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긴상!

 

─긴짱!

 

사카타 긴토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파치, 카구라……?”

 

긴토키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우거진 수풀뿐. 사람의 인기척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명히 긴토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긴상이다! 긴상이야, 카구라짱!

 

─응! 긴짱이다 해!!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긴토키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버버댔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시간이 없어.

 

─긴짱, 잘 들리냐 해?

 

“정말로 신파치와 카구라, 인 거냐……?”

 

─네!

 

─응!

 

아이들이 외쳤다. 한 치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힘차게.

 

─긴상,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할게요. 긴상이 지금 계신 곳이 평행세계라는 것은 아시나요?

 

“어, 어. 그런 것 같더라.”

 

긴토키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대강 추측했을 뿐이지만, 역시 이곳은 평행세계였던 모양이다.

 

─긴상은 지금 의식만 다른 세계로 넘어간 상태에요. 세계선을 잇는 열쇠── 쇼요 선생님의 심장 탓에요.

 

“뭐?”

 

긴토키는 아르타나의 폭주에 말려들기 직전까지 가지고 있던 붉은 광석을 떠올렸다. 그것은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긴짱, 그 세계의 열쇠를 찾아. 그리고 지금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어라 해. 그러면 원래 세계로 올 수 있을 거다 해.

 

“열쇠라니, 그게 대체…….”

 

─막대한 아르타나가 뭉치면 열쇠가 될 수 있다고 해요. 그곳에도 비슷한 것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리고 서둘러라 해. 긴짱이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아네랑 모네가 말했다 해.

 

“아네랑 모네가?”

 

황룡문의 무녀. 아르타나에 있어서는 지구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그녀들의 말이라면 분명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큰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이들의 음색에서는 급박함이 느껴졌다.

 

─사정이 있어서 오랫동안 대화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끊겠다 해.

 

─긴상…….

 

신파치의 목소리가 애수에 젖었다. 신파치는 잠시 머뭇거렸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말을 고르는 듯했다. 소년은 끝내 짧은 말 한 마디를 남겼다.

 

─몸조심하세요.

 

─긴짱, 다시 만나.

 

카구라는 명랑하게 당연한 듯 재회를 약속했다. 긴토키는 대답하지 못했다. 더 이상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절벽 끝은 다시 적막으로 가득찼다. 그날따라 바람도 불지 않아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방금 들은 신파치와 카구라의 목소리가 꿈결에 본 신기루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 긴토키는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긴토키는 아이들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이곳은 평행세계이고, 자신은 쇼요의 심장 탓에 의식만 이 세계로 이동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열쇠’를 찾아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원래 세계의 열쇠는 쇼요의 심장이다. 그에 비견될 만큼 아르타나를 품고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존재할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이쪽 세계 아르타나 변이체의 심장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 하하.”

 

긴토키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제 때가 온 것이다.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들을 마주할 때가. 너무나도 달콤하고, 무척이나 안락해서, 저도 모르게 생각하기를 피해왔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야겠지.”

 

긴토키는 가슴 쪽의 옷자락을 쥐었다. 옷에 잔뜩 주름이 졌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분명 오늘 아침까지도 만난 아이들인데. 몸조심하라고, 다시 만나자고 하는 말이 이토록 아득하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사카타 긴토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긴토키는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스쿠터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긴토키는 왔던 길을 막힘없이 돌아갔다. 멀리로 에도의 빌딩 사이에 솟구쳐 있는 터미널이 보였다. 에도로 돌아가면, 우선…….

 

“……응?”

 

그러다가 시야를 스치고 간 붉은 옷자락에 긴토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꿈뻑이고 말았다. 과거 ‘백야차’라 불릴 만큼 싸움에 탁월했던 긴토키는 동체 시력과 관찰력 또한 발군인 편이었다. 방금 반대편 차선을 지나간 스쿠터가 눈에 밟혔다. 안전모와 고글을 쓴 두 여성이 스쿠터를 타고 있었고, 붉은 무녀복을 입고 있었으며, 뒤쪽에 앉은 여성은 하얀 강아지까지 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스톱! 스톱스톱스토오오오오옵!!”

 

긴토키는 스쿠터를 세우고는 역주행을 시작했다.

