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범무구范無咎.

ㅤ죄명,

ㅤ불어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自殺하다.


ㅤ위 죄인은 속계에 있을 적에 스스로 목숨을 앗는 거죄巨罪를 지은 관계로 팔대지옥八大地獄 중에서도 무간無間으로 가는 것이 실로 마땅하다 판단하는 바이다. 허나, 비천한 아역 신분으로 태어나 생계를 위해 노작을 도맡아 하며 의로운 일에도 주인에게 매질을 당하니 본디 기질이 선하며 비범하다고 한들 심중 깊이 악의가 자랄 수밖에 없구나. 또한 결의結義를 통한 의형제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에 천공天公은 일직사자日直使者 치하에서 이승의 일을 보는 차사差使의 공직을 내리는 바이다. 이로써 너의 혼은 윤회輪廻할 자격을 상실하였으나 악처를 피하는 판결이니, 이것은 하늘이 내리는 최대한의 자비이며 죄인이 누려 마땅한 공과격功過格이노라.

判決文 | 玉皇上帝


ㅤ죄인, 범무구는 자미궁紫微宮에서 날아온 판결문을 받들고 무릎을 꿇었다. 물에 빠져 죽은 살은 부르텄으니 검은 낯빛을 따라 흑무상黑無常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다. 

ㅤ그는 낡은 복식을 벗고 새로 받은 것으로 환복을 했다. 금실로 글자가 새겨진 전립戰笠과 색이 어둡다 못해 시퍼런 겹두루마기를 걸치고 옆구리에 새빨간 오랏줄을 맨다. 저승으로 인도할 이름이 적혀 있는 적배지赤牌旨를 손에 들자 그 모습이 검게 빛나면서도 붉다. 명계冥界에서 나고 자란 것 같은 늠름한 사내를 이제 그 누가 아역이라 볼 것인가. 영락없는 차사의 행색이었다. 


ㅤ삼사도군문을 지나면 저승의 시왕이 있는 열두 대문이 나온다. 거대한 크기는 수미산보다 높으며 재질은 금강金剛보다 견고해 산 자의 눈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상급 신이 아닌 이상 윤허를 구하지 않고 문을 지나면 혼마저 사라지기에 차사의 거처는 외곽에 위치해 있다.

ㅤ칠개지옥 위로 백토가 겹겹이 쌓인 이곳은 나조 신의 위력이 닿지 않아서 언제나 붉은 달이 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감색으로 빛났고, 달빛을 받은 흰 산천이 곳곳마다 연홍색으로 물들었으나 사합원의 기와만은 굳건히 푸르렀다. 

ㅤ이 시각, 범무구는 북쪽의 정방에서 창 너머 정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얗게 샌 나무에는 잎 대신 붉은 부적이 넘실거린다. 그는 명계로 오는 혼이 적은 날에는 창가에 앉아 연죽煙竹을 태웠다. 손가락 사이에 낀 설대가 까맣게 매끄러웠다. 오동烏銅에 은으로 장식이 되어 화려할 법도 한데 절제된 인상 때문에 과하지 않았다. 뭉근한 연기 사이로 노랗게 변모한 홍채가 보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분명한 말명사자의 것이었다. 까만 눈동자가 본래의 색을 잃어갈 수록 범무구 또한 속계의 감정을 하나씩 잃었다. 

ㅤ흡연구를 물고 깊게 숨을 마시자 매섭던 눈매가 나른하게 흩어졌다. 모든 것을 망각하고자 해도 쉬이 그러할 수 없는 게 단 한 가지 있었다.

ㅤ한껏 펼친 부채처럼 가늘게 휜 설대. 그리고,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창에 기대어 생각에 잠긴 한 남자. 딱딱한 관복을 벗어 이마 근처로 흩어진 머리칼은 꼭 물에 젖은 것 같았다. 

ㅤ그는 또, 아우 생각을 했다.

