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청담동 명품 거리의 이면, 조용한 골목 사이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요정(料亭), 풍월관이 있었다. 기와지붕으로 된 2층 건물 가운데 '風月館(풍월관)' 이라는 한자가 수려한 서체로 쓰인 간판이 매달려 있었고,  매일 밤 8시부터 새벽까지 불이 밝게 켜져 주변을 밝혔다. 

하지만 풍월관이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진 곳은 아니었다. 철저한 예약제였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정문에는 항상 검은 양복을 입고 인이어를 낀 사내 둘이 지키고 있었다. 그 풍월관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 세단만 드나들었다. 그 세단에서 내리는 자들 또한 대부분 빳빳한 양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왼쪽 가슴에 소속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다니는 자들도 빈번하게 있었다.

저녁 여덟시, 어둠이 풍월관의 기와지붕 위로 깔릴 무렵, 풍월관 주차장으로 검은 세단이 연이어 들어왔다. 주차장에 일렬로 선 차에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새까만 정장을 입은 십수명의 사내들이 내려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풍월관 입구까지 양 옆으로 나란히 서 길을 만들었다. 그 후 가운데 세워진 세단 조수석에서 남자가 내렸다. 오른쪽 눈 아래 눈물점이 있는 옅은 색 머리의 남자는 기껏해야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표정은 차갑고 딱딱했다. 그는 습관처럼 주변에 위험한 것이 없는지 눈으로 빠르게 확인한 후에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눈물점의 남자보다 훨씬 중후한 멋이 있는 사내가 내렸다. 검은 셔츠, 검은 정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꽤 키가 컸다. 회장님. 눈물점의 남자에 의해 회장님이라고 불린 사내는 짙고 검은 콧수염을 한 번 매만지다 사내들이 길을 만든 한 가운데로 걸었고, 눈물점의 남자도 그를 뒤따랐다. 그가 걸어가자 모든 사내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차 회장님?

마담, 내가 여덟 시 맞춰서 온 거 아니었나? 기다리다가 목 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

회장님도 참. 어서 들어오세요.

의건아, 들어가자.

차회장이 너스레를 떨며 마담의 뒤를 따랐고, 의건은 아직까지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사내들을 손짓 하여 일어나게 했다. 그 중 반은 요정을 지키고 반은 따라 들어오라 지시했고, 의건의 간단한 지시에 사내들이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 섰다.


마담은 종류별 술과 스무 가지가 넘는 궁중 음식, 그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들이 준비되어 있는 방으로 차회장을 안내했다. 차회장이 가장 안쪽 자리에 들어가 앉으니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여자가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앉았다. 차회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여자의 허리를 감싸안아 당겼다.

역시 마담 눈썰미가 좋다니까.

과찬이세요, 회장님.

의건아, 너도 앉아라.

아임더. 서 있겠심더.

방문 옆에 서 있던 의건이 단호하게 거절해버리니 차회장이 쯧쯧, 혀를 찼다. 눈치 빠른 마담이 그러지 말고 앉으셔요, 하고 비음 섞인 목소리로 권유했고, 띄엄띄엄 앉아있던 여자들이 마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어서 의건의 양쪽 팔에 팔짱을 끼고 자리로 데려왔다. 팔짱을 끼고 움직이니 팔에 한 겹의 비단 아래 풍만한 가슴이 닿았다. 앉으라는 차회장의 손짓에 하는 수 없이 차회장 옆자리에 앉은 의건은 보는 사람도 불편할 만큼 좋지 않아 보이는 얼굴을 했다. 차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거이거, 이 놈이 이런 데는 아주 숙맥이야. 언제 크나, 응?

나중에 강실장님만 따로 저희 요정에 몇 번 보내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드릴테니.

오호, 그럴 테냐, 의건아? 어때, 이 참에 계집의 맛을 알아보는 건.

차회장이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옆구리에 낀 여자의 가슴을 주물렀고,  여자는 짐짓 놀란 체를 하다 부끄러운 척 얼굴을 붉혔다. 마담이며 다른 여자들도 꺄르르 웃었으나 의건 만은 꼿꼿하였다.

시간 됐심더. 

마담, 우리 의건이가 시간 됐단다. 손님 맞아야지.

예, 회장님.

