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연성과 썰은 원작 소설 설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 언제나와 같은 if 세계관 이야기





귀장군이 금린대 지하에 감금되어 있단 설정을 읽다 보니 위무선도 가짜 시체 내세우고 그냥저냥 잘 살아 있었단 이야기도 보고 싶어지는데.. 


비록 음호부를 파괴하느라 몸이 많이 상했고 가짜 시체에 신빙성을 실어주느라 수편도, 진정도, 부서진 음호부도 다 그 곁에 두고와서 제 몸 지킬 방도 하나도 변변치 못한데, 그럼에도 이릉노조 위세 어디 안 가니 산골벽지 같은 곳에서 잡귀나 좀 쫓아주고 구운 감자, 삶은 옥수수 따위 얻어먹고 살아가는 그런...


위무선이 느닷없이 횡사하니 다른 의미로 목적을 달성한 세가들은 슬그머니 이릉노조 성토 대회에서 발을 빼기 시작하고 거기에 더해서 분명 그와 절연했다던 운몽의 종주가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날 말 그대로 미친개처럼 날뛰어서 여론은 순식간에 동정표쪽으로 쏠렸다더라... 


본디 비참하게 죽은 영웅이야말로 가장 쉽게 미화 가능하지 않겠는가. 

절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수 없고, 또한 스스로의 도덕성을 자랑할 만한 상대. 


그래, 이릉노조가 말년에(이 소릴 듣고 강만음은 고작해야 약관을 넘긴 나이에 어찌 말년 소리까지 지껄이냐며 또다시 한바탕 날뛰었다) 다소 방자하게 굴긴 했지마는, 따지고보면 선문세가 중 그에게 은혜 한 번 입지 않은 가문이 있겠소. 어쩌구 저쩌구 주절주절.. 


일이 이쯤되니 이릉노조의 생전에 그와 무슨 연줄이 있었고 어찌 구명 받았나 떠드는 게 자랑거리가 될 지경이라. 일찍이 위무선의 이름의 앞뒤로 별호마냥 붙어다녔던 사마외도란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강만음의 눈에 핏발이 서고 경기를 일으키니 이름 석 자 부르기도 난감했더랬다. 종래엔 적당히 그 사람, 그 인물, 그 자, 그 친구(그러나 이 호칭은 소싯적에 위무선과 얼마나 친하셨냔 날 선 물음에 사장되었다) 같은 호칭으로만 불리게 되었지만 그게 위무선을 말하는 줄은 다들 알지. 


강만음은 난장강 복마동에서 나온 잡기 하나, 종잇조각 하나까지 모조리 쓸어서 연화오로 가져간 것도 모자라서 위무선이 고이 지키던 온씨 방계들마저 '위무선의 유품'이란 명목하게 싸그리 긁어 운몽 귀퉁이에 정착을 시켰는데, 당연히 이 일을 두고 말이 많았지만 위무선이 남긴 물건이 탐나면 그가 남긴 짐덩어리들도 함께 데려갈 테냐 묻는 말엔 차마 답을 못하여서. 


권리와 책임이 한 줄을 타는 건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라 강만음은 뒤늦게 파문 당한 운몽 강씨 대사형에 대한 권리를 주장함과 동시에 그가 떠넘긴 책임마저 제 몫으로 돌렸다. 누가 보아도 잔뜩 무리를 하는 모양새였으나, 그러나, 산 자가 아무리 고생을 한들 죽어 관짝 안에 갇힌 시체만 하랴. 


이미 동생 하나를 잃은 판국에 남은 하나마저 잃을 순 없다며 강염리가 혼례를 미루길 청하니 금자헌 역시 속절없이 이릉노조의 사후처리에 휘말렸지. 무어라 입 뗄 명분이라곤 일절 없던 고소 남씨 함광군은, 감히 운몽에 위무선의 유품 한 점 요구하질 못해 대신 온씨 방계들로 시선을 돌렸을 테다. 


아무리 강만음이 온씨 방계들을 제 휘하에 두겠다곤 천명했어도 그가 베풀 수 있는 은혜엔 한계가 있었다. 목숨 부지하고 사는 게 그 천장일 것이라 진작에 수긍한 온정은 남망기의 손에 아원의 교육을 맡겼다. 보다 정확히는, 맡겨주었다. 바닥에 선 내 눈으로 보기에도 당신이 딛고 선 바닥이 더욱 지옥과 가까워 보이니. 세상 비참한 일이로다. 


이은 것이 없었으니 끊어질 것도 없고, 가지지 못했으니 잃은 것도 없음이라. 

누굴 원망할까. 저 혼자 덜컥 죽어 나자빠진 인간인데. 


우러를 것은 오로지 하늘 뿐이나 망자가 묻힌 곳은 땅 속 깊은 곳이니 한과 망을 저울질하던 이는 기어이 시선을 땅으로 처박았다. 생전에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보았더라면 이제 와서 일생 고개 숙이고 다닐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그 무엇도 사후엔 부질없구나. 




