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하늘령



+) 마블, 블립(모종의 이유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갑자기 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관

+) 오지화의 관점으로 진행됩니다. 



어느 날 세상의 절반이 사라졌다. 내 동생 지훈이, 친동생과 마찬가지였던 만양정육점 붙박이 재이, 그리고 내 친구 똥식이까지. 강력계 사무실의 모든 전화가 동시에 쩌렁하게 울리던 그 날의 감각,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도수가 '팀장님'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 그 몸이 먼지처럼 흩어지던 모습은 오랜 악몽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전세계 인구의 절반이 무작위로 사라진 뒤. 42살 오지화의 곁에 남은 사람 중 하나는 29살, 한주원이었다.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그 날 이후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사라진 이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 믿는 이들과 남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든 꾸려야 한다는 이들. 나 오지화는 후자였고, 한주원은 전자였다.


우리는 남김없이 모두 누군가의 유족이었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바빠졌다. 그 과정에서 부정과 부인, 분노와 슬픔을 거치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은 지나치게 빠르거나 생략되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후자에 속하는 나와 같은 부류보다, 더 어려운 쪽은 아직 '기다리는' 전자의 사람들이었다.




상실을 유예한 사람 중 일부는 견디지 못하고 제 삶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그 들을 잃은 날(우리는 그 현상을 '블립'이라고 부른다) 이후에도 우리는 남은 이들 중 많은 수를 잃어야 했다. 블립이 있고 삼년이 지났을 때, 나와 한주원 모두 평균보다 빠르게 조직에서 승진했다. 45살 오지화가 오경위에서 임시직이지만 오서장이 되고, 32살 한주원이 한경위에서 과장급인 한계장이 되었을 무렵. 자연스럽게 나와 한주원이 마주할 일이 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석에서 한주원은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이들은 적었다. 조직 내 시스템을 빠르게 익히고,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춰야만 중간관리자로서 소통이 가능했다. 한주원은 그렇기에 좋은 후배였고, 부하였으며, 같은 추억을 공유한 가족과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그와 내가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몰랐다. 한주원은 가끔 이런 관계를 적당히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한주원은 제가 맡고 있는 사업에 대한 예산을 뻔뻔히 찾아와 요구하는 것이다.




" 서장님. 이번 특별 지원 예산, 저희 팀에서 추진하는 사업으로 밀어 주십시오 "




그 말을 하고서 '그렇게 해주실거죠, 선배님'하고 눈을 깜박이는 한계장의 얼굴을 보고 헛웃음을 쳤다. 이제는 적당히 선배님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윗사람을 혀에 올려 굴릴 줄 아는 사내가 된 한주원이다. 남은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보호받을 능력이 부족한 이들을 지키는 일. 한주원은 거기에 골몰했다.




" 뭐, 한계장이 이렇게 밀고 들어와서 말할 만큼. 이번 특별 예산은 내 역량이긴 하지. "




비어버린 집과 텅 빈 시설을 범죄구역이 아닌, 보호지역으로 정하고 사회에서 자정하게 하는 일. 공공시스템은 이제 명확한 구역을 나누지 않으며 교육, 보호, 행정, 군사의 모든 영역은 가치판단에 따른 우선순위로 배정된다. 문주시 만양읍, 내 친구 이동식의 빈 집은 한주원의 적극적인 의견에 따라 아이들의 '쉼터'로 지정되었다. 한 순간에 보호자가 사라져 사회에서 소외된 아이들. 제 친구처럼 한주원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보지 못했다. 청소년 범죄 예방 사업 중 하나로 그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주원이 비번이나 휴무일에도 그 쉼터에서 생활하다시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 그럼 한계장도 내 부탁 하나 들어주지 그래 "




내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눈꼬리가 긴 눈을 크게 뜨는 한주원을 본다, 그리고 웃는다.




...