마담이 손님을 맞으러 나간 사이 여자들이 차회장과 의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양주보다는 사케나 정종을 선호하는 차회장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차회장이 잔을 들자 의건도 따라 들어 잔을 부딪혔고, 의건은 고개를 돌려 술잔의 술을 한 모금에 삼켰다. 차회장은 음미하듯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차회장의 술잔이 채 비기도 전에 마담이 새로운 손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손님은 딱 보기에도 고급 정장을 입었고, 가슴에는 국회의원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있는 남자였다. 차회장과 의건은 앉은 채로 그를 맞이하였고, 그 자는 그러한 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의건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크흠,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차회장이 국회의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의원님.

크흠, 반갑네.

이 의원의 반말에 의건의 표정이 보란 듯이 구겨졌다. 이 의원이 그런 의건의 얼굴을 보고 흠칫하였고, 차회장은 일부러 말리듯 의건 앞에 손을 들어보여 막는 시늉을 했다. 

어째, 자리가 불편하십니까? 들어오실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 혹시 저희 애들이 실수한 거라도 있었습니까?

아, 아닐세. 불편은 무슨. 

이 의원은 잠깐 움츠러들었던 제 모습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더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여전한 반말에 의건은 날카롭게 이 의원을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차회장만이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의원은 차회장과 의건을 번갈아보다 또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서로 바쁜 것을 아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함세. 

그러시죠.

이번 정기국회 발의 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아아, 듣자하니 이 의원님께서 새로 프랜차이즈 관련 법안을 발의하신다고 했지요.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결국엔 프랜차이즈 대기업 살리고, 동네 가게는 말아먹고, 의원님은 뒷돈 두둑이 챙길 수 있는 그런 법안이요. 그 법안에 제 도움이 왜 필요하실까? 아하, 그러고보니 이 법안이 소문이 나니 중소기업협회에서 단체 농성을 벌일 계획이라고 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입니까? 우리 애들 풀어서 농성하는 놈들 다 밀어버리라구요? 아니면, 아예 그 놈들을 묻어버릴까요?

어허, 이 사람! 말을 가려서 하게!

이 의원은 펄쩍 뛰었다. 하지만 차회장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이었고, 이 의원은 화로 얼굴이 시뻘개져선 금방이라도 나갈 기세였다. 차회장은 방금 전과는 다르게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이 의원님께서 준비하신 건 뭡니까.

크흠, 흠! 내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지. 들리는 말에 차회장이 이번에 새로 카지노를 열고 싶어한다고 들었네만, 좋은 땅 자리 하나 알아봐줌세. 

차회장은 말없이 술을 넘겼다. 말인즉슨, 차회장이 카지노를 열고자 하면 법에 걸리지 않게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말이 된다. 카지노를 열 만한 목돈도 얹어줄 것이다. 차회장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 의원님, 알고 계십니까. 지난 4월 임시국회 때 한남 재개발 관련 법안 발의하셨지요? 억울하고 힘없는 주민들 밀어낸다, 어디 가서 사느냐. 재개발을 멈추고 동네의 아름다움을 유지하자. 아주 바랍직한 법안이었지요. 덕분에 의원님도, 당도 이미지 쇄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랬지. 

그 때 그 재개발 한창 추진하던거, 다 우리 애들입니다. 그 때 난리도 아니었어요, 돈은 돈대로 잃고, 애들도 쌔빠지게 고생하던거 다 허탕치고. 그 뿐입니까? 그 때 저랑 동업하시던 윗분 하나가 그 길로 떨어져나갔죠. 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이 의원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았다. 차회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 의원은 앉은 자리에 가시라도 돋힌 듯 안절부절 못했다. 차회장이 웃으며 이 의원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이 의원은 하나도 입에 넣지 못했다.

그, 그래서 지금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건가!

뭘 어쩌긴요. 그냥 하소연이나 하는 겁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죠,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뭐, 뭐야? 

일어나이소. 안내해드리겠심더.

이런, 건방진!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런 대접을 하는 거야?!

일어나라고.

의건의 섬뜩한 한 마디에 이 의원이 움찔 놀라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이 의원은 문 밖에 서 있던 검은 사내들에 의해 끌려나가다시피 방을 나갔다. 


차회장과 의건, 그리고 여자들이 남았다. 차회장은 안주를 집어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의건아, 처리해야겠다.

예.

팔팔한 주둥아리랑 눈깔만 남겨.

예.

자, 우리는 이제 좀 즐겨볼까?