 

“멈춰! 거기 앞에 가는 스쿠터!!”

 

“언니! 옆의 스쿠터가 역주행해요!”

 

“미친 놈인가?!”

 

“왕왕!!”

 

“아니야! 그보다 우선 멈추라고!! 나야, 나!!”

 

“나야 나 사기에는 안 당합니다! 꺼져라, 사기꾼!!”

 

“잠깐만요, 언니. 이 목소리는……?”

 

그제야 긴토키를 알아본 아네와 모네가 길가에 스쿠터를 세웠다. 겨우 따라붙은 긴토키도 그 옆에 스쿠터를 주차했다. 긴토키는 고글과 헬멧을 벗었다.

 

“아, 역시 긴상이었군요.”

 

“왕!”

 

“니들 진짜 어디 갔었냐? 갑자기 에도에서 없어져서 얼마나 곤란했었는지 알아?”

 

긴토키가 투덜댔다. 아네가 불만스러운 듯 허리에 손을 얹으며 대꾸했다.

 

“의뢰비를 바로 못 받은 게 그렇게 급한 일이었나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지갑을 안 가져와서. 그보다 긴상도 의뢰 드린 사진 아직 안 주셨잖아요.”

 

“엉? 뭔 소리야?”

 

긴토키가 얼굴을 찌푸렸다. 의뢰? 그녀들이 이쪽 세계의 자신에게 의뢰를 했었다고?

 

“일단 사정을 좀 설명해봐. 너네가 나한테 무슨 의뢰를 했는데?”

 

“용혈 근처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에도를 떠나 사진을 받지는 못했지만요. 이제 됐어요. 지금 가는 길이니까요. 직접 확인할게요.”

 

당연히 긴토키가 알 것이라고 전제한 말이었기 때문에 쉬이 맥락을 읽을 수 없었다. 긴토키는 손을 들었다.

 

“잠시만. 일단 상황을 정리하자. 내 쪽 사정부터 설명할게.”

 

긴토키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자신은 평행세계에서 왔고, 지구의 아르타나 상태가 안정되어 있지 않다고 들었고, 터미널은 아르타나를 기준치 이상으로 뽑으려 했으며, 원래 세계의 신파치와 카구라가 평행세계로 돌아가려면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 전해주었다고. 평행세계라는 대목에서 자매가 화들짝 놀랐다.

 

“현재 시공간에 균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거 긴상 때문이었나요?!”

 

“나 때문이라니?”

 

“이거 언니, 아무리 봐도 다른 세계의 사람이 온 바람에 균열이 닫히지 않는 거 같죠?”

 

“그렇네. 아르타나 상태가 영 나쁜 것도 그 영향인 거 같고.”

 

“하필은 이쪽 세계로 온 건 저희 의뢰 때문 같은데…….”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거기다 터미널이 아르타나를 기준치 이상으로 뽑아내려 했다니.”

 

“대체 무슨 속셈으로……. 설마?”

 

자매가 저들끼리 쑥덕대고 있으니 긴토키가 입술을 내밀며 끼어들었다.

 

“야, 나도 이해가 가게 얘기해줘.”

 

“아, 네. 알겠습니다.”

 

아네가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은 후 설명을 시작했다.

 

“일의 발단은 저희의 의뢰인 것 같아요. 저희가 용혈 근처를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긴상에게…… 그러니까 이쪽 세계의 긴상에게 부탁드렸거든요.”

 

“그냥 정기적으로 하는 용혈 관리였어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거죠. 일일이 직접 가는 게 귀찮으니까 이번에는 몇 군데를 긴상에게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부탁드렸지만요.”

 

“그런데 그때 긴상이 저쪽 세계에서 평행세계로 가는 문을 열고 만 거예요. 하지만 세계선은 물리적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의식만 이동했는데, 수억 수조의 평행세계 중 이쪽 세계의 긴상에게 당첨된 것 같아요. 저희 의뢰 때문에 마침 이쪽 세계의 긴상이 용혈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죠.”

 

“빙의라고 해야 하나……. 저희도 문헌으로밖에 본 적 없는 사례라 놀랍네요.”

