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짓을 벌였습니까?"

"아. 라이 오랜만."

"닥치고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죠. 리브."

"입다물고 어떻게 대답을 해? 오랜만에 보는 동기에게 너무 차가운거 아니야? 감방에서 나온 사람을 만날 때는 두부라도 들고 오는게 예의라고? 승진했다고 나 무시하는거야?"




하얀 공간에 유난히 이질적인 색을 지닌 자가 있었다. 리브라고 불린 온통 검은색 일색인 여자가 반대로 온통 하얀색 일색인 라이라고 불린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쇠사슬로 몸이 묶여있었지만, 무섭다거나 두렵다는 기색없이 자신 앞에 있는 남자의 질문에 싱글싱글 웃으며 계속 농담조로 대답했다.


남자는 부글부글 끓는 화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리브! 당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압니까? 네가 놓친 한 영혼 때문에 억울한 생명이 일곱이나 죽었어요. 그런데 사고를 수습하지 못할 망정, 방관을 합니까?"

"그게 뭐 어때서?"

"뭐라고요?"

"생명은 언젠가 죽어. 그 시기가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잖아. 나도 처리해야할 서류가 늘어서 엄청 귀찮다고."

"정신 못차리는 거 보니까. 감옥생활이 참 편했나보네요? 안되겠네."




결국 이야기가 통하지 않자, 라이는 리브의 죄명을 하나하나 읊었다. 그러나 그녀는 죄책감을 가지기는 커녕, 그게 뭐 대수냐는 말투로 되물었다.


그 반응을 본 라이는 리브의 뻔뻔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입을 다무니까, 하는 말이 점점 가관이었다. 


라이는 그녀가 어느 정도 반성했으면 용서해주려고 했던 과거의 그를 완전히 잊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괘씸죄까지 더해서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로 했다.




"지금 가는 곳에서 7000만명의 생명을 구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마십시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 소속이었던 대한민국 국민도 7000만명이 안되는데 장난해?"

"장난으로 보입니까?"




얼토당토 않은 라이의 벌에 리브는 말도 안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이는 그녀의 의견을 묵살하고 비웃었다. 그 모습에 열받았지만 사신으로서 라이가 상사였기 때문에 불만스러워도 리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를 관리하는 사신은 아니더라도 한 구역을 관리하는 사신은 되는데. 말단 사신이나 할 법한 일이라니.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건 처음부터 리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귀찮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귀찮음에서 우러나온 짜증을 담아 라이에게 미세하게 반항했다.




"나는 사신이지. 난세의 영웅이 아니라고. 7000만명 죽이는게 더 빠를 거 같은데."

"그렇게 하면 그 때는 내 손에 소멸입니다. 알겠습니까? 7000만명 살리는 겁니다. 7000만명."



그리고 미약한 반항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






"아. 이 망할 새끼가"



나는 방금까지 분명히 이런 망할 동네에 있지 않았다. 이곳 여기저기 건물들은 부서지고 무너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야 여긴 어디야?"



얼핏 보이는 가게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쓸데없이 하얗던 '꽃밭'에 있을 때와는 다를바가 없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검은 머리, 어둡게 빛나는 검은 눈을 가진 어린 계집애.


사신으로 살았던 지난 400년간 이 모습이었기에,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겹다. 아무튼 나는 그대로인데, 공간 만 바뀌었다는 건, 빌어먹을 동기 새끼 짓이었다. 그 때 그 자리를 거절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상황파악을 하고 있는 지금도 주변에서는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옛날 일하던 중 잠깐 봤던 좀비 영화에서 들었던 절규로 가득찬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아 시끄럽다.'


나는 한 손으로 귀를 막으며 다른 손으로 옆구리를 더듬었다.