쉼터에서 홀로 이동식을 기다리던 한주원이 어느 순간. 최전방에서부터 차근히 성이 무너지듯, 그가 곧 무너질 것임이 나의 눈에 보였다.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대부분을 융통해가며 한주원이 끌어안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시선에서 이따금 나는 어리고 약한 것들에 무르던 내 친구 이동식을 느낀다. 그 시기에 경찰 및 지도 계층에서는 블립 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 중 일부를 사회에 복귀 시킬 수 있도록 면죄하거나 석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한주원은 제 아버지인 '한기환'이 면죄 대상 목록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며 소송 중이었다. 번복되는 재판 속에서 지쳐 휘청이는 한주원의 눈동자는 점점 텅 비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주원에 맞선 상대를 소개했다. 임신한 몸으로 블립을 겪고 배우자를 잃은 뒤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였다. 돈 많고, 젊고, 잘생긴 한주원에게는 너무 처우가 맞지 않는 상대가 아니냐며 누군가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한주원에게 그 이를 소개한 것이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울 때 겨우 설 수 있는 사람. 처음 내 제안에 곤란한 낯을 띄우던 한주원은 결국에 나를 가운데 두고 만난 이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1년 뒤, 46살 오지화에게 33살 한주원이 그 이에 함께 인사를 하러 왔다. 똑같은 반지를 끼운 손을 잡고서.




" 다행이네요. 두 사람 "


나의 말에 그 이가 웃었다. 지훈이와 재이가 사라지고, 나는 한주원을 피붙이는 아니지만 손아래 동생처럼 느꼈다. 한주원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지켜야 할 사람, 동식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세상에 남아야할 사람. 희미하게 웃고 있는 한주원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가 삶을 버틸 수 있는 하나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아, 한기환은 면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블립 후 오년이 지났다. 그 날 갑자기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낀 것은 나 하나가 아니었다. 공간이 일렁이는 느낌은 멀미처럼 몸 안을 울렸다. 내 서장실에서 오년 전 사라졌던 이전 소장이 돌아왔다. 제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황당해하는 전 소장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세상 밖이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음을 알았다. 서장실에서 뛰쳐나오는 나를 보고 놀라는 도수를 껴안아주고, 얼른 부인에게 연락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대로 차키를 쥐고 만양 파출소로 내달렸다.




내 동생 오지훈, 그 애가 파출소 마당에서 호스를 잡고 물을 뿌리던 모습 그대로 다시 서있었다. 거칠게 차를 세우고 뛰어오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몸을 부둥켜안고 우는 나를 보고, ‘누나가 달려오는데 순간.. 엄마 인줄 알았어.’ 하며 얼떨떨하게 지훈이가 웃었다. 지훈이의 손을 잡고 만양정육점으로 향했다. 셔터가 내려진 가게 안에서 쿵쾅거리고 발로 차며 신경질을 내던 재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 왜 울어요..'하고 눈을 굴리는 재이를 부퉁켜 품에 끌어안았다. 한 손에는 지훈이, 그리고 다른 손에는 재이를 잡아 쥐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식이 집으로 갔다.




동식의 집 대문 앞에 나보다 먼저 도착한 이의 차가 보였다. 검은 SUV는 한주원의 차였다.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마당으로 진입했다. 그 틈바구니 속 열린 현관문에서 신발도 벗지 못하고, 하얗게 질린 채 거실에 선 한주원의 넓은 등이 보였다. 그의 품에 온전히 숨겨진 채 당황해하는 동식이도. 한참을 말없이 동식이만 끌어안고 있었던 건지, 한주원이 겨우 팔을 풀었을 때 동식은 제 집에 넘쳐나는 어린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식이의 두 손을 붙잡았다.




" 잘 돌아왔어, 동식아 "




동식의 흔들리는 눈은 내 뒤로 한발 멀어진 한주원에게 향해 있었다.








“ 오년이 흘렀다고? ”


“ 그래, 이제 내가 이동식 너보다 누나다 ”




동식은 찬찬히 나의 얼굴을 살폈다. 47살이 된 오지화의 나이든 얼굴이 그동안의 일들을 42살 이동식에게 설명하고 있는 걸까.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데리고 나간 지훈이와 재이 덕에 조용한 거실에서 나는 동식과 마주 앉아있었다. 그리고 떨어진 의자에 앉은 34살 한주원의 얼굴을 어색한 듯 흘깃거리던 동식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을 무렵. '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 하며 주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떠나는 한주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는 동식에게,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한경위가 .. 결혼을 했어? 아이도 있고? ”


“ 응. 이제 곧 일 년이 되어간다 ”






...






