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씨."

프란츠는 교장선생님에게 이름이 불린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다. 예의바르게 미적지근한 미소를 얼굴에 걸고 있는 프랑수와 프란체스카 쇼팽이었다.

"쇼팽 양."

프란츠는 가상의 모자를 까딱하고, 프랑수와도 가볍게 고개를 한 차례 끄덕여 인사한다. 프란츠는 조금 굳어서 쭈뻣거린다.

"몹시 반가워요.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것도 꽤 됐죠?"

프랑수와는 아무 말없이 더러운 가축을 보는 눈으로 프란츠를 바라본다. 프란츠는 스스로가 그 시선 앞에서는 얼마나 작아지는지 절감한다.

"리스트 씨. 리스트 씨와 시시한 잡담이나 하려 말을 건 건 아닙니다."

"아, 물론...그러리라 예상했죠."

프랑수와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도 프랑수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던 편이었던 것 같지만 오래간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자신의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자리를 옮길까요."

"물론이죠."

부드러운 녹색 옷감 아래로 신발 끝이 보인다. 프란츠는 문을 열고, 프랑수와는 먼저 아직 날이 찬 바깥으로 나선다. 하얀 입김이 하늘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걸을까요?"

그 편의 예의였기에 물어보지만, 프랑수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오래 걸릴 이야기가 아니니 괜찮습니다."

프란츠는 제 손등을 만지작거린다. 프랑수와와 마지막으로 대화했던 때에 비해 프랑수와는 눈에 띄게 피로해 보인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눈은 더 푹 들어가 보였고, 혈색은 백색에 가깝게 창백했으며 안 그래도 말랐던 몸은 더욱 가늘어졌다.

방금 전까지는 프랑수와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바랐으나, 이제는 그러지 말았으면 했다. 프란츠는 몸을 급하게 돌린다.

"바깥이 차네요, 들어가는 게 낫겠어요."

"참으로 변덕스러우시군요. 자신의 결정에도 이리 쉬이 질리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프랑수와치고는 긴 말이었다. 프란츠는 그 자리에 멈춰선다.

변덕스럽다.

도둑이 제발저린다던가, 프란츠의 심장이 덜덜 떨렸다. 프랑수와가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것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았는데도, 프란츠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변덕, 스러운 게 아니죠. 진심으로 쇼팽 양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걸요."

"아, 그런 줄은 제가 미처 몰랐군요. 무례를 범했습니다."

프랑수와는 덤덤하게 제 팔을 쓸어내리며 계속 말을 한다.

"오늘 베를리오즈 씨께 주신 선물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상당히 고가의 선물 같더군요."

"물론이죠. 제 소중한 친구니까요."

프란츠는 빙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기분을 느끼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정성들여 고른다.

"본래는 미혼의 남성이 미혼의 여성에게 보내는 선물로는 적절치 않다 말씀드릴 생각이었으나... 리스트 씨를 보니 상관없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프랑수와의 눈길이 프란츠의 화려한 단추와 브로치, 옷 무늬에 와닿았다가 떠난다. 리스트는 시선을 낮춘다.

순간적으로 몹시 화려한 드레스라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수와의 드레스는 화려하다기보다는 우아하고 정교했다. 한 곳의 무늬라도 빠지면 미완결의 상태로 남을 듯이 섬세하고 완벽했다. 짙지도 엷지도 않은 녹색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프란츠는 멋쩍게 웃는다.

"제 사치에 대한 냉소신가요?"

"냉소라니요.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전해드렸을 뿐인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말씀드린 모양입니다. 할 말은 이게 전부였습니다. 시간 뺏어 죄송하군요."

프랑수와는 비어 있는 제 목을 쓸어내리며 프란츠를 지나쳐간다.

프란츠는 바깥에 달린 등불에 불을 붙이고 파이프를 문다.

사실 프랑수와가 무슨 의도로 한 말이었는지 프란츠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아무에게나 값비싼 보석과 옷과 장신구를 사주는 당신에게 저 보석은 딱 평범한 꽃과 과일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겠구나-하는 빈정거림이었다.

하얀 연기. 프란츠는 프랑수와에게 보냈던 헤어핀을 떠올린다. 은은한 분홍빛과 보랏빛이 섞여 여러 개의 진주가 포도알처럼 송송이 달린 진주와 금으로 세공한 이파리 모양의 장식이 합쳐진 헤어핀이었다.

당시 프랑수와는 호의는 감사하나 과분한 선물이라며-다시 말해 부담스럽고 조금은 도를 넘은 선물이라는 의미의-거절과 함께 프란츠에게 헤어핀을 돌려주었다. 헤어핀에는 머리카락이 한 올 끼어 있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프란츠는 프랑수와 쇼팽이 망설이다가 헤어핀을 곱게 착용해봤음은 알지 못한 채 아쉬운 마음만을 안고 지나쳤을 것이다. 프랑수와는 제 머리카락 한 가닥이 끼었음을 알지도 못하고 보내준 것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머리카락을 잘라 나눠가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렁이는 것이었다.