이 천지개벽과도 같은 개찬의 풍문을 들은 위무선은 무슨 생각을 했느냐? 역시 제가 죽은 게 정답이었구나 싶은 씁쓸한 성취나 곱씹고 있었지. 저 하나 사라졌다고 우르르 흐르기 시작하는 역사들을 보고 있자니 아마 제가 지킨답시고 버티고 섰던 게 실은 막고 있었을 뿐인가, 하고. 


강징이 온씨 방계들을 품었다니, 금단에 대한 일은 영영 모를 테지만 그 나름의 보은은 하겠구나. 남잠이 아원을 맡았으니 번듯한 수사로 자라나겠어. 사저가 혼례를 미루게 된 것은 죄송한 일이지만 어쩌면 몸이 조금 회복된 뒤에 남몰래 혼례식을 보러 갈 수도 있으려나. 나 죽기 전엔 하시겠지. 


온녕은 위무선이 죽지 않았단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온정에게도 알리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러나 비구름에 흐린 하늘이 사기 충천하던 난장강의 하늘과 엇비슷해 보이는 날엔 어쩔 수 없이 제 주인 걱정을 했다. 끼니는 잘 챙기시고 계실까. 또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려 잠드시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또다시 산골짝의 동굴 하나를 거처로 삼아 복마동이라 이름 지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위무선의 장례날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흐느꼈고, 진실을 아는 온녕은 눈물이 흐르지 않아 당혹스러웠으나, 흉시는 애당초 울 수 없으니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위무선은 난장강을 떠난 것만으로도 사기에 침식 당해 시시각각 죽어가던 몸에 어느 정도 활기가 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옷차림을 바꿔야겠단 고민에 턱 아래를 오래 쓸었다. 검고 붉은 옷이 어쩌다 이릉노조의 상징이 되었나. 혹자들은 운몽 강씨의 상징색도 버려놓고 늘상 검붉은 옷만 챙겨 입는 위무선을 두고 겉멋이 들었다느니, 역시 사마외도라느니, 피가 튀어도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느니 좋을 대로 떠들었지만 막상 위무선의 속내는 이러했다. 더러워져도 티가 안 나고 관리가 쉬운 색을 골랐을 뿐인데 다들 상상력도 풍부하네. 그 나이 먹고도 동심이 안 죽은 모양이지. 


제 입으로 뱉어낸 피로 적신 옷을 벗어들고 오래 고민하던 위무선은 마른 가슴팍으로 한기가 들자 도로 그 옷을 껴 입었다. 모르겠다. 세상에 흑의 입는 게 나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거추장스러우니 머리나 좀 자를까. 패검이 없어 허리춤 넘어서까지 출렁이는 머리칼을 쥐어잡고 고민하던 위무선은 여귀를 하나 불러 가슴팍 언저리까지 오도록 짧게 치라 명하곤 잘라낸 머리카락을 포상으로 주었다. 


남은 길이를 반으로 접어 대충 올려묶자 허름한 옷에 창백한 안색, 어설픈 매무새까지 더해져 이릉노조 위무선을 모르는 이라면 대충 가난한 청년쯤으로 볼 만했다. 얼굴이 지나치게 잘난 게 흠이긴 했다마는. 하여간 이놈의 미모는 죽기 직전이 되어서도 이 지경이라니까. 


개울가에 얼굴을 비춰보던 위무선은 스스로의 농이 실없어 피식 웃었다. 음호부를 부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기력을 요했고 가뜩이나 엉망이던 몸에 큰 내상을 입혔다. 거기에 이젠 몸을 돌봐줄 온정도 없으니 어디까지 망가졌을지 섣불리 짐작하기도 겁나는 일이었다. 헌데도 난장강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육신이 이다지도 가볍게 느껴지다니. 그간 짊어진 것이 많아 그랬는지, 아니면 회광반조와 같은 착각인지. 


먹은 것 없는 속에 핏물만 잔뜩 들어찼는지 다시금 울컥 올라오는 속을 게워낸 위무선은 돌을 던져 꿩 한 마리를 잡곤 그 길로 산길로 터덜터덜 접어들어 가장 먼저 보이는 수레의 주인에게 동행을 청했다. 어차피 요리해 먹을 재주 없으니 꿩은 주인에게 줄 뇌물이었다. 


허허로운 인자를 베푼 이가 이름을 묻는 말에 댈 성씨가 없어 짧게 고민한 위무선은 시원한 웃음과 함께 '위 모씨' 라는 소갯말에서 제 성을 뚝 떼어네 '모씨'라 답했다. 초로의 노인이 저더러 모 공자라 부르는 것을 듣자 새삼 제가 가문도, 책무도, 죄업도, 이름마저 죄 버리고 왔단 게 실감이 갔다. 







- 2020년 7월 14일에 풀었던 썰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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