 

긴토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긴토키가 가지고 있던 쇼요의 심장 때문에 평행세계로 가는 문이 열렸다. 아르타나의 폭주와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 것도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런데 이쪽 세계의 자신은 그때 마침 아네모네 자매의 의뢰로 용혈 근처에 와 있었다. 그래서 긴토키는 수많은 평행세계 중 이곳의 자신에게 빙의한 것이다.

 

“지구의 아르타나 상태가 나쁜 건 나 때문이야?”

 

“아마도요. 다른 세계의 사람이 와 있는 탓에 시공간의 균열이 수복되지 않는 거 같아요. 아르타나와 시공간의 균열이 서로에게 계속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솔직히 얘기해서, 까딱하면 지구가 망할지도 몰라요.”

 

“뭐어?!”

 

황당한 말에 긴토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 때문에 지구가 망한다니, 말도 안 되는 악몽이었다. 신파치와 카구라가 다급해 보였던 것도 그 탓일지도 모르겠다.

 

“저희는 지구의 아르타나 상태가 나빠진 것을 눈치채고 각지의 용혈들을 진정시키러 다녔어요. 그거 때문에 캬바레에도 휴가를 냈구요.”

 

“근데 에도를 떠난 와중에 터미널까지 그런 짓을…… 어쩐지 아르타나 상태가 진정되지 않더라!”

 

모네가 탄식했다. 긴토키는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질문했다.

 

“터미널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글쎄요. 하지만 정황을 고려하면…… 긴상이 말한 그 ‘열쇠’ 때문이 아닐까요?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를 만들려고 아르타나를 뽑았다는 게 제일 유력해 보이는데.”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를 만들어서 뭘 하는데?”

 

“높으신 분들이 뭘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분명 변변찮은 생각은 아니겠지만요.”

 

아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모네에게 안겨있던 코마코가 끼잉끼잉 소리를 냈다. 모네는 코마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언니,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요?”

 

“긴상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야지. 그래야 균열도 닫히고 용혈도 진정될 거 같아.”

 

“긴상이 돌아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그거라면 내 쪽에서 짐작 가는 게 있어.”

 

“네?!”

 

긴토키의 말에 아네와 모네가 화들짝 놀랐다. 긴토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그 녀석과 마주할 때가 온 거지. 열쇠에 대해서는 나에게 맡겨.”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왕왕!”

 

코마코가 힘차게 짖었다. 아네와 모네가 다시 스쿠터에 올라타며 고글을 썼다.

 

“그럼 저희는 긴상이 열쇠를 찾을 때까지 최대한 아르타나를 진정시키고 있겠습니다. 저희는 핸드폰이 없으니, 열쇠를 찾으면 이걸 써서 연락해주세요. 불태우면 쓸 수 있어요.”

 

아네가 주머니에서 종이로 된 부적을 꺼냈다. 부적을 불태우라니 오컬트적이구만. 긴토키는 그런 감상을 흘리며 부적을 옷 소매에 꾸겨 넣었다. 무녀 자매와 강아지 한 마리는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며 떠났다. 긴토키도 스쿠터를 몰아 에도로 돌아왔다.

 

부우우웅. 푸른색의 스쿠터가 익숙한 카부키쵸의 거리를 질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해결사 사무소가 있는 2층짜리 목조 건물 앞에 멈춰야 했다. 그러나 긴토키는 그 전에 브레이크를 밟고 말았다.

 

“응?”

 

멀찍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카부키쵸의 거리도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긴토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고, 그나마 다니는 사람들도 낯빛이 어두웠다. 일찍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았다.

 

무법자의 거리에는 하루에도 온갖 소동이 일어난다. 어지간한 일로는 까딱도 하지 않는 간 큰 이들이 사는 곳이 카부키쵸이다. 그런 카부키쵸가 긴장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저들 때문에.

 

긴토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흑의를 걸친 이들을 보았다. 검은 옷에, 삿갓에, 석장…….

 

“나락?!”

 

긴토키는 기겁하며 스쿠터를 뒷골목에 주차했다. 긴토키는 근처 가게에서 삿갓을 하나 사서 쓴 후 기척을 죽인 채 걸어갔다. 해결사 사무소로 향할수록 까마귀들의 악취가 심해졌다.