차회장이 양 옆에 있던 여자들을 끌어왔다. 이제까지 쥐죽은 듯 있던 여자들이 그제서야 꺄르르 웃으며 차회장에게 붙었다. 의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나왔고, 비어진 의건의 자리를 채우듯 다른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풍월관 뒷마당, 담벼락 때문에 그늘이 져 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누가 있다고 해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의건의 발걸음이 향했다. 건물 외벽에 기댄 의건은 뒤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지시를 내릴 요량이었다. 차회장이 명령을 내렸으니 그 명령은 일주일 안에 빈틈없이 처리해야만 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폰을 귀에 갖다대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의건은 귀에 대었던 폰을 슬쩍 떼었다가 다시 대어보았지만 역시 폰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아도 어두워 좀처럼 다른 사람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우는 소리가 그치기는커녕 의식하니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의건은 일단 전화는 끊고 뒷마당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 발을 한걸음 떼는데 발에 툭 무엇인가가 걸렸다. 무꼬? 손을 내려 짚이는 것을 주워 올렸다. 누군가의 손이 의건의 손에 딸려 올라왔다.

의건의 한 손에 전부 잡히는 자그마한 손을 어깨높이까지 끌어올리고 나서야 반강제적으로 일어나게 된 자의 얼굴을 담벼락 너머 드리우는 불빛으로 겨우 볼 수 있었다. 언뜻 봐도 십대, 많이 쳐봤자 이제 스물이 되었을 법했다. 옅은 갈색 머리에, 희미한 빛을 품은 눈이 사슴마냥 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볼썽사나울 정도였다. 어린애, 눈물. 그 두 가지가 의건이 약해지는 부분이었다. 딱딱했던 의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마,마,마,왜 울고있노,이기,누꼬,이기,우짜노.

의건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스러워 했다. 그런 곳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했고, 다른 곳도 아니고 풍월관 뒷마당에 있는 것이 이렇게 어린 애일 줄도 몰랐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울고 있는 건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게다가 여리하게 생긴 것이 조금만 건드려도 톡 터질 것만 같아서 손목을 붙잡은 채로 멀뚱멀뚱 보기만 하게 되었다.

이거 놔.

아직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제법 퉁명스러웠다. 의건이 어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다가 손을 툭 놓아줬고, 그 남자아이는 잡힌 손이 꽤 아팠는지 툭툭 털다가 주먹을 쥐고 뺨을 적신 눈물을 슥슥 닦았다. 고운 얼굴 다 망가지겠네. 생각한 의건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줬더니 남자아이는 의건을 매섭게 올려보다 필요없어, 또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만약 제 밑에 놈이 그 남자아이마냥 나이도 무시하고 반말을 해댔다면 바로 혼을 냈을테지만, 이 아이한테는 그게 좀 귀엽게 보여서 그냥 놔뒀다.

쪼끄만게 와 이런데 있노.

실은 왜 울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한번 눈을 매섭게 뜰까 싶기도 했다.

...그쪽, 이 집 손님이야?

남자아이가 의건을 발밑에서부터 위로 훑어봤다. 그 눈빛은 마치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이런 곳에나 드나드는 거냐고 묻는 듯했다. 의건은 괜히 죄를 지은 기분이 들어 뒷목을 매만지다가 남자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강생이는 이른데 나다니는 거 아니다, 마. 집에 가라.

남자아이는 의건의 사투리를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지 미간을 구기긴 했지만 대충 뜻은 통했는지 신경 꺼, 한소리 하며 마당을 돌아 나갔다. 의건은 거센 바람이 한바탕 분 것마냥 넋을 놓고 았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어린 게 울고 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 고 강생이 진짜.

남자아이가 돌아나갔던 그대로 건물을 돌아 앞마당으로 나왔다. 여즉 지키고 서 있던 부하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여 강생이 하나 안 지나드나.

강생..강아지요?

아, 마 그기 아이고 강생이 말이다, 강생이. 쪼만, 요까지 오고 눈 부리부리 해갖고,

아, 남자애 말입니까? 방금 풍월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새끼를 와 풍월관으로 보내노? 도랐나! 

의건이 금방이라도 부하의 어깨를 내려칠 것처럼 손을 훅 들었다. 부하가 잔뜩 쫄아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제 상사의 심각하게 화가 난 표정이 보여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화, 확인은 철저히 했습니다. 여기 마담 아들이라고 해서 들여보내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아들? 마담?

예.

의문이 들었다. 풍월관을 드나든 지 꽤 오래되었지만 마담의 아들이라는 녀석을 본 적이 없었다. 의건이 좀처럼 납득하지 않고 있으니 부하가 다시금 더듬으며 말했다.

푸, 풍월관 마담이 직접 데리고 들어갔으니 확실합니다, 실장님. 정말입니다.

알았다, 마. 

아들이라고? 의건은 여전히 의문을 품었다. 슬쩍 풍월관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강생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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