한주원이 그 이와 결혼하기 한참 전, 술에 취해 내게 이야기 했다. 이동식이가 사라지던 날. 그 순간 한주원이 함께 있었다고. 그 날, 주원이 동식에게 고백했다고 말했다. 동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자마자,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동식이 먼지처럼 사라졌다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동식을 보며 한주원은 저 때문에 동식이 사라진 거 같아 괴로웠다고 했다. '한계장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역시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로 나는 그를 타박했다.




" 선배님 " 한주원이 나를 부른다.




저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요. 어쩌면.


제가 이동식씨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 ... 그 사람 돌아오지 않을까요?




그 말을 하고서 한주원이 울었던가. 아니 울지 않았던 거 같다.






...






“ 잘했어. 오지화. ”


“ ... 동식아 ”


“ 한주원, 나 없는 동안 네가 잘 지켜준 거네. ”




동식이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다시 혼란해졌다. 하루아침에 삶이 뒤바뀌어 버린 사람들과, 빈자리를 끼워 넣은 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도를 맞춰가기는 무리였다. 동식이 역시 만양의 집에서 본인이 살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다. 지훈이와 재이는 정부에서 긴급으로 지원하는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적극적인 나의 추천이었다. 동식은 권유하는 나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서두르는 법이 없는 동식이기에 나는 그를 믿었다.


동식은 다행히 처분하지 않은 옥천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했다. 만양의 집은 한주원이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대로 남겨주는 것에 동의했다. 블립 이후 사라졌던 보호자가 돌아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분명 돌아왔을 보호자가 더 이상 찾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만양의 쉼터에 머무는 어린 아이들의 수는 아직도 꽤 많았다.






나와 한주원 역시 꽤나 바빠졌다. 무너지고 해체되었던 사회와 시스템이 또 한번 부서지기 시작했다. 연일 계속되는 범죄와 기승하는 폭력 소식에 모두 정신이 없었다. 조직 내에서 갑자기 자신의 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항의와 그들을 다시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 또한 빠르게 논의하는 중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속이 썩었다. 마음이 여린 지훈이는 예전처럼 다시 집에 박혀 바뀌어 버린 세상으로 외출을 하지 않으려 했다. 회복 프로그램의 참여에도 효과가 없는 것일까.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나를 위로한 것은 재이의 덤덤한 태도였다. ‘언니, 나는 오년 번거 같아서 좋은데요. 덤 같기도 하고.’ 내 고민 까지 털고 웃어 보이는 재이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주 오랜만에, 재이가 다시 만양정육점을 연다.






...






“ 왔어요, 한계장 ”


“ 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






만양 정육점에 오랜만에 모인 멤버들 사이, 요즘 통 얼굴을 보지 못했던 한주원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겨우 집에서 끄집어 자리에 앉힌 지훈이는 ‘한경위, 아니 한계장님이 어떻게 벌써 삼십대 중반이냐, 그래도 분위기가 성숙해지니 더 잘생겨진 거 같다’며 개구지게 웃었다. 익숙한 이들 안에서 조금 풀어진 지훈이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동식이는 그 날 이후, 언제나처럼 내내 웃었다. 꽤 괜찮아보였다.






재이가 끓여준 된장찌개 앞에서 '재이의 찌개 맛이 오년 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자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 고기. 더 필요한 거 같은데 ' 재이가 중간에 일어나려 했고, 동식이가 ‘내가 갈게’하며 대신 일어섰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한주원을 두고라도, 동식은 내내 웃음이 많고 응, 응, 대답을 하곤 했지만 제가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없었다. 어쩐지 옆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신경이 쓰였다. 둘이서 그 날 이후 제대로 대화라도 했을까. 한주원은 내내 나처럼 정신없고 바빴을 테니 그런 적이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주원이 잠시 고개를 까닥이고, 동식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며 한주원이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였다. 벌써 가야하냐고 아쉬워하며 묻는 나의 말에. 한주원은 ' 집에 사람이 기다려서요' 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 그래, 가봐야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을 기약하며 한주원이 떠난 한참 뒤. 그제야 동식이 아직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하나, 둘, 술에 얼큰하게 취해 고개가 떨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는 동식이를 찾으러 갔다. 동식은 아직도 정육점 옆 식육칸에서 고기 덩어리를 썰고 있었다.