 

나락의 감시망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점에서 그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긴토키는 고개를 들어 해결사 사무소를 보았다. 그의 집은 폐쇄되어 있고, 1층 오토세의 스낵바는 문이 깨져 있었다. 그 주위를 수십의 까마귀들이 둘러싸고 있다. 저들의 목표가 해결사라는 것은 명백했다.

 

‘나락 녀석들이 왜……. 그보다 카구라랑 할망구네는……!’

 

긴토키의 얼굴이 초조로 물들었다. 제 집에 가 있을 신파치는 몰라도 카구라와 사다하루, 오토세, 타마, 캐서린이 걱정이었다. 긴토키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는데 어느샌가 한 사람이 다가왔다.

 

“어이, 너. 삿갓 벗어 봐.”

 

“……!”

 

들켰다. 나락은 터미널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긴토키를 안다. 얼굴을 보이면 끝장이다. 긴토키는 즉각 목검을 뽑았다.

 

“크헉!”

 

“저 녀석은 뭐냐!”

 

“쫓아!!”

 

어차피 쫓길 바에야 사카타 긴토키가 아닌 난폭한 낭인으로 취급되는 쪽이 나았다. 긴토키는 달려드는 나락의 암살자들을 모두 때려눕히며 달려갔다. 일단 추격자들을 떼어놔야겠다. 사람들을 찾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긴토키는 무작정 달렸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날 때였다. 긴토키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긴토키, 이쪽이네!”

 

“즈라?!”

 

긴토키가 반색했다. 그는 바로 카츠라 코타로였다. 긴토키는 카츠라를 따라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뒷골목의 맨홀이 열려 있었다. 카츠라는 그를 맨홀 아래로 안내했다. 긴토키가 사다리를 타고 맨홀로 내려가자 카츠라도 맨홀 뚜껑을 닫고는 뒤따랐다. 나락의 암살자들이 보기에 긴토키는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깔끔한 도망 솜씨는 과연 ‘도주의 코타로’라고 불릴 만했다.

 

“즈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

 

하수구 아래로 내려온 긴토키는 카츠라에게 그렇게 물었다. 카츠라는 발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나도 다 자세한 것을 아는 것은 아니네만…… 아는 것만큼은 설명해주지. 일단 내 아지트로 가자. 리더와 오토세 님 일행도 그곳에 있으니.”

 

“다들 무사한 거야?!”

 

“그래.”

 

긴토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하수구를 지나 다른 맨홀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비밀스레 감추어진 카츠라 일파의 아지트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카츠라의 말대로 카구라, 사다하루, 오토세, 타마, 캐서린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도 있었다.

 

“왔냐, 긴토키.”

 

“타카스기? 너도 왔냐?”

 

“어쩌다 보니 말이야.”

 

타카스기는 비뚜름하게 벽에 기댄 채 담배 연기를 뿜었다. 옆에 앉아 있던 카구라가 설명했다.

 

“긴짱이 나가고 할 일이 없으니까 신노스케를 집으로 불렀다 해. 신노스케랑 샤미센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옷 녀석들이 쳐들어왔어. 영문을 모르겠지만 할멈네랑 같이 도망가다 일단 즈라의 아지트로 피한 거다 해.”

 

“왕왕!”

 

“정말이지,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녀석들이라니까.”

 

오토세가 혀를 찼다. 그녀는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늙은 몸으로 쫓겨 다니려니 상당히 피곤했을 것이다. 타마가 오토세의 다리를 주무르며 물었다.

 

“긴토키 님은 괜찮으십니까?”

 

“어. 멀쩡해.”

 

“저 양아치가 어디서 맞고 다닐 놈은 아니지.”

 

캐서린이 비웃었다. 엘리자베스가 팻말을 들었다.

 

[아지트에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라요.]

 

“거기다 그 천조원 나락이 쫓고 있다니…….”

 

카츠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양이전쟁에 참전한 자들은 다들 나락에게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타카스기가 긴토키를 바라보았다.

 

“긴토키, 아무래도 저 까마귀들의 목적은 네 주변인 거 같은데. 저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뭐…… 거한 사고를 치긴 했지.”

 

“흥. 역시 그랬나.”