ㅤ이만 잊었노라 답한다면 참이 아닐 것이다. 허나, 속계에 두고 온 아우를 골백번 떠올린들 자신에게 내려온 함이 아니라면 찾아갈 수 없었다. 섣불리 그리워 하는 것조차 과한 욕심이었다. 사자의 방문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ㅤ운명이라는 것이 이리 우스운 것인 줄을 알았더라면 애당초 만나지 말 것을 그랬다. 왜, 제 부모의 함자도 모르던 상놈에게 웃어주었느냐. 왜, 서로 지키지도 못할 약조를 했냐는 말이다. 

ㅤ⋯⋯더욱 중히 여길 것을. 

ㅤ시작은 아우에 대한 원망이었으나 최후에 당도하는 것은 언제나 못난 자신을 향한 질책이었다. 힘없이 늘어지는 손목이 허벅지에 닿았다. 뜨거운 장죽이 반대쪽 손등에 가서 붙는다. 그는 살이 데어 빨갛게 붓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연죽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ㅤ붉은 달빛이 돌담 위로 바스라지자, 한은 다시 한 번 어지럽게 피어오른다.


ㅤ「그러던 어느 날, 기나긴 세월 흘러 적배지에 받잡은 인간의 함자는 참으로 익숙한 것이라. 

범무구는 미상불未嘗不 걸음이 가벼웠다.」


ㅤ이곳은 이승 남부에 위치한 어느 토루土樓.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고산高山은 날짐승이 아니라면 반드시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터인데 어찌 외딴 곳에 삼간초가 하나가 있단 말인가.

하늘에 길이 열려 무명 천 밟고 차사 강림하니 

인적은 없고 잔잔한 시냇물 소리만 들렸다. 잎을 길게 늘어뜨린 잔나무를 헤치며 앞으로 향하자, 흰 의복을 입은 노인이 보잘것없는 마루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정갈하게 빗어 허리께까지 땋은 머리는 늙은이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생생히 하얬다.

ㅤ상여를 업은 까만 사내가 저벅, 저벅, 걸어가 노인의 앞에 섰다. 그는 홀로 이승과 동떨어져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허, 이 노인네가 정녕 사자 두렵지 아니한가. 이만 늦었으니 속히 가사이다.”

“그곳에는 비 안 오더이까.”

시치미를 떼며 태연자약하던 차사의 얼굴이, 한 노인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자신에게 내민 손에는 작은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ㅤ이제는 살까지 까맣게 변한 우산. 허나, 범무구라고 새긴 글자만은 아직도 또렷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차사는 우산을 투박하게 건네받았다. 손잡이가 아닌, 중간 지점을 꽉 쥔 손. 여전히 고집스러운 성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ㅤ살결이 아이처럼 흰 노인이 고개를 들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붉어진 눈가가 보였다. 그는 한 자, 한 자, 힙겹게 말을 꺼냈다.

ㅤ“그것, 참으로, 다행입니다. 형님.”

ㅤ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차사가 불현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냉기가 돌다 못해 검게 질린, 망자의 낯.

ㅤ“형님이 가신 후로 밤이 다르고 낮이 다르니 천지가 뒤섞여 이 목숨이⋯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ㅤ“다 괜찮다. 이제 다 괜찮아.”

ㅤ범무구의 말씨에 은근한 온기가 어렸다. 노인의 주름진 손등 위에 입을 맞추자, 어느덧 눈앞에 있는 것은 오랜 기억 속의 정겨운 얼굴이라. 

ㅤ“이제는 비를 피할 우산도 있고, 너도 있는데, 두려울 것이 천하에 무엇이냐. 이만 되었다. 이러면 된 것이다. 이 형님이 오랜 약조를 지키러 왔다, 사필안이여. 내, 다시는 너를 두고 떠나지 않으리라 맹세할 것이다. ⋯⋯다시는.”

ㅤ애틋한 음성 너머로 바람이 아득히 불어온다. 화창하던 날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초록빛으로 둘러싸인 산천에 툭, 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ㅤ검은 우산 한 자루 속, 두 개의 인영이 비친다.

《八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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