“ 동식아, 사람들 거의 갔어. 고기 그만 썰어도 될 거 같아 ”


“ 내가 알아서 할게 ”




내 말에도 동식은 묵묵히 도마 위로 칼을 밀었다.




“ 아니 먼저 돌아간 사람도 있고. 이것도 많다니까. 그만하고 너도 와서.. ”


“ 오지화! ”




손에 든 칼을 쾅 소리를 내며 동식이 도마에 내리친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 하며 입을 닫는다.




내가 알아서 한 댔잖아. 상관 마 오지화 너는,




“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어! ”


“ ..... ”




형편없이 구겨져버린 얼굴에서 나는 너무 늦게 알아챘다. 내 친구 동식이는 괜찮지 않았다. 나를 향한 저 밑바닥에서부터 숨겼던 비난에서 넘치는 원망이 형형했다. 그러니까 동식은 미운 것이다. 나 오지화가. 자신을 기다리던 한주원에게 새로운 이를 소개했던 것을 오래 원망하고 있었던 거다. 그걸 알면서 나는 ..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순간 나보다 더 당황해 입술을 앙다문 동식의 눈이 그 날처럼 흔들렸다.




“ 그, 지화야.. ”


“ 미안해. 동식아, 내가. .. 미안하다. ”




내 선택을 변명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동식에게는 미안했다. 동식이 울었던 가. 아니. 그는 두 손으로 떨리는 눈가를 훑어냈다. 동식은 뒤로 돌아 내게서 등을 보였다.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차마 죄책감에 동식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 알아, 지화야.. 기약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서 원망할 수가 없었어. 주원이를.. 비겁하게 만만한 너에게 화를 냈다.”




동식이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삼키며 내게 말한다. 속 좁은 저를 이해하라며. 울지 않는 동식이 대신 내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 하마터면 화를 낼 뻔 했어. 왜 날 기다리지 않았냐고. 벌써 다른 사람을 만났냐고. 나는 그대로인데. 너는 왜 변했냐고. ”




동식이가 버석하게 마른 제 뺨에 손등을 부비며 말한다. 마른 그의 얼굴 대신 줄줄, 나의 얼굴이 젖었다. 동식아, 부르고 싶은데 목이 메어 나오질 않는다.




“ 가지 말라고, 돌아오라고. 그 녀석에게 떼를 쓸 뻔 했어. 만양 집도, 한주원, 너도. 원래 내 거였다고. 우기고 싶었어. 지화야.. 나 어떡하지.. ”




툭, 나는 동식의 한쪽 어깨를 잡고 젖은 눈을 묻었다. 들썩이는 내 흐느낌을 오히려 동식이 도닥였다.






...






" 우리 언니 그 새 더 늙었네 "




재이의 말에 나는 머쓱하게 긴 머리를 쓸어 넘긴다. ' 일이 힘들어요, 아니면 사람이 힘들어요. 누구야. 우리 언니 이렇게 빨리 늙게 하는 사람. 나한테 데리고 와요 ' 엄한 표정으로 허리를 짚으며 하는 재이의 말에 오랜만에 웃음을 터트렸다.




" 지훈이는 좀 어때? "




요즘 통 집에 들어가지 못한 날이 이어져 지훈이의 안부를 재이에게 묻는 지경이다. 정육점 문을 닫고 내 얼굴을 보러 경찰서 앞에 왔다는 연락에, 한달음에 달려와 개인 사무실에서 재이를 맞았다. '우리 언니 진짜 문주경찰서 서장이구나.' 놀라는 재이 얼굴에 웃음이 났다. ' 지훈이는 얼마 전부터 봉사활동 하는데 제법 괜찮은가 봐. 그 우리 돌아온 첫 날, 갔던 동식아저씨 집 쉼터에서 얘 들한테 운동도 가르치고, 춤도 알려주고 한다던데. 아예 그 쪽으로 진로를 바꿀까 고민 중 인거 같더라구요.' 재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오지훈 그 녀석 사실 경찰이랑은 영 안 어울렸어. 내 말에 재이가 동의하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동식 아저씨 말이야 "




잔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재이의 말에 잠시 멈칫한다.