다행히 그 새끼가 내 무기와 능력까지 빼앗은건 아니었는지, 허리춤에 익숙한 권총이 자리했고 시험 삼아 쏴본 혈탄은 건물 하나에 명중해 그걸 박살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

"덕분에 죽이려고 다가오는 외계인이 건물 파편에 맞아서 무사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총이 잘 나가는 것을 확인하며 허리춤에 꽂는데 왠 인간 여자가 다가오더니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고맙다고 내 손을 마주잡고 마구 흔드는데, 짜증나서 한 소리 하기도 전에 여자가 다른 곳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보여? 사신인데?'


이 상황이 이상했지만, 아까부터 왼팔 안쪽이 가려워서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벌레라도 물렸나 들여다 보니, 투명한 숫자가 문신마냥 박혀 있었다. 


"물린건 맞네. 그것도 라이새끼한테."


이딴 걸 내 몸에 만들어 놓을 사람은 그 자식이 유일했고, 이런 악취미적인 걸 좋아하는 것도 그 자식이 유일했다.


숫자는 마이너스부터 시작하는 거였는지 팔에는 -69,999,999라고 쓰여져 있었다. +로 쌓이는 것도 짜증나지만 빚 갚는 형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더 짜증났다.


짜증이 나서 눈에 보이는 무언가라도 부수지 않으면, 제 손으로 이 곳을 다 파괴시켜 자신의 영혼을 라이에게 고스란히 바칠 것 같았다. 그 새끼에게 엿을 먹이기 전에는, 열받아서 그런짓은 못할 것 같았다.



라이는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내 의욕을 자극 했고 나는 순순히 라이의 장단에 어울려 주면서 나중에 돌아가서 꼭 라이를 두들겨 패주겠다고 결심했다.


언제 7천만명을 구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지 않는 사신의 시간은 무한했고, 그 말은 즉 리브가 이길 가능성이 큰 게임이라는 뜻이었다.



난 대충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을 살펴보기 위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여기는 도대체 뭐길래, 건물들은 다 부서지고 거리에 시체들이 즐비하며 그 시체들은 왜 이상한 껍데기를 뒤짚어 쓴거란 말인가.



'인간이 있는 거로 봐서는 지구가 맞는 것 같은데, 이 징그러운 건 뭐야. 외계인이야? 뭔데 지구에 있어? 이거 장르가 왜이래? 아. 라이, 정말 가지가지 하네.'



리브는 자신의 앞을 막고  클클거리는 외계인을 쳐다보았다. 투구를 쓰고 눈, 코, 입은 있지만, 어딘가 뭉개진듯한 생김새를 가진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은 내가 겁을 먹고 있다고 착각했던 건지 이상하게 생긴 창을 들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충 뭘 하려는 건지 예상은 갔지만, 저게 저것들이 인사하는 방법인가 궁금하여 가만히 쳐다보니, 그 중 하나가 기세등등하게 나에게 창을 휘둘렀다.



"네가 먼저 시작했다."



공격을 했는데, 가만히 맞아주고 있는 건 내 성격이랑 안 맞았고, 이건 애초에 내 잘못이 아니라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었기에 허리춤에 꽂혀있는 권총 두 자루를 꺼내 외계인 무리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리브의 일방적인 몰살이 시작되었다.


400년 가까이 총을 잡은 탓에 리브는 반사신경이 아주 뛰어났고, 악령을 잡으러 다녔던 적이 많아서 왠만큼 움직여도 쉽게 지치지 않았다.


한마디로 치타우리 종족은 잘못 걸렸다. 4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한 직업에 종사했던 전문성을 그들은 이길 수가 없었다.


리브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치타우리 종족의 시체를 툭툭 치운뒤 약간 어지러워서 깨끗한 곳 한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왠지 팔이 따끔거리는 것 같아 확인하니 숫자패널은 7천만을 넘어가고 있었고, 숫자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라이, 이 미친 놈이. 정당방위라는 것도 모르냐?"

 


저것도 일단 생명이라고 팔의 숫자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다니, 정말 짜증나게 융통성 없는 상사였다.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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