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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본 듯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 전 왕의 초상화를 보아 그랬던 것 이구나'



선국의 개국이 워낙 물흐르 듯 되었기에 일반민들은 밟고 사는 땅의 주인이 바뀐지를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육직책으로 1대왕의 초상화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지방에 보급하며 널리 알리었다. 덕분에 평생가도 왕의 얼굴을 봤을리 없는 시영 조차 그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냥 왕손도 아니시고 현왕 전하의 형님이 되시는 분 입니다."




시영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바가 있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발을 놀리었다.




'이 사람이 왕위를 양보하고 초야에 산다는  바로 그 남자구나'




선왕은 장자가 아닌 휘를 세자로 정하였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붕어하였기에 현왕은 무척 어렸고 영진은 한창 나이의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영진군을 보위에 올라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나왔건만 오히려 당사자인 영진이 선왕의 뜻을 내세워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효자와 충신의 미담으로 민가에 전해져 시영 또한 들어본 바가 있었다. 시영이 공부라는 걸 할 당시 나이 지긋한 스승인 맹진사가 이 이야기를 언급할때는 눈가의 물기를 소매 끝으로 찍어 가며 감격에 젖곤 하였다.




'왕위를 거절하다니 어떤 모지란 인물일까 했건만..'




"아!"




갑작스러운 시영의 외마디 소리에 룡이 의문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 있으신건지?"




"아아?... 아니요 운영은 함께 왔는지요? 갑자기 그가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시영은 영진이 있던 방에 놓고온 자신의 약병 꾸러미가 생각났지만 이제와 돌아가기에도 늦기에 급히 얼버무리며 운영의 일을 물었다. 그러나 운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룡은 슬쩍 그와 눈 마주침을 비끼며 급격히 표정을 굳히었다. 그냥 꺼리는 것이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를 소식을 들은게 아닐까 싶은 반응이었다.




" 전 영진군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급히 왔습니다.월성군께서는 오늘도 '그곳'에 있으셨지만 아직도 계실지는 모르겠군요."




'그, 난봉꾼 자식'




싸늘한 대답을 하는 룡이기에 시영은 더이상 묻지않고 입을 닫았다. 룡은 달맞이를 할것이니 꼭 와달라고 하기에 억지로 불려와 차려진 술상에 앉았지만 의원으로부터 온 급한 소환 전갈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미호의 달맞이 행사는 화려하기로 소문이 날정도로 준비가 꼼꼼하고 형식이 아름다웠다. 촌에서 온 운영은 그런 것은 처음 보았기에 주변의 휘황찬란한 분위기에 눈을 뺴았겨 룡이 자리를 뜨는 중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오히려 상석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임가놈과 눈이 딱 마주쳤다.




'웃어?'




그는 고가의  비단으로 만든 겉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 상중임을 나타내기 위해 검은색을 택하여 지었지만 은은한 자수가 놓여 있었고 단정한 색이지만 결코 최상품으로 보이는 장신구를 골라서 착용하고 있어 청아해 보이진 않았지만 결코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빠드득"




룡이 오만상을 쓰더니 이윽고 이를 가는 소리까지 나자 시영은 조용히 그의 눈치만 살피었다. 이 남자는 운영과 어떤 사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시영이 보기에 이 의원은 운영에게 자못 마음이 동하는 거 같은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하였다.




"흠..."




시영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도 한동안 숨을 옅게쉬며 살피어 주변에 그 둘 외에는 없다는 것을 결론 내린 후 입을 열었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주제였다.




"형장께서는 운영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떻게라니.."




시영의 직접적인 물음에 룡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지만 시영의 깊은 눈동자를 보자 그의 의도가 점차 짐작이 되었다. 그는 운영의 성벽을 알고 있는 자인 것이다.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 오래 함께 자랐다면 알 수 밖에 없을테니. 운영은 들어내놓고 수작을 거는 이는 아니지만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숨기는 편도 아니었다. 시영의 질문의 룡의 시선이 불안한듯 여러곳을 찾아 응시하였다.




'내가 왜 이 물음을 받아야 하는 거지?'




"크흠..."




그저 무슨소리냐, 화를 내고 끝내도 될 터인데 룡은 어째서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명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생과 죽음에 통달 할 수 밖에 없는 의원이라는 직업상 명확하지 않은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내가 왜 그 놈팡이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거지?'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특정인을 진지하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없었다.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말이다. 영진군이 자주 웃으며

놀리듯이 물어오지만, 그가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른 낙엽이 바람에 풀석이듯 휘젓는 농일뿐이었다.