" 범죄율 때문에 일부 대상으로 경찰 복직 프로그램 구성되는 거 듣자마자. 신청 했다면서요 "


" 그렇지, 내가 명단 결재했으니까.. 나도 알지 "


" 나는 이제 아저씨 그저 편하게 살 길 내심 바랬는데. 언니는 어때요, 아저씨 괜찮을까 "


" 동식이야.. 훌륭한 경찰이지. 말해 뭐하니. 동식이가 원하는 거라면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




깜박, 눈을 한번 감았다 뜨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재이의 얼굴이 보였다. 오년 전 그대로인 모습인데. 재이는 지훈이 보다, 때로 한주원보다 더 제 속을 빤히 보는 느낌이 든다.




" 미안해하지마요, 언니 "


" 내가 무슨 "


" 지훈이 경찰 관두는 거, 동식 아저씨 경찰 복직하는 거, .. 그리고 한주원씨 이혼. 전부 언니 잘못 아니니까 "




꾹, 입술을 말아 문 나를 보며 재이가 제 찻잔을 입에 댄다. 말없이 묵묵한 재이의 앞에서 나는 돌을 얹은 듯 묵직한 가슴을 애써 쓸어내려본다.




블립 이후 사라졌던 그 이의 남편은 지훈, 재이, 그리고 동식이 돌아왔던 그 날. 다시 돌아왔다. 제 아내와 아이의 곁에서 제 자리를 차지한 한주원을 보고 그 이의 남편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일 년간 생활하며 그 이와 한주원은 큰 소리를 내며 싸운 일도 없다 했다. 그저 잔잔하고 내내 조용하게 서로의 곁에 있던 사람들. 그 이의 남편이 돌아오고, 그 이는 제 남편과 꽤나 많이 다퉜다고 했다. 그리고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주원이라고 들었다.




' 한계장. 그럴 필요 없어. 두 사람 부부 상담도 가능하고. 양육권도 법률적 도움을 받으면 되는거야. 필요하다면 휴직 처리도 가능하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


' 아닙니다. 선배님. 저도, 그 사람도 서로를 위해 맞는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 .. 혹시 동식이 때문 인거야? '




내가 아니면 아무도 묻지 못할 질문이다. 동식의 이름에 잠시 침묵하던 한주원은 고개를 저었다. ' 이동식씨와는 관련 없습니다. 선배님. 정말입니다. 이건.. 그냥 저희 부부 결정입니다. 소개해주셨던 것도 있으니 선배님께도 미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주원의 말에 씁쓸한 것이 울컥, 치밀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다. ' 선배님 ' 주원이 저를 부르며 시선을 맞춘다.




' 그 사람과 살면서 저 한번도 큰 소리 낸 적 없습니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


' 알지. 그래서 더 안타까워 그래. 두 사람 얼마나 서로를 위했어요? '


' 그런 제가 그 날, 정육점에서 이동식씨하고 둘이 대면하고서. 오년만에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며 싸웠습니다. 별 것도 아닌 걸로요. '


' ..... '


' 그 사람도 그랬더군요. 제가 집에 가니 돌아온 남편이랑 소리를 지르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




한주원이 하려는 말을 알 거 같았다. 번들, 눈에 물기가 도는 나를 알아채고. 한주원이 어색하게 웃는다. ' 저희 사이가 좋을 수 있었던 건 서로 별 다른 감정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이어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돌아온 사람과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건. '




' 아직.. 감정이 남아서라고 밖엔 말씀 드릴 게 없네요 '






...