하여 다른 모든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재활용해도 그 헤어핀만은 그럴 수 없었다. 비록 프랑수와가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보답을 해 준 유일한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수와는 아마도 그것조차 프란츠가 뿌리고 다니는 또 하나의 의미없는 선물로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전까지는 그 헤어핀에 프란츠에게서 받았던, 사람은 별로였어도 선물만은 좋았던 기억이 함께했다면 이제부터는 헤어핀조차 프란츠의 형편없음을 한 차례 더 강화시켜주는 상징이 되었으리라.

아무렴 어떠랴, 프란츠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굴러갈 리가 없다. 시체의 손을 놓으면 힘없이 툭 떨어지듯이 프란츠도 이제는 저항해보고 싶은 의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프란츠의 변덕스러운 본성은 이 희극에서 프란츠를 최적의 악역 배우로 점찍어놓고 있었으니 인생이 그런 연기를 자신에게 바라고 있다면 순응하는 수밖에.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고, 별로 관심도 없었다.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프란츠는 매운 입김을 뱉어낸다.

슬슬 들어갈 시간이었다. 들어가자 에투아르가 급하게 리스트의 손을 잡아끌고 의자를 치워놓은 응접실에서 다른 페어들과 함께 선다. 프랑수와는 들라크루아의 말을 들으며 유쾌하게 미소를 짓는다. 피아노에 앞에 앉은 멘델스존이 세상에 하나뿐일 왈츠를 즉석에서 지어내 연주하기 시작한다. 경쾌하고 폭신폭신한 음악이 맑게 굴러가며 햇빛이 쏟아지듯 음을 쏟아낸다. 누구도 왈츠가 끝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다들 숨이 차서 헥헥거리기 시작할 때서야 아마 십분은 넘게 이어졌을 멘델스존의 연주가 천천히 잦아든다. 에투아르는 발그레해진 뺨을 빛내며 파티의 주인공다운 미소를 지어보인다. 하얀 목에서 프란츠의 선물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얼핏 보면 사람들을 보는 듯한 멘델스존의 시선이 에투아르의 목에 꽂혀 있음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구석에서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앉아 있던 프랑수와가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프란츠는 에투아르의 머리 위에 제 턱을 댄다-에투아르는 프란츠가 그럴 때마다 자기가 턱 받침대인 줄 아냐고 짜증을 냈지만 정말 편했다.

프랑수와가 다시 곡을 칠 준비를 하던 멘델스존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멘델스존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혹시 실직한 전직 반주자와 함께 한 곡 춰주실 맘씨 고운 숙녀분이 계실까요!"

멘델스존인데, 누군가가 따라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에투아르는 잠시 멘델스존 쪽을 아쉬운 듯 바라보다가, 마음을 다잡은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다시 프란츠를 바라본다.

"이제는 너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 연기를 하는 게 맞겠지?"

"그럼."

모든 쌍이 자리를 잡자 쇼팽의 손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힘이 실린 폴카가 시작된다. 프랑수와는 텅 빈 웃음을 지으며 행복하게 폴카를 연주한다. 눈을 감은 채로도 선율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짝이 몇 차례 바뀌고 멘델스존은 한 바퀴 돈 에투아르의 두 손을 잡고 즐겁게 뛰어다닌다. 프란츠는 씁쓸하게 웃으며 에투아르의 또 다른 친구와 손을 맞잡는다.

화폭 속에 화가는 담기지 않듯이, 이 격정의 장에 프랑수와는 담기지 않았다. 프랑수와는 현명히도 프란츠와 얽히기를 거부하며 건반과 하나되어 있었다. 프란츠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았을 크기의 소리였지만, 프랑수와에게는 산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일 텐데, 대체 저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프란츠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몇 분이 지나고 프랑수와가 몸을 살짝 떨며 곡을 마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해 보이는 프랑수와를 상드가 의자로 옮겨준다. 에투아르가 프랑수와의 실크 숄을 덮어 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쇼팽은 괜찮아진다.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희극도 어떻게든 잘 끝날 것이고, 프랑수와는 자신에게 받은 상처 따위 금방 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프란츠는 그렇게 믿는 것이 훨씬 낫다고 믿으며 와인을 한 잔 더 채운다.

클래식 작곡가 RPF/RPS 연성을 합니다. 간혹 작곡가 관련 개인적 사담+ 작곡가 편지 자료+ 작곡가 TMI 자료 등등을 올립니다!

타피 클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