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님네 미카에이가 너무 취향이라 쓰는 누룩님 헌정글!!! 절 견뎌주세요 저 오이도 먹자나




"그냥 이럴 바에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걸로 하자."


 차가우면서도, 그 차가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


"이제부터 우리는 아예 모르는 사람인 거야. …아오야기 미카도, 네 이름 일곱 음절만 생각해도 이젠 지긋지긋해! …그만하자, 전부."


 호세키가오카 학원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의 마지막 날, 이시가키 에이나는 아오야기 미카도에게 마지막을 고했다.


***


 당장 내일이 졸업식인, 끝을 앞둔 시점. 미카도는 호세키가오카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녹음 작업을 마치고 멍하니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분명 여기서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도, 깔끔히 정리된 짐들과 방 풍경에서는 생활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에이, 왠지 보고 있기 괴롭네. 그리 중얼거리며 미카도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날은 분명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어느덧 나뭇가지에는 꽃눈이 돋아 있었다. 그래, 여전히 시간은 흘러갔고, 일상 또한 그 흐름에 맞춰 빠르게 제 피부를 스쳐지났다. 다만 한때 제 피부를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떠나고 없었다.


"에이나…."


 그 손길의 주인이 문득 생각나, 미카도는 나지막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손길만이, 그 몸만이 생각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보다도 더 제 머릿속에 넘쳐흐르는 것은…툴툴거리는 그 목소리, 가끔씩 보여주는 미소, 엷게 붉은빛으로 물든 뺨, 그리고….


"야, 쉬엄쉬엄 해. 원래 그런 거 잘 하잖아 너."


 뺨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은 그녀가 건넨 음료캔이 아닌, 잠시 운전 중지에 들어간 난방기로 인해 남아있는 찬 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방금 그 목소리는…하, 그러네. 네 말대로 나 미친놈인가봐, 에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카도는 괜히 이불을 꾹 쥐었다. 찬 공기가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만하자, 전부.'


 아무리 매사 경박하기 짝이 없다고 에이나에게 지적받아온 미카도라도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싸늘한 얼굴을 한 에이나에게 농담이나 던지며 그 상황을 무마하려 했겠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뭐라 형용하기도 어려운 그녀의 표정을 봤기 때문에. 그리고…그녀가 등을 돌리는 순간 멀리 튕겨나간 한 방울의 눈물을 봐 버렸기 때문에.


 미카도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에이나는 나를 좋아한다. 단순한 밤의 파트너로서도, 친구로서도 아닌…연애 감정으로. 하지만 그 명제가 도리어 미카도를 괴롭혔다. 여름이 끝나고 공기가 서늘해질 무렵, 단풍이 들듯 에이나의 마음이 빨갛게 여물어간다는 것을 미카도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미카도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거리를 뒀다. 이 이상 가까워지면, 미카도 자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이미 언젠가부터 에이나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게 아니라, 에이나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상태에 도달했는데도. 그렇게 그는 애써 에이나의 마음을 부정했고…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했다. 그 결과 아오야기 미카도는 이시가키 에이나에게 있어 보고만 있어도 마음 속까지 간질간질해지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 '그 이름 일곱 음절만 생각해도 지긋지긋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그리 중얼거리며 미카도는 제 앞머리를 헝클였다. 그래, 이대로는 안 된다. 어쩌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랐다. '이 바보야!' 라며 외치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미카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이나, 끝나고 학교 안뜰로 와 줄래. 너라면 분명 코웃음치겠지. 그래도, 이 부탁만은 들어 줘.'


 그렇게 졸업식 당일. 그 종이쪽지만을 남긴 채, 미카도는 학교 안뜰 나무에 기대 서서 쪽지의 수신인을 기다렸다. 괜시리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계를 한 번 본다. …뭐, 안 오는 게 당연한 건가. 그리 생각하며 그가 입가에 실소를 머금을 때였을까.


"…뭔데."


"에이나, 너…."


"용건이 뭐냐고."


"와…줬구나. 고맙다."


 사람 불러내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 웃기지도 않지. 그리 중얼거리는 에이나를 벤치에 앉히고, 미카도는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두 개 뽑아왔다. 다행히 에이나가 좋아하는 음료수 버튼에는 아직 불이 들어와 있었다. 조금 온기가 느껴지는 캔커피를 에이나의 손에 쥐어준 미카도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에이나, 아니…이렇게 부르면 싫어하려나. 이시가키."


"뭔데. 나 바쁘니까 빨리 얘기해라?"


"너는 항상 진지하지 못하고 가벼운 내 태도가 싫다고 했었지. 하하, 그래…나도 내가 진지하지 못한 놈인 건 뼈저리게 알고 있어. 심지어 널 몇 번이고 울리기나 하고 말이야."


 그래. 그 마지막 날 전에도, 미카도는 몇 번 에이나를 울렸었다. 같은 이유였다. 미카도는 둘 사이의 관계에, 감정에 진지하지 않았고, 에이나는 진지했기 때문에. 그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상처받아서. 그런 것조차 눈치 못 챌 정도로 미카도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애써 눈을 돌렸던 것이다. 혼란스럽고, 익숙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여러모로, 미안했다. 그래서 에이나…. 염치없는 거 알아. 들으면 쓰레기라고 욕하면서 날 때릴지도 모르지. 그래도…말이라도 들어 줘."


 뭔데. 가라앉은, 하지만 조금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에이나는 답했다. 미카도 역시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에이나의 무릎 위, 꽉 움켜준 그녀의 손을 발견했다. 무심코 자신 또한 손을 꽉 움켜쥐고는, 미카도는 다시 눈빛을 다잡고 에이나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에이나. 처음으로 날 진지하게 만들어준 너한테, 하나만 더 부탁하자. …한번만, 더 날 받아주면 안 될까."


"뭐…?"


"예전같은 관계가 아니라…그것보다 조금 더…진지하고 소중한…."


 그리고 정적이 흐른다. …젠장, 실패인가. 뭐, 당연한 결과다. 지금까지 해 온 게 있….


"…이 나쁜 새끼야!!!!"


 그 말과 함께 등에 묵직한 타격감이 내리꽂힌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이런, 전에도 손은 맵더니. 이렇게 돌려받는구나. 예전같았으면 '이런이런, 그래도 그렇지 너무 폭력적인 거 아닌가요 이시가키 씨?'라며 너스레를 떨었을 미카도였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럴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하, 이거 차였군."


 그렇게 말하며 미카도가 얼얼한 등을 손으로 문지를 때였을까,


"이 구제불능 쓰레기에 멍청아!!!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한 번만 말할 테니까 똑똑히 들어…."


 문득 마주친 에이나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고….


"너, 차인 거 아니야."


 그리고 방금 본인의 발언에 확인 도장이라도 찍듯 에이나는 미카도의 얼굴을 조급하게 양 손에 가두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키스, 그것보다 잘 하면서."


 입술이 떨어졌을 때였을까.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가 놀란 듯 뒤로 물러나려는 에이나의 두 뺨을 감싸고, 미카도는 다시 한 번 부드러운 동작으로 에이나에게 입을 맞췄다. 어느덧 두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재회의 포옹을 하듯 두 사람은 서로의 혀를 빈틈없이 얽었다.


 호세키가오카 학원에서의 마지막 날. 이것이 이들의 연인으로서의 첫 키스였다.


『드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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