한주원과 나눴던 최근의 대화를 곱씹으며 조용해진 나를 재이는 그저 찬찬히 살핀다. 언니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빙긋 웃는 재이의 얼굴에 빛이 들어와 천진했다. 흔히 세상이 블립으로 사라진 우리를 떠난 사람, 세상에 오년간 남은 사람을 남겨진 사람이라고 부르잖아? 재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복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온 이야긴데 말야.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나도 그게 맞는 거 같아. 비록 지랄 맞은 이유로 세상이 틀어지긴 했지만. 블립당한 사람들, 우리 입장에서는 말야.




" 떠난 사람도, 돌아온 사람도 아니예요 "


" ... "


" 우리가 남겨진 거야. 흘러가버린 시간에서, 먼저 앞서간 사람들 속에서 "




그래, 그렇구나. 우리는 어쩌면 다른 시간과 공간에 뒤틀려있었을 뿐. 사실은 서로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 기대하며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어진 관계들이었던 거구나. 누가 누구를 떠나고, 또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저 너에게 내가 가고. 나에게 네가 오는 것 일뿐.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는 동안 재이가 겁 없이 내 손을 덥석 잡아온다. ' 나도 기다리는 거야. 언니. 그러니까. 언제든 와요. 나한테 ' 빙긋, 웃는 재이의 얼굴에 또 빛이 들어온다.





...




" 선배님!!! "


" 야, 오지화 !! "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저 귀신 같은 놈들. 만양정육점에 다리를 덜렁이며 앉아있던 나에게 동시에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나란히 순찰차를 타고 온 것을 보니 발령 받자마자 첫 순찰 장소로 여기를 택한 모양이다. 씩씩거리는 분에 찬 숨을 참지 못하는 이동식과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는 한주원. 저 또라이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 걸 보니 왜 슬쩍 웃음이 나는 지. 문득 상배 아저씨가 두 사람을 나란히 붙여두고 이런 기분이었을까. 짐작하며 혀를 차본다.




" 어, 한계.. 아니. 이제 소장이지. 한소장, 그리고 이경위. 반가워 "


" 지금 반갑단 말이 나오십니까? 아니 왜, 저희 파출소에 이경위가 발령 된 겁니까? 소장 동의도 없이? "


" 하, 내가 할 말이거든. 이봐 오지화. 나 이거 물러줘. 나 죽어도 한주원 아래서 일 못해. 내가 교육생들 중에서도 실력 탑이었는데. 왠 지방 파출소? 그것도 한주원 밑에서? 미쳤어? 진짜? "




제법 귀가 따가워 슬쩍 손가락 하나로 귀를 후비는데, 탕- 소리가 난 쪽에 시선을 돌리니, 식당 의자를 걷어 찬 재이가 두 눈을 부라린다.




" 아니 언제부터 인사 권한을 가지고 경찰조직이 왈가왈부였지? 응? 그저 회식장소 짬으로 귀동냥한 나도 아는 걸 가지고? 두 사람 지금 여기에 따지러 온 거예요? 비번인 서장님에게 무려? 아직 근무 중이면서? 하극상이네. 이거? "




옳지, 우리 재이. 잘한다. 어깨를 으쓱하고 시선을 내리까니. 움찔, 하며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 죄송..합니다. 오서장님 "




한주원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쿡- 팔꿈치로 동식의 옆구리를 찌른다. 신경질을 내며 제 옆구리를 쓸어내린 동식이 불만스러운 눈을 애써 내리깔고, ‘ 죄송함다..’ 하며 고개를 숙인다. 아이구, 우리 한소장도 나만큼 꽤 빨리 늙겠어. 동식이 데리고 근무하면. 이러다 둘이 동갑되는 거 아닌 가 몰라. 껄껄 웃는 나를 보고 삐죽 입술을 내밀던 동식이 휙, 먼저 문을 옆으로 밀고 나간다. 운전석에 타려는 동식을 보고, ' 운전 제가 한다고 했잖습니까! 이 경위! 이봐요, 이동식씨 제 말 안 들립니까? ' 하고 소리치던 한주원이 다시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급히 그를 쫓아 나선다.




나 오지화, 재이가 준 곡물차를 느긋하게 음미한다. 

시선 끝에서 만양의 다시 만난 두 또라이, 한주원과 이동식을 따라 하늘 빛이 길게 붙는 걸 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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