시영은 자신을 앞에 세워두고 말없이 심각해진 룡을 채근하지는 않았다. 이런일은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질문은 역시 스스로 해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사뭇 지루하기는 하여 눈치껏 여기저기에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러다 정원의 한구석에서 양귀비 꽃을 재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과연 의원의 집이군, 이건 약으로 쓰이는 다른 것인 거 같군. 위험하기에 관에서 재배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어찌 허가가 났는가?'




약초에 관심이 많은 시영이기에 귀한 약재를 보자 눈이 돌아갔다. 이름처럼 요사한 색을 가진 꽃이라서 계속 보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물들었다. 어느순간 오해한? 영진군이 자신의 턱에 손을 대어 당겼던 감촉이 순간적으로 되살아 났다. 괜스레 볼에 약간의 열이 올라와 발그레해짐이 느껴졌다.




'흠... 흠.. 그거 참.. 그분도 남색가란 말인가'




미호의 주점은 고급의 사교장소 인것 같지만  실상 비밀 결사와도 같았다. 출입할 수 있는 기준이 높아 신분은 물론이고  부담할 수 있는 월사금 또한 왠만한 녹봉에 견주어도 적지 않았다.  예전부터 주변에 여자는 다가오지 않고 남자 녀석들만 득시 글한 게 사촌 운영의 탓인 줄 알았건만 시영, 자신의 팔자인 것 같았다.




'특별히 혼사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등한시 했나... 허참'




흑야의 단주자리가 혈통으로 이어지기에 운영이 자식을 가지지 않는 이상은 자신이 어떻게 해결?을 해봐야 할 터였다.




이번에 고향에 돌아가면 그래도 매파를 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 없는 자신에게 시집을 올 여자가 있냐 마는 혹시나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실례하겠습니다."




혼자서 쓸쓸히 가족계획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룡이 갑자기 시영에게 인사를 하더니 휭하니 떠나버렸다. 떠나가는 눈빛이 단호하여 그가 어떤 마음의 결론을 내렸음이 짐작이 갔다



"아... 네. 그러시죠" 



시영의 대답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공허이 울렸다. 룡의 기세가 시영이 흔하게 느끼던 살수들의 분위기와 흡사하기에, 그가 혹시나 운영을 죽이러 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원에게 당할?운영은 아니기에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일이 아닌가 방심은 호랑이도 절벽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한다.




***




룡은 집을 나서자 마자 말을 거칠게 달리어 나섰다. 통행금지 시간이지만 그는 가문의 덕으로 혜택받은 통행패가 있었다. 급한 병중 환자를 위해 얻은 것이지만 오늘은 사사로이 쓰였다. 그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달맞이는 끝나고 좌중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떠오른 달을 비춰보기 위해 준비했던 물이 담긴 놋대야를 치우는 일로 분주하였다.




"룡나으리 다시 오셨군요. 좋은 때는 지나갔으나 아직 만월이 한창이니 실망하지 마시고 즐기십죠."




미호가 눈웃음을 치며 두리번거리고 있던 룡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월성군께서는 어디 있는가?"




미호는 룡을 위해 머물 빈방을 찾다가 그제서야 머릿속에 운영을 떠올렸다. 미호는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룡의 상태가 급하게 말을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이리 애닮게 찾는 이를 보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이 둘이 함께 다녔지 참'




"운영 나리야 당연히 잘 모시고 있죠. 이쪽으로 저를 따라오시죠"




그는 능란한 주인답게 물 흐르듯이 룡을 안내하였다. 평소에 그들이 있던 방이 아니라 오늘은 좀 더 뒤편에 위치한 곳으로 룡은 처음 가보는 방향이었다. 마루가 다른 곳보다 짙은 색의 나무로 깔리어 있고 옻칠을 한 마냥 검은빛이 돌아 묵직하였다. 기둥이나 문의 장식도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중후하였다.




"이곳입니다."




미호는 손짓으로 방을 한번 가리키고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왔던 길로 떠나갔다. 주로 숙박을 하는 용도인지 사방은 불이 켜져 있는 방일지라도 약간의 인기척이 날뿐 고요하였다. 그런 분위기에 룡은 문의 고리를 조심히 당기어 열였다.




"자네 왔는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네. 시간이 야심한데 어찌했는지 모르겠군"




방은 일반 사대부의 침실과 같이 꾸며져 있어 정갈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이 놓여 있었다. 문이 열리는 통에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운영이 반쯤 들어있던 잠에서 깨어나며 부스스한 머리를 들었다.




'돌아오지 않을 걸 예상했다면서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뭐지'




"새벽이 넘어가는데 자리에 들지 그리 앉아계십니까?"