 

터미널에서의 마찰도 그렇고, 나락이 천도중의 수족인 것을 생각하면 저들이 열쇠를 만들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카츠라가 설명을 이었다.

 

“저들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을지는 모르겠네. 누가 어디서 위험에 처할지 알 수 없어. 허나 일단 가까운 몇 명…… 신파치 군과 오타에 님, 그리고 쇼요 선생님은 노려질 것이 유력하다고 봐야겠지.”

 

“쇼요는 어디에 있어?”

 

“오늘 아침에 요시와라로 가셨네. 히노와 님과 차를 마시기로 약속했다 하더군.”

 

“…….”

 

긴토키가 입을 다물자 타카스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라, 긴토키. 선생님이 얼마나 강한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까마귀떼 따위에게 잡히실 분이 아니다.”

 

타카스기는 오랜 친구답게 다른 사람이면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긴토키의 초조함을 바로 꿰뚫었다. 그러나 카츠라는 조금 더 신중했다.

 

“아니. 나도 긴토키와 같은 마음이다. 나락, 그들은 어째선지 10여년 전에도 선생님을 쫓아다녔으니까. 우리는 그 녀석들을 선생님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양이전쟁에 참여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전쟁이 끝나도록 우리는 나락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했지. 불길하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군.”

 

어제 쇼요도 그들이 양이전쟁에 참전한 이유를 ‘쇼요를 나쁜 사람들이 쫓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역시 그 ‘나쁜 사람들’은 나락이었나. 이쪽 세계에서도 쇼요와 나락은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둘로 나눠지도록 하세.”

 

타카스기의 질문에 카츠라가 대답했다.

 

“나와 긴토키, 타카스기는 요시와라에 가서 선생님을 찾지. 리더 일행에게는 신파치 군과 오타에 님을 부탁드려도 되겠는가?”

 

“알겠다 해!”

 

“알겠습니다.”

 

카구라와 타마가 응했다. 긴토키도 이견은 없었다. 노인이라 거동이 불편한 오토세와 덩치가 커서 눈에 띄는 사다하루를 제외하고는 다들 아지트 밖으로 나왔다. 카구라, 캐서린, 타마, 엘리자베스는 시무라 남매의 집인 항도관으로 향했다. 긴토키와 카츠라, 타카스기는 지하도시 요시와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시와라까지 가는 길은 큰 문제가 없었다. 카부키쵸만 벗어나면 당장 나락에게 쫓길 위험은 없다. 그러나 요시와라에 들어서자 상황은 180도 변했다. 요시와라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와라의 자경단인 백화와 나락이 부딪쳤다. 긴토키는 삿갓을 푹 눌러쓴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녀석들, 쇼요가 요시와라에 온 걸 아나?”

 

“감시카메라 같은 것으로 보았을지도 모르겠군.”

 

“서두르자.”

 

백화 측에 가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쇼요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은 곧 히노와가 운영하는 찻집에 이르렀다. 긴토키는 이를 악물었다. 히노와의 찻집은 멀리서 보기에도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젠장.”

 

긴토키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찻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의자와 테이블이 뒤집히고, 찻잔은 형편없이 깨져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쇼요! 히노와! 있으면 대답해!”

 

“긴토키, 목소리를 낮춰라!”

 

긴토키는 카츠라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홀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히노와와 츠쿠요, 세이타가 쓰러져 있었다. 안방은 장침과 쿠나이 등으로 난장판이었다. 긴토키와 카츠라, 타카스기는 다급하게 쓰러진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히노와 님은 기절한 것뿐인 듯하네.”

 

“이쪽 꼬맹이도 큰 부상은 없다.”

 

비전투원인 히노와와 세이타를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는지 그 둘은 멀쩡해 보였다. 문제는 츠쿠요였다. 츠쿠요의 앞섬은 그녀가 토해낸 핏물에 젖어 있었다. 몸에 꽂힌 독침들 때문이다.

 

“츠쿠요! 정신 차려!!”

 

긴토키가 츠쿠요의 어깨를 흔들었다. 피가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친 지는 몇 분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츠쿠요가 힘겹게 눈을 떴다.

 

“긴, 토키……?”

 

“괜찮냐?! 잠시만, 바로 의사에게……!”

