, 부족함 없이 챙겨 주었을 텐데요.”

“글쎄…입이 짧나?”


그런 개인적인 것까지는 사밀레이나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들처럼 무도회나 다과회를 다니며 타인의 소문을 주고받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그저 아버지를 따라 황실에 두어 번 오가거나 시종들이 말하는 굵직한 소문들 정도나 주워듣는 식이었다. 아몬디네 후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몇 차례 들어본 것이 전부고, 정식으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앙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성으로 가는 내내, 제이드와 사밀레이나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영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활기차고 부유한 사람들의 모습은 수도 베레디의 시민들이나 오귀스트 성 근처에 사는 자유민들과는 또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이 영지 안에는 유독 대장간—혹은 그 비슷한 것—이 자주 보인다는 거였다. 커다란 고철 덩어리 같은 것들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사람이 탈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한 것들도 있었다.


“기계 장치를 연구하는 시설일 거야.”


제이드의 비취색 눈동자에 어린 호기심을 읽은 사밀레이나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면, 저런 고철 덩어리를 타고 움직일 수도 있을 거라더구나.”

“마차 말고요?”

“그렇지. 상상이 잘 안 되지?”

“네. 전혀요.”

“사실 나도 그래. 하지만 정교한 부품을 끼워 넣어, 연료를 주입하면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하는 기계는 이미 있다고 하니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닌 거지.”

“그렇네요…. 마법 같아요.”

“그래. 마법 같아.”


 성으로 가는 입구에 마차가 멈춰 서자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접근을 제한했기 때문에 인파에 휩쓸릴 걱정은 필요 없어서, 사밀레이나와 제이드는 얼른 마차에서 내려 찌뿌둥한 몸을 쭉 폈다. 사밀레이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하품하며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살짝 들뜬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후작 부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이르게 찾아온 오귀스트 백작가의 손님을 환대하기 위함이라기에는 과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여인들보다 사내들이 많았다.

아마도.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직접 모시지요.”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에 사밀레이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환한 금발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여인이 곧게 선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밀레이나보다는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는 무성한 소문이 조금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장밋빛이 감도는 생기 있는 뺨에 걸린 미소는 그림 같았고, 연적색 눈동자는 고운 보석 같았으며 키가 크고 늘씬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황금색 목걸이가 반짝거렸고, 딱 붙는 드레스 자락은 발끝까지 내려왔다. 뚱뚱한 느낌은 없으면서도 뺨과 어깨, 가슴의 선이 둥글고 보드라워 우아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의 배경도 배경이지만, 외모만 보고도 충분히 구혼에 매달릴 법했다.

사밀레이나는 제이드보다 살짝 앞선 채 치맛자락을 쥐고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우선 후작 부부의 일에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을 초대한 것은 제 여동생의 뜻이랍니다.”


약혼의 당사자인 사라 아몬디네가? 사밀레이나는 의아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요. 제 남동생, 제이드 레 메인 오귀스트는 아직 병석에서 일어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장기간 여행은 조금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혹 지병이라도 있으시다면 의사를 미리 대기시켜 둘까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제이드가 주근깨 진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무안해했다.


“누님께서 저를 각별히 여기셔서 그리 말씀하신 겁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그래도 일단은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렇군요. 그럼 이쪽으로….”

“사샤 아가씨!”


대화를 마친 그들이 몸을 돌려 성문을 넘으려던 차, 비명 같은 소리가 인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물론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사샤를 부르는 음성은 종종 있었다. 주로 젊은 남자들이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거나, 꽃을 던지며 사샤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식이었기에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소년은 이따금 곁눈질로 보기는 하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사샤는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익숙해 보였다. 어찌나 태연히 흘려넘기던지, 다소 심드렁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외침은 달랐다. 절규하듯이 날카롭게 찌르는 음성에 사밀레이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훌쩍 돌아보았다.


“후작 어른의 죽음을 제발 상세히 조사해 주세요! 이렇게 돌아가셨을 리가 없어요!”

“예끼, 이 사람 또 그러네.”

“사고 나서 죽은 마부의 아내였다나 봐요. 아닌가? 살아남은 마부인가? 사실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때 살았다 한들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을요.”

“가엾기는 하지만, 여신의 뜻이 그런 것을 어쩌겠어….”

“이건 사고가 아니에요, 사샤 아가씨, 믿어주세요…제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세요…이건 타살이에요…. 정말이에요…. 분명히 문제가 있어요….”


타살, 이라는 단어에 주변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고요해졌다. 영지민들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인상을 찡그렸고, 기사들은 허무맹랑한 음해론에 기분이 상해 살벌한 분위기를 냈다. 사밀레이나는 반사적으로 제이드를 막아서며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소리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가, 눈동자만 굴려 제 곁으로 다가와 선 사샤를 흘끗거렸다. 여자가 인파를 헤치며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서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마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동그란 금속 장식 허리띠가 절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샤는 턱을 살짝 든 채 영지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 맞답니다. 장례식은 이미 끝났고, 역대 아몬디네 가문 사람들이 묻히는 가족 묘지에 묻어 드렸어요. 다만 황제 폐하께서도 조사를 명하셨기에 사고 당시의 상황을 꼼꼼히 조사하고는 있습니다만….”

“아가씨….”

“영지민의 말을 함부로 흘려 들을 수는 없지요. 사람을 보낼 테니 절차에 맞춰 성에 잠시 들리도록 하세요.”

“허무맹랑한 소리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사샤 아가씨. 하나하나 다 귀담으실 필요는….”

“거기 너.”

“…예.”

“부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성으로 모시도록. 알겠어?”

“알겠습니다….”

“공연히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오귀스트 영애. 가실까요.”

“그러죠.”


사밀레이나는 사샤의 안내를 따라가면서도, 무심결에 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재촉하듯 저를 바라보는 사샤를 보았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입꼬리는 완벽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밀레이나는 알 수 있었다. 연적색 눈동자가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남의 영지 일이었다. 그녀가 함부로 참견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기에, 사밀레이나는 눈을 내리깔며 그들을 초대한 성을 향해 나아갔다.




글 :: 사나 (@sanawrite), plea00@naver.com
그림 :: 사윤 (@Sayun_0712), skysky4041@gmail.com

디자인 :: 장미 (@BeYour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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