"그게.. 하하 그게 오늘이 내게 뭐 좀 중요한 날이어서 그렇다네, 잠이 안오지 뭔가. 게다가 자네같이 우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다시 오지 않을까하기에,  편하게 있기가 어려웠다네. 그런데 정말 이리오다니 내 도성에 와서 가장 잘 한 일이 자네와 친우가 된 것일세!"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룡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꽤나 많은 술을 마신것인지 방안 가득히 술향으로 가득하였다. 룡이 운영의 일을 알겠느냐마는 오늘은 운영의 아버지 진수의 기일이 었다.  룡은 그의 뜬금없는 중요한 날 타령에 잠시 그게 어떤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나 아는 바가 없었다. 


룡이 멀찍히 서있자 운영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룡이 이에 다가와 자리에 앉자 운영은 비몽사몽간인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희끗이 웃었다.




"운영님과 저는 우정이 아닙니다. 제게  그런 걸 바라지 마십시오"




취한 와중에도 룡의 싸늘한 말투는 또 알아들었는지 운영은 한층 풀 죽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룡은 그의 표정을 보고 한참을 인상을 찌푸리더니 운영의 멱살을 와락 잡아당겼다. 운영은 취한 와중이어서 그렇지 평소에는 이러한 공격을 받으면 언제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어어어, 자네도 참. 화를 내고 그러는가 말로 하지.. 사람 민망...."




운영은 반사적으로 룡을 공격할 뻔한  손속이 반쯤 나갔던 것을 참았다. 그러면서 내심 처음부터 여지껏 자신에게 차갑게 구는 그의 태도에 서운해 하는데 룡은 잡았던 멱살을 놓지 않고 그대로 당기더니 마치 새가 잠시 나뭇가지에 앉았다 날아가는 듯, 입을 맞추고는 놓아주었다. 




"우정이 아닙니다."



사람이 당황을 하면 또 몸에 베인 습관대로 룡의 장심을 밀어내며 공격할 뻔 한것을 멈추었는데, 그 사이에 이 매미같은 방문객은 운영을 두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운영은 정신을 잃기에는 멀쩡하고, 제대로 사고하기에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손을 들어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니  누구의 것인지 약간의 침같은 것이 묻었다. 그 촉감에 그제야 술이 확 깨며 현실감이 생기었다.




"하?"




실상 그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는 눈만 끔뻑였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술자리 내기의 벌칙임이 분명하다는 것 이었다. 미호의 주점의 다른방에서는 온갖 육체적인 벌칙을 주고 받는 것을 운영은 알고 있었다.



운영을 방에 놓고는 밖으로 뛰쳐나온 룡은 발길이 닿는 데로 걸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좀더 빨리 그에게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더 이상 숨이 차서 못 걷겠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멈추어서는 기둥에 기대어 섰다.




".. 이런... 젠장"




부끄러움과 심장이 더 이상 뛰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섞이었다. 게다가 욕망.. 방을 빨리 나오지 않았으면 뒤에 어떤 행동까지 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숨을 고르자 그제서야 머리가 좀 맑아졌다. 그가 의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탕약을 끓이는 이들이 첫 물동이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누가 쫓아오는게 아닌데 자꾸 뒤를 돌아보며 뛰듯이 걸어서 돌아왔다. 




"주인님, 기침하셨습니까?"




방앞에서 마주친 시동은 자주 이 시간에 귀가하는 주인에게 익숙하였기에 내색없이 인사를 하였다. 




"바로 나갈 것이다. 저번에 가지고 온 함을 총관에게 가서 달라고 하여 받아오거라. 잘 모르겠거든 내가 맡겼던 푸른색 상자라고 하면 알아 들을 것이다."




"네, 주인어른"




평상시에도 허여멀건한 인상의 주인이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 색이 헬쑥해 보이기 까지 하였다. 아이는 룡이 지시한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시동이 돌아왔을때 룡은 이미 외출할 채비를 마친 후 였다. 그는 아이가 건네주는 상자를 품에 넣고서야 이제 챙길것이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타하십니까 주인님"



"그래"



머리에 햇볓을 가리는 챙이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작지 않은 짐을 등에 짊어 진것이 결코 잠시 외출을 하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저... 오시는 분이 있으시면 뭐라 전할까요?



시동은 여느때와 같이 여쭈었지만 룡은 순간적으로 아이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 기세가 꾸짖는 말이 룡의 입에서 바로 나올듯 하여 아이는 괜한걸 물었다고 생각하였다. 



"누가 온다고 그러는 것이냐, 그냥 나갔다고 하거라. 찾아도 없다고 하고"



이름과 명성이 높으신 주인이라서 평시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주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하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 키는 크지만 주인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왕족도 있지 않은가? 


아이는 룡을 배웅하며 가끔씩 자기에게 동전을 한두개씩 쥐어주던 운영의 얼굴이 생각났지만 그의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이 떠난 후 사흘쯤 되니 분명 좀 검은 편이 었던 운영이 주인만큼 허옇게 질려서는 찾아와 룡의 행방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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