 

“긴토키, 그보다…… 요시다 씨가…….”

 

츠쿠요가 떨리는 손으로 긴토키의 옷자락을 쥐었다. 긴토키의 하얀 기모노에 붉은 얼룩이 졌다.

 

“방금 전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요시다 씨를 내놓으라고…… 하지만 요시다 씨는, 그 직전에 이곳을 떠난 뒤였어……. 그놈들은 요시다 씨를 쫓아서…….”

 

츠쿠요가 일어나려 땅을 짚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은 금세 힘없이 꺾였다.

 

“요시다 씨를 구하러 가야…….”

 

“그건 우리에게 맡겨라.”

 

타카스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츠라가 다가와 츠쿠요를 업어 들었다.

 

“츠쿠요 공은 내가 병원에 데려가도록 하지. 긴토키, 타카스기. 너희는 선생님을 찾아라.”

 

“그래.”

 

타카스기는 히노와와 세이타를 구석에 눕히고 돌아왔다. 카츠라는 급한 발걸음으로 지상을 향해 달려갔다. 둘만 남은 찻집. 타카스기와 긴토키는 찻집 벽에 몸을 숨긴 채 바깥을 관찰했다. 백화의 저항은 이미 진압되었는지 나락의 암살자들이 곳곳에 돌아다녔다. 타카스기가 혀를 찼다.

 

“생각보다 수가 많군. 나락의 눈을 피하며 쇼요 선생님을 찾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해?”

 

“내가 미끼가 되어 소동을 일으키겠어. 너는 그 틈에 선생님을 찾아.”

 

“……괜찮겠냐?”

 

요시와라에 깔린 나락의 수를 보았을 때 미끼는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긴토키가 걱정하자 타카스기가 코웃음을 쳤다.

 

“날 뭘로 보는 거지? 정면으로 싸우는 한 저런 녀석들이 몇백 명이 와도 끄떡없어.”

 

나락의 무서움은 은밀한 암살자라는 특성이었다. 넓은 곳으로 나가서 대놓고 적을 맞이한다면 할 만하다는 것이 타카스기의 판단이었다. 어쩌면 백화 잔당 몇 명이 가세해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물론 허세가 조금 섞이기는 했으나, 긴토키는 타카스기를 믿었다. 그가 그렇게 확언한다면 덧붙일 말은 없다.

 

“알겠어.”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왔다. 긴토키는 건물 사이에 난 작은 골목에 숨었고, 타카스기는 허리춤의 검을 거침없이 뽑아 들었다. 갑자기 무기를 꺼내든 남자에게 행인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나락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까마귀들과 싸우는 건 정확히 12년 만이군.”

 

타카스기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삿갓을 벗은 후 자신에게 달려드는 암살자에게 검을 꽂아 넣었다. 긴토키는 그런 그를 뒤로하며 달렸다.

 

“쇼요 녀석, 어디에 갔지?”

 

긴토키는 뛰어가며 머리를 굴렸다. 나락이 급습했을 때 쇼요는 이미 히노와의 찻집을 떠난 후였다고 한다. 츠쿠요 말의 뉘앙스를 미루어 봤을 때 몇 분 지나지 않은 일 같다. 분명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

 

쇼요는 지상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요시와라와 지상을 잇는 통로는 세 개가 존재한다. 긴토키 일행이 이곳까지 오는 길에는 쇼요를 만나지 못했으니 그 루트는 제외. 병원과 가까운 루트는 카츠라가 가고 있으니 그쪽은 카츠라에게 맡겨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긴토키가 향할 곳은 한 군데뿐이다. 긴토키는 마지막 통로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사카타 긴토키는 끝내 발견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출구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한 곳에 삿갓을 쓰고 석장을 든 이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운 밀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사카타 긴토키의 죄. 다시는 만나지 못해야 했을 이. 그러나 원치 않은 모습으로 몇 번이고 재회했고, 지금도 그리는 것만으로 숨이 먹먹해지는 스승.

 

과거의 그림자를 억지로 상기시키는 모습에 긴토키는 울 것 마냥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요시다 쇼요가 포승줄에 묶여서 연행되고 있었다.

아무거나 끄적이는 잡덕 글러입니다

나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